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56화 (57/172)

혹성강호. 56. 피로 빚어진 과거.

56. 피로 빚어진 과거.

손과 팔뚝과 어깨에서 솟구치는 핏물보다 가슴 속에서 피어나는 피의 기억이 그렉은 견디기 힘들었다. 벽도문출신의 이놈들이 후려치는 쌍도는 동료들을 갈라버린 칼이다. 저 푸른 도광의 칼날이 형제들을 죽였다.

‘조엘!’

광기와 원한에 사무쳐 자신을 죽이려는 놈, 아주 오랜 과거의 조상이 바이킹이라고 자랑하던 놈, 그 피를 받아선지 이미터 신장의 그렉 자신과 비슷한 체격을 가진 놈이다. 저놈의 동생을 죽이던 기억이 선명하다.

‘동료들을 팔아치우고 죽여 버린 개자식들!’

조엘과 동생 조르간은 그런 놈들이었다.반화성의 기치 아래 뜻과 힘을 모았던 동료들을 팔아 배를 채웠다.‘근역(槿域)’ 이란 이름으로 뭉쳤던 동지들은 저놈들에 의해 몰살했다.저 짐승만도 못한 조엘놈에게.

‘개자식! 네놈을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광풍처럼 들이치는 조엘의 칼을 피하며, 벽도문놈들의 칼질을 받아치며 그렉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얼마나 부질없는 마음인지 안다. 자신은 살기 위해서 동료들의 죽음을 뒤로 하고 떠난 것이다.

‘비겁하게······!’

처절한 통한을 삼키던 그렉은 조엘의 쌍도가 목과 가슴으로 휘어져 들어오는 것을 인지했다.그런데 피할 수가 없다.벽도문 다른 놈들의 공격과 짜여 들어오는 합격, 피하는 순간 다른 칼들의 난도질을 받을 거다.

‘철갑기공!’

과연 버텨줄지, 버틴다면 얼마나 버틸지를 생각하며 그렉은 모든 내력을 끌어냈다.이제 죽을 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품고서다.그런데 불꽃이 튄다. 닥쳐온 벽도문 놈들의 칼날들이 튕겨나가며 일으키는 스파크다.

‘뭐!’

치뜬 눈으로 그렉은 이유를 확인했다.강흑성이다.그가 마검을 움켜쥐고 벽도문 놈들을 공격하고 있다.혈광을 풀어내는 그의 검이 당황한 벽도문 놈의 목을 쑤신다.왜 그런지 놈은 피하지 못한다. 렉이 걸린 것처럼.

‘저건! 흐름을 알고 있구나!’

강흑성이 그렇다는 걸 그렉은 깨달았다.두 번째 놈의 심장에 주먹을 박아 넣는 걸 보고 확신했다.첫놈처럼 놈도 방어하지 못했다.아니 그게 아니라 강흑성이 놈의 틈을 파고 들어갔다. 조문처럼 태생의 약점이다.

‘벽도문의 무공을 꿰고 있어!’

충격과 놀람과 기쁨으로 그렉은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그러며 보니 자신보다 더 놀란 충격으로 눈을 부릅뜬 조엘이 눈에 들어온다. 허수아비처럼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수하들을 보는 충격, 놈이 괴성을 지른다.

“크아아아!”

창고가 흔들리게 소리를 지른 조엘은 벼락처럼 쇄도했다.어느새 다섯 번째 수하의 가슴을 쪼갠 젊은 놈에게다.벽도팔십이로의 최후절초인 벽뢰분천을 펼쳤다.쌍도는 벼락처럼 푸른 도광을 내며 젊은 놈을 갈랐다.그런데 감각이 없다. 손에, 칼에 갈라지며 느껴져야 할 적의 형상이 없다.그 이유가 보인다.벽뢰분천의 궤적을 귀신처럼 벗어난,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로 이동한 젊은 놈이다.놈의 눈동자가 무섭게 빛을 낸다.

‘위험!’

