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44. 대적.
44. 대적.
“끄응.”
된 숨을 뿜어내며 박현은 몸을 일으켰다. 후끈한 감각이 사라진 왼다리로부터 피어나 전신을 옥죈다. 다시 한 번 없어진 왼다리를 보게 된다.
“제길.”
이를 갈며 박현은 고개를 흔들었다.미련을 가져봐야 힘들기만 하다는 걸 안다. 이젠 이 현실과 결과를 받아 들여야 한다.그렇다고 행각하고 마음먹었지만 아직도다.사라진 다리 보다 중요한건 오늘밤의 일이다.
‘형.’
박준을 생각하며 고개를 든 박현은 떨리는 숨소리를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두려움에 물들어 옹기종기 앉아 있는 여인들, 명회의 제닌과 샤이닌과 진숙이가 바들거리고 있다. 오늘밤에 또 죽음이 닥칠 수 있어서다.힘없고 약한 존재들, 죽음의 이빨에 물려가다가 구사일생 살아난 처지들, 가혹하고 비정한 이 세상의 손에 다시 움켜잡힐까 두려움에 떨고 있다.저들의 마음속엔 이 저주 같은 삶에 대한 원천적인 증오가 있을 거다. 아니 어떻게 해야만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날까에 대한 갈구가 있다.
‘잘 될 거야, 형하고 다들 잘해낼 거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 같은 믿음을 삼키며 박현은 삼백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빔소총들을 세워놓고 t-rex를 잡은 채 지하밀실 출구 아래 있다.
‘저놈, 제일 잘하고 있구나.’
삼백이의 강직한 모습을 눈에 넣고 박현은 자조의 웃음을 흘렸다.다들 제 할 일을 하고 있는데 자신만 이러고 있어서다.목숨 걸고 싸우러 간 형과 동료들이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신세다. 함께 칼을 휘두르고 싶다.
‘헛된 생각, 이대로도 짐만 될 뿐인데.’
그게 현실이다.형 박준과 무슬란과 그렉과 강흑성은 귀신대가리들과 싸우는 거다.그건 말이 그렇다는 거지 현실적으론 자살미션이다.그들보다 강한 무기도 없고 숫적으로는 황당한 차이다.그런데 싸우러 갔다.
‘제발······!’
모두가 무사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박현은 고갤 숙였다. 악문 이 사이로 뜨거운 숨을 흘려내며 두 손을 모아잡고 힘줄이 도드라지게 쥐었다.그 순간 삼백이가 움직였다. 붉은 눈을 반짝이면서 계단을 오른다.
“뭐냐?”
박현은 바로 반응하며 물었고 삼백이는 지하밀실 문을 밀어 올렸다.
* * *
어깨 곁을 지나가는 빔의 궤적을 느끼며 강흑성은 무원신풍보를 전력으로 펼쳤다. 거대수사이를 달리는 그 움직임은 수림의 어둠과 하나 되어 흘러갔다. 하지만 정찰대의 소총은 액션감응으로 조준사격을 해 댄다.
‘폭포 좌측.’
암석지대로 들어가야 한다. 그곳에서 반격이다. 어차피 부딪치기 위해 온 행보다. 정찰대가 퓨리엔트족과 얽힌 이 기회를 끝까지 활용해야 한다.
‘와라.’
정찰대를 뒤로 달고 강흑성은 비둘기 폭포의 좌측 암석지대로 들어갔다.
* * *
“헉, 헉, 헉, 헉.”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그렉은 마지막 힘을 냈다.샹그릴라의 불빛이 보이는 전방을 향해 경공을 전개했다.정말이지 무슬란을 업고 달리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그렇지만 해 냈다. 마침내 샹그릴라에 왔다.
“후와.”
무슬란을 평상에 내려놓은 그렉은 큰 숨을 몰아쉬고 바로 운기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무슬란은 백지장 같은 얼굴이지만 미안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지만 박준이 아직 안 왔기에 수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삼백아?”
뒤에서 다가온 삼백이의 기척에 무슬란은 반응했다.삼백이는 무슬란을 보지 않고 바로 달려갔다.수림을 향해서다. 그게 박준 때문이라는 걸 무슬란은 알았다.3분정도가 흘러서 삼백이와 박준이 모습을 보였다.
“하이고 죽겠다 죽겠어.”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가누며 온 박준은 평상에 대자로 누웠다.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 내쉰다. 무공도 없는 사람이 지프를 버린 채 두발로 수림을 달려왔다. 안 쓰러지고 돌아온 게 용한 일이다.
“그렉, 이 자식!”
