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83. 길잡이.
83. 길잡이.
불을 피우고 음식을 준비하면서 그렉은 강흑성을 돌아봤다. 염려가득한 눈으로 지켜보는 아우리엘을 곁에 두고 귀룡이란 거대거북을 치료중이다. 강흑성의 내가장력을 맞은 거대 거북은 죽은피를 토해내고 있다.
“저거 살아날까?”
박현이 의구스러운 시선을 던지자 무슬란이 미간을 제법 심하게 구긴다.
“우릴 수장시키려고 날뛴 놈인데 정말 살려주려는 거야?”
그렉과 박현은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서로를 봤다. 강물위에서 정말로 저 귀룡이란 거대거북에게 죽을뻔한 거다. 그런데 강흑성은 살리고 있다. 강흑성이 살리려고 마음먹었으면 끝난 일이고, 그렇게 한다면 살 거다.
“저 요상한 하프엘프놈을 왜 안 죽이는 거야?”
거듭 나온 무슬란의 불만을 박현과 그렉은 십분 이해한다.블랙베어들과 싸운 경험은 절로 진저리가 난다.저들은 일행을 죽이려했다.그래서 강흑성은 죽인다고 한 거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저렇게 다시 살린다.
“아 재섭서.”
박준이 다가오며 뱉은 말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몰라 그렉은 물었다.
“무슨 소립니까?”“뭐가?”“지금 한 말이요? 재섭서요? 그게 무슨 말인데요?”“얘 뭐래?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모르니까 묻죠?”“아 이자식 증말, 야, 저 여자 같은 하프엘프놈을 보면 기분 안 이상하냐?”“에?”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던 그렉은 아우리엘을 돌아보고 깨달았다.
‘그 말이 그럼······’
재수 없다는 말이다.여자처럼 생겨서 보는 사람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드는 놈이란 거다.그게 싫고 기분 나빠서 재수 없다고 말하는 거다.
“역시 사장님은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지셨네요.”“뭐? 편이 어쨌다고?”“그렇게 성차별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니까 평소에도 차별적인 언행이 나오는 겁니다.”
뜨악한 표정을 만든 박준은 바로 미간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야, 넌 호랑이잖아? 그런데 그런 말해도 되냐?”“예?”“개소리 말이다?”
이번엔 그렉이 인상을 확 구겼다.둘이 그러고 있는데 박현과 무슬란은 저희끼리 이야기 중이다.
“아무래도 이용하려는 거 같지?”“음, 그런 게 확실하다. 저놈들 살려주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뭐.”
강흑성이 결정했으니까 라는 소리. 궁시렁궁시렁 두런두런 이어지는 그 대화를 강흐성의 곁에 붙어 있던 아우리엘은 큰 귀로 다 듣고 있었다.
“용사, 당신 일행은 원래 저런가?”
강흑성은 아우리엘을 힐긋 봤지만 귀룡의 치료에만 전념했다. 죽은피를 토해내도록 했으니까 이제 흩어진 장기들을 제자리로 잡아줘야 한다.
“인간하고 타이그란에다 움바바족이 뭉친 것도 요상한데, 아, 그래선가? 그래서 저렇게 아무렇게나 지껄이나? 내가 여기서 다 듣고 있는데도?”
제가 말해놓고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우리엘.
“에이, 아무튼 내가 일진이 사나운 날인 거야.”
아우리엘은 흠칫하며 바로 강흑성을 향해 미소 짓는다.
“아니, 용사를 만나서 그렇다는 게 아니고 말이지······”
강흑성은 무시하듯 일행을 돌아보고 말한다.
“거북을 뒤집어야겠습니다.”
박현과 무슬란이 바로 달려왔다. 그 뒤로 오는 그렉과 박준에겐 눈길도 안주고 강흑성은 둘에게 지시했다. 팔을 걷은 둘은 거북을 뒤집었다.
“으이쌰!”“우와아!”
움바바족 둘이 힘을 쓰자 거대 거북은 배를 내놓고 뒤집어졌다. 불안과 두려움에 큰 눈을 끔벅거리는 놈에게 아우리엘은 연신 안심하라 한다.
“걱정 마 귀룡, 널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야. 그래, 배 가르는 일 같은 건 없을 거야. 피토하게 하려고 네 머릴 친 것 같이 조금 아프기만 할 거야.”
박준이 그 꼴을 보고 혀를 찼다.
“하이고, 저게 달래는 거냐? 겁주는 거냐?”
그렉이 그 말을 받는다.
“거북이 놈이 더 웃기잖습니까? 우릴 죽이겠다고 뎀벼들 땐 언제고 저런 꼴이냐고요? 저 자식 지가 애완동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아우리엘이 버럭 화를 냈다.
