혹성강호. 40. 사신의 그림자가 되어.
40. 사신의 그림자가 되어.
흑청빛 안광을 번득이며 강흑성은 계곡 아래를 응시했다. 정찰대장 브라이튼을 위시한 대원들이 썰물처럼 퇴각하는 광경이다. 그런데 처참하다.달려가는 자들의 숫자가 애초의 삼분지 일이다. 삼십여 명만 살았다.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이 있지만.’
게틀러를 향해 퇴각한 정찰대가 탑승과 동시에 퇴주하는 모습을 확인한 강흑성은 계곡의 변화를 목격했다. 안쪽에서 방어하던 퓨리엔트족들이다.
‘더 안쪽에서 광산을 지키던 정찰대 한 팀은 진작 정리했어.’
하늘상어를 날리던 때, 그 전후가 분명하다. 그러니 이십 여명에 불과한 저들은 정말로 대단하다. 정찰대 다섯 개 팀 백 명의 공격을 물리친 거다.물론 외부의 조응이 강력했다. 산 너머에서 하늘상어를 날린 공격.
‘그들이 와서 정찰대의 배후를 직격했더라면······ 그건 아니겠군.’
결과에 대한 예측을 강흑성은 수정했다.정찰대 개개인이 지닌 전투장비는 정말로 강력하다.백병전으로 충돌하는 건 어리석다.그래서 저런 전술을 택한 거다. 누군지 모르지만 저들의 지도자는 직접 저렇게 나섰다.
‘죽을지도 모를 작전, 그런 자리에 직접.’
그러니 다른 자들이 믿고 따른 거다. 저렇게 승리를 일궈냈다.
‘누구냐.’
궁금하다. 사냥꾼 무리에 불과한 퓨리엔트족을 저렇게 만든 자가.
‘응?’
강흑성은 미간을 좁히며 눈썹을 곤두세웠다.이십여 명의 퓨리엔트족 후미에서 모습을 보인 자가 다르다.퓨리엔트족의 야수얼굴이 아닌 인간이다.아니, 정확하게 인간이 아니라 반인반수, 하프 퓨리엔트 사내다.
‘혼혈.’
자신과 같은 존재를 보는 강흑성은 기묘한 소름 같은걸 느꼈다. 대형빔라이플을 어깨에 걸치고 나온 사내,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고 있다.
‘그냥 소총이 아닌데, 저걸로 근두운과 송골매들을 맞췄구나.’
무기의 정확한 명칭이 뭔지 모르지만 그런 게 분명하다.사내는 서른 전후쯤으로 보인다.승리에 기뻐하는 얼굴이 아니다.퓨리엔트족 특유의 줄무늬가 눈 밑에서 턱까지 이어 내려와 있다. 그러나 인간얼굴이다.순간 하프퓨리엔트 사내의 고개가 돌았다.강흑성 자신이 내려다보고 있는 계곡 위를 향해서다.즉각 고개를 숙이고 호흡을 죽인 강흑성은 기다렸다, 만에 하나 사내가 자신을 인지한 거라면 이어질 후속행동을.
‘특정한 건 아니야.’
야수족의 감각이다. 퓨리엔트족을 이끄는 자의 특별함일 거다. 바람도 맞바람,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이정도 거리에서 기척을 인지했을 리 없다.
‘그럴만한 고수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하프퓨리엔트 사내가 무공을 익혔는지, 그게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지만 평범한 사내는 결코 아니다. 고강한 무공을 가졌다고 상정해야 한다.그런데 지금 정말로 중요한건 그게 아니다. 정찰대를 뒤쫓아야 한다.
‘본부에 남은 병력과 화기를 다 동원하겠지.’
그러기 위해 정신없이 등 돌려 달려가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참담한 패배를 안겨준 퓨리엔트족에게 반격하기 위한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는, 분노의 열기로 눈이 충혈 돼 있을 지금이다. 그런데 같이 해야 한다.
‘이럴 걸 예상한 건가.’
암반에서 떨어져 나온 강흑성은 산사면을 박차고 달려 내려갔다. 품안에 있는 소형발신기를 더듬으면서다. 출발할 때 사장 박준이 건넨 것이다.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확실히 남다른 사람이야.’
만에 하나라도 통신감청이 되면 안 되기에, 문자전용 송수신기다. 이걸 건넨 박준에 대한 새삼스러운 마음을 삼키며 강흑성은 바람처럼 달렸다.
* * *
작고 네모난 수신기 화면에 뜬 내용을 보고 박준은 경직했다.강흑성이 보낸 현재 상황이다.음성이 아닌 문자로 메시지를 보내는 골동품 장비가 톡톡히 역할을 하고 있다.그런데 기함할 것은 이 문자 내용이다.
‘퓨리엔트족이!’