이제 생각난 듯 박준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운기중인 그렉을 보곤 눈썹만 꿈틀거렸다. 무공을 숨겨온 일에 대해 따지려했지만 솔직히 부질없다. 그보다는 무슬란을 업고 달려온 일이 고맙고 대견하다.
“야, 무인이면 이보다는 잘해야 하는 거 아니냐?”
무슬란을 돌아보며 묻는 박준, 아무리 3미터 거구를 업고 달렸다지만 무인이면 이렇게 까지 지치냐는 거다. 무슬란은 창백한 미간만 좁혔다.
“그게 뭐······”
움바바족인 자신이 원체 거구라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뭐한 거다.
“아 됐고.”
시선을 돌린 박준은 삼백이를 응시하고 물었다.
“별일 없었지?”
붉은 눈을 반짝인 삼백이는 대답대신 수림을 돌아봤다. 당신들만 돌아오고 보이지 않는 강흑성은 어떻냐는 되물음이다. 당장 달려갈 기세다.
“이 자식은 도대체 누가 주인이야?”
어처구니없는 화를 던진 박준은 이내 표정을 바꾸고 이야기 한다.
“흑성이, 돌아올 거다.”
돌아올 거다, 그 한마디 밖에 할 수 없기에 박준은 쓴 침을 삼켰다.듣고 있는 무슬란과 운기를 막 마치고 눈을 뜬 그렉도 마찬가지다.강흑성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엔 도리가 없다. 그래서 마음이 미안하고 아프다.
* * *
집채만 한 바위들이 솟아 있는 암석지대를 달리다 강흑성은 멈췄다. 패천마혈을 움켜쥐고 호흡을 다스렸다. 뒤따라온 정찰대의 기감을 구분했다.
‘여섯.’
강흑성 자신을 잡기 위해 달려온 자들의 숫자는 그뿐이다.나머지는 빅풋이 쫓아간 하프퓨리엔트 사내에게 갔다.강흑성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확인한 움직임, 정찰대원들은 헬멧과 장갑을 완벽하게 착용하고 있다.
‘그래, 독은 더 사용 안한다.’
슈트의 완전착용상태면 어차피 소용없다. 이미 당한 자들의 죽음으로 파악한 저들의 대응이다. 그러나 그것이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될 거다.
‘너희는 못 돌아간다.’
흑청빛 안광을 섬뜩하게 흘려내며 강흑성은 기다렸다.마음속으로 숫자를 센 것이 스물을 넘어갈 때, 기둥 같은 암석 뒤로 온 정찰대에게 나갔다.흠칫하며 놀란 놈이 반응하기 전에 무원일격의 가르기를 내리쳤다.핑, 날카로운 발사음을 내고 빔소총이 불을 뿜었다. 하지만 그뿐, 소총은 갈라졌다. 잡고 있던 팔도 갈라졌고 상체가 어깨부터 갈라져 버렸다.부들거리는 마지막 경련을 보이며 쓰러진 정찰대원, 그 앞에서 강흑성은 바람처럼 신형을 돌렸다.뒤에서 빔소총을 겨눈 다른 놈을 향해 암석을 차고 휘돌았다.빔줄기가 허공을 가를 때 놈의 목을 횡으로 후렸다.휘릭, 머리통이 떨어져 나갔다.천산마갑 슈트를 착용한 정찰대원의 머리가 감꼭지가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잘려나갔다.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바이탄합금의 슈트다. 저렇게 두부 자르듯이 가를 수 없는 거다.
“고수다!”
정찰대원 중의 리더가 소리쳤다. 슈트의 통신기만이 아니라 육성으로도 들린 소리, 그만큼 놀라고 당황했다는 방증이다. 슈트를 종이처럼 가를 무력을 가진 강자라는 깨달음, 남은 네 명의 정찰대원은 출력을 올렸다.지이잉, 전류가 흐르는 듯한 소리를 내며 천산마갑슈트의 색이 변했다. 전투력 최대치의 푸른빛이 감돈다. 그 빛을 머금은 전투대검을 뽑았다.
“삼월검진!”
리더의 소리에 맞춰 정찰대원들은 등을 대고 검진을 형성했다.그러나 그 순간 강흑성은 이미 돌진했다.정찰대원들의 다리로 몸을 던지며 검을 후렸다.번쩍하는 혈광이 터진 것과 같이 정찰대원 일인의 다리가 잘렸다.
“크악!”
고통 속에 쓰러지는 한 놈, 그 몸을 치고 솟구친 강흑성은 모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흘러갔다. 정찰대원들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떠오르는 기억영상, 아버지의 경험이 보여주는 전투기동을 재현했다.
