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74. 대영웅의 자취.
74. 대영웅의 자취.
저 형상을 뭐라고 해야 할까, 모이앙은 이제 더 이상 모이앙이 아니다. 검은 숲 요괴라고 부르는 블랙엘프의 흔적은 사라졌다. 블루마운틴 보다 더 큰 괴수다. 전신에 털처럼 불거져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칼날이다.
‘미친!’
더 이상 놀랄 수도 없는 심정으로 경직했던 크리스티앙은 몸을 세웠다.괴수로 변한 모이앙이 샹그릴라 일당을 향해 포효하는 순간이다.검은 깃털 피풍의 주술사 놈도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도망갈 때는 지금이다.
‘헉.’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몸을 크리스티앙은 겨우 다스렸다. 내력은 바닥났고 내상까지 입은 상태여서다. 검을 지팡이 삼아 다시 걸음을 냈다.그런데 등에 시선이 느껴진다. 모골이 송연한 가운데 돌아보니 놈이다.
“가려고?”
하얀 얼굴로 소리 없이 웃는 놈, 주술사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 순간 모이앙이 돌아섰다. 아니 거대한 괴수가 몸을 돌리며 손을 뻗었다.
‘허.’
크리스티앙은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괴수가 된 모이앙이 자신을 향해 손을 뻗어내는 순간 깨달았다. 도망칠 수 없다는 것, 죽을 순간이란 거다.모이앙이 뻗은 오른 팔에서 검은 은빛이 이탈했다. 무수하게 돋아나온 칼날, 흑강석과 은회색 비늘이 합쳐진 괴수의 모발, 크리스티앙을 삼켰다.
* * *
“헉!”
박준이 경악하며 총을 움켜잡았다.본능적이고 반사적인 반응, 지금 눈으로 본 결과는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거대한 괴수가 된 블랙엘프, 본래의 흔적을 찾아 볼길 없는 놈이 칼날의 폭풍으로 우두머리를 흩었다.남도의 제왕, 일행을 추적해온 저놈들의 수괴가 흔적도 없어졌다.아니 흔적은 남았다.수백 개의 칼날이 날아가 저며 놓은 피의 흔적이 선명하다.그것 외엔 남은 게 없다. 샤크 세대는 호수에 박혀 불타고 있다.
“저 주술사 놈이 또 수작을 부리려나 보다!”
박준의 외침처럼 주술사는 걸어오고 있다. 일행이 있는 곳으로 태연하게 온다. 강흑성이 지옥마검을 내리쳐 본질을 죽여 버린 흑강석 산 앞에 멈췄다. 이젠 흙더미다. 그 비탈에 서 있는 일행을 향해 미소 짓는다.
* * *
“정찰대의 영역 안에 발을 디디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태연하고 침착한 자, 검은 안대로 오른쪽 눈을 가린 사내, 블랙블러드의 사자 우인관을 패튼은 묵직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자는 철패에 새겨진 핏방울이 몇 개일까.’
블랙블러드 조직들은 철패를 지녔다.전면엔 블랙블러드라고 써있고 뒷면에 칼날에 흐르는 피가 새겨진 철패다.핏방울 개수가 다섯이면 특급살수다.마주 앉은 우인관 이자는 어떤지, 그저 사자일 뿐인지 모르겠다.
“여기가 북부지구정찰대가 있던 곳이지요?”
하등의 긴장 없이, 의자를 밀고 일어선 우인관은 창가로 걸어가 밖을 보며 말했다.
“제공해주신 자료엔 여기서 일어났던 사건과 관련한 일들이 소상하게 기록돼 있더군요. 샹그릴라란 주점을 운영하던 일당, 퓨리엔트족의 준동······”
말끝을 흐리며 등을 보고 선 우인관, 그가 갑자기 돌아섰지만 패튼은 눈빛하나 흩트리지 않았다. 이 순간 심중에 피어나는 모멸과 자괴를 삼키느라 힘이 들뿐이다. 결국은 이렇게 살수조직까지 만나고 있음이다.
‘이런 자들을 이용하라는 지시는 대체 뭔지······!’
치안총국에서 은밀히 내려온 명령이다. 그래서 놀랐다. 패튼 자신이 남도의 제왕을 부린 것처럼 치안총국은 블랙블러드를 이용하려는 거다. 사태의 완전한 수습을 위해서, 그러나 은밀을 기하며 해야 하기에 그렇다.
‘더러운 청부업자들, 춘천에서도 일을 벌였다는 풍문이던데······’
블랙시티인 춘천은 후임시장 자리를 놓고 암투가 진행 중이다.자치대장과 부시장이 시장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다.그 일에 블랙블러드가 끼어들었다. 자치대의 청부를 받아 광장에서 살상을 저질렀다 한다.
‘혼란을 이용해 자치대의 힘으로 춘천을 장악하려는 수작.’
춘천은 그런 일이 진행 중이다.블랙블러드는 그런 하찮은 일부터 치안총국의 청부 일까지 하는 세력이다.화성에서 이 지구까지, 저들은 어디에나 있다.삼백년 전 대영웅 유성대협에게 소멸될 뻔했지만 살아남았다.