인지하고 깨달은 순간 조엘은 전력으로 신형을 피했다. 벽도팔십이로의 칼바람을 일으켜 쉴드처럼 방어하면서다. 그 쉴드에 충격이 왔다. 젊은 놈이 용선풍처럼 돌아 나오며 내지른 붉은 빛 검의 일격, 찌르기다.

쾅!

벽과 벽이 충돌한 것 같은 소리가 터졌다. 그 충격이 퍼지는 것과 함께 조엘이 휙 떠밀려 굴러갔다. 그가 있던 자리에 강흑성이 멈춰 섰다.

“크흑!”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신형을 수습하는 조엘, 창고벽을 우그러뜨린 충격을 털어내며 고개를 흔들고 있다. 그를 바라보며 강흑성은 검을 세웠다.

“벽도팔십이로의 근원이 뭔지 아느냐?”

차갑고 무심하게 가라앉은 눈과 목소리로 강흑성은 물었다.고통과 분노와 수치로 몸을 부들거리며 일어선 조엘은 물론 다른 이들도 의아했다.강흑성이 던진 물음이 뭔지다. 그런데 그보다 놀라운 건 이결과다.

“그렉! 무슬란! 그놈을 뭉개버려!”

박준이 소리치는 곳을 향해 조엘을 반사적으로 고갤 돌렸다.하나 남은 수하가 둘에게 협공당하고 있다. 움바바족의 흉악한 작두칼에 곧 쪼개질 판이다.움바바족은 부상 중인 게 분명하지만 그렉의 협공이 있다.

‘저!’

움찔하며 튀어나가려던 조엘은 멈칫하며 상대를 봤다.자신을 이렇게 비참하게 굴려버린 젊은 대적자, 무인이다.그렉이 흑성이라고 불렀다.

‘어디서 이런 놈이 나타난 건지······!’

놀랍고 당황스럽다.지금 이 순간 심장을 격렬하게 뛰도록 하는 건 저놈이 보인 무력이다.사문의 무공을 알고 있다. 그게 분명한 것이 직전에 던진 물음이다.벽도팔십이로의 뿌리를 아느냐는, 그 물음이 답이다.

‘어떻게 사문의 무공을? 저놈이 누구길래?’

조엘의 당혹스러운 심정을 비수로 찌르는 것 같은 비명이 터졌다. 마지막 남은 수하가 쓰러진다. 그렉의 철권을 맞았고 움바바족의 칼을 맞았다.

‘이!’

상반신이 쪼개져 쓰러지는 자를 조엘뿐 아니라 모두가 바라봤다. 그 충격을 주는 죽음을 흩어내는 목소리가 다시 나왔다. 강흑성의 목소리다.

“벽도문 시조 백일준, 그는 대영웅 유성대협을 모신 자다.”

담담하고 차가운 음성으로 이어져 나오는 이야기를 조엘은 물론 모두가 들었다. 백일준에게 벽도팔십이로를 전한 이가 유성대협이란 내막이다.세상이 모르던 비사다. 그런데 그게 정말인건 차치하고 강흑성이 놀랍다.

“네놈······”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연 조엘은 뒷말을 이어냈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모호한 물음, 듣는 자들에겐 그런 내막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묻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벽도문 무공을 어찌 하느냐는 물음이다.그렇다는 걸 그렉만이 안다. 그리고 물음을 받은 당사자 강흑성만이.흑청빛 안광을 무섭게 흘려내던 강흑성은 짧은 말을 뱉었다.

“중요한건 지금 이순간이다.”

강흑성은 걸음을 냈다. 그 기세와 움직임에 조엘은 흠칫하며 쌍도를 세웠다.

“그래······! 죽고 죽이는 이 순간 말고 뭐가 중요할까······!”

전신 내력을 끌어올린 조엘은 푸른빛이 어린 쌍도를 휘두르며 마주 나왔다.

“잠깐!”

격렬한 소리가 창고를 다시 흔들었다.내지른 건 그렉이다.박준과 무슬란이 돌아봤고 박현도 그랬다. 야마구치를 비롯한 놈들도 마찬가지다.그러나 누구보다 흉악한 눈길을 던지는 건 조엘, 분노에 차 반응한다.

