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54. 떠나는 길.
54. 떠나는 길.
새벽빛이 움트는 징조를 보이는 동쪽, 아직은 짙은 어둠뿐인 하늘을 바라보며 그렉은 시간을 확인했다. 버스 계기판의 시계는 새벽4시를 가리킨다.
‘이제 곧 7군단 보급대의 행렬이 이 길을 지나가겠군, 사실이라면.’
해동컴퍼니, 그곳의 보스 야마구치란 놈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럴 거다.그 진위를 파악하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뭣보다 그놈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강흑성이 살포한 독에 당한 놈들은 살려고 애원했다.
‘무엇보다 상응하는 대가의 돈을 지불했으니까.’
정보는 확실할 거다. 그러니 문제는 이제부터다.7군단 보급대를 따라가야 한다.은밀하게 뒤를 따른다는 건 불가능한 일.애초 계획대로 그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고 사정해야 한다. 여자와 아이들이 매달려야 한다.
‘필요하다면 돈을 안겨줘서라도.’
7군단의 군기가 엄정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악머구리 판이다. 정의와 도덕과 인정 따위는 욕심을 이기지 못한다. 누구나 이 위험하고 비정한 세상에서 이득을 취하고자 한다. 그런 세상이다.
‘준비한 걸로 될지 모르겠어.’
운전석 뒤로 둔 금화상자를 힐긋 돌아본 그렉은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금화 백 개의 원박스 상자를 세 개나 차에 실어놓은 이가 박준이다.그렇게도 돈밖에 모르는 자처럼 굴더니 아낌없이 내줬다.그의 진심이다.
‘다들 무사히 대륙에 도착해야 할 텐데.’
걱정이 다시 한숨을 부른다. 그들이 가는 길이 위험한 길이어서다. 서해바다를 건너는 건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하지만 해적들이 출몰하는 곳이다. 7군단 휘하의 함정들이 기동할 때 걸리면 함포에 박살날 거다.
‘그런 속을 뚫고······’
좁힌 미간을 꿈틀거리며 생각하던 그렉은 흠칫 고개를 들었다.열어놓은 차창 밖으로부터 소리가 들려온다. 도로 저편에서부터 다가오는 소리다.땅을 울리며 가까워지는 이 소리는 분명하다. 군대의 매머드가 온다.
‘왔구나!’
긴장을 침과 함께 삼킨 그렉은 버스 안을 다급히 돌아봤다.카이오와 눈을 맞췄다.삼백이는 강흑성에게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카이오 곁에서 떨어지질 않고 있다.유일하게 떨어지는 때가 아이들을 돌볼 때다.
‘저 자식.’
삼백이에게서 시선을 거둔 그렉은 명희 엄마와 샤이닌 엄마를 비롯한 여자들을 일일이 응시했다. 모두 긴장으로 경직한 얼굴, 계획을 공감하며 각오한다.그렉은 다른 말없이 고개를 깊게 끄덕이고 차 밖으로 나갔다.버스로 도로를 막아놓은 상황, 육중한 기동음으로 다가오던 매머드 행렬이 멈췄다.
‘매머드, 정말로 크긴 크구나.’
군대의 초대형 전투차량, 지상의 군수물자와 병력 이동을 위해 만든 장갑차다. 언 듯 봐서는 게틀러의 서너배 크기로 가늠되는데 탑승인원이 백 명이다. 내부공간이 어떻게 돼 있는지 모르지만 다섯 배의 용량인 거다.
‘열대.’
매머드가 열대다. 선두와 후미엔 역시 게틀러가 있다. 버스를 향해 즉각 벌컨을 겨눈다. 정체모를 차량이 도로를 막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지금!’
그렉은 준비한 백기를 힘차게 흔들었다. 게틀러의 헤드라이트 빛과 벌컨의 조준광이 눈부시게 비추는 속으로 걸음을 내고 미친 듯이 흔들었다.
* * *
파도가 계속해서 때리고 있는 배는 소형 반잠수정이다. 박준이 요구한대로다. 탑승인원이 여섯 명으로 제한돼 있지만 서해를 건너기엔 무리 없다. 연근해용 선박이고 애초에 군대의 정찰용이었기에 무장은 약하다.
“이거 얼마나 오래 된 거야?”
박준이 가득 좁힌 미간으로 배를 보며 묻자 야마구치는 긴장해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폐기되거나 바다에 버려진 걸 재활용한 겁니다. 제작당시와 같은 성능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서해를 수십 번 왕복해도 거뜬할 놈입니다. 현재 아무런 하자가 없고 무장은 미니건 한정이 전부입니다.”
선수에 장착된 미니건, 수상으로 나왔을 때 돌출시켜 사용하는 무기를 박준은 자세히 살폈다. 에너지 탄창은 이상 없는지, 무기 자체에 결함은 없는 지다. 그러노라는 데 야마구치의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내는 걸 봤다.
“눈깔이 왜 그러냐?”
흠칫한 야마구치에게 박준은 피시식 비웃음을 던졌다.
