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86. 우물.
86. 우물.
무동력선, 금교어족의 배는 밤에 이동하는 것이 역시 무리다. 무엇보다 휴식도 취해야 한다. 몸이 버텨줘야 목표를 추적하고 원하는 걸 취함이다. 때문에 쉼 없이 움직이고 싶지만 강가 가까이로 가 닻을 내렸다.
“수림에서 괴수들이 출몰할지 모르니까 경계를 늦추지 마라.”
돌아가며 불침번을 설 수하들, 황금대도객들에게 지시를 내린 혁리추는 선미로 갔다. 명일해의 앞에 마주 앉아 술병을 내밀었다. 금교어족 마을에서 취한 것, 그들이 자랑하는 황금주다. 황금빛의 호로병에 담겼다.
“한반도에선 이술을 접한 적이 없을 거외다, 그렇지 않소이까?”
기이하게도 황금빛이 나는 조롱박 술병에서 역시 황금빛 술이 흘러나온다. 잔을 내밀고 그걸 받아든 명일해는 기묘한 눈으로 향기를 맡았다.
“이것이 말로만 들었던 황금주구려. 그렇소, 맛을 본 적이 없소.”
그윽하면서도 독주의 향기를 풍기는 황금주에 명일해는 침을 삼켰다. 외모는 징그럽게 생겼지만 술만큼은 천하제일이라는 금교어족의 술이다.
‘언제 이걸 챙겼나,’
금교어족마을에서 자신은 이런걸 보지 못했다. 아니 신경도 쓰지 않았다. 확실히 혁리추 이자는 대륙현지인, 손을 잡은 건 잘한 결정이다. 더불어 이 순간 기묘한 느낌은 황금대호방의 이름과 유사한 술 이름이다.
“자 한번 경험해 보시오.”
혁리추의 미소를 받으며 명일해는 잔을 넘겼다. 화끈한 목구멍의 자극 뒤로 일어나는 형용 못할 향과 맛에 전율했다. 수림에서 나오는 수많은 약초와 강 속의 재료들로 만든 술, 금교어족의 요술이라고들 말한다.
“하, 정말로 요술 같은 맛을 가진 술이외다.”“자자, 더 드시오.”
혁리추는 잔을 다시 채워줬고 명일해는 거푸 석 잔을 마셨다.달이 휘영청 뜬 밤에 강 위의 배에 올라 이렇게 술잔을 나누는 정취가 새삼스럽다.모든 걸 잃고 버리고 걸음 하는 현실만 아니라면 더없이 좋은 밤이다.
“색다른 정취를 술과 함께 마시게 되오이다.”
명일해의 미소를 받은 혁리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아니겠소, 이런 밤을 맞고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소이다.”
이런 밤, 복잡한 생각과 감정들이 깃든 진심의 표현이다. 이심전심 동병상련, 명일해와 혁리추는 서로 술잔을 채워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둘을 엘킨이 간간히 돌아다보던 어느 순간, 강가에 누군가 나타났다.
“문주!”
엘킨이 가장 먼저 반응하며 일어섰고 황금대도객 육인은 대도를 쥐고 강가로 뛰어내렸으며, 혁리추와 명일해는 일어서서 눈에 힘을 줬다. 접근하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존재, 검은 깃털로 된 피풍의를 입은 자다.황금대도객 육인이 바람처럼 포위하는 움직임 속에 불청객이 말한다.
“잡고 싶어 하는 놈들이 있는 걸로 아는데.”
웃는 얼굴로 목소리를 낸 자는 젊다.하얀 얼굴에 파란 눈동자를 가졌다.사이한 기운을 전신으로 풍기는 자다.황금대도객 육인의 살벌한 살기 속에 있건만 웃고 있다.명일해와 혁리추는 뚫어지게 사내를 응시했다.
“내가 도와주면 그놈을 잡을 수 있을 거야.”
이어 나온 불청객의 말, 무슨 의미인지를 알 것 같지만 이순간 필요한건 죽음이다. 때문에 힘이 응축한 눈으로 사내를 보던 혁리추가 명령했다.
