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82. 사는 방법.
82. 사는 방법.
“준후야! 괜찮냐!”
장검에 묻은 피를 뿌릴 새 없이 전복은 준후를 부르며 달려갔다. 최창수의 뒤에서 두려움에 물든 모습을 보이는 열 살 아이, 그 눈이 반가움으로 빛난다. 최창수를 죽이려한 매화검문 무인 둘을 전복이 해치운 거다.
“전복 아저씨!”
와락 안기는 준후를 마주 앉은 전복은 뒤늦게 최창수의 눈을 응시했다. 무지막지한 욕과 분노가 담긴 시선, 슬그머니 외면하면서 변명한다.
“그게 말이지, 자치대하고는······”“준후가 위험했다는 걸 명심해라.”
너 때문에란 강한 눈빛을 던지며 최창수는 새삼 전복의 무기를 봤다. 매화검문 무인 놈을 갈라버린 장검은 본래의 무기지만 저건 다르다. 그 직전의 무인 놈 머리통이 터진 이유가 저거다. 핸드건형 복합광탄발사기다.
“아, 이거? 자치대에서 하나 가져왔어. 어때? 쓸만하지?”
자랑스러운 듯 무기를 들어 보이는 전복을 최창수는 한심스럽게 바라봤다. 물론 저 무기 덕분에 위기를 넘긴 셈이지만 본질은 전복 때문이다. 그렇다는 걸 굳이 말 안 해도 알기에 전복은 준후 머리만 쓰다듬는다.
“우선 여길 벗어나자고.”“당연한 건데, 갈 데는 있나?”“시 경계를 벗어난 곳에 안가를 마련해 뒀어. 화천 가는 길인데, 아아, 우선 가자고.”
준후를 데리고 몸을 돌리는 전복을 따라 최창수는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 그러며 보니 점포는 제대로 파괴됐다. 되는대로 장도와 단검을 주워 챙기고 밖으로 나가니 죽은 자들이 보인다. 매화검문의 무인 두 놈이다.
‘최소 여섯 놈이 움직였구나.’
전복을 잡기 위해 매화검문은 무인 여섯을 동원했다.그중 둘이 최창수 자신이 지하실에서 발사한 미니건에 의해 흩어졌다.아마도 여섯 중에 하급무인일 터다.둘은 죽는 걸 봤고 나머지 둘은 여기 죽어 있다.
‘역시 전복이군.’
실력만큼은 알아줘야 한다. 대륙전쟁 당시에도 그랬지만 전복은 야수 같은 존재다. 피 튀기는 싸움을 즐기기도 즐기지만 반드시 적의 목을 벤다. 그렇다는 걸 알기에 매화검문은 여섯 명이란 숫자를 동원한 거다.
‘블랙헌터마켓에서도 상위랭킹이겠지.’
전복이 말은 안했지만 그렇다는 걸 안다. 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일하는 자가 전복이다. 현상금 사냥꾼 일도 그렇게 하는 거다. 아무리 흉악한 놈이라도 잡겠다고 마음먹으면 잡고, 아니면 아무것도 안한다.
‘전쟁터가 따로 없구나······!’
화염이 곳곳에서 치솟고 있고 접전의 함성과 병기 부딪치는 소리, 빔광선들이 어둠을 가르고 날아가는 광경 속으로 최창수는 전력으로 달렸다. 준후를 데리고 앞서가는 전복을 따라 달리며 전장의 기억을 떠올렸다.
‘춘천은 이대로 멸망하는가?’
대륙처럼 될지도 모르겠다. 그곳은 지구를 버리고 화성으로 떠난 자들에 대한 적대감으로, 지구를 다시 번영케 하겠다는 기치로 일어섰었다.
‘당연히 망할 곳이었지만.’
되도 않을 신중화를 외치던 의지는 잔인하게 짓밟혔다.그따위 편협한 사상과 가치로는 화성을 못 이긴다.변화를 일궈내고 새 세상을 열수가 없다.그들은 발버둥 쳤지만 졌다. 신중화는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춘천이 그렇게 되고 말 것 같다.블랙시티였지만 춘천은 나름의 질서와 규율 속에 살아가던 곳이다.그러나 그렇기에 필연 생겨나는 이권쟁투로 이지경이 됐다.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살아야 한다. 방법은 하나다.
‘싸워서 날 지키는 것밖엔 방법이 없어.’
피와 죽음 속을 뒹굴며 체득한 가치를 삼키며 최창수는 계속 달렸다.
* * *
칸타의 울음이 진정 두려움에 떠는 것이란 걸 아우리엘은 알았다. 본래 천성이 착한 존재지만 그렇다고 적을 두고 이렇게 두려워 한 적은 없다. 싸워 물리쳐야 할 적을 상대함에는 언제나 강한 투지로 울었었다.
‘저 인간!’
