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47. 아버지의 이름.
47. 아버지의 이름.
빈손을 내려다본 우란테는 몸의 떨림을 밀어냈다.하지만 태백대력신공의 울림이 아직도 육신을 울리고 있다.무리하게 펼친 그 힘의 여파로 속에선 토혈이 솟구친다.그렇지만 이겼다. 무서운 강적을 쓰러뜨렸다.
‘천지문의 천지비룡편을 이처럼 연마한 자를 만날 줄이야······!’
상대는 정말로 강한 자였다. 천지문의 무공이 다 그렇지만 익히기가 어렵다는 무공이 바로 천지비룡편이라고 알고 있다. 어느 정도까지 성취를 이룬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육성을 넘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터다.
‘천지비룡편은 육성부터가 절정으로 나아가는 경지, 무력 자체가 달라. 나 역시 마찬가지, 태백대력신공과 태백대력검의 성취가 더 높았더라면······ 파검술은 동귀어진의 수, 이렇게 무리한 짓까진 하지 않았겠지.’
태백대력신공의 성취가 이제 오성을 넘고 있다. 그 신공의 대성을 이뤘다면 천지문의 어떠한 고수라도 무서워 할 것이 아니다. 신공의 진력을 바탕으로 태백대력검을 펼친다면 파검술이란 기격은 필요 없을 터다.
‘어떠하든, 이겼다.’
뜨거운 숨을 길게 내쉰 우란테는 꿈틀거리는 피투성이를 응시했다.직전까지 생사투를 벌인 대적자, 정찰대의 지휘관은 피걸레 같은 형상이다.아직은 숨이 붙어 있지만 회생불가의 상태다.남은 숨이 얼마 없다.
‘응?’
창백해진 얼굴의 미간을 곤두세운 우란테는 그의 움직임을 봤다.젊은 사내, 그가 피투성이가 된 자에게 다가간다.무릎을 접고 앉아 묻는다.
“당신이 펼친 무공, 본래 천지문의 무공이 아니지?”
미간을 깊게 좁힌 우란테는 힘겨운 걸음을 옮겨 갔다. 피를 게워내고 있는 정찰대 지휘관의 곁에 섰다. 천산마갑슈트를 착용하고 있었다면 이렇게까진 안됐을까, 하는 생각하는데 젊은 사내는 다시 물음을 던진다.
“천지비룡편이란 이름을 가진 그 무공, 원래 주인이 따로 있잖아?”
좁힌 미간에 힘을 주며 우란테는 기묘한 느낌을 삼켰다. 죽어 가는 자에게 천지문의 무공에 대해 묻는 젊은 자의 의도가 뭔지 정말 모르겠다.
‘애초에 나와는 싸울 생각이 없었어.’
블루마운틴을 유인해 온 자, 정체가 뭔지 짐작도 안 되는 존재.이 청년의 본래 의도가 그러했다는 걸 우란테는 이제 의심치 않았다.그럴 생각이었다면 지금처럼 좋은 기회가 없다.전력을 다한 후의 자신을 치는.
‘그러한 의도를 예감하고 대적한 것이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모험을 걸 수밖에 없던 상황, 접전의 결과를 낸 것도 모험이었다. 이 밤에 한 일이 처음부터 그런 것이다.
‘정찰대를 유인해 공격하다는 것 자체가.’
하지만 성공했다. 이 결과를 이룬 데에는 다른 요인이 작용했다.그건 눈앞의 청년, 정체모를 무인이다.이 자는 우란테 자신을 이용했다.이자의 목적도 정찰대였던 거다. 그러니 목적 외의 싸움은 불필요한 거다.
‘냉철한 마음을 가진 자.’
심중에서 돋아나는 말을 뱉어내려던 우란테는 청년무인의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천지문은 천지비룡편이란 무공을 어떻게 이뤄낸 건가?”
물음에 반응하듯 피투성이로 죽어가는 자, 진류는 울컥 피를 게워냈다. 부들거리는 입술과 일그러진 안면을 강흑성에게 돌리고 눈을 경련한다.
“나······ 진류가······ 천지문의 제자가······ 네놈들 따위에게······”
경련 같은 음성으로 피와 함께 목소리를 이어내는 자, 진류란 이름을 밝힌 정찰대 지휘관은 이내 허탈한 음성을 이어낸다. 허무에 찬 미소로.
“감찰관 직책 따위······ 밟고 올라가는 길이라고······”
웩하며 다시 피를 토해내는 진류, 그 모습을 차갑게 응시하는 젊은 무인, 강흑성은 다시 물음을 던졌다.
“네가 펼친 천지비룡편의 원형은 철룡이십사식이다. 그걸 너희가 흉내 냈든 어떠했든 상관없다. 그 무공의 원형, 철룡이십사식의 주인을 아는가?”
진류는 마지막 경련을 보였다. 그런 진류를 강흑성은 흑청빛 안광의 눈으로 응시했고, 곁에 서서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던 우란테가 답을 냈다.
“유성대협이다.”
강흑성은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고개를 획 돌렸다. 그 눈에서 뿜어져 나온 흑청빛 안광이 너무 강렬해 우란테는 자신도 모르게 눈가를 움찔했다.
