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79화 (80/172)

혹성강호. 79. 하프엘프.

79. 하프엘프.

폐허가 된 흑산거리에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그래도 산 것들이 있어서 불빛이 어른거리는 저 거리를 보노라니 새삼스러운 감회가 든다.저곳으로부터 살기 위한 발악을 하며 일어선 자가 바로 나 자신이다.

“무극도 혁리추······!”

스스로의 별호와 이름을 어둠속으로 부르며 혁리추는 대도를 움켜잡았다.자루가 분리되는 병기, 그 이음매에 배어 들어간 수많은 피가 느껴진다. 숨이 거칠어진다. 지나간 세월 속의 무수했던 생사투가 다 기억난다.

‘이렇게 이 거리를 보기까지 손에 묻힌 피가 얼마인데······’

황금대호방의 방주라는 존재로서, 무극도 혈리추라는 이름을 듣는 자들에게 공포를 주기 위해서, 악귀처럼 죽이고 또 죽이면서 이 거리에 섰다.이제 남은 일은 금혈방과 단천문 뿐이었다. 상해를 가지기 직전이었다.

“폐관수련이 헛된 일이 되었어. 흐흐흐.”

자조의 중얼거림과 웃음을 흘려낸 혁리추는 대도를 움켜쥔 손을 문득 응시했다. 무수한 흉터로 도배된 손, 얼굴도 그렇고 몸도 마찬가지다.이렇게 살아온 세월의 정점을 찍기 직전이었는데, 모든 것이 날아갔다.

‘아니, 그건 아닌가?’

어쨌든 지금 상해는 무주공산이다. 하지만 황금대호방도 무너졌다. 황금삼형제, 그놈들이 다 날려먹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처지다.

‘까짓, 하면 될 일이지만, 뇌인걸의 무공이란 말이지?’

천지문이 배출한 최고의 기재, 불세출의 고수, 유성대협과 천웅대협과도 자웅을 결할 수 있다던 존재, 그가 남긴 무공이 세상에 나타났다. 그 문파의 파문제자 천지도 상패천이란 놈이 유적을 뒤져 찾아낸 것이다.

“세상에 우연은 없지.”

다시 나지막한 중얼거림을 흘려내며 혁리추는 차갑게, 소리 없이 웃었다.오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진리다.세상의 일이란 우연인 것 같아도 우연인 것이 없다.뇌인걸의 무공은 나타나야했기에 나타난 거다.그게 왜인지, 어떠한 내막과 배경인지는 지금 알 수가 없다.시간이 흘러야 명확히 알 수 있을 터다. 분명한 것은 그것을 움켜쥐어야 한다는 거다.우연이든 필연이든 이 손에 넣어야 인과의 열매를 가지는 거다.

‘익힐 수 없는 무공이라고?’

그날, 천지도 상패천은 사냥꾼노릇을 하던 자들의 앞에 실버볼을 던졌다.그 안에 든 뇌인걸의 무공을 공개했다. 역혈의 무공, 익힐 수 없는 무공이어서다. 자포자기와 절망으로 그런 거다. 그렇지만 끝이 아니었다.그걸 차지하기 위해 단천문주 운드라이와 금혈방주 위하문은 충돌했다. 그사이에 상패천과 정체모를 놈들, 샹그릴라 일당이란 놈들은 도주했다. 지금은 운드라이와 위하문도 상패천을 쫓아서 상해를 떠나버렸다.

‘단천문과 금혈방이란 기반이 궤멸돼서기도 하지만.’

그렇게 만든 자가 오고 있다. 바다 건너 한반도에서 온 자, 남도의 제왕 문주 팔로진사검 명일해, 그가 잠시 후면 도착한다. 그가 샤크 세대를 보내서 이 거리를 짓밟았다. 이제 넘어온 이유는 뇌인걸의 무공이다.

‘샹그릴라일당 놈들을 찾으려다가 알게 된.’

명일해가 보낸 놈들은 필경 북망산을 올랐다. 샤크 세대에서 토해내는 불벼락으로 모든 걸 초토화한 놈들, 그놈들도 어디선가 당한 거다. 그렇지 않다면 명일해 저자가 올 리가 없다. 무어보다 뇌인걸의 무공이다.

‘역혈의 무공, 익힐 수 없다 해도 다른 자의 손에 있는 건 용납할 수 없지.’

그건 혁리추 자신의 마음이기도 하다. 손에만 넣으면 어떻게든 익힐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다. 뇌인걸이 익히지도 못할 무공을 만들 리가 없다.

‘필경 상리를 벗어난 묘법과 비밀이 숨어 있음이야.’

확신을 삼키던 혁리추는 불빛을 보고 눈동자를 응축했다.드디어 차가 도착했다.커다란 바퀴 여섯 개가 지면을 박차고 달리는 장갑차량, 폐허가 된 흑산거리를 밟고 달려와 멈춘다.옆문이 열리고 그가 내린다.