상상도 못한 강적이다.허공으로 치솟아 올라가 푸른 장력을 터트렸다.열 갈래로 나뉜 그 힘이 블랙베어들을 강타했다. 모조리 머리가 터졌다.저런 자와 싸우는 건 바보짓이다. 내가 죽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다.
“항복한다!”
아우리엘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갑작스러운 그 반응에 강흑성은 걸음을 내다 멈췄고, 그렉과 박준과 박현과 무슬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야?”
박준은 황당함을 삼켰다. 하프엘프의 행동이 전혀 예상 못한 것어서다. 두 손으로 움켜잡았던 저격소총을 머리 위로 들고 항복이라고 외쳤다.그게 너무 생뚱맞기도 하지만 저 눈은 정말 간절히 살기를 바라고 있다.
“난 죽여도 좋다! 칸타와 곰들은 살려줘!”
이어 나온 하프엘프의 외침에 일행은 황당함의 진정을 개달았다.살려달라는 소리가 맞긴 맞다. 그런데 자신 말고 사슴과 곰들을 살려 달라는 거다.살려달면서도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 같은 저 눈을 이제 알겠다.
“아 이거 뭐야?”“뭐가 많이 요상한데?”
박현과 무슬란의 목소리 뒤로 그렉이 가라앉은 목소릴 냈다.
“빌면 살려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타이그란 족의 말에 아우리엘은 뒤늦은 경직을 눈동자에 품었다.
‘저 악귀 같은 인간이······!’
죽인다고 했다. 아니 이미 죽었다고 한 것 같다. 그 말대로 될 것 같다.
“살려주십시오!”
사슴에서 뛰어내린 하프엘프가 강흑성의 앞에 엎드리는 걸 보고 일행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도 예측을 뛰어넘는 행동, 고갤 박는다.
“죄송합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하프엘프의 행동을 바라보던 박준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 증말, 근데 여자 맞아?”
나머지 일행도 그제야 의구심을 가졌다. 분명 외모는 여자인데, 낭랑한 목소리와 흑단 같은 긴 흑발과 가녀린 몸은 맞는데, 하는 짓은 아니다.
“몰라서 그랬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아우리엘은 땅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연신 사죄했다.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그 모습을 응시하는 존재, 강흑성은 세웠던 검을 천천히 내렸다.
* * *
시 외곽의 경계가 무의미한 상태다. 전복은 계획한 방향대로 이동했다. 신북방향으로 어둠을 주파해 이동, 숨겨놓은 소형차량 앞으로 인도했다. 바퀴 네 개의 골동품 차량이다. 농가의 헛간 속에서 잘 숨어 있었다.
“이 집은 오래전에 비었어.”
폐가를 가리키며 전복은 감회가 깃든 시선을 던졌다. 오고 가는 길에 야숙지로 이용하던 장소다. 집 안엔 원래 살던 사람들의 물건들이 있다. 오래된 모니터엘범 안에는 단란한 가족사진과 이집의 역사가 있었다.
“부랑자들의 습격을 받은 모양이군.”
서늘하게 빛나는 시선을 던지며 최창수는 짐작을 말했다.어디나 같은 비극이다.버려진 지구에서 그래도 사람처럼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던 사람들이다.하지만 그들은 야차 같은 세상의 발톱에 할퀴고 찢겨 나갔다.
“어디선가 살아 있을 지도 몰라.”
희망 섞인 전복의 말에 최창수는 차갑게 대구했다.
“사는 방법을 안다면.”
전복은 반사작용처럼 최창수를 휙 돌아봤다.기억에 있는 말, 최창수의 가치관이다.대륙전쟁 당시에도 최창수는 저 말을 했었다.사는 방법을 알아야 사는 거라고, 그건 싸워서 자신을 돌보는 것이라고, 그 눈이다.그 말대로 최창수는 해 왔다. 무공이랄 수도 없는 권각술만 지닌 인물이 정말 치열하게 싸웠고 살아남았다. 전복 자신이 보기에도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또 하나 있다. 박준, 그 놈은 더 하다.
‘무공이라곤 일초반식도 모르는 놈.’
그런 인간이 박준인데, 그 인간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자인데, 그는 살아 있는 웃음으로 제 생존을 늘 증명했다. 불가사의한 인간이다.그렇지만 살기 위해 도망쳤다.동료들을 사지에 두고 혼자 도망쳤다.
‘그것도 사는 방법이니까.’
피식 웃음을 보인 전복을 최창수가 힐긋 돌아봤고, 준후는 떠나길 종용했다.
“어서 가요.”
고갤 끄덕인 전복은 운전석에 올랐고 최창수는 준후와 뒷자리에 탔다. 골동품 화석연료 차는 신음 같은 소리를 차 전체로 토해내고 출발했다.
* * *
“사는 방법을 아네.”
박준의 목소리가 기묘하게 들렸지만 일행은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프엘프를 내려다 보다 검을 내린 강흑성만 응시했다. 안 죽이려는 것 같아서다. 그런데 아직 모른다. 강흑성은 죽인다고 했다. 그럼 죽이는 거다.
