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68. 태산행.
68. 태산행.
흑산을 벗어나고 상해를 벗어나기까지 따라붙는 위험은 없었다. 이젠 위험이라 하기엔 뭐한 상해의 세력들, 그들은 상패천을 두고 싸우느라 여력이 없는 거다. 강흑성이 운드라이와 상패천에게 해독약을 먹인 결과다.
“이쯤에서 타고 갈 수단을 구하는 게 맞지 싶은데?”
박준이 일행에게 동의를 구하며 강흑성에게 시선을 고정했다.그런데 강흑성의 반응이 아니라 그렉이 입을 연다.
“단천문주 운드라이와 금혈방주 위하문이란 자의 상황이 어떻게 됐을까요? 상패천도 해독약을 먹었으니 그대로 당하진 않았을 덴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자가 왜 그랬을까요? 벽뢰수라는 무공을 포기한 거잖아요?”
일행 모두가 그것을 봤다, 홀로그램으로 뜬 벽뢰수의 내용.그것은 가공함을 넘어 허황되다고 해야 하는 것이었다.무려 오갑자 이상의 내공이 있어야만 수련이 가능하고 대성이 가능한 무공, 그냥 꿈의 무공이다.
“벽뢰수인지 뭔지 그게 허무맹랑하니까 포기 한 거지.”
제가 냈던 물음을 잊고 박준은 대답했다. 그렉은 바로 꼬리를 물었다.
“그런가요? 그래도 화성의 천지문 같은 대문파에선 가능하지 않을까요? 영약을 복용하거나 격체전력을 통해 내공을 몰아넣는 다거나, 화성연구소에선 인체를 개조하기도 하잖습니까? 오갑자가 허황된 내력이지만······”“역혈의 무공입니다.”
명료한 목소리를 내며 걸음을 멈춘 강흑성을 일행 모두가 바라봤다. 상해를 빠져나와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앞서 내던 강흑성, 노변의 바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수통의 물을 마신다. 일행 모두가 자연히 휴식했다.
“벽뢰수라는 무공은 상리를 벗어난 무공입니다.”
다시 입을 연 강흑성은 그렉과 박준과 박현과 무슬란에게 자세히 이야기했다. 벽뢰수에 숨어 있는 진정한 절망진실, 상패천이 던져버린 이유다.
“허, 그렇다고?”“와, 이거 완전 사기네 사기?”
그렉과 박준의 반응처럼 박현과 무슬란은 서로를 돌아보며 된숨을 내쉬었다.강흑성의 말대로라면 벽뢰수는 일반 내공을 익힌 자는 불가하다.역혈의 내공을 익힌 자만이 수련 가능하다. 그런 내공은 세상에 없다.
“천지도 상패천, 그자가 무공을 포기하면서 보인 표정이 뇌리를 떠나지 않아.”
박현이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바로 곁의 무슬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그자는 뭐랄까, 가슴에 포한이 있는 것 같았어.”
우리 같은, 이란 말을 무슬란이 하지 않았지만 일행은 다 알았다. 부족마을이 몰살당한 포한, 당사자가 아니면 알지 못하고 짐작 못할 것이다.그러한 것이 천지도 상패천에게도 있었다는 거다. 그래서 절망한 거다.
“상패천이 왜 천지문의 파문제자가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
박준이 새삼 궁금한 듯이 눈동자를 굴릴 때 강흑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헤어질 때가 됐습니다.”
박준은 눈썹을 확 곤두세웠고 박현과 무슬란과 그렉은 경직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알면서도 박준은 다그치듯 물었다. 강흑성이 지금 낸 말을 묻어버리려는 듯이다.솔직히 안다. 강흑성은 갈 곳이 있다. 카이오가 말한 태산이다.이젠 박현의 다리를 해결했으니 간다는 거다. 같이 안 간다는 거다.
“하 이놈자식, 여태 생사고락을 같이 했는데 헛소리 마라.”
박준은 단호하고 강렬한 힘을 실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현도 바로 나섰다.
“그래, 난 이제 내 몫을 할 수 있다. 흑성이 네 덕분이다.”
내 몫, 네 덕분, 그 말을 하고 난 박현의 눈동자는 무겁게 응축했다. 고맙고 고맙다고 수백 번 수천 번을 외쳐댈 심정인 거다. 그 마음으로 말한다.
“네가 하려는 일이 뭔지 모르지만 같이 가자.”“맞아, 이제 와서 헤어진다는 건 말도 안 돼.”
무슬란이 바로 이어 강한 의지를 밝혔다. 그런 일은 절대로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흑성아.”
마지막 남은 그렉이 목소릴 냈다. 흐릿한 미소로 바라보면서다.
“난 갈 데가 없다.”
강흑성은 그렉의 미소와 박준의 성난 얼굴과 박현과 무슬란의 눈을 응시했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말이 때마침 지나는 바람과 섞여 맴돌이친다.
‘그렇군.’
그렉의 사정, 일신내력을 이제 안다.도망자다, 남도의 제왕과 다시 원한을 맺었다.박준형제와 무슬란은 터전을 잃었다.북부지구 정찰대를 상대로 복수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이다.