“죽여라!”
황금대도객들은 일시에 공격했다. 대도를 벼락처럼 휘둘렀다.검은 깃털의 사내는 찰나에 분시될 운명, 그런데 대도가 튕기며 불꽃이 피어난다.분명 검은 깃털 피풍의를 강타했건만 그게 장갑슈트처럼 막아냈다.
‘저!’‘뭐!’
혁리추와 명일해가 놀라는 순간 검은 깃털 피풍의 사내는 킥킥거리며 웃는다, 동시에 뭔가 웅얼거린다. 정확히 들리지 않는 소리, 주문 같다.
“주술사다!”
혁리추가 깨닫고 외쳤다. 변화가 일어나서다. 황금대도객들의 발밑에서 나무뿌리들이 치솟았다. 문어가 물고기를 휘감듯이 도객들을 휘감았다.황금대도객들이 필사적으로 대도를 휘둘러 잘라내는 사이 다른 변화가 닥쳐왔다.수림에서 괴수들이 달려왔다. 그런데 여태 보던 괴수들이 아니다.갖가지 놈들이 뭉쳐진 것 같은 괴수, 흉악하고 끔찍한 괴수들이다.
“엘킨!”
명일해가 외치는 것과 동시에 엘킨이 움직였다.배낭에서 꺼내든 복합광탄발사기를 발사했다.콰콰콰콰, 하는 연속된 발사음이 들림과 동시에 강가에서 폭발이 치솟았다.땅이 뒤집힌다. 그러나 목표는 깃털 같다.검은 깃털 피풍의 사내가 귀신처럼 폭발범위를 피하는 걸 보며 명일해와 혁리추는 동시에 서로를 봤다. 각자의 병기를 움켜잡고 갑판에서 치솟았다. 엘킨의 복합광탄공격을 피해 물러난 적을 향해 바람처럼 쇄도했다.
“쯧.”
검은 깃털 피풍의 사내는 혀를 찼다. 동시에 두 손을 내밀었다.은빛이 어린 그 손을 따라서 땅이 일어섰다.명일해의 검과 혁리추의 대도가 그 벽을 갈랐다.그런데 갈라버린 흙벽이 병기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 무슨!’‘저놈이!’
당황하는 둘의 귀에 검은 깃털 피풍의 사내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난 그렇게 할 수 있지. 물론 잠깐에 불과해. 그 잠깐이 모가지를 따는 데는 충분하다는 걸 알거다. 그래, 너희와 같은 고수들은 조금 다를 테지.”
전 내력을 다한 명일해와 혁리추는 병기를 뽑아내고 물러섰다.
“시험해볼 텐가?”
다시 한 번 해보겠냐는 말, 명일해와 혁리추는 눈썹을 부들거렸다. 상대의 수를 알기에 당하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그럴만한 능력을 가졌다고 자부하지만, 눈앞의 존재는 주술사다, 만나지 않는 게 좋은 존재다.
“내가 말이지······”
검은 깃털 피풍의의 주술사는 하얀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품고 다시 말했다.
“여태 쌓아온 힘의 상당부분을 잃었어. 그런 일이 생길 줄 몰랐는데 생기고 말았지. 계속 에너지를 축적해서 도약을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놈을 만나서 틀어졌지 뭐겠어? 그놈이 누구냐고? 너희가 쫓는 그놈이야.”
명일해와 혁리추는 꿈틀거리던 눈을 경직하고 서로를 돌아봤다.
* * *
하늘을 담은 우물, 저곳의 이름이 그렇다고 한다.거대한 연못이라고 해야 할지 작은 호수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런 곳이다.하늘을 담은 우물이란 말처럼 밤하늘의 달이 떠 있다.수면은 고요하고 물빛은 검다.
“저 안에 있는 쇠솥만 꺼내주면 된다.”
철무진의 눈에 든 간절한 기대를 강흑성은 분명히 봤다. 우물의 깊이도 깊이지만 와류가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곳이다. 잠수정도 소용없다는 거다. 그래서 기대를 거는 게 귀룡이다. 괴수라면 가능할까해서다.