“남도의 제왕에게 따로 일을 맡기셨던데, 그들이 성공할 걸로 보십니까?”
비수를 찌르듯 툭 날아온 물음, 우인관의 눈이 하얗게 웃고 있음을 패튼은 알았다. 비웃음은 분명 아니지만 의미심장한 웃음, 물음과 같은 거다.그런데 놀랍다. 남도의 제왕을 따로 부린 걸 블랙블러드가 알고 있다.
‘역시······!’
블랙블러드란 이름의 의미와 그 힘을 새삼 절감하며 패튼은 입을 열었다.
“예단할 수 없는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소.”
우인관은 검은 안대의 오른쪽 눈을 가볍게 매만지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식어가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입에 머금고 넘긴 후 목소릴 다시 냈다.
“남도의 제왕은 샤크를 세대나 동원했습니다. 그 조직에서 샤크를 은밀히 세대나 보유하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지요. 물론 폐기품을 구해 재가동하는 것이지만, 그만한 능력을 행사한다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알고 있는 일이기에 패튼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각설하고 핵심은 대상입니다. 서부지구 대장께서 남도의 제왕에게 원한 내용이지요. 이곳 북부지구를 몰살하고 대륙으로 도주한 샹그릴라 일당······”
북부지구를 몰살한 이란 말에 패튼은 눈가를 움찔했지만 계속 들었다.
“그들을 잡느냐 하는 결과입니다. 예, 남도의 제왕이 가진 힘과 세력의 운용능력이면 가능할 겁니다. 가능해야 합니다. 그런데 샹그랄리 일당은······”
말끝을 흐리고 미간을 가득 좁힌 우인관은 뒷말을 다시 이었다.
“그들 속에 추측이 어려운 존재가 있습니다. 내주신 사건 자료를 통해 비교적 정확하게 전말을 파악하고 있습니다만, 일당 중의 젊은 사내, 그가 독을 사용한 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물론 지금은 해독약이 준비돼 있지만, 그자가 정찰대를 향해 사용한 독은 전무후무한 겁니다.”
점점 더 깊게 찌푸려지는 미간으로 패튼은 입을 열었다.
“그 독이 뭔지 블랙블러드는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인관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 * *
“원하는 게 뭔가.”
강흑성은 물음을 던졌다. 주술사는 아무 말 없이 미소만 흘려내고 있다. 강흑성도 주술사를 바라보면서 흑청빛 눈동자만 심유하게 번득였다.
“정말로 힘들게 이룬 건데 그렇게 허물어질 줄은 몰랐어.”
잔잔한 음성으로 입을 연 주술사, 푸른 눈을 빛내면서 여전히 미소 짓고 있다.
“수림과 세상 도처에서 모은 원령의 정화였다. 흑강석을 빚어 그 속에 불어넣었지. 특히나 이곳의 지형은 수림의 에너지가 호수로 모이는 곳이라서 할 수 있었어. 심령의 거대수가 아주 큰 힘이 됐지. 아는지 모르겠지만 심령의 거대수는 정말로 찾기 힘들어. 역시 이곳의 지형 덕이야.”
수림의 에너지가 호수로 흘러 모인다는 소리.
“심령의 거대수라는 게 뭔데? 두발로 걸어 다니면 그게 짐승이지 나무야?”
박준이 적의 가득한 눈으로 질문 아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심령의 거대수인 거야.”
대답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게 답이다란 주술사의 미소.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인가.”
잡소리는 그만 걷어내고 네 목적과 의지가 뭔지 밝히라고 강흑성은 던졌다. 그 일성을 받은 주술사는 검은 깃털 피풍의를 가볍게 흔들며 묻는다.
“네 속엔 뭐가 있지?”
꿈틀, 미간을 한번 뒤튼 강흑성은 대답했다.
“네가 알면 죽을 것이 들었다.”
주술사의 파란 눈이 그 순간 확 팽창했다. 하얀 얼굴에 피워내던 미소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검은 깃털 피풍의는 바람을 맞은 것처럼 떨었다.
“그래, 위험하다는 걸 안다. 아주 위험해. 그런 게 아니라면 내 작품을 이렇게 망쳐놓을 순 없을 테니까. 그래서 더 알아야겠다. 네놈이 뭔지.”
파란 눈동자로 살기를 폭사한 주술사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뒤로 공간이동을 하듯이 물러났고, 그 자리에 블랙엘프였던 괴수가 섰다.
“크아아아!”
소름끼치는 괴성과 함께 괴수는 공격을 시작했다.
* * *
알고 있다는 소리에 패튼은 미간을 경련처럼 좁혔고 우인관은 뒷말을 냈다.
“삼백년 전 그런 독을 사용한 자가 있습니다. 그 이름은 유성, 세상이 대영웅이라고 부르는 두 명의 존재 중 한명입니다. 세상이 다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 블랙블러드가 유성과 어떠한 관계였는지, 그의 손에 소멸할뻔 했던 역사를 모를 사람은 없을 겁니다. 예, 바로 그의 독입니다.”
패튼은 황당한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 그게 정말이오? 유성대협이 사용한 독이란 말이오?”