‘하지만 나와는 갈 길이 달라.’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일행을 응시하며 강흑성은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나 감사한 마음 가슴에 담고 있었습니다. 샹그릴라를 찾아간 건 제겐 행운이었고 살 길이었습니다. 그로서 진정한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강흑성은 박준과 그렉을 향해 고개를 깊게 숙였다. 때문에 박준과 그렉은 당혹감을 삼키며 예감했다. 저 의지를 꺾을 수 없단 것을 느꼈다.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흑성이 잔잔한 미소로 그 말을 냈을 때였다. 정오를 넘어간 하늘 저편에서 은빛이 번득였다. 그걸 본 강흑성은 눈동자를 응축하며 일어섰다.
“샤크가 옵니다.”
* * *
손에 쥔 실버볼을 상패천은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동시에 애병 천지도에 전 내력을 실어 휘둘렀다. 금혈방주의 금혈도를 받아쳤다. 강력한 힘이 내부를 진탕시켰지만 괜찮다. 독과 그 이전의 내상은 사라졌다.
‘그자가 준 해독약은······!’
흑색군복의 젊은 사내, 그자는 그냥 살려준 게 아니다.진정으로 이 사지를 벗어갈 기회를 줬다.그러한 이유는 그게 자신들의 행보에 이득이어서다.상패천 자신을 두고 단천문과 금혈방이 충돌하는 이 상황이다.
‘지금쯤이면 상해를 벗어났겠지!’
운드라이의 검을 받아치며 상패천은 그 젊은 사내의 눈을 떠올렸다.그가 자신만이 들을 수 있게 말한 내용에 새삼 소름이 끼친다.이곳을 벗어나기만 한다면 절망은 희망이 될 수 있다. 벽뢰수를 익힐 수 있는 거다.
“물러서라 개자식들아!”
격렬한 의지와 분노를 터트리며 상패천은 천지도를 휘둘렀다. 그 무시무시한 칼바람이 소용돌이가 되어 먼지를 하늘로 올릴 때, 하늘이 빛났다.눈부신 섬광, 빔줄기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금혈방무사들과 단천문의 살아남은 무인들이 미친 듯 싸우는 현장에 불벼락으로 내리쳤다.상패천은 운드라이와 위하문과의 접전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뭐야!’
경악한 숨을 들이 내쉴 사이 없이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그렇게 상황을 인지했다. 하늘에 샤크가 나타났다, 벌컨의 불우박을 퍼붓고 있다.
* * *
숲으로 빠르게 은신한 일행은 하늘을 주시했다. 강흑성의 말대로 과연 푸른 하늘에 샤크가 나타났다. 은빛의 유려하고 위험한 비행체는 길을 따라 이동하며 날고 있다. 의도가 있는 움직임, 뭔가를 찾고 있는 거다.
“뭐야 저거? 정찰대야?”
박준이 험악한 눈동자에 품은 위험한 예감을 말했다, 그렉이 바로 반응했다.
“정찰대는 아닙니다. 그놈들 마크가 없어요.”“그럼 저게 뭐야? 군대도 아니잖아?”
군출신 박준은 의문을 삼키며 일행을 돌아봤다. 하지만 누구도 답을 내줄 수 없는 상황, 그렇지만 예감은 다들 같다. 일행이 목표라는 예감이다.
“평택에서의 일로 꼬리가 붙은 걸 수 있습니다.”
강흑성의 흑청빛 눈동자를 돌아본 박준은 의문을 말했다.
“남도의 제왕인가 하는 놈들이라고?”
그것들이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라는 박준의 뒷말보다 강흑성이 빨랐다.
“폭파한 샤크를 정찰대가 찾았을 겁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퍼즐조각처럼 맞춰진다. 정찰대가 평택조직의 상황을 파악했고, 거제도 행은 허위란 것도 드러났을 테고, 서해를 건너는 걸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남도의 제왕을 칼로 선택했을 가능성이다.칼로 선택했다, 남도의 제왕으로 하여금 일행을 찾아내고 죽이는 거다.정찰대가 둔 수가 그렇단 소리다. 왜 직접 대륙으로 넘어오지 않는지는 모르지만 짐작은 된다. 대륙의 특수한 상황과 정찰대의 체면 때문이다.북부지구 정찰대는 몰살당했다. 샤크도 탈취 당했다.이전에 한 번도 없었던 엄청난 사건, 레드스콜피온의 치욕이다.그건 절대로 밝힐 수 없고 인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카이오와 여자들은 안전하다.
“결국 시간의 순서대로 이뤄진 셈인데, 남도의 제왕이 나선 건······ 정찰대가 우리 정보를 넘겨주고 그놈들을 사냥개로 부리는 상황이라면······”
아직 짐작이지만 확신을 품고 박준은 뒷말을 이어냈다.
“대전에 있는 여자들의 소재를 정찰대가 알아낸다고 해도, 절대 찾아갈 순 없을 거야. 그건 군대와 그리샴장군의 비웃음을 사는 일이 될 테니까.”