“죄송합니다! 용사님 살려주세요!”
하프엘프의 간청하는 모습을 보고 일행은 더 이상 의심을 품지 않았다.
“여자 아니네.”“그렇지? 여자가 저러진 않잖아?”“혹시 반남반녀 아닐까?”
그렉과 무슬란에 이어 박현의 마지막이야기에 아우리엘은 고갤 홱 돌렸다.
“남자다!”
버럭 소리친 아우리엘은 자신이 빌어야 하는 처지란 것과, 그대상이 눈앞의 인간임을 상기하며 다시 고갤 조아렸다. 연신 절하며 애원했다.
“사슴과 곰 몇 마리 더 죽여도 거기서 거깁니다! 살려주십시오!”
박준이 혀를 찼다.
“사는 방법은 아는데 간청하는 법은 모르는 년, 아니 놈이구나.”
아우리엘이 성난 눈을 다시 돌리자 박준은 이죽거리며 말했다.
“말하는 게 원래 그런 거 같지만, 살려달라고 빌 거면 정말 불쌍하게 여기도록 빌어야지 그래서 되겠냐? 나 같으면 그 꼴을 보고 더 죽이겠다.”
아우리엘은 미간을 좁히고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이상하다고 느껴지냐? 그래 그런 태도는 좋다. 좋긴 한데 넌 상대를 잘못 골랐어. 네 앞의 그 인간은 죽인다고 선언하면 죽인다 이거지.”
예외는 없다는 소리, 박준의 미소를 보던 아우리엘은 강흑성을 돌아봤다.
“부탁이다. 나는 죽여도 돼, 칸타와 곰들은 살려줘라.”
담담하지만 진심이 보이는 눈과 목소리, 일행은 숙연한 감정을 느꼈다. 비록 직전까지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한 적이지만 저렇게 동료를 위해 간청한다.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 하고 사슴과 곰들만은 살려달라고 한다.
“금교어족 때문에 우릴 공격했나?”
강흑성이 물음을 던졌다.일행은 긴장한 숨을 머금은 채 강흑성을 응시했고, 아우리엘은 잠시 대답이 없다가 대답한다.
“그렇다.”
명료한 대답, 강흑성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이유는?”
그제야 일행은 아우리엘에게 다른 이유가 있음을 알았다.
“인간들이 밉다.”
박현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반응하려는데 박준이 제지했다.
“인간들은 정말 나쁘고 위험하다. 난 인간들을 보이는 대로 죽여 왔다. 금교어족도 마찬가지다. 운하인근 수림의 부족들은 다 그렇게 한다. 인간들이 금교어족을 먼저 사냥했다. 당하고 사는 건 바보다. 갚아줘야지.”
이제 전후맥락을 이해한 일행은 서로를 돌아봤다.
“너는 무슨 이유인가?”
강흑성의 물음이 다시 날아가자 일행은 아우리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갸름한, 여자처럼 아름답다고 할 얼굴을 찌푸린 아우리엘은 대답했다.
“엄마와 날 버렸으니까.”
* * *
쳐다보는 것도 짜증이 나게 생긴 개들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트라이울프와 들개의 잡종이다. 그래선지 험악하게 짖어댄다. 마음 같아선 검을 뽑아 동강내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저놈들이 길잡이를 할 것이다.
“개들의 기세가 좋소이다.”
마음에도 없는 치사를 던진 명일해는 혁리추의 미소를 받았다.
“삼목울프의 피를 받은 놈들이지만 여려가지 훈련을 가쳐서 제법 쓸모가 있소이다. 이제 우리가 들어가야 할 수림에서는 저놈들이 필요하지요.”“어련히 잘 준비하셨겠소이까?”
명일해는 출행할 인원들을 돌아봤다. 아침이 오려면 아직도 먼 이 새벽에 준비하고 나선 자들, 혁리추의 심복부하들인 황금대도객들이다. 혁리추처럼 자루가 긴 대도를 병기로 지닌 자들, 혁리추가 키운 무인들이다.
‘여섯.’
혁리추는 저들 외엔 아무도 준비하지 않았다.오직 제 자신과 수하들 여섯만으로의 출행이다.물리지 않을 행보, 모든 걸 건 건곤일척이다.그러하기는 명일해 자신도 마찬가지다. 수하라곤 오직 엘킨 하나뿐이다.
‘이루지 못하면······!’
돌아올 것 없는 길이다. 이제 그 길을 간다. 피가 미치게 끓어오른다.
“자, 우리의 행보를 위해 잔을 듭시다!”
명일해는 호방한 웃음으로 잔을 채워 들었고 혁리추도 잔을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리고 잔을 넘긴 뒤 뒤로 던졌다.챙그랑 하고 술잔이 깨지는 소리에 맞춰 출발을 알리는 개들의 울음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