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75.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들.
75.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들.
“헤······”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은 심정으로 박준은 걸음을 냈다. 휘청하는 걸음은 흙이 돼버린 흑강석비탈을 구르게 만들었다. 아이고 하는 소릴 지르며 굴러내려 갔지만 여전히 현실감이 없다. 괴수를 죽인 강흑성 때문이다.
“완전히 조져놨구나······”
그 표현이 정말 제대로라는 생각이다.블랙엘프였던 놈, 뭔지도 모를 칼날괴수로 변했던 놈은 곤죽이 돼서 흩어졌다.강흑성이 형상을 흩어버렸다.그런데 그 과정이 뭐라고 말하기 힘들다. 그냥 때려잡은 것 같다.
“뭔들······ 흑성이 자자식이 하는 일인데······”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박준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손에 털리는 검은 흙을 느끼며 또 새삼스럽게 감탄하고 황당한 마음을 삼킨다.이건 이렇게 손으로 털 수 없는 흑강석이었다.강흑성이 검으로 이렇게 만들었다.
‘뭔지 모를 붉은 광휘의 검으로······’
박준은 소름이 돋아난 어깨를 으르르 떨었다. 강흑성이 만들어낸 그 혈광이 아니었다면 자신과 동생 박현과 무슬란과 그렉은 먼지가 됐을 거다. 샤크 세대가 퍼붓는 빔의 불벼락 아래서 살아난 것이 신기할 뿐이다.
‘주술사 놈이······!’
하얀 얼굴에 푸른 눈을 가진 주술사놈, 그놈이 이 모든 걸 만들었다.경악스럽게도 샤크 세대를 격추했다.그놈이 원령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흑강석 인간들이 그렇게 했다.포자체가 됐던 그놈들은 꿈에 볼까 무섭다.
‘존재해선 안 되는 것들······!’
오늘 여기서 겪은 흑강석인간들과 괴수들은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존재한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엔 그런 것들이 넘쳐 난다. 정말 넌더리난다.
“주술사 개자식이 도망갔잖아?”
곁으로 내려온 동생 박현의 목소리엔 적의가 넘쳐난다. 그 말대로 주술사 놈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강흑성이 괴수를 뭉개버리자 도망친 거다.
“끝장을 볼 것처럼 굴더니, 퉤, 도망질에 일가견이 있는 놈이네.”
무슬란의 침 뱉는 소리에 이에 그렉도 한마디 보탠다.
“분위기만 그럴듯하게 잡는 놈인 건가? 음, 그렇다고 보기엔 여기 벌려놓은 짓이 정말 대단한데,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도망친 건지 모르겠네.”
아직도 주저앉아 있던 박준은 일행에게 소리쳤다.
“개쉐이덜아! 손이라도 내 주면 손모가지가 썩어 나냐!”
박현이 흠칫하며 시선을 내렸고 무슬란은 고개 돌리며 헛기침 했는데 그렉은 맞지른다.
“뭔 손을 내줘요? 넘어졌으니까 잡아 달라 이겁니까? 허이구, 앱니까?”“뭐 이새꺄!”
정해진 흐름대로 둘이 붙으려는 데 무슬란이 강흑성을 가리켰다.
“왜 저러고 있는 거 같으냐?”
물음을 받은 대상인 박현은 물론 박준과 그렉도 강흑성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강흑성은 짙은 어둠과 하나 된 수림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동료들의 시선을 등으로 받고 선 강흑성은 패천마혈을 검갑에 넣었다.
‘종적을 찾을 수가 없어.’
흑청빛 눈동자를 검날처럼 빛내며, 수림을 뚫어지게 보며 이결과를 곱씹었다. 칼날을 전신모발처럼 풀어내던 괴수를 해치우자 주술사는 사라졌다. 그가 보인 눈빛과 미소를 생각하면 도망은 도망이 아니라 전술이다.
‘지금 여기서의 불리함을 버리고 유리함을 취하기 위한.’