박준은 강한 끄덕임으로 말했다. 강흑성의 말을 받아 되물음을 내면서부터 전후를 직감한 내용이다. 일행 모두가 짐작하고 확신하는 부분이다.
“저놈들이 정말 남도의 제왕이라면, 정찰대의 개로 우릴 잡으러 온 거라면, 잡히지 않게 도망치거나 싸우거나 둘 중에 하나밖에 없겠군. 안 그래?”
무슬란이 강흑성을 향해 흐릿한 미소로 말했다. 박준과 박현과 그렉은 서로 눈을 맞췄다. 어쩔 수 없는 현실, 갈라서잔 말은 소용없게 됐다.
“상해하늘에 섬광이 보입니다.”
강흑성이 가리키는 곳으로 일행 모두는 시선을 돌렸다. 떠나온 상해 하늘에 섬광이 작렬하고 있다. 저게 샤크가 퍼붓는 불벼락이란 걸 다들 안다.
“개신발 샹그릴라······! 우릴 잡으러 온 게 확실해······!”
박준의 확신을 일행은 모두 삼켰다. 타고 온 반잠수정을 저놈들이 찾아낸 거다. 인접한 상해로 갔다는 것도 알아냈다. 혈랑패를 처리한 일과 흑산에서의 분쟁을 인지한 거다. 주저하지 않고 저렇게 공격을 때린다.
“서둘러 여길 벗어나는 게 최선이겠습니다.”
강흑성은 말하고 바로 움직였다. 숲 깊숙한 곳으로 방향을 잡은 그 행보를 일행은 뒤따랐다. 좋든 싫든 함께 가는 거다. 북으로 전진해 나갔다.
* * *
샤크는 쉬지 않고 빔을 퍼붓고 있다. 크리듐 에너지가 바닥날 때까지 할 모양이다. 단천문과 금혈방은 물론 흑산에 있던 사람들 전부가 죽어나가고 있다. 그 죽음의 불벼락을 피해 상패천이 들어간 곳은 지하수로다.
‘지독한 곳이구나.’
악취만이 아닌 악기를 느끼며 상패천은 지하수로를 달려갔다.틀림없이 강이나 바다로 연결됐을 것이기 때문이다.빔공격으로 지하수로 자체도 무너질 판이다.서둘러 빠져나가지 않으면 이곳에 묻혀 죽을 것이다.
‘안 죽어, 난 안 죽는다!’
살아야 한다. 절망을 끊어내고 복수할 방법을 찾았다.이걸 놓칠 수 없다.지옥에서 온 사신 같은 그 젊은 사내, 그가 알려준 방법이 맞다면 된다.
‘그런데 그 자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마교의 역천대혈비기, 그것은 존재한다.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마교는 사라졌고 마교의 무공과 비술들도 사라졌다.그래서 절망한 게 아니라 마교의 역천대혈비기가 방법이 될 줄 몰랐었다.어떻든 이젠 찾았다.
‘묘진위.’
그 이름을 가진 자를 찾으라고 했다. 그가 알고 있다 했다.
‘그자가 아니래도 마교의 후인을 찾는 거야. 마교의 흔적을 찾는 거야.’
가아 할 길을 움켜잡은 상패천은 떨어지는 돌덩이들을 피해 지하수로를 달렸다.
* * *
“흐음.”
턱밑에 난 까칠한 수염을 어루만진 크리스티앙은 눈동자를 서늘하게 빛냈다. 그야말로 묵사발로 만들어 버린 상해, 흑산이란 곳에서 싸우던 놈들은 박살났다. 단천문과 금혈방의 대가리 두놈은 도망쳐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황금대호방의 황금삼형제 놈들을 때려잡았단 말이지?”
폐허가 된 흑산거리를 바라보며 크리스티앙은 차갑게 웃었다.평택에서 수치를 주고 달아난 놈들, 그렉이란 타이그란 놈과 그 일행은 여기 있었다.놈들 중에 독을 사용하는 자가 있다. 처음 보는 무서운 절독이다.
“그따위 잡술은 이제 안 통해.”
미소 끝에 섬뜩한 살기를 뿜어낸 크리스티앙은 알약을 하나 꺼내 먹었다.정찰대가 만들어준 해독약이다.독에 당한 그들이 제일먼저 한 일이 이거다.이 알약이면 독은 이제 무시해도 된다.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황금강 염진을 일격에 죽였다는 건데······”
서해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상해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 이곳을 지배하는 세력과 인물들도 잘 아다. 황금삼형제, 그들이 뒈진 결과다.
“천지도 상패천이 끼어 교묘하게 돌아간 일이란 말이지······”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던 크리스티앙은 칼자루를 움켜잡았다.
“뭐든, 우리 남도의 제왕에 이빨을 드러낸 놈들은 죽인다······!”
붉은 장발을 바람에 흔드는 크리스티앙 뒤로 남도의 제왕 무사들이 움직였다. 샤크를 앞세워 흑산을 초토화한 그들은 남은 자들을 도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