“유성대협?”
그게 누군데 하는 얼굴.우란테가 옅은 황당함을 보일 때 강흑성은 눈동자를 응축했다.한 박자 늦게 깨달음이 들어차는 얼굴, 이름의 주인을 안 거다.모를 수가 없는 이름, 지구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들어본 이름.
“프락시안의 침공을 물리친 두 영웅 중 한사람······!”
이를 문 숨으로 중얼거림을 흘려낸 강흑성은 뒤늦게 솟구쳐 오르는 전율에 소름을 돋워 올렸다.그 분이다. 아버지다.아버지가 바로 유성대협이다.어머니에게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다.이제 알았다.세상을 구한 대영웅, 아버지는 그런 분이다.
‘어머니는 한 번도 말씀해 주시지 않았는데······!’
아버지를 본 기억이 없다.어머니는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한 적이 없다.강흑성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무덤도 쓰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유언이었다고, 그 말만을 들었다.
“천지문의 천지비룡편은 그대가 알고 있는 철룡이십사식이 원형이지.”
다시 입을 연 우란테는 더욱 기묘한 눈으로 강흑성을 응시했다. 그걸 알면서 주인이 누군지 모른다는 게 이상하다는, 그걸 묻고 있던 거다.그렇거나 어떻거나 진류는 대답할 상황이 아니니 우란테는 이야기 했다.
“유성대협의 철룡이십사식을 보고 천지문에서 모방무공을 만든 거다. 천지문 최고 기재라는 삼백년 전의 문주 뇌준걸이 심혈을 기울인 것이지.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아는 이야기다.”
그러한 내용을 왜 모르냐는, 그러면서 철룡이십사식이란 건 어떻게 아냐는 기묘한 시선, 고개를 다시 든 강흑성은 스르르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그렇구나, 그랬던 거구나.’
전율이 다시 몸을 물들인다. 천지문이 아버지의 무공을 모방했다는 것을 떠나서, 그 내막을 알았음을 차치하고, 아버지의 정체를 깨달아서다.
‘적호문에 잡혀있을 때 들은 이야기가······ 지구를 집어삼키려던 프락시안들과 싸워 물리친 존재······ 세상을 구한 대영웅이 바로 아버지였어······!’
삼백 년 전 지구를 침공한 프락시안인들과 전쟁을 벌인 건 인류와 데바족과 야수족을 포함한 이종족 전체지만, 그들을 영도한건 아버지였다.
‘아버지······!’
위대한 전설, 유성대협과 천웅대협, 그 두 사람의 대영웅이 세상을 구해냈다.
“이젠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우란테의 목소리에 강흑성은 흠칫하며 현실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진실한 모습을 알게 된 전율과 희열을 밀어내고 흑청빛 안광을 흘려냈다.
“다시 볼 일은 없어야 할 거야.”
강흑성 자신이 누군지 궁금해 하지 말고 알려고 하지도 말라는 소리.
“마찬가지.”
우란테는 검광 같은 눈빛을 흘려내며 명료하게 답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말없는 그 시간이 영겁처럼 흐른 후 움직였다.강흑성은 게틀러를, 우란테는 슈트의 바디캠들을 찾아 파괴했다.이내 게틀러의 연료탱크가 폭발해 화염이 치솟았다. 그 불을 등지고 강흑성과 우란테는 각기 수림으로 사라졌고, 진류는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 * *
삐걱거리는 소릴 내며 달려온 삼백이의 눈은 흥분과 기쁨으로 붉게 반짝였다. 그렇다는 걸 강흑성은 진정으로 느꼈다. 이 로봇에게 사람과 같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그걸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지만 엄연한 진실이다.
‘삼백아.’
등을 토닥이는 삼백이의 진실한 눈을 응시하며 강흑성은 미소 지었다.이렇게 마음을 나눈다는 것이 중요하지 다른 것은 중요치 않다.로봇에게 무슨 마음이 있냐는, 그걸 설명한다는 일 따위는 아무 의미 없다.
‘지금처럼 서로 이해하고 진심을 나누면 되는 거야.’
삼백이의 환대 뒤로 강흑성은 다른 이들의 기쁨을 받았다.사장 박준의 안도와 감사한 미소, 무사히 돌아올 줄 알았다는 그렉의 대견한 웃음이다.그 마음들을 받으며 바로 지하밀실로 내려갔다. 무슬란을 살폈다.
“어때? 괜찮겠지?”
걱정 가득한 박현의 물음, 강흑성은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이내 갈라진 어깨를 비롯한 외상과 내상 치료에 들어갔다.그 모습을 모두 지켜봤다.그렇게 각자의 감회를 삼켰다. 이 밤에 치르고 겪고 이 현실이다.
‘미안하고 고맙다.’
