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69. 피할 수 없다면.
69. 피할 수 없다면.
상해애서 태산까지 가는 거리는 정확히 모르지만 대략 서울에서 부산거리의 두 배쯤 된다. 걸어서 간다면 며칠이 걸릴지 모를 거리다. 그런데 이동수단을 마련하기 어렵게 됐다. 남도의 제왕놈들이 따라붙고 있다.
“제길, 이렇게 수림으로만 이동해서 어느 세월에 태산엘 가?”
무슬란이 투덜거리자 박현은 달래듯 말했다.
“수림 밖으로 나갔다가 빔우박을 맞는 것보단 낫잖아, 참아라.”
말해놓고 박현은 눈썹을 곤두세웠다. 수림 저 안쪽에 자이언트레빗이 보여서다. 황소만한 크기의 몸을 가진 놈, 점프해서 뭔가를 발로 밟았다.
“토끼새끼다!”
무슬란이 부지 간에 낸 그 소리가 자이어트레빗의 시선을 돌렸다.
“야 이 등신아!”
무슬란에게 면박을 줄 시간이 없기에 박현은 바로 움직였다.덩굴을 꼬아 만든 슬링샷을 돌려 투척했다.포탄처럼 날아간 돌, 사람머리 만한 그것이 자이언트레빗의 머릴 강타했다.붉은 눈을 뜨던 머리가 터졌다.
“잡았다!”
무슬란은 환호를 터트렸다. 저녁거리를 잡으러 움직인 터, 맞춤한 걸 잡은 거다. 황소만한 저놈이면 일행이 배터지게 먹을 거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자이언트레빗이 자신들을 보고 도망치지 않고 덤비려 했다.
“현아, 저놈 이상하지 않았냐?”
자이언트레빗에게 다가가던 박현은 고개만 돌려 눈으로 물었다.
“아니 우릴 보고 안 도망갔잖아? 눈깔 보니까 덤비려고 한 것 같았는데?”
박현도 미간을 좁혔다. 무슬란의 의문에 공감해서다.움바바족을 본 자이언트레빗이라면 도망쳐야 하다. 블루마운틴을 본거나 같은 거다.그런데 저놈은 안 그랬다. 붉은 눈알을 번득이며 덤벼들려고 한 것 같았다.
“독초를 먹고 돌아버린 놈인가 보지.”“그래? 그럼 그런 놈을 우리가 먹어도 되는 거냐?”“우린 독에 강하잖아.”
그까짓 게 뭐 문제냐는 박현의 대답, 무슬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강흑성이 만들어준 해독약을 복용했다. 강흑성의 피를 기반으로 만든 약이다.강흑성이 만든 절대독이 아니고선 웬만한 독은 얼굴도 못 내민다.
“야, 배고프다, 어서 가지고 가서 먹자.”
박현보다 먼저 달려간 무슬란은 자이언트레빗을 어깨에 걸쳤다. 머리통이 터진 황소만한 갈색 털의 몸뚱이는 피로 물든 채 흔들렸다. 그 몸이 밟고 있던 것은 들개다. 겁도 없이 수림으로 들어온 놈, 배가 터졌다.
“이놈도 먹을 걸 찾아서 목숨 걸고 들어온 모양인데······”
들개를 내려다보며 복잡한 눈길을 던지는 박현에게 무슬란은 돌아가길 종용했다.
“베 고프다고.”“그래, 가자, 가.”
움바바족 용사 둘은 그렇게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난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수림이 흔들렸다. 거대한 그림자가 피의 흔적을 따라 움직였다.
* * *
“확실히 남도의 제왕입니다.”
수림경계로 나가 샤크를 정찰하고 온 강흑성은 결론을 말했다.그렉이 말한 그들의 상징, 입에 검을 문 해치라는 전설의 동물이 동체에 그려져 있었다고 말했다.그렉과 박준은 예상하고 확신했지만 침음성을 냈다.