“깊이가 얼마나 되는 거야?”
우물가에서, 아니 거대한 연못인지 작은 호수인지 그 곁에서 아우리엘이 물었다. 바로 곁의 귀룡머리를 쓰다듬으면서다. 놈은 혀를 날름거린다.
“정확히 모른다.”
철무진의 난감해 하는 대답, 대답이 아니지만 대답이 됐다. 아무도 모르는 거다.푸르르르, 푸른 바람의 정령 사슴 칸타가 소리를 냈다.마치 이런 일에 휘말리지 마, 하고 말하는 것 같은 소리다.아우리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 찝찝한데.”
인상 쓰는 아우리엘에게 철무진이 다시 말하는 동안 강흑성은 사슴 칸타를 새삼 바라봤다. 벽뢰, 푸른 전류를 토해내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 힘을 강흑성 자신이 받아 들였다. 그로인해 벽뢰수를 발출할 수 있었다.
‘저 사슴은 어떻게 벽뢰의 힘을 품게 된 것일까?’
푸른 바람의 정령이란 이름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벽뢰의 힘으로 푸른 바람처럼 달리는 거다. 다른 짐승들을 기절시키는 정도의 힘은 있는 걸로 아다. 그렇지만 강흑성 자신에게 토해내던 그런 힘은 아니다.
‘본래도 특별한 짐승이지만 저 놈은 더 특별한 개체.’
칸타를 보며 생각하던 강흑성은 아우리엘의 새된 음성을 들었다.
“에에? 쇠솥의 크기도 모른다고?”
철무진은 난감함을 숨긴 얼굴로 흠흠거렸고, 곁에서 수작을 지켜보던 박준이 역시 나선다.
“꺼내올 물건이 쇠솥이라는 것만 알지 크기도 무게도 모른다는 거 아닙니까?”“아 뭐, 그렇소.”“그럼 귀룡이 들어간다고 해도 못가지고 나올 수도 있는 건데요?”“그렇진 않을 거요. 만일 그렇다면 쇠줄을 연결해서 우리가 밖에서 끌어올리도록 하겠소, 장비는 다 준비돼 있으니까 들어가기면 하면 되는 거요.”
뒤를 돌아본 박준은 접 입맛을 다셨다.
“장비는 뭐, 제대로 준비하긴 했는데, 귀룡이 아무리 괴수지만 이 우물의 크기가······”
마뜩찮은 표정이던 박준은 아우리엘에게 결정을 넘겼다.
“너 알아서 해라.”
나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박준은 물러났다. 그런 박준을 아우리엘은 째려봤다. 위해주는 척 하나마나한 소리만 지껄이고 물러나는 거여서다.심통난 것 같은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던 아우리엘은 강흑성을 마지막으로 보고 결정했다.
“한다, 하는데, 귀룡이 위험해지면 바로 그만 둘 거야.”
철무진은 반색한 표정을 만들고 바로 지시를 내렸다. 일행의 뒤로 준비해온 장비들이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초대형 장갑차량인 매머드에 연결된 케이블을 풀기 시작했다. 물론 매머드 주변엔 무장부하들이 깔렸다.
“야야 무리하지 말고 잘해라.”
박준이 아우리엘에게 놀리듯이 말하고 아우리엘이 눈을 부라릴 때 그렉이 입을 열었다. 강흑성의 곁으로 다가와서 강흑성만 들을 수 있게다.
“천철정(天鐵鼎)이다.”
무슨 소린가 돌아보는 강흑성에게 그렉은 우물로 들어가는 귀룡을 보며 뒷말을 냈다.
“이들은 철극문의 후예야, 철무진 저자가 찾으려는 건 철극문의 보물이다. 천철정, 하늘의 쇠로 만든 솥이라는 건데, 철극문의 비전이 담겨 있지.”
강흑성은 기억해 냈다. 자신의 기억이 아닌 아버지의 기억이다.