그들이 정찰대를 유인해 격파했다, 강흑성이 보낸 내용이 그거다.소요산 크리듐 광산을 쳐 지원을 유인했고, 하늘상어를 날렸다는 거다.그 결과로 정찰대 다섯 개 팀 중 삼분의 일 정도만 살아서 퇴각했단 거다.
‘비둘기 폭포방향으로 이동 중이다?’
그곳은 소요산과 정찰대 본부의 중간쯤 되는 지역이다.분명 그곳에서 본부의 병력과 화기를 기다리려는 거다.샹그릴라에서는 삼각형방향으로 그리 멀지 않다.강흑성은 그곳으로 오라는 거다. 일단 오라는 거다.
‘또 이렇게?’
특별하고 치밀한 계획이나 전술 없이 움직이는 거다.강흑성이 3팀을 몰살했을 때처럼 이다.물론 오늘 이대로 공격해 끝장을 낸다는 소리는 없다. 그렇지만 이 흐름이 말해 준다.강흑성은 이 기회를 노리는 거다.
‘제길······!’
수신기를 움켜쥐고 박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아무리 목숨을 걸고 복수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현실의 엄혹함을 모른 체 할 순 없는 거다.이대로 정찰대를 친다는 건 이란격석이다.그런데 그런 일을 강흑성은 했다.
‘혼자서······!’
그 일을 또 하려는 거다.이번엔 같이 하겠다는 거다. 복수는 당신들의 목적이니 오라는 거다.하려면 지금 가야 한다, 정찰대 본부에서 합류하기 전에 해야 한다.이 말도 안 되는 현실, 이건 받아내야 하는 거다.
‘죽기로 한 몸······!’
부득, 소리 나게 이를 갈아 부친 박준은 불 꺼진 홀에서 벌떡 일어섰다.
* * *
시간은 이제 9시가 되고 있다.창밖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먹장 같은 하늘엔 촘촘히 박아 넣은 것 같은 별들이 반짝인다.그 아래로 펼쳐진 수림을 보노라니 문득 소름이 돋는다.데빌그라운드가 느껴져서다.
‘북쪽, 저 너머에 그곳이 있지.’
임관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초급장교시절에 그곳을 겪었다. 훈련의 일환이었다. 갓 임관한 간부들을 위한 훈련프로그램, 그에 따라 서른 명이 데빌그라운드에 들어갔다. 그런데 나올 때는 여섯 명만이 살아서 나왔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프로그램······’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짠 프로그램이냐고 치안총국장의 분노가 대단했었다. 그렇지만 그게 다였다. 그렇게 그냥 덮였다.그 결과로 짐작했다. 치안총국내의, 지위와 계급이 높은 누군가라고.
‘응?’
미간을 뒤틀듯 좁힌 진류는 창밖의 광경을 보고 직감했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정찰대원들이 게틀러에 탑승하고 있다. 남아 있던 인원들 전부인 것 같다.어디로 충동하는 걸가? 이 시간에 저럴 일이 뭘까?정찰대장 브라이튼은 돌아오지 않고 남아 있던 인원 전부가 급히 출동할 일이 뭔가?
“어?”
진류는 정말로 놀라 한걸음 물러섰다.
‘고화력 중화기까지?’
3개 팀이 탑승한 게틀러 뒤로 하늘상어발사차량이 따라간다.그것만이 아니다. 전투로봇 빅풋이 상차돼 있는 차량도 움직인다.저건 전쟁이다.
“도대체 뭐야?”
강하게 뒤튼 안면을 돌리며 진류는 밖으로 나갔다.
* * *
t-rex를 움켜쥐고 선 삼백이에게 그렉은 다시 한 번 당부했다.
“여차하면 바로 움직여야 한다. 네가 하는 일이 제일 중요해, 알지?”
삼백이는 붉은 눈을 강하게 번득였다. 잘 알고 있어, 라고 대답하는 것처럼.
“그래, 잘해 다오.”
삼백이에게서 돌아선 그렉은 숙소로 눈길이 가는 걸 억지로 잡았다. 명희와 샤이닌과 진숙이와 제닌, 네 아이의 귀엽게 웃는 얼굴이 눈앞에 어른 거른다. 그 웃음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오늘 밤의 일을 잘 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가슴 전체에 차 있는 거다. 강흑성이 상황을 알려왔다는 사장 박준의 말을 좇아 이렇게 움직이고 있지만, 과연 어떻게 뭘 할 건지 정해진 게 없다.계획이고 전술이고 없는 상황, 3팀을 그렇게 했을 때 처럼이다.
‘정탐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더니.’
헛소리가 됐다.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귀신대가리들을 상대로 어떤 치밀한 계획을 세울 건지도 막막한 거였다.어쩌면 지금처럼 하는 게 답일지도 모른다.어쨌든 강흑성은 3팀을 혼자서 몰살했다. 믿어야 한다.
“믿는 수밖에.”