강흑성 자신이 주술사가 만든 모든 것을 파훼했다. 심령의 나무로부터 만들어낸 괴수, 원령을 불어넣어 빚은 흑강석 인간들, 다 갈라버렸다.
‘이곳엔 이제 아무것도 안 남았으니까.’
지옥마검을 내리쳐 흑강석 산 자체가 품은 원기를 갈랐다.패천마혈과 강흑성 자신이 폭발해낸 마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소멸한 거다.그 소멸로 흑강석 산은 흙더미 둔덕이 됐다.모든 것이 흩어진 이곳에서 주술사는 후퇴를 결정했다.하지만 그가 던진 말처럼 확인하러 올 것이다.
‘나라는 존재를, 내 속의 힘을.’
수림의 에너지 속으로 종적을 감춘 주술사, 무수하게 펼쳐진 거미줄 같은 저 속에서 놈을 찾긴 힘들다. 주술사는 그런 존재, 놈은 더 특출나다.검자루를 지그시 잡은 강흑성은 나직하게 결의를 뱉었다.
“존재해선 안 되는 것들, 덤빈다면 죽여준다.”
지옥에서 올라온 암류처럼 강흑성의 그 독백은 수림으로 퍼져나갔다. 그것이 흩어질 때, 아직도 타고 있는 샤크의 불바람에 밀리듯 일행이 다가왔다.
“저거 팔면 정말 큰돈을 만질 수 있는데, 아 아깝네 아까워.”
박준의 안타까운 목소리 뒤로 그렉이 역시 입을 열었다.
“역시, 자나깨나 돈타령이시네, 쯧.”“이쉐이가 정말!”
둘 사이를 가로막듯이 나선 것은 무슬란이다. 3미터 거구가 막자 둘은 서로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상황, 무슬란은 무시하며 제 말을 냈다.
“남도의 제왕 놈들이 제대로 씨몰살을 당했는데 말이지, 괴상한 놈들이 있었잖아? 괴수하고 싸우던 세 놈 말이야? 정상적인 놈들이 아니었지?”
박현도 강흑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맞아, 그놈들 이상했어. 몸으로 칼날 같은 뿔을 달고 있는 게 무슨 늑대사슴 같더라고. 괴수하고 싸우는 게 무지막지 한 것이 대단했잖아?”
그렉과 박준도 서로 노려보던 시선에 의아함을 품을 때 강흑성이 말했다.
“이종입니다.”
그게 뭐냐는 눈으로 이종이란 말을 되풀이 하는 일행, 강흑성은 이야기 했다. 춘천으로 갈 때 겪은 캐리언족 사내의 이야기, 매화검문과 화성연구소의 비밀연구다. 그 연구재료로 잡혀가고 팔려가는 이들이 있다.
“그놈들이 이종이라고? 화성연구소에서 만들어냈다는 거야?”“매화검문 놈들이 한데 붙어서 그 짓을 한단 말이지?”
동생 박현 뒤로 분노를 드러낸 박준은 매화검문이란 이름을 씹어 먹듯이 계속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매화검문 놈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것들 하는 짓거리가 그랬어. 언젠가 큰일을 낼 개종자들이야.”
그런 놈들 돈을 훔친 사람은 뭡니까 라고 말하려던 그렉은 겨우 참았다.
“핵심은 남도의 제왕 놈들이 매화검문 화성연구소와 선이 닿았다는 거네. 이번 일에 나서면서 이종이란 놈들을 데려온 건 우릴 잡으려는 목적.”
박현이 눈을 빛내며 맞장구쳤다.
“그래, 사냥개를 앞세우듯이 이종들을 앞세워 온 거지.”
심각한 눈빛의 일행에게 박준이 대수롭잖단 듯 말했다.
