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59. 상해로의 첫걸음.
59. 상해로의 첫걸음.
해는 어느새 정오를 외치며 밝은 빛을 사위에 뿌리고 있다. 그 빛을 올려다 본 강흑성은 고개 돌려 일행을 살폈다. 박준과 자신이 식량이 든 전술배낭을 멨고 무슬란은 커다란 금화박스를 카트에 실어 끌고 있다.갈라진 어깨를 봉합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백 개들이 원박스가 아니라 천개가 든 텐박스다. 그 무게가 상당하다. 보통사람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다. 하지만 걸음에 거침이 없고 거뜬하다.
‘움바바족.’
3미터 거구의 체격을 새삼 느낀다. 어깨가 갈라졌던 부상이 거짓인 것만 같은 모습이다. 물론 강흑성 자신이 제대로 잘 치료해준 덕이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않은 몸이다. 저 가슴에 든 의지가 저렇게 하는 거다.
‘모두 다 그래.’
강흑성은 박현과 그렉을 응시했다.강철파이프로 만든 목발에 의지해 걷는 박현은 다리만 없다 뿐이지 내상은 거의 다 나았다.가장 좋은 상태일 거다.그래선지 대륙에 들어왔다는 현실자각인지 눈빛이 강렬하다.반면에 그렉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이다.강흑성 자신이 돌봐주고 있지만 아직은 부상을 털어낼 수 없는 상태다.정말 다행이라면 심각한 외상이 없다는 거다.철갑기공을 익혀서 그런 건데, 정말 그 기공 덕을 봤다.
‘나는 왜 이들과 동행하는 건가.’
다시 앞을 보며 강흑성은 자문했다.목적지는 태산, 중국으로 부르던 이 대륙 땅에서도 산동이라는 지역에 있다.현재 위치에서 북상해야 한다. 그러니 이젠 갈라지는 게 맞다.그런데 이렇게 상해를 향해 가고 있다.
‘내가 달라지고 있는 걸까.’
박준이 그걸 말했다. 그렉도 그런 말을 했었다.처음 샹그릴라에 왔을 때는 독 오른 짐승 같았다고 한다.살기 위해 발버둥치던 모습이 그렇게 보인 거다.그랬는데 마음을 조금 열었던 거다. 간혹 웃음까지 보였다.
‘그랬는데······’
과묵하고 냉정한 모습으로 변했다는 거다. 그 이유를 말하라면 분명하게 답할 수 없다. 강흑성 자신에게 닥쳐온 변화와 자각이 그렇게 만든 거다.정확히 무엇이 어떠하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그렇지만 강흑성 자신은 언제나 그대로고 하나였다.가슴 깊은 속의 본성은 늘 그대로다.변한 건 아니다. 없다. 처음부터 그렇다.웃을 줄 알고 슬퍼할 줄 알며 기쁨과 즐거움 속에 세상을 살고 싶다.그게 자신이다.
‘어머니와 숲을 뛰며 웃던 게 그때처럼.’
벌나비를 쫓아 달리고 새를 잡겠다고 나무에 오르다 떨어지던, 그래서 왁하고 울음을 터트리면 어머니가 다가와 따듯하게 품어 주셨다. 그 안온한 어머니 품과 같은, 즐겁게 웃으며 서로 위하는 세상을 살고 싶다.그걸 원하는 강흑성 자신은 그대로다.하지만 이 세상은 그것 앗아간 지옥, 다시 찾아야 한다.치열하게 싸워서 이기고 빼앗긴 것을 되찾을 거다.그때를 위해 지금 걷는다.박준에게 말했듯이 웃을 때를 찾는 거다.
‘만들어 낸다.’
강흑성은 설핏 입가에 미소를 피워냈다. 진정 되찾고자 한 웃음은 아니지만, 그러기 위해 내딛는 걸음처럼 의지를 피워내는 마음의 미소다.
‘난 웃음을 잊은 게 아니야.
매일매일, 매시간 아버지의 기억과 전투경험을 되새기느라, 부분 부분이지만 그 치열하고 광대한 힘을 녹여내려 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잃었다가 잠시 되찾았던 웃음을 또 있었었다. 그러함을 이젠 깨닫는다.
‘나를 잊지 않았으니 잊은 건 없어.’
