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80화 (81/172)

혹성강호. 80. 푸른 바람의 정령.

80. 푸른 바람의 정령.

상해일탑, 그 이름으로 부른 빌딩의 꼭대기에서 혁리추는 아래를 내려다 봤다. 남도의 제왕 문주 명일해를 기다리며 바라본 흑산거리를 포함해 상해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대륙의 진주라던 이곳은 이제 버려야 한다.

‘대륙의 진주.’

아득하게 오랜 옛적에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육백년에 걸쳐 일어난 두 번의 대전쟁, 그리고 이십오년전 대륙전쟁의 결과로 완전한 폐허로 망가졌다. 상해의 그 호칭을 되살리자고 벌인 전쟁이 바로 대륙전쟁이었다.

‘신중화, 그 이름은 흩어졌지만······!’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혁리추는 가슴을 움켜잡았다.이십오 년 전 전장의 한복판을 달리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그렇지만 현실은 바로 이것이다.암흑 속에 가녀린 빛으로 숨 쉬는 상해, 대륙의 현실이다.

‘뇌인걸의 무공을 손에 넣는 다면······!’

화성군에게 패한 전쟁을 돌이킬 수 있다.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빌딩, 육백년 전에 상해를 아울러 보던 그 화려한 영광을 되찾을 수 있다. 흉한 폐허의 몰골이 아니라 진정한 상해일탑의 면모를 되찾는 거다.

‘명일해의 말이 사실이라면 뇌인걸의 무공보다도 그놈들이······!’

블랙블러드를 움직이게 한 놈들, 샹그릴라 일당을 잡아야 한다.그 중의 젊은 놈이 유성대협의 독을 사용했음이다.그 내막이 뭔지, 만에 하나 유성대협의 유진과 관계가 있다면 엄청난 일이다. 그걸 가져야 한다.

‘그렇게만 되면 화성을 거꾸러뜨릴 수 있어!’

움켜쥔 주먹을 부들거리며 혁리추는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환영의 술잔을 나눈 명일해를 처소에 두고 홀로 이곳에 오른 이유는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서다. 냉철하고 명민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다.

‘모든 걸 버리고 가는 거다.’

상해에 남긴 미련을 버리고 가는 거다. 이름만 남은 황금대호방도 털어내는 거다. 모든 걸 다시 시작하는 거다. 뇌인걸의 무공을 손에 넣으면, 아니 유성대협의 유진을 얻는다면 이 세상천하 자체를 가질 수 있다.

‘명일해. 그자도 그런 각오와 계획으로 온 것이야.’

남도의 제왕, 그 세력은 이제 이름만 남았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샤크 세대라는 전력을 잃은 거다. 부문주와 정예들을 보냈지만 다 잃었다. 저들이 행세하던 자리는 다른 세력들이 차지할 것이다.

‘이심전심이라.’

명일해의 통신연락을 받고 대면에 응한 것은 그래서다.세밀한 이야기들은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의 입장과 처지를 읽었다.동상이몽일터이지만 필요에 의한 협력이다.뇌인걸의 무공과 유성대협의 자취를 좇는 거다.

‘종국에 가서는 얼굴이 달라질 테지만.’

서로 칼을 겨누는 때, 그때가 언제일까를 더듬던 혁리추는 현안을 다시 붙잡았다.

‘천지도 상패천 보다는 샹그릴라 일당을 추적하는 게 우선이야.’

분산해 추적할 여력도 이젠 없으니 한쪽을 정해야 한다. 당연히 유성대협의 자취다. 게다가 뇌인걸의 무공은 손에 넣어도 확신이 없는 상태다.

‘샹그릴라 일당과 천지도 상패천이 관계가 있는지도 확인해야해.’

그들이 관계가 있다면, 혁리추 자신의 짐작처럼 상해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고 그 이유가 뇌인걸의 무공과 관련이 있다면, 그래서 더 잡아야 한다.그런데 솔직히 이 부분은 아닌 것 같다. 본 자들의 증언도 그렇다.

‘흑산에서 살아남은 놈들의 말에 의하면······’

천지도 상패천을 두고 단천문주 운드라이와 부문주 황금룡과 황금수 황금강 세 놈이 격돌했다. 그 자리에 샹그릴라 일당이 있었다. 현장을 본 놈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건 우연이었다. 하지만 우연은 필연의 형제다.

‘명일해는 그런 둥 마는 둥 하는 반응이지만.’

혁리추 자신의 가설, 그것이 짐작 못하게 돌아가는 흐름이란 것을 확신한다. 그것을 세상의 도리니 우주의 섭리니 하는 거창한 말로 안 해도 된다. 아무도 믿지 않아도 된다. 혁리추 자신만이 진리임을 알면 된다.

‘세상은 다른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게 아니니까.’

어둠을 노려보며 혁리추는 각오를 더 단단히 삼켰다.