경악에 가까운 놀람으로 되묻는 패튼을 보며 우인관은 차분히 말했다.
“성분 분석결과 90프로 이상이 일치합니다. 물론 10프로의 차이가 있으니 완전히 같은 독이라고 할 순 없을 겁니다. 삼백년 전 유성은 독을 뿌린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발산했다는 차이도 분명 있지요. 그는 독인이었으니까요. 중요한 건 유성의 독과 유사한 독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삼백년 만에 라는 우인관의 마지막 말을 패튼은 명확히 들었다.
“우연일 겁니다. 우연일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 우연이 아니라면 결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모든 게 달라집니다. 유성의 독이 다시 출현한 것이니까요. 그의 행적은 신기루처럼 사라졌지 않습니까? 삼백년 전에 어디로 사라진 건지, 어디서 죽음을 맞은 건지 아무도 모릅니다.”“유, 유성 대협의 유진을 이은 누군가 나타났다는 겁니까?”“그건 모릅니다. 정말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일부의 맥이 이어진 것일 수도 있고, 그 역시 아닐 수도 있고, 확인이 필요하죠.”
칼날 같은 안광을 번득인 호인관은 나지막이 다시 목소릴 냈다.
“팩트는 이겁니다. 만에 하나 유성의 독과 연관이 있다면, 남도의 제왕은 패튼 대장이 원하는 칼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돌아오면 다행일 겁니다.”
패튼은 등골에 돋은 소름을 분노로 밀어냈다.
“억측이요, 아니 일방적인 짐작과 추정에 불과한 일이오.”
유성대협은 사라졌다. 천웅대협과 같이 프락시안족을 물리치고 종적을 감췄다. 삼백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의 자취를 아무도 찾지 못했다. 그가 스스로를 소멸시키고 우화등선 했다는 이야기가 정설인 거다.
“그렇습니까? 패튼대장도 우화등선했다는 이야기를 믿으시는 겁니까?”
미소 짓는 우인관, 이번에 분명 비웃음이다.패튼은 버럭 반응했다.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질 않소! 그렇다면 블랙블러드는 무엇을 믿는 거요? 유성대협의 명맥을 이은 후인이 나타났다고 믿는단 말이오?”
우인관은 서늘한 미소를 느릿하게 지우며 대답을 냈다.
“말씀처럼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겪은 것과 안 겪은 것의 문제입니다. 우리 블랙블러드가 삼백년 전에 겪은······ 그 확인이지요.”
무슨 소린지 알아들은 패튼은 눈가를 가늘게 떨었다.
‘이건 청부가 아니구나!’
그렇다, 치안총국에서 블랙블러드에게 샹그릴라 일당을 해결하라는 청부, 그것이 겉으로 보이는 거라면 속의 진실은 삼백년 전에 겪은 일의 경기다. 블랙블러드의 원한과 두려움, 삼백년 전의 흔적을 확인함이다.
‘블랙블러드가 치안총국 내에도 있는 거야······!’
진실의 깨달음을 삼킨 패튼은 시선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 * *
괴수가 팔을 뻗는 순간 칼날의 기둥이 퍼져 나왔다. 무지막지하고 가공할 스피드의 그 공격을 향해 강흑성은 마주 나갔다. 무원일보를 밟아 나간 순간 패천마혈과 하나 되어 무원일도를 내리쳤다. 칼날들을 갈랐다.
‘마기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괴수를 이길 것이란 확신이 든다.마기에 몸과 영혼을 내주었던 짧은 시간이 또 한걸음을 나아가게 해줬다.이젠 무원진력이 오성이상의 경지다.그 힘과 의지로 검과 하나가 되어 가르는 거다.
‘초식을 넘어서.’
홀연히 마음속에 일어나는 심득.강흑성은 흩어버린 괴수의 칼날들이 다시 날아 뭉치는 것을 보며 멈춰 섰다.괴수의 검은 눈이 팽창하는 순간 다시 걸음을 냈다.거대한 칼이 되어 내려치는 가름을 반보로 비켜섰다.콱, 소리를 내며 땅을 파고 들어간 괴수의 팔, 그 칼날들이 곤두서 폭발하려는 찰나에 일검을 내리쳤다.도끼로 장작을 패는 것 같은 그 가름에 괴수의 팔이 떨어졌다.곤두서 비상하던 수많은 칼날들도 떨어졌다.
“쿠와아아!”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괴수.놈을 향해 느린 바람의 흐름처럼 돌아선 강흑성은 검의 혈광을 덮어쓰고 나아갔다.검을 휘둘렀다.후리고 가르고 쪼개고, 검이란 무기로 낼 수 있는 모든 동작과 공격을 펼쳐냈다.무모하고 무지막지한 것 같은 움직임.법식도 없고 현묘한 도리는 더욱더 없는 모습의 공격.강흑성의 그 공격에 괴수가 흩어졌다.생선의 비늘이 날리듯 칼날들이 휘날렸다.형상을 이루던 모든 것이 쪼개지고 갈라지고 동강나고 떨어져 나갔다.괴수도 울부짖었다.끝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