“그레엑! 네놈의 모가지를 갈라줄 테니 기다려라!”

강흑성을 죽이고 그렇게 하겠다는 소리, 그렉은 호목을 빛내며 나섰다. 강흑성의 곁으로 다가와 서서 조엘을 노려본다. 그렇게 나직이 말한다.

“내가 한다.”

그렉을 돌아본 강흑성은 잠시 눈길만 던지다가 뒤로 물러섰다.

“좋다! 네놈의 모가지를 먼저 잘라버리마!”

쌍도를 으스러지게 움켜쥔 조엘은 한 맺힌 분노를 토해냈다.

“내동생의 죽음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그렉은 피로 물든 주먹을 가슴 앞에 모아 주비면서 나직이 말했다.

“마찬가지다. 네놈형제의 배신으로 죽어간 형제들의 죽음을 삼키며 살아왔다. 매일매일, 한시도 그 일을 잊은 적이 없다. 삼백 명의 동료들이 짐승처럼 도륙 당하던 그날 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망뿐이었지······!”

마지막 말을 힘겹게 흘려낸 그렉은 치를 떨 듯이 부들거렸다. 그게 수치와 분노와 자괴와 죄책감으로 인해서라는 걸 보는 자들 모두가 알았다.

“그렉, 비루한 타이그란족 새끼······!

이가는 분노를 숨으로 풀어낸 조엘은 확실한 소리로 이를 갈며 뒷말을 냈다.

“네놈이 우리 형제의 계획을 눈치 챘을 때 바로 죽였어야 했는데, 동생에게 네놈을 잡아 놓고 있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랬으면 조르간은······!”

동생의 이름을 이 사이에 물고 조엘은 부들거렸다. 그 순간 그렉이 소리쳤다.

“닥쳐라! 나야말로 네놈들을 그때 죽이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다!”

그렉은 격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숨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조엘 네놈과 조르간이 수상한 통신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게 뭔지 자세히 알아보려 할 게 아니라 때려잡았어야 했어······! 그랬으면 네놈들이 부른 흉적들이 닥치기 전에 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 죽였어야······!”“개소리 마라!”

불같은 감정을 토해내며 그렉의 말을 자른 조엘은 눈동자마저 경련했다.

“근역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었다고 생각 하냐? 이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그따위 허무한 이상과 헛소리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조엘은 더 힘차게 소리쳤다.

“천만에! 다 개꿈인 거다! 내동생과 나는, 벽도문 형제들은 현실을 자각한 거다 미몽에서 깨어난 거야! 봐라! 지금 네 꼴을 봐! 넌 혼자서 살겠다고 도망친 개자식이야! 내 동생 하나 죽여서 네가 얻은 게 바로 그거다!”

그렉은 온몸을 부들거렸지만 반발의 말을 내지 않았다.아니 못했다. 조엘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날 밤 자신은 조르간을 죽이고 도망쳤다. 조엘무리가 끌어들인 흉적들에게 몰살당하는 동료들을 등지고.

“나는 다르다! 내 선택으로 우리는 승자의 길에 올라섰다!”

조엘의 입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우리 벽도문은 남도의 제왕이 됐어!”

그렉은 흠칫하며 눈을 치떴고 조엘은 뒷말을 소리쳤다.

“그 이름 앞에서는 누구도 허리를 세우지 못한다!”

광분한 호랑의의 눈을 번득이며 그렉은 다급히 반응했다.

“그들이, 근역형제들을 도륙한 이름이 그것이냐? 남도의 제왕? 역시 네놈 형제와 뿌리를 같이 하는 놈들이었던 거지? 너희 형제가 동료로 영입한 놈들이 그놈들이었던 거지? 개자식들! 짐승만도 못한 개새끼들아!”

그렉은 처절한 분노를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는 조엘은 오히려 흥분을 가라앉혔다. 눈빛과 기세를 갈무리하듯, 숨을 깊게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 그날의 공을 정찰대와 군대에 인정받아 남도의 제왕은 지금의 성세에 이르렀다. 물론 내 역할이 지대했던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우리다.”