“치열한 일이 될 것이야······!”

아니 흉악하고 무시무시할 것이다.블랙블러드가 개입하는 일이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그들만이 아니다. 천지문을 비롯한 화성의 삼대문파에서도 올 것이다.이미 행보했을 것이다. 그들과 싸워야 한다.

“죽고 사는 자가 구분되는 것이 강호,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

가녀린 숨결처럼 반짝이는 상해의 불빛을 응시하며 혁리추는 새벽을 기다렸다.

* * *

팔로금검의 검신에 면포를 대고 정성스레 닦아내며 명일해는 물음을 던졌다.

“남겨 두고 온 것이 아까우냐?”

총기를 손질하던 엘킨은 명일해의 등에 시선을 고정하고 대답했다.

“문주를 따르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명일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킨의 대답은 흡족하다. 미사여구를 붙여 둘러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했다. 명일해 자신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결정했음이다. 그게 남아 있는 것보다 엘킨 제게 유리하다는 거다.

‘벽도문 계파 놈들에게 둘러싸여선 아무것도 아닐 테지.’

남도의 제왕은 본래 벽도문에 뿌리를 두고 형성됐다. 그 속에서 팔로육합검문 출신인 자신이 문주에까지 올라 권력을 장악했지만 이젠 아니다.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내 손에서 다 새어나간 것이야.’

엘킨은 그렇다는 걸 알고 따른 거다. 베어족답지 않게 영민한 저 머리와 수행력은 곁에 둘만 하기에 충분하다. 엘킨이 정확하게 어떤 계산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명일해 자신을 수행한 결과를 갖게 될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내 자신이 그러할 것이야.’

내심의 결의를 삼키며 명일해는 엘킨에게 말했다.

“고달프고 위험할 것이다.”

엘킨은 알아들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흐린 불빛에 푸르디한 검신을 비추며 명일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각오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도산검림에 뛰어들게 되는 것이야. 블랙블러드를 보게 될 것이고 삼대문파를 겪게 될 것이다.”

신중한 눈길로 명일해를 바라보던 엘킨은 입을 열었다.

“그들도 그들이지만, 잡아야 할 자들과 곁에 둔 자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명일해는 몸을 돌려 엘킨을 응시했다. 말없는 그 시선 뒤로 미소를 지었다.

“네 말이 맞다. 샹그릴라 일당이라는 놈들, 유성대협의 자취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놈들은 상해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도주했다. 우리가 보낸 샤크 때문이 아니야. 그놈들 때문이지. 그리고 혁리추, 저 자는 칼이다.”

칼이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엘킨을 잘 안다. 혁리추라는 칼날을 이손으로 움켜잡았다는 의미다. 피를 보지 않기 위해선 긴장하고 경계해야 한다.

“혁리추, 저자도 지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야······!”

창가로 간 명일해는 어둠속에 괴물처럼 서 있는 폐허의 빌딩을 바라봤다.

* * *

푸른 바람의 정령은 갑자기 머릴 세우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뭔가를 감지했기 때문에 보이는 반응, 그 등에 탄 하프엘프 여자는 당황을 보인다.

“뭐야? 왜 그래?”

사슴을 달래려 쓰다듬던 하프엘프 여자는 강흑성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원인이 강흑성이란 것을 알아서다. 저 울음은 뭔가를 부르는 게 분명하다.

“인간! 뭐하는 거냐!”

소리친 하프엘프는 번개같이 총을 겨눴다. 총신이 기다란 저격소총은 강흑성의 머릴 향했다. 강흑성은 울음소리를 그치고 총구를 응시했다.

“쏴라.”

강흑성의 눈동자가 흑청빛의 위험함을 확 뿜어내는 걸 하프엘프는 분명히 인지했다. 귀룡을 저렇게 만든 인간, 보통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블랙베어들을 부른 건데, 이남자도 뭔가를 부르고 있다.

‘인간 놈이!’

당황과 분노 속에 손가락에 힘을 주던 하프엘프는 블랙베어들의 울음에 흠칫했다.직전에 토해내던 울음과는 다르다. 분노 속에 긴장이 들었다.블랙베어들이 이렇게 긴장할 일이 뭘까? 그 이유가 다가오고 있다.

‘이건? 설마!’

이젠 몸을 들썩이는 푸른 바람의 정령, 사슴의 뿔을 잡고 하프엘프는 뒤돌아 봤다.흥분한 블랙베어들이 돌아선 사이로 그것들이 보인다.블랙베어에 비하면 팔다리 하나밖에 되지 않을 크기지만 무서운 놈들이다.

‘퓨터!’

하프엘프가 눈썹을 떠는 그 순간 박준이 소리쳤다.

“퓨터다!”