“저리 꺼져!”
박준과 그렉은 동시에 t-rex와 빔라이플을 겨눴다.
“이쉑이 정신 못 차렸네!”“정말 꺼지고 싶냐!”
아우리엘이 허리에 찬 칼을 뽑으려는 순간 강흑성이 소리쳤다.
“조용!”
삽시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렉과 박준은 숨 쉬는 소리도 내지 않았고, 아우리엘은 칼자루를 잡은 채 얼어붙었다. 귀룡의 울음소리만 퍼졌다.
“네 속을 바로잡아주려는 것뿐이다.”
뒤집힌 귀룡에게 그 말을 전한 강흑성은 시작했다. 무원의경상의 도리대로 거북의 배를 누르고 뒤틀어 치며 흐트러진 내부를 바로잡았다. 귀룡은 울음을 토했지만 참아냈고, 끝을 낸 강흑성은 다시 뒤집으라 했다.무슬란과 박현이 용쓰는 소릴 내며 거대 거북을 다시 뒤집었다. 쿵 하는 진동으로 들썩인 귀룡은 다시 죽은피를 토해냈다. 하지만 시원해진 배와 고통이 사라진 몸 상태에 좋아하며 울음소릴 냈다. 기뻐하는 소리다.
“헤, 이 거북이 놈 정말 좋아 하는데?”“그러게? 고개 조아리는 꼴이 신기하네?”
무슬란과 박현의 놀란 미소 속에 귀룡은 강흑성 앞에 납작 엎드려 고갤 내밀었다. 마치 사람이 하듯 감사인사를 한다. 머릴 흔드는 게 그렇다.
“귀룡아!”
아우리엘이 기쁜 목소리로 귀룡의 머릴 안았다. 귀룡은 혀를 내밀어 아우리엘의 얼굴을 핥았다.
“아 드러.”“음.”
박준과 그렉이 표정을 구기거나 말거나 아우리엘과 귀룡은 부비부비했다.그 속에서 강흑성은 수림을 돌아봤다.숨어서 파란 눈만 보이고 있는 놈, 칸타란 이름을 가진 푸른 바람의 정령이다.두려워 저러고 있다.
‘나를, 내 속의 마기 때문에.’
사슴의 두려움 원인이 자신이라는 걸 알기에 강흑성은 내버려 뒀다. 아우리엘은 눈치를 보면서도 칸타가 염려스러워 떨어져 있도록 했다. 놀라운 건 블랙베어들처럼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는 저 사슴의 마음이다.
‘하프엘프와 영적으로 묶여 있어.’
아우리엘, 아버지가 인간이라는 하프엘프, 이상하게 말하지만 사슴과 블랙베어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겠다고 한 존재, 기이한 인연이다. 이제 이 인연을 활용해야 한다. 죽이지 않은 이유다. 갈 길은 아직 멀다.
“우릴 도와줘야겠다.”
강흑성이 입을 열자 아우리엘은 바로 고갤 돌렸다. 드디어 기다리던 말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죽이지 않고 살려주는 대가, 그 요구가 나온다.
“길잡이를 해줘야겠다.”
* * *
“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를 심정으로 명일해는 호수를 바라봤다.이제 아침이 밝기 시작한 시각, 푸르스름한 빛이 거대수들 사이로 내리친다.그 아래 펼쳐진 광경은 엄청나다.샤크 세대가 호수에 빠져 잿더미가 됐다.
‘벌컨을 사용했어······!’
호수주변 수림은 그 흔적이 여실하다, 평지처럼 초토화됐다. 부문주 크리스티앙은 이곳에 있는 적들을 공격했다. 그렇지만 저 꼴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냐······?’
심중의 충격과 분노를 삭이며 명일해는 샤크를 다시 응시했다.조직의 돈을 긁어모아 마련한 건쉽이다.저렇게 쓰레기로 변했다. 저 꼴이 남도의 제왕의 현실인 거다.그러니 돌아갈 수 없다. 남은 것은 이름뿐이다.
‘여기서, 대륙에서 목표를 이뤄야 이름을 다시 세운다······!’
부드득 소리나게 이를 악문 명일해는 곁으로 다가오는 엘킨의 긴장한 눈을 봤다.
“문주, 부문주의 검을 찾았습니다.”
엘킨이 주워온 검을 받아든 명일해는 미간을 뒤틀었다. 분명히 부문주 크리스타앙의 검이다. 그가 이곳에서 싸우다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모이앙을 비롯해 쉰여섯의 형제들 모두 이곳에서 전사한 게 분명합니다.”
침통한 엘킨의 목소리를 귀에 걸고 명일해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바로 감췄다. 혁리추가 다가와서다. 느릿하게 목소릴 낸다.