입가의 미소를 품어 들이듯 지운 강흑성은 걸음을 힘을 줬다.지금 이들과 상해로 가는 길의 진정한 이유를 되새기면서다.빚을 갚는 거다.쫓기던 어린 짐승이었던 자신을 살려준, 살게 해준 이들에 대한 빚이다.
‘원수는 원수로 갚고 은혜는 은혜로 갚는다.’
힘찬 걸음을 내는 강흑성을 그 순간 박준이 불렀다.
“야, 내가 앞서야지. 여길 아는 건 나라고.”
강흑성은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며 설핏 미소를 물었다. 그러자 박준은 눈썹을 세우고 눈을 크게 뜬다. 뭐라고 하려다가 고갤 젓는다.
“관두자.”
심드렁히 말을 뱉은 박준은 앞서 나가며 일행에게 설명했다.
“이제 곧 상해외곽에 다다르게 될 거다. 말했듯이 여긴 경계 같은 게 없어. 누구나 들고 나는 복마전이지. 별일 없겠지만 긴장은 조금 챙겨라.”
박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렉이 입을 열었다.
“잘나신 사장님, 좀만 쉬어갑시다요.”“저······!”
홱 돌아보며 욕을 하려던 박준은 그렉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화를 삼켰다. 어쩔 수 없단 얼굴로 강흑성을 응시했고, 강흑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쉬자.”
박준이 길옆으로 나가 바위에 앉자 일행 모두가 그 곁에 벌려 앉았다. 수통의 물을 마시며 한숨 돌린 그렉은 주변 풍경을 눈에 넣고 묻는다.
“대륙전쟁 때 다 파괴된 줄 알았더니 도로가 제법 번듯하네요?”
일행이 걷던 도로와 주변 풍경은 상상하던 것과 거리가 있었다. 폐허가 된 모습이 아니다. 물론 거대수들이 이뤄낸 수림이 펼쳐져 있지만, 푸른 녹음이 드넓게 펼쳐진 평야와 산들은 전쟁의 흔적을 엿볼 수 없다.
“여긴 외곽이라 그래. 아니 그보다는 대륙 땅이 원체 넓어서 그렇지. 주요전투가 벌어졌던 곳은 사정이 달라. 상해도 큰 피해를 본 곳은 아니지. 뭐 그래봐야 삼백년전 대전쟁 때 모조리 부서졌으니까. 세상 전부가.”
박현이 목소리를 낸 건 그때다.
“다 좋은데, 뭐 좀 먹자 형.”
뜨악한 시선을 돌린 박준은 으이그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타박하는 대신 배낭을 열어 전투식량을 꺼냈다. 용기에 물을 부어 모두에게 돌렸다. 그런데 무슬란과 박현에게는 새모이 같은 양, 두 개씩을 더 꺼내줬다.
“많이 처먹어라 자식아.”“아이씨, 먹을 거 주면서 꼭 그래야 되겠어? 남도 아니고 동생한데?”“새꺄, 내가 누군 때문에 이 고생이냐?”“제길 생색은, 나 몰래 숨겨둔 돈이 그렇게 많았으면서.”“그렇다니까? 내가 목숨 걸고 매화검문지부장에게서 훔쳐온 돈이란 말이지? 남도의 제왕놈들하고 목숨 걸고 싸워서 챙긴 돈이라고? 그 돈을 너한테 쓰는 거야 자식아! 돈 훔쳐 도망 나온 대륙 땅에 다시 들어와서!”“아아 알았어! 소리치지 마!”“이 싸가지 없는 새끼!”
형제가 예전처럼 다시 멱살잡이를 하는 데 강흑성이 날선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 옵니다.”
그렉도 이내 상황을 인지했고 박현과 무슬란도 그랬다. 포장도로의 흔적이 남은 길을 울리는 진동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말이다.
“총 잡아.”
박준이 긴장하며 말함과 동시에 박현과 무슬란과 그렉은 소총을 잡았다. 움바바용사 둘은 t-rex괴수사냥총, 그렉은 w-2000 빔소총이다. 박준은 핸드건, 강흑성은 흑청빛 안광을 흘려내며 패천마혈을 움켜쥐었다.일행이 쉬고 있는 곳으로 도로를 달려온 무리가 멈춰 섰다.새카만 흑마인 블랙펜더를 탄 무리다.숫자는 이십 명, 인간과 야수족 이종족이 섞였다. 그 무리의 중앙에서 눈을 빛내던 인간 남자가 느릿하게 나선다.