“남도의 제왕 팔로진사검 명일해 대협을 뵈오! 원로에 노고가 많으시오이다!”

혁리추는 대도를 세워 잡는 포권례를 취했다. 장갑차량에서 내린 자, 남도의 제왕 문주 명일해는 미소를 만면에 품은 얼굴로 다가와 답사한다.

“위명이 쟁쟁한 황금대호방의 주인 무극도 혁리추 대협을 뵙겠소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하며 동시에 큰 웃음을 터트렸다. 진심의 웃음이면서 속내를 감춘 웃음, 그 소리가 흑산의 밤거리를 흔들며 퍼져나갔다.

* * *

강물을 뒤집어 올리는 것의 정체가 뭔지 강흑성은 알았다. 거대한 거북이다. 그런데 머리가 거북머리가 아니라 용의 머리다. 한 번도 본적 없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심상으로 인지하던, 그 용의 대가리다.

‘뭐!’

황당한 충격으로 눈을 부릅뜬 강흑성은 뒤집히려는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강물을 검으로 갈랐다. 붉은 검광은 강물 속으로 스며들어 충격을 퍼트렸다. 그렇게 전복의 위기를 파훼하자 거북이가 포악하게 공격한다.

“으왁! 저 미친 괴물은 뭐야!”

돛대를 잡은 박준은 비명처럼 외쳤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을 해줄 이가 없다. 강물을 타고 떠올라 뒤집히기 직전의 배를 잡고 있기 바쁘다.

“놈이 온다!”

박현이 소리치며 일어섰고, 무슬란도 작두칼을 움켜잡고 준비했다. 그런데 강흑성이 빨랐다. 배를 몸통으로 치려는 괴수 거북을 향해 도약했다.

“흑성아!”

그렉이 소리치는 순간 강흑성은 거북의 등에 검을 꽂았다. 마치 흑강석과도 같은 등껍질이다. 검이 박힌 순간 거북은 몸부림치며 휘돌았다.

‘윽!’

엄청난 스피드와 압력에 강흑성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괴수 거북은 자신이 공격받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본능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강물 속으로 들어가 몸을 휘돌리며 이리저리 부딪친다. 떼어내려는 거다.

‘네 맘대로 안 될 거다!’

전신이 맷돌처럼 갈리는 듯한 강물의 압력 속에서 강흑성은 오른 손을 들었다. 이 순간 떠오르는 심득의 무공, 무원신수의 힘을 손에 모았다.

‘격산타우.’

강흑성은 오른손을 거북의 등에 내리쳤다.쿵, 하는 울림을 분명히 느꼈다.그 결과가 바로 나타났다. 거북은 수면으로 치솟아 올랐고 강가에 떨어졌다. 어둠과 수림을 흔든 육중한 그 울림 속에서 거북은 울었다.

꿔우어!

고통스러운 소릴 지른 거북은 껍질 밖으로 드러난 팔다리를 흔들었다. 사슴과 개를 반씩 섞어놓은 것 같은 용머리의 입으론 피를 흘려냈다. 거대하게 몸부림치는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흑성은 검을 뽑아 움직였다.

“네가 시작한 거다.”

괴수거북의 머리 앞에 서서 강흑성은 그 말을 던졌다. 두려운 눈을 끔벅거리는 괴수 거북은 다시 울음을 토해냈고, 강흑성은 검을 높이 들었다.강흑성이 검을 내리치려는 그 순간 수림에서 총격이 날아왔다. 타앙, 하는 소리를 뒤늦게 수림에 퍼트리는 총격, 빔라이플이 아니라 화약총이다.

“뭐야!”“또 어떤 놈이야!”

배를 강가에 댄 박준과 박현의 외침 속에 공격자가 모습을 드러냈다.늑대사슴위에 올라탄 인간이다.정확하게는 여자다.더 정확하게는 엘프다.

“뭐야? 엘프 맞아? 왜 얼굴이 저래?”

후다닥 달려온 박준이 제일 먼저 낸 말은 그 의문이다. 아주 오래된 저격용 소총을 어깨에 걸친 여자, 아니 엘프는 피부색이 인간과 다르지 않다.

‘하프엘프.’

상대를 보며 강흑성은 그렇다는 걸 직감했다. 흰엘프와 붉은 엘프와 블랙엘프의 특징이 없이 인간과 같은 피부색을 가진 저 여자는 하프엘프다. 타고 있는 짐승은 늑대사슴처럼 보였지만 푸른 바람의 정령, 그거다.

‘늑대사슴의 조상이라는 짐승.’

말로만 들었지 한 번도 본적 없다. 저 웅장하고 멋진 뿔은 정말로 사슴의 뿔이다. 지금 고통스럽게 소리 내는 거북의 머리에 난 뿔과 비슷하다. 저놈은 푸른 바람의 정령이라는 이름처럼 바람을 타고 달린다 한다.