‘이건 무공이 아니야. 싸우는 법이지.’
정찰대원들의 가슴을 쪼개고 허리를 동강내며 강흑성은 짜릿한 전율 속에 들었다. 적과의 접전이 이뤄지는 매순간순간, 어떻게 몸을 움직이고 무기를 쓸 것인지에 대한 아버지의 기억, 깨달음의 경험을 체화해 냈다.
“미. 미친!”
혼자 남은 리더 놈,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그를 향해 강흑성은 걸음을 냈다.
“이!”
전투 대검을 겨눈 채 이 악물던 놈은 슈트의 벨트를 눌렀다.자폭장치, 대적할 수 없는 적을 향한 마지막 공격이다.그렇지만 손목이 잘렸다.
“악!”
강흑성의 벼락같은 일검이 만든 결과, 상대와의 거리를 가늠하고 최단 거리와 빠르기로 공격한 결과다. 이건 무공이나 마검의 위력과는 별개다,
‘싸우는 법.’
그것을 강흑성은 느끼고 깨닫고 있다.아버지가 전해주는 경험이다.무수한 적들과 싸우고 익힌, 강적들을 처치하고 깨달은, 몸과 마음의 공부다.
“그게 뭐냐?”
주저앉은 리더놈의 가슴을 발로 차며 강흑성은 물음을 던졌다. 답을 기대하지 않은 물음, 마검을 리더 놈의 목에 대고 벨트부위를 확인했다.
“자폭장치, 이런 것도 슈트에 있었나?”
독백처럼 중얼거린 강흑성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적에게 슈트를 빼앗길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거다. 최근에 추가된 장비인 거다.
“크으······ 넌 어차피 죽는다······!”
마지막 적의를 뿜어내는 정찰대 리더, 그 목에 겨눈 마검을 강흑성은 힘주어 눌렀다. 콱, 하고 검이 관통하는 느낌을 받아내며 작게 말했다.
“전투로봇 따위에겐 안 죽는다.”
피를 먹어 더욱 붉어지는 마검을 뽑아내며 강흑성은 돌아섰다.
* * *
“저기다!”
정찰대원들에게 소리치며 진류는 앞으로 달려갔다.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빔소총을 쥐고, 싸우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그 상황 속으로 달려가고 있다.중요한건 적의 섬멸, 이제 이뤄내야 한다.
‘하프퓨리엔트.’
빅풋이 따라잡은 놈은 그런 존재다.저놈이 퓨리엔트족을 이끄는 놈이 분명하다.고강한 무공을 가졌다. 빅풋의 공격을 피하며 반격하고 있다.
‘저렇게 큰 대검을 지푸라기처럼 휘두르다니······!’
하프퓨리엔트의 검은 말 그대로 대검이다.그런데 물 흐르는 것 같은 신법과 더불어 물결처럼 검술을 풀어내고 있다.빅풋이 후려치는 삼월검에 부딪치지 않고 흘려낸다.놀라운 무위, 저런 무공이 뭔지 모르겠다.
“접전 주변으로 포진한다!”
대원들에게 대응을 명령하며 진류는 수림을 돌았다. 빅풋과 싸움중인 하프퓨리엔트를 포위하려는 의도, 그런데 살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온다.
‘응?’
인지한 순간 진류는 신형을 솟구쳤다. 그 순간 수림 속에서 명멸하는 섬광들을 봤다. 번쩍하는 빛줄기로 수림을 가른 궤적, 대원들을 맞췄다.
‘유인이었구나!’
깨달음과 분노 속에 착지한 진류는 소총을 버렸다.허리 속에 품고 있던 비룡편을 풀어냈다.촤르르, 소릴 내며 자태를 드러낸 검은 강철 채찍.
“모조리 죽여주마!”
살기를 전신으로 발산하며 진류는 수림 속으로 질주해 나갔다. 여태 속에서 꿈틀거리던 무인으로서의 본능을, 그 힘을 비룡편과 함께 펄쳐 냈다.
* * *
서늘한 숨결을 내쉬며 강흑성은 접전을 바라봤다. 대형전투로봇과 어우러진 하프퓨리엔트 사내는 역시 고수다. 그런데 또 다른 고수가 있다.
‘저자······’
은신해 있던 퓨리엔트족의 저격에 당한 정찰대원들, 그들의 지휘관이다.철편을 허리에서 풀어내 휘두르고 있다.수림이 휘날리고 퓨리엔트족도 휘날린다.일방적인 공격이다. 마치 표범무리에 들어간 괴수 같다.
‘끝은 봐야지.’
흑청빛 눈동자를 빛낸 강흑성은 마검 패천마혈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