몰랐던 사실, 아니 도망치며 외면했던 진실을 알게 된 그렉은 다시 몸을 떨었다. 그날 밤의 참혹했던 광경을 떠올리며, 분루를 흘리며 도망치던 자신을 떠올리면서다. 봉인해버렸던 그 기억과 감정들이 피를 끓인다.

“조엘······ 오늘 너와 나 하나는 여기서 죽는다.”

가라앉은 숨소리를 낸 그렉은 주먹을 십자로 교차해 가슴 앞에 모았다. 그 모습에 더 이상 흥분과 분노의 감정은 없었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자신을 가라앉힌 상태, 바라보는 조엘은 눈을 빛내며 자신을 제어했다.

“그래, 그렇게 될 거다.”

칼끝처럼 서로를 향해 기세를 뿜던 두 존재, 그렉과 조엘은 동시에 움직였다.

* * *

“으이그, 제기랄 일이다.”

박준은 인상을 쓰며 한숨을 쉬었다. 강흑성이 치료하는 그렉을 바라보면서다. 그 마음을 알기에 무슬란은 작게 한숨 쉬었다. 그런데 그게 야마구치와 부하들에겐 다르게 보인다. 움바바족이 화가 나서 그런 것처럼.

“부상자가 하나 더 늘었으니 이걸 어째야 하는 거야?”

박준은 동생 박현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거듭 걱정을 비쳤다.

“형, 어쨌든 그렉이 이겨서 산 게 중요하잖아.”“누가 아니래냐? 내말은······ 아 관두자 관둬.”

골치 아픈 사람처럼 이마를 만지는 형 박준에게 박현은 다른 말을 더 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이 상황은 자신 때문에 셍긴 것이다.잘려나간 왼다리를 대신할 로봇다리를 구하기 위한 대륙행으로 인해서다.

‘내가 이지경이고 무슬란도 성치 않은 데다 그렉까지······’

시선을 돌린 박현은 그렉이 잘라놓은 조엘이란 놈의 머리통을 봤다.원통한 눈을 부릅뜬 수급이다.저렇게 만들기 위한 싸움은 정말 치열하고 처절했다.그렉의 숨은 실력을 확인한 싸움, 하지만 조엘놈도 대단했다.

‘마지막에 흑성이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렉이 위기에 몰린 순간 강흑성이 소리쳐 알렸다. 조엘이 다음 순간 펼칠 동작을 알고 그 틈을 알린 거다. 그렉은 놓치지 않고 반격했다.그 최후가 저 모습이다.철권에 심장이 박살난 조엘은 허무한 분노를 품은 채 모가지를 잘렸다.이제 위기는 끝났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일은 이제부터다.이곳을 마무리하고 대륙으로 가는 길, 결정을 해야 한다.

“저 자식들을 어째야 하는 거야?”

야마구치 일행을 바라보는 박준의 고민어린 중얼거림, 박현도 지금 생각하는 현실이다. 남도의 제왕이란 놈들과 거래하려다 이렇게 돼버린 거다.

“야마구치한 놈하고 다른 놈들을 다 죽여야 뒤탈이 없는 건데······”

박준이 다시 중얼거리던 그때다. 강흑성이 그렉에게서 일어섰다. 무슬란이 모아놓은 야마구치놈들에게로 다가간다. 새 모이 주듯 뭔가를 뿌린다.

‘독!’

박준은 눈을 치떴고 박현도 그랬다.강흑성은 야마구치 놈들에게 독을 살포하고 있다.놈들은 즉각 피를 토하고 발작하며 죽어간다.무시무시한 광경이다. 그런데 그 보다 더 무서운 건 강흑성이다. 저 결행이다.

‘처음부터 우릴 죽이려고 한 놈들······!’

강흑성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저 비정함이 일행에게는 가장 좋고 유리한 길, 현명한 선택인 거다.그렇지만 아는 것과 행동하는 건 다른 거다.그런데 그렇게 안하는 게 바보인 터, 이 잔혹한 세상에서 사는 법이다.박준과 박현과 무슬란과 그렉의 복잡한 눈길 속에서 해동컴퍼니 조직원들은 핏물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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