“친구들 안녕하신가?”
얼굴을 가로지르는 칼자국이 흉악한 자다. 거구의 움바바족이 둘이나 있는 일행을 차갑게 응시하며 미소 짓는다. 경계와 살기가 든 눈길이다.
“사해는 동도라는데, 이렇게 길에서 만난 것도 인연이겠지.”
되도 않은 소리에 박준은 하마터면 코웃음을 칠 뻔했다.
“그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친구들인가?”
치밀어 오른 것을 삼킨 박준은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길 따라 와서 길 따라 가는 중이지.”“그런가? 그래 보이는 군, 상해로 들어가는 거겠지?”
고개만 끄덕인 박준에게서 시선을 옮긴 무리의 우두머리 놈은 일행이 먹으려 준비한 전투식량에 시선을 고정했다.
“구하기 쉽지 않은 걸 가졌군.”“뭐 그렇겠나? 이런 전투식량쯤 돈과 수완만 있으면 얼마든지 구할 텐데.”
이번엔 무리의 우두머리 놈이 고갯짓만 했다.
“정말 구하기 쉽지 않은 건 타고 있는 말들 같은데?”
블랙펜더, 이마에 외뿔이 돋은 게 데바족과 같은 짐승이다. 샹그릴라에 붉은 엘프 크라폰이 타고 왔던 거다. 한반도에선 정말 귀한 짐승이다.
“돈과 수완만 있으면 어렵지 않지.”
박준이 한 말을 되풀이해서 대꾸한 무리의 우두머리, 놈의 얼굴에 번지는 차갑고 섬뜩한 기운을 박준은 분명히 봤다. 일행 모두 인지했다.
‘흑도패 놈들······!’
무리의 정체를 박준은 확신했다. 무력으로 살상과 약탈을 일삼는 놈들이다. 움바바족이 둘이나 있고 타이그란 족도 있는 일행이지만 자신들의 숫자와 힘을 믿는 거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흥거리로 여기는 거다.
“거기 그 상자엔 뭐가 들었을까?”
우두머리 놈은 진득한 웃음을 흘리며 상자를 말한다. 무슬란이 내려놓은 큰 박스, 남도의 제왕 놈들이 가지고 왔던, 금화 천개가 든 박스다.
‘이것들이!’
박준은 눈썹을 확 세우며 어금니를 물었다.원래 샤크를 처분해 마련하려던 돈이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마련했다.그래서 남은 돈을 모조리 여자들에게 줬다.마련하기 전이었지만 그래야 했고 결과를 확신했다.
‘내 피 같은 돈을!’
생각하니 피가 솟는다. 엄밀히 따지면 매화검문 지부장의 돈이었지만, 금화 오백 개 하프텐의 그 돈은 목숨 걸고 훔친 거다. 그 돈으로 샹그릴라를 마련했다. 그렇지만 이젠 없다. 샹그릴라도 없고 돈도 여자들 줬다.그리고 이제 남은 돈, 남도의 제왕에게서 뺏은 돈은 동생 박현의 다리를 사야 한다. 그러니 결국 없어질 돈이지만, 아직은 이 손안의 내 피다.그런 돈을, 피와 목숨보다 소중한 돈을, 저 흑도패 놈들이 침 흘린다.
“꺼져!”
자신도 모르게 빽 소리친 박준은 그래놓고 흠칫했다.
‘아이 개신발! 내가 지금 뭐한 거냐?’
주워 담긴 늦었다. 흑도패 무리는 살벌한 기세로 벌려 섰다. 일제히 빔소총을 겨누고 도검류의 무기를 뽑는다. 박준의 반응이 나오자마자 즉시다.역시 피할 수 없던 일, 그걸 알기에 박준의 반응이 나온 것이다. 그 근저에는 강흑성에 대한 믿음이 있다. 해적놈들에게처럼 독을 뿌릴 테니까.
“강호에서 모욕을 참는 건 죽을 때뿐이지.”
얼굴의 흉터를 꿈틀거리는 흑도패 우두머리 놈, 말안장에서 월도를 뽑는다. 시퍼런 날빛이 흉악하게 퍼지는 그것을 휘둘러 잡고 살기를 던진다.