박현은 눈가를 가늘게 떨며 강흑성에게 그 마음을 전했다.돌아오자마자 이렇게 무슬란을 치료하고 있다.그런 이에게 다른 말은 못하고 무슬란이 괜찮겠냐고 물었다.박현 자신도 치료했다. 참 염치없는 짓이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
뜨거운 숨으로 나온 박현의 음성.강흑성을 향한 그 말에 박준과 그렉이 시선을 돌렸다.부지 간에 속에 있는 진심을 말한 박현은 모로 돌아누웠고, 둘은 서로를 봤다.강흑성은 반응하지 않은 채 치료에만 전념했다.무슬란의 상처를 꿰매기 시작한 강흑성의 손 움직임 소리만 지하밀실을 흔드는 가운데 시간은 흘러갔다. 어느새 어둠은 여명에 먹히고 있었다.
* * *
“깊게 잠이 들었어.”
무슬란의 상태를 말하며 박준은 물을 잔에 따랐다. 화성박스에서 꺼낸 믹스커피가 뜨거운 물에 사르르 녹아들며 향긋한 내음을 피워 올린다.그렉은 코를 벌름거리며 침을 삼킨다. 커피는 정말 맛보기 힘든 것이다.
“자, 피곤하지, 어서 마셔라.”
강흑성에게 믹스를 두개나 탄 커피잔을 박준은 내밀었다.옆에서 침을 삼키며 나도, 하는 얼굴로 손을 옴지락거리는 그렉에겐 못마땅한 시선을 돌렸다.너도 줘야 하냐? 란 얼굴, 으이그 하는 소리로 잔을 내 준다.
“아, 커피다 커피.”
그렉은 정말 감탄하며 커피향을 맡았다.샹그릴라에서 일하면서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것이 커피다.아니 커피가 있는 줄도 몰랐다.그래서 이상하다, 사장 박준이 몰래 먹었다면 냄새라도 맡았을 텐데 그런 적이 없다.
“지난번에 들여온 물품 중에 있었던 거다. 힘들게 구한 거야.”
그게 궁금하지? 란 박준의 대답에 그렉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중하게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 모금 넘겼다. 바로 캬아 하며 감탄했다.
“하, 죽인다. 그래, 바로 이 맛이지.”“야, 너 커피 마셔봤어?”“그럼요, 내가 뭐 완전 촌놈인줄 아시나 본데, 저로 나름대로 살았습니다?”“하 지랄, 그래 어련하겠냐? 여태 무인인 걸 감쪽같이 속인 놈인데.”“아 그건 경우가······”“다를 거 없어 자식아.”
매몰차게 말을 자른 박준은 그렉을 흘겨보지만 더 추궁하진 않았다. 일부러 숨기고 말 안 한 과거다. 말하고 싶으면 말할 터, 강요할게 아닌 거다.
“이대로 괜찮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담담히 나온 강흑성의 말, 샹그릴라가 맞닥뜨린 현실이다.
“그래 맞아, 퓨리엔트족도 안전히 안심할 순 없지만 레드스콜피온 놈들이 몰려올 거야. 아니 이미 현장에 도착했겠지. 그놈이 감찰관이었다고?”
말미의 물음에 강흑성은 그렉을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찰대 상부에서 뭔가 수상한 냄새를 맡은 거야. 그래서 감찰관을 보낸 거지.”
예리한 눈빛으로 박준은 짐작을 이어냈다.
“북부지구에서 일어난 연이은 사건 사고들에 내막이 있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게 크리듐을 둘러싼 일이란 걸 파악할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화성 입장에선 마찬가진 거야. 반화성조직의 테러, 그 일인 거지.”
“북부지구 정찰대가 궤멸했으니까 엄청난 일이 벌어진 거죠.”
상황의 무게를 보탠 그렉의 뒤로 강흑성은 다시 입을 열었다.
“마무리를 하긴 했지만 여파가 어떻게 번질지 모릅니다.”
맞는 말이다. 샹그릴라와는 아무 상관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일로 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흔적들을 지우고 닥쳐올 일에 대해 마음먹고 있지만, 마음과 생각대로 될지 알 수 없는 일인 거다. 결과가 너무 커다란 거다.
“북부지구 정찰대가 궤멸하고 감찰관까지 죽었으니······”
현황의 엄혹함이 주는 무게를 뜨겁게 삼키며 그렉은 말끝을 흐렸다.엄밀히 이런 상황을 명확하게 예상한 것은 아니지만 예감한 것은 맞다.정찰대를 치는 일이니 당연한 거였다.그런데 솔직히 대비할 방법이 없었다.
“제길, 일이 벌어지고 닥쳐오는 흐름이 그랬어······”
뒤이은 박준의 무거운 숨.
“그랬는데도 해냈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성공한 거라는 강흑성, 그 흑청빛 눈동자를 그렉과 박준은 응시했다.성공, 정말로 그렇다. 섶을 지고 불러 뛰어드는 자살미션이었다.두려워 할 것이 아니다. 죽음의 외줄은 이미 밟고 선 것이다.
“이제부터 할 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이어 나온 강흑성의 말에 그렉과 박준은 눈동자를 강하게 빛냈다.그런데 그 순간 아침 하늘 위로 비행체가 날아갔다.은빛의 바람 같은 궤적을 남긴 비행체, 그것이 군대와 정찰대가 쓰는 건쉽 샤크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