“처음부터 이 미니건 같은 걸로 상대했으면 결과가 달랐을 텐데, 그지? 그 생각하지? 아쉽고 억울하지? 어때? 지금이라도 해볼래? 한 번 해 봐?”
박준은 미니건으로부터 비켜서며 종용했다. 하지만 야마구치는 당혹한 얼굴로 허둥거렸다.
“무, 무슨 말씀을요?”
정말로 무슨 말씀이냐다. 미니건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을 하긴 했지만 헛일이라는 결론을 바로 새겼다. 그런다고 이길 수 있는 자들이 아닌 거다.뭣보다 애초에 상대를 오판했다. 기회를 상실해 놓고 부질없다.
‘독까지 먹은 마당에······!’
큰돈을 벌게 해주는 거래임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몸에 침투한 독이 문제다. 고철 같은 검으로 부하를 두 쪽 낸 젊은 무인이 말했다. 세 번째 독을 뿌렸다고, 열흘 뒤에 해독약을 줄 거라고.
‘죽지는 않겠지만 열흘 동안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는······!’
그런 독이라고 했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니 자신들이 떠난 뒤에 군대에 알리든 해적들에게 팔아먹든 하라는 거다. 그 대가를 치를 거라 했다.
“그래, 지금처럼 잘하면 되는 거야.”
엷은 미소를 입가에 물고 다시 입을 연 박준은 강흑성을 힐긋 응시한 후에 야마구치를 바라봤다. 경직해 있는 어깨를 두드리며 뒷말을 냈다.
“말한 대로 우린 서해를 건너갈 거다. 짐작하겠지만 동료들이 있다. 그들이 열흘 뒤에, 우리가 무사하게 바다를 건너가고 난 다음에 해독약을 가져다 줄 거야. 우리가 어떻게 되면 어쩌냐고?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믿어, 네가 그 수밖에 더 있냐? 란 말에 확연힌 표정으로 박준은 야마구치의 등을 두드렸다. 야마구치는 시선을 회피하면서 된숨만 내쉬었다. 완전히 지뢰를 밟은 상황, 하지만 모면할 방법이란 전혀 없다.
“형, 우리가 타도 괜찮을까?”
박현이 다가서자 야마구치는 헛, 하며 자신도 모르게 물러났다.3미터 거구의 종족, 둘이나 된다.말 한 자는 왼다리가 헐렁한 채 다른 자의 부축을 받고 있다.부축한 자의 흉악한 시선이 훑고 가는 게 섬뜩하다.
“걱정마라, 탑승인원 여섯 명이지만 개조한 거라서 열 명도 타는 거야. 필요 없는 부분들을 떼 내고 제대로 만들었다. 아무 무리 없을 거다.”
박준의 대답을 들은 박현은 안도의 고갯짓을 했고 무슬란이 이어 물었다.
“언제 출발합니까? 지금은 늦은 것 같은데요?”
박준은 무슬란을 돌아보고 강흑성에게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래, 오늘은 시간이 촉박하니까 내일 밤에 출발하자.”
박준이 결론을 내리자 강흑성은 새벽밤바다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곤 몸을 돌려 야마구치에게 다가갔다. 흠칫하며 긴장하는 그에게 요구했다.
“샤크대금을 오늘밤까지 준비해라.”
야마구치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흑청빛 안광을 흘려내며 야마구치를 보던 강흑성은 뒷말을 이어냈다.
“우린 너희와 같이 있을 거다.”
야마구치는 숨을 멈추며 미간을 경직했고, 강흑성은 남은 말을 뱉었다.
“샤크를 처분하는 일, 내가 네 옆에 있을 거다.”
야마구치는 경직한 얼굴을 하얗게 부들거리며 다시 고갯짓을 했다.
* * *
매머드 행렬의 후미로 붙은 그렉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예상하고 계획한대로 7군대 보급대의 속으로 들어왔다.총구를 들이대던 군인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보고 총을 내렸지만 여전히 경계의 눈을 했다.
‘그런 때 돈이 필요한 거지.’
지휘관에게 사정을 말하고 금화박스를 내밀었다.금화가 무려 일백 개, 원박스다. 지휘관의 삼년 치 연봉은 될 거다.정말 다행하게도 그 돈으로 해결했다.나머지 두 박스는 대전에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돈이다.
‘아무리 그리샴장군이 인신매매를 증오한다고 해도······’
이 지옥 같은 세상 사람들 전부를 그가 구제하진 못하는 거다.당연히 대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이다.그러지 못한 이들은 지나온 평택과 같은 곳에서 사는 거다, 그 정도만 해도 성공한 삶이 된다.
‘유랑민이 돼 어디에선가 어떻게 죽을지 모를 삶 보다는.’
그런 삶을 움켜잡기 위해선 돈이 필요한 거다. 거기에 더해 돈과 생명을 지킬 무기가 필요하다. 그러니 역시 무기를 살 돈이 있어야 하는 거다.
‘이제 거의 됐어.’
호목을 빛내며 고갤 끄덕인 그렉은 뒤따라오는 게틀러의 불빛이 깜박이는 걸 봤다. 멈추라는 신호다. 무슨 일긴가 싶지만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불안한데.’