“두 사람은 어디 갔습니까?”
강흑성이 무슬란과 박현에 대해 묻자 박준은 그렉을 돌아보고 대답했다.
“전투식량 다 잃었잖아, 저녁거리 마련한다고 말이지.”
강흑성의 눈치를 보며 말한 박준 뒤로 그렉은 다른 목소리를 냈다.
“우리가 북진하는 방향으로 쫓아오는 게 확실한데, 놈들이 우리 목적지가 태산이란 걸 알 리가 없잖아? 역시 우리 모습을 본 자들이 말했겠지?”
상해를 벗어난 방향이 그렇다. 사람들이 봤다. 남도의 제왕 놈들은 우선 그 방향을 택해 훑고 있는 거다. 하늘을 날고 있으니 떼어내기 힘들다.
“곧 수림으로 진입할 겁니다.”
강흑성은 명료하게 그 결론을 말했다. 길을 비롯해 이동 가능한 곳을 다 훑었는데도 못 찾고 있으니 남은 건 수림, 놈들의 수색이 임박했다.
“수림은 저들에게도 위험한 곳입니다.”
담담한 눈빛과 음성으로 입을 연 강흑성은 뒤를 돌아보며 뒷말을 이어냈다.
“더 깊고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박준과 그렉은 알아들었다. 어차피 일행에겐 위험이 닥쳤다. 그 위험을 몰고 온 놈들에게 유리함을 주는 대신 불리함을 준다는 거다. 수림의 깊은 곳, 데빌그라운드와 다를 바 없는 지역으로 놈들을 유인하는 거다.
“그래, 대륙의 수림은 어디가 어떤지 아무도 몰라.”
박준은 기억과 경험을 떠올리며 작게 진저리를 쳤다. 대륙전쟁 당시에 겪은 이 땅의 수림은 어디가 딱히 데빌그라운드라고 말할 수 없는 곳이었다. 비교적 안전하다고 하는 도시 근방 수림지역도 가늠이 힘든 곳이다.
“우리가 가야 하는 방향, 북진하는 곳에 위험한 기운들이 우글거립니다.”
강흑성은 바라보는 곳으로 박준과 그렉은 불안한 시선을 던졌다.말인즉슨 저리로 가면 데빌그라운드와 같은 공간이 펼쳐진다는 거다.이제 그곳으로 가는 거다. 저절로 숨이 경직된다. 그런데 강흑성이 함께 있다.
“까짓 거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 있겠어?”
짐짓 턱을 세운 박준은 자신에 찬 미소로 뒷말을 냈다.
“뎀벼들면 흑성이 네가 독을 뿌려, 그럼 끝이잖냐?”
그렉도 그럼그럼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강흑성이 뜻밖의 말을 한다.
“남도의 제왕은 독에 준비를 했을 겁니다.”“뭐? 그게 무슨 소리냐?”“독에 준비를 해?”
바로 튀어나온 박준와 그렉의 놀란 물음에 강흑성은 답을 줬다.
“정찰대가 그들에게 방법을 만들어 줬을 겁니다.”
박준과 그렉은 동시에 아 하는 탄식을 흘려냈다.정찰대, 그들이라면 그렇다.북부지구가 독에 당했으니 대응방법을 마련했을 거다.성분을 분석하고 해독약을 만드는 건 그들의 시스템으로 하등 문제가 아닐 거다.
“화성연구소를 통했든 치안총국 자체에서든, 어려운 문제가 아니겠지······!”
신음처럼 숨을 씹은 박준은 강흑성을 응시했다. 그럼 이제 어쩌냐는 물음이다.
“독은 수단일 뿐입니다.”
박준은 눈가를 움찔했고 그렉은 시선을 스르르 내렸다.두 사람은 강흑성의 지금 낸 말이 가진 함의를 곱씹었다.지나치게 강흑성에게만 의존하고 있는 현실, 독에 의지하는 마음, 강흑성은 그 부분을 경고한 것이다.