‘천절정.’
철극문의 보물이 맞다. 그 안에 비전이 있는 것도 맞다.정확히 뭐가 있는지는 모른다.중원세상으로부터 이어져온, 철극문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군. 그걸 찾으려는 거군.’
철금련이라는 이름으로 이곳 신남경을 장악한 사내, 철무진의 심중에 든 것을 이제 알겠다. 선대의 비전을 찾아내 철극문을 다시 열려는 것이다.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고 철극문의 이름을 빛내려는 철혈의 의지다.
“철극문.”
나지막하게 그 이름을 중얼거린 강흑성은 철무진이 돌아보는 시선을 받았다.들었음이다. 그래서 저런 눈이다.강흑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냈다는 자각이 만들어낸, 이러할 것을 예감하기도 했지만 꿈틀거린다.
꾸워어.
귀룡이 다녀오겠다는 듯이 울음을 토하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 행동과 울음에 철무진은 고갤 돌렸고 강흑성도 우물을 바라봤다. 아우리엘과 칸타가 염려하며 바라보는 우물, 암흑의 하늘을 품어선지 새카맣다.
* * *
“거길 봤지?”
검은 깃털 피풍의 주술사, 하얀 얼굴에 떠오른 사이한 미소를 명일해와 혁리추는 응시했다. 거길 봤냐는 물음, 그놈들이 다녀간 수림의 호수다.
“흑강석 산을 봤을 거다. 맞아, 호수 양 옆에 있지. 그런데 우측 편은 흙으로 변했어. 원래 흙이었냐고? 아니지. 그건 염연히 흑강석이었어.”
강물에 출렁이는 달을 향해 눈길을 돌린 채 주술사는 계속 말했다.
“산이라고 하기엔 작은, 그렇다고 둔덕이라고 하기엔 커다란, 그 흑강석산의 덕을 나는 보고 있었지. 수림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에너지를 그 산의 에너지와 결합해서 새로운 창조물들을 만들어 낸 거야. 그래, 그곳은 아주 특별한 장소였지. 다시 찾기도 힘든 곳, 그곳을 그놈이 망쳤어.”
명일해와 혁리추는 새로운 창조물이란 말에서 욕지기를 느꼈다.이렇게 모닥불을 피워놓고 마주앉은 존재, 주술사가 불러냈던 괴수들이 그것이다.여러 괴수들을 뭉개서 합쳐놓은 것 같은 괴수, 추악하고 흉하다.
“그놈에게는 엄청난 에너지가 있다.”
은빛으로 번득이는 안광을 내며 주술사는 계속 말했다.
“그놈의 속에 형용조차 하지 못할 에너지가 있어. 바로 그 에너지가 흑강석 산을 흙을 바꿔버린 거야. 산의 에너지를, 내가 의지를 불어넣은 그 산을 흩어버린 거지. 그게 어떤 건지······ 제대로 알고 쫓는 거냐?”
명일해와 혁리추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주술사가 한 말을 다시 되짚었다. 자신들이 추적하는 샹그릴라 일당의 젊은 무인, 그가 흑강석 산을 흙으로 만들었다는 거다, 결론은 주술사의 공격을 파훼했다는 이야기다.뒤늦게 일어나는 자각으로 명일해아 혁리추는 뜨거운 숨을 이사이에 물었다.
“그래도 잘 모를 거다. 그래서 내가 필요한 거야.”
사이한 미소를 피워내며 주술사는 잔을 들었다. 금교어족의 황금주가 든 잔이다. 그걸 단숨에 넘기고 피풍의로 입을 닦은 뒤 나직이 말한다.
“나는 그놈의 속의 갖고 너희는 너희가 원하는 걸 갖는 거다.”
주술사는 잔을 내밀었다. 그 잔을 응시한 명일해가 술병을 들어 술을 채웠다. 혁리추의 잔에 채웠고 자신의 잔에도 채웠다. 그 잔을 들었다.
“서로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주술사와 혁리추와 명일해는 동시에 잔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