강흑성을 향한 마음, 소리 내 말한 그것은 삼백이를 향한 마음이기도 하다. 그렉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돌아오지 못할 경우, 삼백이는 여자들을 데리고 피해야 한다. 그 중요성을 알기에 삼백이는 저렇게 남는다.
“출발하죠.”
지프에 올라타 있는 사장 박준과 눈을 맞추며 말한 그렉은 조수석에 올라탔다. 무슬란은 이미 수림 안으로 달려가 보이지 않는다. 차에 탈수 없어 먼저 달려갔다. 3미터 거구의 움바바족 신체능력이 새삼 감탄스럽다.
“가자.”
강한 힘이 실린 박준의 음성을 남긴 지프는 어둠 속으로 질주를 시작했다.
* * *
비둘기 폭포, 왜 이런 이름이 붙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달빛을 받은 모습이 장관이다. 이십여미터 높이에서 떨어진 물줄기가 작은 호수를 이뤘다.그 수면에 비친 달과 별들의 밤하늘은 신비경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어서 와야 할 텐데.’
요동치는 심장과 가쁜 숨을 다스리며 강흑성은 폭포 앞을 응시했다.정찰대장 브라이튼을 위시한 삼십여명의 정찰대원들.두 대의 게틀러에 타고 여기까지 퇴각해온 모습이다.참담함으로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같이.’
모멸과 격노를 동시에 품은 자들, 그 속에 정찰대장 브라이튼이 있다. 악마족이라고 부르는 데바족의 상징과도 같은 이마의 뿔이 선명하다. 저자의 지금 심정이 어떨지 모르겠다. 숨이 붙어 있던 부하들을 버렸다.
‘퓨리에트족이 전부 참수했겠지.’
그럴 걸 브라이튼도, 저들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와야 했다. 반격을 위해서, 북수를 위해서다. 그러나 어떠하든 동료들을 버리고 온 거다.
‘시간이 없는데.’
미간을 꿈틀거리던 강흑성은 통신기의 수신진동을 느꼈다.빛을 감추려 전투복 상의 안에서 확인했다.박준의 메시지, 5분 정도 후 도착이다.
‘정찰본대의 지원이 먼저 도착하면······’
폭포 앞 모래밭, 그 위의 정찰대를 응시하던 강흑성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마찬가지야.”
상의 포켓에서 텀블러를 꺼낸 강흑성은 바람을 확인하며 이동했다. 정찰대를 향해 부는 바람이다. 정찰대는 지금 아무도 헬멧을 쓰지 않았다.
* * *
‘이런 꼴을 겪을 줄은 상상도 못해봤는데······!’
치밀어 오르는 모멸감과 분노로 브라이튼은 치를 떨었다. 데바족인 자신이, 북부지구 정찰대장이, 퓨리엔트족무리에게 당해 도망치게 된 거다.
‘그것들, 퓨리엔트족은 확실히 변했어.’
분노를 떠나 황당하면서도 놀랍다. 퓨리엔트족의 변화가 그렇다.소수가 아닌 대규모의 무리를 짓는다는 건 이미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 놀랄 노자다.교묘한 전술과 하늘상어와 같은 중화기를 사용한 거다.
‘어떻게가 중요하지 않아. 이 밤에 놈들을 분쇄해야 해.’
으스러지게 이를 악무는 브라이튼에게 보고가 들어왔다. 본부에서 출발한 병력이 보낸 보고다. 그들 뒤로 감찰관이 따라 붙었다는 이야기다.
“빌어먹을 감찰관놈······!”
눈앞에 있으면 갈아 마실 기세로 살기를 발산한 브라이튼은 마지막 결심을 굳혔다.크리듐을 포기하더라도 완벽하게 격멸하는 거다.하늘상어를 날려 계곡을 초토화 시키고, 분명히 있을 놈들의 지원병력을 치는 거다.
‘빅풋이면······!’
그렇게 이 일을 덮어야 한다.크리듐 광신이 폭발을 일으킨다면, 거의 그렇게 되겠지만, 그건 우연한 일로 하는 거다. 반화성의 기치로 준동한 퓨리엔트족을 몰살하는 거다.크리듐광산이 온전하기를 바랄뿐이다.
‘감찰관이 돌아가고 나면······’
궁리를 더듬던 브라이튼은 난 데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두 대의 게틀러 중 왼쪽의 게틀러 앞이다. 폭포호수 앞에 주저앉아 세수를 하던 부하다.
“크어어······!”
전신을 부들거리며 피를 게워낸다.슈트 밖으로 드러난 손과 얼굴이 뭉개지고 있다.저 모습을 보고 떠오르는 건 하나다.독, 바이오웨폰이다.
“헬멧을 써라!”
대원들에게 외쳐 명령하며 브라이튼은 헬멧을 돌출시켰다. 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대원들이 하나둘씩 쓰러진다. 동시에 숲에서 빔이 날아온다.번쩍 하는 빔줄기에 맞은 대원의 머리가 터지는 순간 브라이튼은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