“이젠 안보고 싶어도 봐야겠다.”
상자를 이르는 말, 우두머리가 공격명령을 터트리려는 그 순간 강흑성이 움직였다.그야말로 벼락이 치는 것 같은 형상으로 튀어나갔다.피처럼 붉은 혈광을 터트렸다.마검 패천마혈로 갈라치는 공격, 무원진격이다.번쩍 하는 순간에 결과가 났다.월도를 휘둘러 고쳐 잡던 흑도패의 우두머리, 놈의 월도와 팔이 잘려나갔다.타고 있던 블랙팬더의 목이 갈라졌고, 그 선을 만들고 내려간 마검의 날은 우두머리의 다리까지 갈랐다.
“크아악!”
피를 뿜으며 말머리와 같이 떨어져 뒹구는 우두머리, 그 광경을 본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흑도패 놈들은 보고도 믿기지 않아 충격을 먹었다.눈 깜짝할 순간, 자신들이 공격하려던 찰나였는데 두목이 당하고 말았다.
“이 새끼들아!”
무슬란이 괴수총을 버리고 작두칼을 휘두르며 튀어나왔다. 무지막지한 그 공격에 흑도패 한 놈이 말과 같이 쪼개졌고, 동시에 발사된 박준과 박현과 그렉의 총격은 다른 놈들을 뭉개버렸다. 특히 t-rex가 그랬다.
“뒈져 새끼들아!”
박현이 발사하는 총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맞은 놈은 산산조각으로 터졌다. 그렇게 비산하는 피와 살 속으로 강흑성은 혈귀처럼 움직였다. 피를 갈구하는 마검의 울음에 공명하며 검을 후렸다. 흑도패를 휩쓸었다.
* * *
서쪽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삼백이의 뒤에서 카이오는 강흑성을 생각했다. 지금쯤이면 대륙 땅을 밟고 있을 그가 무사하기를, 원하는 바를 이루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렇지만 대륙은 정말 무서운 곳이다.
‘가 본적 없지만······’
이야기를 들어서 안다. 그곳은 정말로 지옥 같은 곳이라고 한다.그렇기는 이 세상 어디든 그렇지 않을까 마는, 그곳이 정말로 위험한 걸 안다.꿈에서 본 그 존재가 있는 거다. 뭔지 모를 그것, 강흑성의 적이다.
“신이시여, 제발 그분이 무사하도록 도와주십시오.”
두 손을 모아 잡고 카이오는 하늘을 향해 기원했다.그 소리에 삼백이가 돌아섰다.강흑성의 부탁을 받고 카이오 자신을 따라온 삼백이다. 지켜주려는 거다.저 고마운 눈이 말하고 있다. 걱정 말고 기다리면 된다고.
“그래, 고마워 삼백아.”
미소 지으며 삼백이의 손을 잡은 카이오는 돌아섰다. 대전에 도착해 웃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있는 곳, 동료들이 기다리는 버스 앞으로 갔다.이제 할 일은 대전 안으로 들어가는 교섭, 안되면 외곽에 사는 거다.
‘돈이 있으니까.’
품안에 든 핸드건을 어루만지며 카이오는 야무진 숨을 내쉬었다.
* * *
피바다로 변한 길 위에서 강흑성은 검을 뿌렸다. 피를 머금은 패천마혈은 핏방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웅웅거리며 울었다. 그 소리를 무시하고 죽인 자들 사이를 걷던 강흑성은 검갑하나를 발견하고 주웠다.
‘얼추 맞겠는데.’
흑도패 놈들 중 한 놈이 사용하던 것이다. 무슨 재질의 가죽인지 견고하고 질기다. 패천마혈을 집어넣자 맞춘 것처럼 딱 맞는다. 이젠 가죽걸개만으로 등에 걸고 다니지 않아도 되겠다. 고철검 모습도 가릴 수 있다.
‘됐네.’
검갑에 가죽걸개를 연결해 등에 검을 멘 강흑성은 일행을 바라봤다. 난데없이 벌어졌지만 피해 없이 끝낸 전투의 숨을 고르는 그들에게 말했다.
“가죠.”
아무 일 없었던 듯이 걸음을 옮기는 강흑성을 따라 일행은 다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