“그것들이 무슨 개지랄을 하던 뭔 상관이냐, 우린 우리 갈 길 가면 되는 거지. 남도의 제왕 놈들도 박살났고, 그놈들 더 누굴 보낼 처지가 아닐 거다. 샤크를 세대나 동원했잖아? 나름 전력을 투입한 게 분명해.”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남도의 제왕을 사주한 게 정찰대다. 그렇지만 그들은 직접 움직이지 못할 사정이 있다. 그러니 안심일지 불안일지 모르겠다.
“지금 걱정할 문제가 있다면 도망친 놈입니다.”
강흑성이 말하는 대상이 주술사란걸 알기에 일행은 눈을 빛냈다. 지금도 불타는 샤크들과 까뒤집힌 호수, 이곳을 이렇게 만든 건 그놈이다.
“놈은 도망친 게 아닙니다. 물러난 것뿐입니다.”
수림을 돌아보며 눈동자를 강하게 응축한 강흑성은 뒷말을 이어냈다.
“제 놈이 유리한 곳에서, 이점을 활용해서, 다시 공격해 올 겁니다.”
강흑성의 시선을 받아선지 수림은 어둠속에 출렁거렸다. 그 모양은 샤크들이 불타며 발산하는 빛의 너울거림 때문이지만, 어쩐지 아닌 것도 같다.
* * *
날이 밝아도 계속 움직였다. 밤을 새운 행보는 피곤을 몰고 왔지만 일행은 강흑성의 쉼 없는 걸음을 따라 이동했다. 그 행보가 밤이 되어 멈췄다.
“이렇게 대놓고 불을 피워도 되는 거야?”
박현은 무슬란에게 물음을 던졌지만 시선은 강흑성에게 꽂았다. 대답은 형 박준이 했다.
“뭐가 걱정이냐? 어차피 우리는 수림으로만 북진하고 있잖아?”
그렇게 했고 할 것이다. 수림 안에 사는 것들은 걱정의 대상이 아니다. 불을 무서워 다가오지 않는 것들도 있고 그 반대인 것들도 있다. 중요한 건 주술사놈, 분명이 다시 공격해 올 그놈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나 여기 있다 하는 건 그렇지 않나?”
표정을 찌푸리는 박현에게 무슬란이 넌지시 말한다.
“유인이야 유인.”“뭐? 그럼 정말로 오라고 손짓하는 거라고?”“아니겠냐?”
좁힌 미간으로 눈을 끔벅거리던 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이러나저러나 서로 피해갈 수 없지.”
결국은 끝장을 봐야 한다는 거, 그게 핵심이고 결론이다.
“뭐 먹을 거 안 잡냐?”
툭 날아온 그렉의 목소리에 박현과 무슬란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버리고 온 자이언트레빗의 간과 고기도 새삼 생각나고, 그 일로 부터 겪은 일도 떠오르고, 저렇게 말하는 그렉의 심보가 얌체 같아서 화난다.
“배고프면 네가 잡던가.”“우리가 사냥 해다 바치는 하인이냐?”
둘의 반응이 대번에 안 좋게 나오자 그렉은 순간 당황했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러자. 이번에 내가 하마.”
순순히 불 앞에서 일어선 그렉은 수림을 살피는 강흑성을 힐긋 본 후에 박준을 돌아봤다. 그가 지닌 괴수사냥총 t-rex를 응시하자 박준은 고갤 저었다. 안준다는 소리, 이 총으론 사냥감이 박살난다는 의미다.어깨를 으쓱한 그렉은 빔라이플 하나만 들고 나섰다. 자신은 타이그란 족, 나름 자신이 있다. 늑대사슴 같은 놈 하나만 잡으면 되는 거다. 대륙의 수림이 아무리 데빌그라운드 같아도 이미 겪은 호수 같진 않을 거다.
‘어디가 끝인지도 모를 수림인데, 뭐 전체가 다 그렇겠어?’
가벼운 마음으로 일행 곁을 떨어져 나간 그렉은 호랑이족 특유의 기민함으로 수림을 헤쳐 나갔다.냄새를 맡고 바람의 방향을 느끼며 이동한지 얼마일까, 드디어 목표를 찾았다.늑대사슴이 암흑쥐를 먹고 있다.