블랙베어만도 죽을 지경인데 퓨터까지 라는 반응, 하지만 동생 박현과 무슬란과 그렉의 표정과 눈빛을 보고 깨달았다. 강흑성이 부른 것이다.

“그, 그런 거라고?”

놀람으로 강흑성을 돌아본 박준은 경직했다.강흑성의 검이 붉게 물들어서다.여태 겪은 바에 의하면 저렇게 되고 살아남는 것이 없었다.그런데 이번엔 모르겠다. 블랙베어가 스무마리다. 이대로 부딪치면 이길까?

“이, 이봐!”

갑자기 치민 충동 같은 것을 이기지 못하고 박준은 나서고 말았다. 동생 박현의 눈이 형 그래? 무슬란의 눈은 아 뭐야, 그렉의 눈은 으이그다.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강흑성과 하프엘프의 사이로 끼어들어 말했다.

“피 보지 말고 대화로 해결하자고. 그게 세상에게 제일 좋은 일이잖아?”

하프엘프가 바로 반응하며 총구를 돌린다.

“피를 본건 네놈들이잖아! 금교어족 마을을 몰살한 놈들!”

시커먼 총구가 가슴을 겨누자 박준은 헉 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그게 창피해 목소릴 높였다.

“그놈들이 우릴 죽이려고 했으니까 그렇게 된 거지! 이건 아 다르고 어 다른 거야! 확실히 하자고! 우린 금교어족을 먼저 공격하지 않았어!”

하프엘프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더 크게 소리쳤다.

“마을을 몰살해 놓고 무슨 헛소리야!”

박준도 지지 않았다.

“사람을 잡아먹는 흉악한 놈들이었다! 우릴 공격하지만 않았어도 아무 일 없었어!”“네놈들이 금교어족 영역을 침범했잖아!”“어디가 어딘지 어떻게 알아! 어디부터가 지들 땅이라고 써서 박아놓든가!”“헛소리 마라 인간놈아! 너희는 그게 문제야! 그 혓바닥으로 다른 종족을 희롱하는 것들! 세상이 지들 거라는 것들! 모조리 씨를 말려야 해!”“너야말로 개소리 마라! 네 몸에도 인간 피가 반은 흐를 텐데 그딴 소리냐!”

흠칫하는 하프엘프에게 박준은 좋다구나 공격했다.

“맞지? 너 하프엘프잖아? 그렇지? 야야 네네 엄마 아빠가 좋아하겠다!”“닥쳐!”

외마디 격노와 함께 총구가 불을 뿜었다.그 순간 강흑성이 움직였다. 박준의 앞으로 이동하며 패천마혈을 내리쳤다.챙하고 불꽃이 튀었다.바닥에 떨어진 갈라진 탄환, 그것을 본 하프엘프는 긴장했고 강흑성은 말했다.

“시작이지?”

강흑성은 퓌르르르 하는 숨소릴 냈다. 동시에 벼락이 치는 것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 움직임 뒤로 퓨터들이 일제히 블랙베어를 공격했다.그런데 강흑성이 튕겨 나왔다. 혈광을 발산하는 패천마혈을 세우고 하프엘프를 향해 나아가던 움직임이 공처럼 튕겼다. 그렇게 만든 원인을 박준과 박현과 무슬란과 그렉이 봤다. 푸른 바람의 정령, 사슴의 뿔이다.푸른 번개, 전류폭발.그런 것이 사슴의 크고 화려한 뿔에 생겨났다. 한순간 주변의 어둠을 밝히는 푸른 눈부심, 그 힘이 굴러 일어서는 강흑성에게 다시 날아갔다.눈을 부릅뜬 강흑성은 푸른 뇌전이 날아오는 순간 그 무공을 떠올렸다.

‘벽뢰수.’

천지도 상패천이 천지문의 유적을 헤매 찾아낸 뇌인걸의 무공이다. 역혈의 무공, 익힐 수 없는 절세신공, 그렇지만 그 방법이 지금 떠오른다.

‘마교, 혼천무상대법.’

육체치환이 가능한 이론의 역천무공, 그것이다. 그것이면 뇌인걸의 벽뢰수를 익힐 수 있다. 그 방법을 마교 후예 묘진위가 갖고 있다. 그것을 상패천에게 알려줬다. 그렇지만 강흑성 자신은 그것을 탐하지 않았다.

‘나 역시 알고 있지만.’

그런데 지금 그것이 떠오른다. 본능과 영혼이 전율하고 있다.아버지의 의지가 길을 가리키고 있음이다. 벽뢰수를 익히라고, 내 것으로 만들라고.푸른 번개에 맞아 강흑성은 뒹굴었다.일어서는 그 몸에 번개는 계속해서 날아갔고 강흑성은 계속해서 뒹굴었다.그사이 수림엔 전쟁이 시작됐다.블랙베어 스무 마리와 퓨터 백 마리가 물고 뜯는 대혈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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