“독이 있고 없고는 상관없습니다. 싸우는 방법은, 수단은 우리가 만들고 선택하면 됩니다. 필요한건 의지와 행동입니다. 여태 해온 겁니다.”
흑청빛 안광을 서늘하게 흘려내는 강흑성, 그 눈을 응시하며 그렉과 박준이 강한 고갯짓을 할 때였다. 박현과 무슬란이 자랑스럽게 돌아왔다.
“형, 저녁거리로 거한 걸 잡았어.”“맛있게 구워 먹자고요.”
자이언트레빗을 당당하게 내려놓는 둘을 보고 박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역시 수림인건가?”
모니터로 보이는 광활한 수림지대를 응시하며 크리스티앙은 와인을 넘겼다. 목구멍을 부드럽게 넘어가는 레드 와인, 그 빛이 새삼스레 피처럼 보인다. 잡아야 할 놈들을 잡아서 그 목을 쳐 내야 할 피, 간절하다.
“열화상으로 전환은 아직도 안 되는 겨냐?”
와인 잔을 내린 크리스티앙은 신경경질 적으로 물었다. 정찰대와 군대가 사용하다 폐기한 것을 재사용하는 샤크의 한계, 새삼 짜증이 난다.
‘그래서 멀쩡한 샤크를 찾자마자 움직인 건데.’
해동컴퍼니 놈들에게 연락이 왔을 때 눈이 번쩍했었다.정확한건 확인해봐야 했지만 영상으로 보건 데는 현역으로 사용 중인 기체였다.과정이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일단 손에 넣고 볼일 이었다.그게 잘못됐다.
‘정찰대를 물 먹이고 샤크까지 탈취한 놈들.’
대단한 놈들이다. 북쪽에서 내려온 놈들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을 추적하는 주체가 서부지구와 동부지구였다. 서부지구대장 패튼이 정보를 줬다.그렇다면 북부지구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의아한 부분이다.
“샹그릴라라는 술집을 운영하던 놈들······!”
박준이란 놈과 움바바족 두 놈, 타이그란 그렉과 이름 모를 젊은 놈 하나다. 그놈들이 샤크를 탈취해서 도주, 처분하려다 조엘과 수하들을 죽였다. 그렉이란 놈은 조엘형제와 악연이 있던 놈, ‘근역’ 의 찌꺼기다.
‘근역······ 그놈들을 쳐서 우리 남도의 제왕이 자리를 잡았지.’
새삼스레 과거를 회상하던 크리스티앙은 눈동자로 살기를 확 뿜었다.
‘닦아내지 못한 찌꺼기는 이렇게 말썽이 되는 거지. 뭐든 말끔한 게 좋아.’
검자루를 강하게 움켜잡은 크리스티앙은 명령을 내렸다.
“수림으로 진입한다.”
하늘을 느리게 날던 세대의 샤크는 수림 속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 * *
“가만있어, 여기서 못 구워먹으면 간이라고 빼가야지.”
박현은 형 박준의 재촉을 무시하고 단검을 꺼냈다.
“얌마! 내 말을 똥구멍으로 듣냐?”
박준이 소리쳤지만 박현의 개의치 않았고 단검을 뽑았다.
“간만 가져가자고.”
움바바족에겐 단검이지만 다른 이에겐 그냥 검이라고 해야 할 것, 그걸로 자이언트레빗의 배를 갈랐다. 뜨거운 김과 내장이 확 쏟아져 나왔다.
“자, 이건 꼭 먹어야해.”
박현은 자이언트레빛의 간을 들었다. 이게 얼마나 귀하고 좋은 건데 하는 미소를 지으면서다. 그 모습을 보는 박준과 그렉이 한숨을 내쉬고 무슬란은 뭔가 잘라가지고 갈게 없나 하고 자이언트레빗을 보던 순간이다.