“험악한 싸움이 있었던 게 분명하오이다. 여기서 벌어진 일의 진상이 어떠한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괴이한 결과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소이다.”
혁리추가 가리키는 곳으로 명일해는 시선을 던졌다.
“흑강석으로 추정되오, 그런데 암석의 형태가 아니라 보다시피 흙이오. 호수 좌측 편은 흑강석의 형태 그대로인데, 우측 편은 흙이라 이상하오. 이건 마치 뭐라고 할까, 엄청나게 강력한 힘에 의해 분쇄된 것 같은······”
말하고도 스스로 이상하여 혁리추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곳을 벗어난 자들을 추적할 수 있겠소이까?”
명일해의 눈동자에 큰 분노를 읽은 혁리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저놈들이 종적을 찾은 듯하오.”
이종견들이 짖어대는 소리가 폐허가 된 호수의 수면을 흔들었다.
* * *
암굴, 전복이 마련해 뒀다는 안가는 암석산 안쪽의 굴이었다. 춘천에서 화천으로 이어지는 도로, 오래전에 사라지고 흔적만이 남은 그 경로에서 조금 벗어난 위치다. 암석산 굴 앞에까지 차가 들어간 건 다행이다.
“와, 여기예요?”
감탄인지 실망인지 모를 준후의 반응에 전복은 너스레로 대응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린데 말야? 어쩌겠냐? 매화검문 놈들 추적도 피해야 하고 여기저기 위험지역도 피해야지.”
여기저기 위험지역, 사방이 다 그렇다. 거대수 수림이 뒤덮은 강원도 지역 전체가 데빌그라운드와 다를 바 없는 거다. 그래서 준후는 걱정이다.
“여긴 안전한 건가요?”“그럼? 아무 걱정마라, 아저씨가 다 조치해 뒀으니까.”
그래도 준후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지만 최창수는 믿었다. 자신이 아는 전복이란 인물은 철저한 자다. 여길 안가로 삼았으면 말 그대로 안가다.
‘접근하는 짐승들이 없도록 괴수 피 같은 걸 뿌려놨겠지.’
냄새 나는 괴수의 부산물들이면 다른 짐승들은 접근 안한다, 그러나 인간은 예외다. 그런 준비도 물론 해놨다. 최창수 자신이 지하실에 한 것처럼.
“우린 이제 어떻게 하나요? 대전으로 가야하지 않을까요?”
준후의 목소리에 전복과 최창수는 순간 서로를 응시했다. 어린 준후가 저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게 대견한 동시에, 정말 가야할까의 생각이다.
‘대전.’‘현재로선 가장 안전한 곳.’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움직이지 않던 두 사람 중 전복이 먼저 움직였다.
“우선 들어가서 배 좀 채우고 피곤도 풀자. 대전 이야기는 그다음에 하고.”
최창수는 움직임으로 대답했다. 동굴 앞에 준비돼 있는 나뭇가지들로 차를 덮었다. 준후도 거들었고 전복은 전투식량을 꺼내 동굴로 들어갔다.
* * *
귀룡이 배를 끌고 간다는 현실을 일행은 황당해 하면서도 받아들였다. 어린애 팔뚝만한 굵기로 꼬아낸 덩굴줄을 머리에 끼고 부드럽게 나아간다. 물살을 거스르는 그 움직임을 따라 배는 운하의 중심을 갈라나갔다.
“이여, 이거 죽이는데.”“그러게, 거북이 놈이 힘이 대단하네.”
무슬란과 박현의 웃음소리 뒤에서 그렉과 박준은 못마땅한 시선을 뒤로 던졌다. 아우리엘이 사슴 칸타와 같이 배에 올라타 있기 때문이다.
“저 자식 이름이 정말로 아우리엘일까?”“그렇다잖아요? 설마 이름을 속였겠어요? 뭐 생기는 것도 없는데요?”“생기는 건 없어도 저놈 생긴 게 요상하잖아.”“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반응을 했던 그렉은 이내 혀를 찼다.
“쯧, 편협한 가치관으로 말장난하시네요.”“뭐새꺄?”
박준이 그렉의 멱살을 잡는 순간 아우리엘이 강흑성에게 물었다.
“운하의 끝까지 가면 뭐가 있는데?”
그렉과 박준은 시선을 돌렸고, 그 순간 사슴 칸타의 방귀를 맞았다.
“우웩!”“아 쓰바!”
둘이 벌떡 일어나는 순간에도 아우리엘은 강흑성에게 거듭 물었다.
“뭐 찾으러 가는 거지? 어디 가는데? 찾는 게 뭔데?”
기묘한 눈길로 아우리엘을 바라보며 강흑성은 칸타의 숨죽인 울음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