미간을 깊게 좁힌 그렉은 처음 대면할 당시를 떠올렸다. 지휘관이 여자들에게서 자초지종을 설명 듣고 그렉 자신을 보던 시선이다. 여자와 아이들을 츄란족 샤냥꾼들에게서 구한 의인, 그렇지만 의심으로 바라봤다.
‘목적 없이 그런 일을 하는 자를 본 적이 없을 테니까.’
그 눈길이 자꾸만 불안을 곤두세운다.만에 하나 그렉 자신이 현상금이 붙은 수배자라는 게 발각되면 끝이다.현상수배자가 된 원인이 반화성조직에 참여한 일원이었다는 게 드러나면, 즉결처분을 받을 수도 있다.
‘제길.’
어금니를 물던 그렉은 카이오가 다가온 숨결을 느꼈다.
“이제부터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카이오를 돌아본 그렉은 함께 온 명희엄마의 힘 실린 목소릴 들었다.
“이 차 운전 할 수 있어요. 저한테 맡기세요.”
카이오가 좌석에서 바라보는 모든 여자들의 마음을 대신하듯 다시 말했다.
“이젠 군대와 합류했으니까 다른 위험은 없겠죠. 지휘관이 본대에 보고하는 것도 우리가 다 봤잖아요. 걱정 마세요. 잘할 겁니다. 남은 돈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말씀하신대로 할 거예요. 어서 동료들에게로 가세요.”
동료라는 말을 하는 카이오의 눈이 흑요석처럼 빛나는 걸 그렉은 분명히 인지했다.그게 강흑성을 생각해서라는 걸 안다.그 마음이 더불어 걱정하며 종용하는 것, 지금 이 순간 결정해야 한다.이대로 떠나는 거다.
“시간 없어요, 운전석에서 나오세요.”
명희엄마는 강제로 몸을 디밀었다. 그 움직임에 밀려 그렉은 어어 하며 운전석에서 물러났고, 명희엄마는 정말로 장갑버스를 제대로 운전했다. 노예사냥꾼들에게 잡히기 전에 어떤 과거를 가졌었는지 궁금하다.
“가세요.”
이젠 정말 시간 없다고 재촉하는 카이오, 그녀의 눈을 보던 그렉은 카이오가 앉아 잇던 좌석에서 붉은 눈으로 바라보는 삼백이와 눈을 맞췄다.말없이 바라만 보는 놈, 그 눈길을 마주 응시하다 핸드건을 건넸다.
“대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시 경계 밖에 사람들이 모여 사니까 괜찮을 겁니다. 어쨌든 7군단의 보호 하에 있는 거니까요.”“네, 돈이 있으니까 잘 될 거예요, 뺏기지 않고 제대로 잘 할 거예요.”
넘겨받은 핸드건을 움켜쥐고 말하는 카이오, 그 얼굴에 든 굳은 의지가 명희엄마를 비롯한 여자들 전부의 것임을 그렉은 느꼈다. 이제 더는 당하지 않겠다는, 죽을지언정 죽이고 죽겠다는 결의가 샛별처럼 빛난다.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카이오와 여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 그렉은 몸을 돌렸다.명희엄마가 열어준 차문 앞에 서서 다시 뒤를 돌아봤다.세상모르고 잠든 아이들을 봤다.저래야 한다면서 강흑성이 약을 먹여서다. 하루는 잘 잘 거다.
‘자고 일어나면 안 전한 곳에 있게 될 거다. 잘들 커야 한다.’
저 아이들이 무사하기를 그렉은 마음으로 빌었다. 그 순간, 차량행렬이 우로 굽은 길을 돌아가며 속도를 늦춘 그때, 도로비탈로 몸을 던졌다.
* * *
“후아.”
속을 긁어 올린 한숨을 내쉰 야마구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도깨비에 홀린 것 같은 이 현실을 어떻게든 무사히 넘겨야 한단 마음으로다.
‘크리듐을 대금으로 냈고 샤크의 실물도 확인했으니까.’
이익이 생기는 것만 생각하면 된다. 그들이 말한 대로만 하면 죽거나 위험해질 일은 없을 거다. 죽일 거 같았으면 애초에 독으로 그냥 죽였을 거다.
‘우리가, 내가 필요하니까.’
샤크를 처분하는 일, 그걸 생각하며 야마구치는 무거운 숨을 흘려냈다.
‘남도의 제왕······!’
그들과 거래해야 한다.그들만이 샤크 같은 엄청난 물건을 소화할 수 있다.그런데 솔직히 그들과 접촉하고 싶지 않다.죽을 일이 생긴다면 그들에게서가 맞을 거다.남도의 제왕, 그 조직의 보스는 정말 제왕이다.
‘제대로 하면 돼, 하는 거야.’
이미 그들에게 연락을 넣은 터, 되돌릴 수도 없다. 만나서 거래 하면 된다. 그런데 그 젊은 무인이 함께한다고 했다. 그 부분이 정말로 거슬린다.
“보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부하 놈에게 화를 퍼부으려던 야마구치는 뒷말을 듣고 경직했다.
“남도의 제왕, 그들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