“꼬리를 달고 왔군요.”
흑청빛 안광을 서늘하게 뿜어내며 강흑성은 움직였다.그때에야 그렉과 박현과 무슬란도 인지했다. 수림의 깊은 곳에서 다가오는 기운이다.
“뭐, 뭐야 저거?”
박준이 기함하며 t-rex장총을 잡았다.거대수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너무 놀라워서다.분명 자이언트레빗이다. 그런데 사이즈가 다르다.두 배, 세배는 더 크다, 블루마운틴정도, 아니 그보다도 큰 괴물이다.
“저, 저게 뭐야?”
그렉도 부릅뜬 눈으로 놀람을 삼켰다. 크기가 거대해서 그렇지 외형은 분명히 자이언트레빗이다. 그런데 엄밀히 그게 아니다. 갈색이나 흰색 털로 뒤덮여 있어야 할 몸이 비늘이다. 그걸 고양이처럼 곤두세웠다.
콰우우!
무서운 울음소릴 터트린 자이언트 레빗, 놈의 붉은 눈알이 향하는 대상은 박현이다. 간을 들고 서 있는 그를 향해 돌진한다. 엄청난 스피드다.
“저 새끼가!”
박준이 명사수임을 자랑하듯 방아쇠를 당겼다.
쾅!
거대괴수사냥총 t-rex는 굉음을 터트리며 목표를 맞췄다.그런데 자이언트레빗은 멀쩡하다. 작은 포탄이 터진 것 같은 불꽃을 몸통에서 피웠을 뿐이다.그 충격을 무시하고 달린다. 목표한 박현을 향해 점프한다.
“뒈져라!”“죽일 놈이!”
무슬란과 박현이 동시에 작두칼을 휘둘렀다. 점프한 자이언트레빗은 움바바족 용사 둘의 공격을 고스란히 맞았다. 그런데 배에서 불꽃이 튄다.t-rex 총격을 흘려낸 것과 같은 현상, 비늘 같은 외피가 방어한 거다.
“이노옴!”
그렉이 벼락처럼 움직였다.벽력같은 호통과 동시에 내지른 철권이 자이어트레빗의 옆구리를 강타했다.박현이 물러난 자리에 착지하는 순간이다.그런데 고통은 그렉의 것이다. 철벽을 친듯한 반발력과 충격이다.
“모두 조심해! 그냥 거대토끼가 아니야!”
그렇다는 건 저 비늘로 곤두선 외피만 봐도 알 수 있지만, 두세 배는 더 큰 거대한 몸을 저토록 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알지만, 그 이상이다.내력을 실은 무인의 공격을 이렇게 반발력으로 튕겨내는 것이 그렇다.
“이 토끼놈이!”
무섭게 덤벼드는 괴수토끼의 공격을 피해 물러서며 박현은 작두칼을 무섭게 휘둘렀다. 그 공방이 만든 불꽃이 어두워지는 수림을 밝혔다. 그런데 그 속으로 강흑성이 움직였다. 무원신풍보를 밟고 휘돌며 발을 냈다.쾅, 하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거대토끼는 옆으로 굴러갔다. 강흑성이 내지른 무원비천류의 무원비천각에 맞은 결과, 하지만 곧바로 일어선다.
“저 괴수 놈이 또 일어선다!”
박준이 경악해 외치는 순간 강흑성은 벼락처럼 움직였다.오뚜기처럼 굴러 일어서는 자이언트레빗에게로 쇄도해 나갔다.검이 아닌 단도를 뽑았다.괴수토끼가 흉악한 입을 벌리는 순간 턱을 차올렸다.그 움직임으로 도약해 단도를 내리찍었다.턱이 부서진 괴수토끼의 정수리에 꽂았다.그 순간 내부에서 폭발하는 힘, 억누르던 마력을 강흑성은 터트렸다.푸악, 자이언트레빗의 머리통은 풍선처럼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