‘뿔로 잡았구나.’
중형견만한 암흑쥐는 늑대사슴의 칼날 같은 뿔에 찔려 동강나 있다.피와 내장이 다 쏟아진 그 사체를 늑대사슴이 맛있게 먹고 있다.사슴은 원래 초식동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상이 뒤집히며 나타난 저놈은 아니다.
‘대가리에 한방.’
빔라이플을 어깨에 견착한 그렉은 숨을 멈췄다. 그러며 늑대사슴을 보니 새삼 저 칼날뿔이 특별해 보인다. 강흑성이 말한 이종이란 존재들이 저것을 드러냈었다. 늑대사슴의 특징을 취한 것, 뭐가 더 있을지 모르겠다.
‘칼날뿔을 폭사하기도 했다는데······’
강흑성이 겪은 캐리언 족은 그랬다고 했다. 손톱도 소형로켓처럼 발사했다는 소리는 어처구니없지만 강흑성이란 존재가 거짓을 말할 리 없다.
‘어?’
상념을 끊고 방아쇠를 당기려던 그렉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갑자기 늑대사슴 옆에 다른 존재가 나타나서다.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 같다.그런데 그게 아니다. 보고도 믿기 힘든 스피드로 곁에 나타난 거다.
‘저게 뭐!’
늑대사슴이 반응하는 순간, 바로 옆에 나타난 그림자는, 아니 괴수는 입을 벌렸다. 커다랗게 벌어진 아가리, 흉악한 이빨들은 소름이 끼친다. 늑대사슴이 칼날 뿔을 돌리며 반응하기도 전에 물었다. 목이 잘려나갔다.
‘퓨터!’
그렉은 이제 깨달았다.늑대사슴을 물어 단번에 목을 잘라버린 저놈, 커다란 머리를 가진 저 괴수는 퓨터다.번개처럼 빠른 움직임은 땅을 디딘 저 두발로 이뤄낸다.몸통에 붙은 짧은 두 팔과 긴 꼬리가 균형을 맞춘다.퓨터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는 괴수다.지구가 인류를 지배종으로 인정하기 전에 번성했던 생물이다.저놈들은 움바바족과 영성이 닿아 잘 지냈다. 그들의 사냥개로 공생했다.그런데 삼백년 전 대전쟁이후 변했다.
‘저놈들은 집단사냥을 하는데!’
깨달은 순간 그렉은 등 뒤의 기척을 인지했다.푸르르 하는 숨소리, 그걸 듣자마자 몸을 옆으로 던졌다.구르며 보니 있던 자리가 갈라진다.
‘제기랄 놈들이!’
퓨터들이 꼬리를 후려쳤다. 몸을 숨겼던 수풀들이 잘려 휘날린다. 그 공격이 허사가 된 걸 안 놈들은 벼락같은 움직임으로 다시 달려든다. 정말로 저 움직임은 감탄스럽고 두렵다. 절정의 무인이나 가능한 동작이다.
“뒈져라!”
그렉은 옆으로 구르며 빔라이플을 발사했다.그런데 빔줄기가 퓨터들의 몸통을 맞고 튕겨나간다. 비껴 맞아서 굴절돼 나가는 거다.저놈들의 가죽은 역시 대단하다. 그러니 죽이려면 눈알을 맞춰야 한다.
‘익!’
다시 총구를 겨누던 그렉은 그 순간 옆에서 닥쳐오는 살기를 느꼈다. 또 다른 퓨터, 영악함을 넘어 흉악한 이놈들의 사냥방법에 걸려든 것이다.
‘제기랄!’
본능적인 반응으로 몸을 돌리던 그렉은 퓨터의 머리가 떨어져 나가는 걸 봤다. 그 이유도 봤다. 강흑성, 그가 마검을 잡고 퓨터들과 충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