‘달리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으니······’

그게 어떤 걸까를 생각하던 강흑성은 무슬란의 호통을 듣고 현실로 돌아왔다.

“넌 뭐야! 뒈지고 싶지 않으면 그 총을 버려라!”

무슬란에 이어 박현은 작두칼을 겨누고 걸음을 냈다. 그렉은 빔라이플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넣었다. 그런데 여자, 하프엘프는 미소를 짓는다. 그 이유를 알기에 강흑성은 짧은 휘파람 소리로 일행에게 경고했다.날카롭게 귀를 파고든 강흑성의 경고, 일행은 긴장하며 물러났다. 그렇게 하프엘프의 뒤를 바라봤다. 수림을 흔들며 나타나는 거대한 그림자다.

* * *

술잔을 든 혁리추는 단숨에 넘기는 명일해를 향해 미소 짓고 술잔을 비웠다. 화끈한 감각이 식도를 훑고 내려감에 전율하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천지도 상패천과 샹그릴라 일당은 연관이 있다고 판단하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이곳 상해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 아니겠소? 뇌인걸의 무공, 벽뢰수라는 그것의 연성 방법을 찾기 위해서 말이오?”

명일해는 빈 술잔은 직접 채우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관한 곳에 있다 온 이 사람보다야 상해에서 직접 보고 겪은 문주의 혜안이 정확하지 않겠소이까?”

그렇게 말하고 명일해는 소리 없이 웃었다.

‘네놈도 직속수하 놈들이 망쳐버린 일을 보고 받아서 아는 정도겠지만, 그래, 네놈의 말에 일리가 있음이다. 살아남은 놈들의 말을 종합하고 단서들을 취합하지 않았겠느냐? 당연이 네놈이 해야 할 일이 그것이었지.’

명일해의 미소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더듬던 혁리추는 물음을 냈다.

“미흡한 이 사람이 모르는 게 뭔지 알려주시겠소?”

채운 술잔을 들다 멈춘 명일해는 잠시 말없이 눈길만 던졌다. 그러다 술잔을 비우고 대답했다. 서부지구 정찰대장 패튼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샹그릴라 일당 중에 유성대협의 독을 사용하는 자가 있다하오.”

혁리추는 흠칫하며 표정을 경직했다.

‘유성대협의 독?’

독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이건 이야기의 궤가 본질적으로 다르다. 삼백년 전 세상을 구한 대영웅 유성대협, 그의 독이란 거다. 생각도 못해본 이야기다. 이게 진실이라면 판이 달라진다.

“블랙블러드가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움직였소.”

바로 이어 나온 명일해의 말은 혁리추의 심장을 콱하고 움켜쥐었다.

* * *

거대수를 몸통으로 밀어뜨린 거대한 그림자가 포효한다.

크워어어!

강물마저 출렁이게 만드는 엄청난 괴성, 일행은 본능적으로 물러나며 경직했다. 그럴만한 존재여서다. 다름 아닌 괴수 중의 괴수라는 블랙베어다.

“이런 미친! 개신발!”

박현은 t-rex를 겨누고 물러나며 부들거렸다. 박현과 무슬란도 작두칼을 움켜잡고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자신들이 아무리 움바바족이지만 상대는 블랙베어다. 저놈은 블루마운틴을 앞발로 후려쳐 죽이는 최강괴수다.

“한마리가 아니야!”

그렉의 외침이 발작처럼 들리는 건 일행 모두가 그 답을 보고 있어서다. 큰 놈은 4미터에 가까운 거대괴수곰, 블랙베어는 한 마리가 아니다. 수림을 헤치고 계속 나타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열 마리다.경직의 그 순간을 파고드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다 죽여 버린다.”

두려움에 짓눌린 일행의 귀를 파고든 목소리는 강흑성이다.나지막하지만 명료하게 혼을 잡아 준다. 강인한 힘과 의지가 느껴진다.그것이 퍼져나간다.푸른 바람의 정령을 탄 하프엘프와 블랙베어들에게도 미친다.일행이 거대괴수곰들을 보고 놀란 가슴을 가라앉힐 때 반응이 나왔다.

“귀룡을 저렇게 만들었다고 해서 네가 이길 거 같아? 멍청해.”

푸른 바람의 정령을 타고 있는 여자, 하프엘프는 차갑게 비웃는다. 그사이 수림에선 블랙베어들이 더 나타났다. 거대한 그림자는 모두 스무 마리다. 이런 광경을 본적 없고 상상도 못해본 일행은 뜨거운 침을 삼켰다.

“너흰 이미 죽었어.”

하프엘프 여자를 향해 섬뜩한 미소를 보인 강흑성은 울음을 터트렸다. 수림을 향해 던지는, 꿔어꾸어하는 소리가 무엇인지 일행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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