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87. 철극문의 보물.
87. 철극문의 보물.
자정이 넘어갔다.하늘엔 별들이 쏟아질 것처럼 떠 있고 사방은 괴괴하다.들리는 거라곤 매머드차체의 앞에 달린 케이블이 풀리는 소리뿐이다.바이탄합금케이블, 10톤의 무게도 견디는 저 쇠줄이 계속 풀린다.
“얼마나 내려간 거야? 이 정도면 거의 백미터는 되지 않겠어?”
박준이 가득 좁힌 미간으로 케이블을 응시한다. 아무리 괴수거북이라고 해도 이정도 깊이까지 괜찮겠느냔 걱정이다. 게다가 놀라운 건 우물의 깊이다. 전당강과 운하의 교차점인 신남경 배후에 왜 이런 게 있을까.
“괴이한 일이야. 대륙에 호수가 많다지만 이건 호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못도 아닌 것이······ 저렇게 둘레를 암석으로 축석해 놓은 걸 보면 우물이라고 하는 게 맞긴 한데, 우물이 이렇게 깊다는 게 말이 되냐고?”
거듭 나온 박준의 의문과 걱정은 일행 모두의 것이다, 특히 아우리엘은 노심초사 서성거리고 있다. 사슴 칸타는 큰 뿔을 바닥에 긁어대는 중이다.
“아 이거 무지 긴장되는데.”“그러게.”
박현과 무슬란의 긴장은 우물 앞 모든 이들에게 전염병처럼 퍼져 있다.특히 긴장하고 있기는 철금련 쪽이다.문주 철무진은 뚫어지게 우물만 바라보고 있다.수없이 시도한 일, 오늘은 성공할 가능성이 있음이다.철무진이 침을 삼키다 강흑성을 힐긋 돌아보는 그때 케이블이 출렁였다.
“신호가 왔다! 당겨라!”
철무진은 바로 반응하며 소리쳤고, 매머드는 케이블을 맹렬하게 감기 시작했다. 동시에 뒤로 후진했다. 육중한 그 움직임은 어둠을 흔들었다.강흑성 일행과 철금련문도들이 눈동자를 뜨겁데 달군지 얼마일까.우물 위로 검은 형체가 솟구쳤다.수면을 뚫고 튀어나온 것은 케이블에 의해 끌려가 바닥에 떨어졌다.종소리 같은 울림을 퍼트리는 사람만한 솥이다.
“나왔다!”“천철정이다!”
철금련 무인들의 입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철무진은 웃었다. 커다란 대소를 터트리면서 쇠솥을 향해 다가가 떨리는 손을 댔다.
“드디어······!”
감격에 겨워하며 철무진은 쇠솥을 어루만졌다. 얼마나 오랜 세월 물속에 있었는지 껍질이 벗겨지듯이 표면이 벗겨진다. 그런데 그렇게 드러나는 진체는 아무런 손상이 없다. 손톱만한 녹자국도 없이 완벽한 외형이다.
“허, 저럴 수 있는 거야?”
박준의 황당함 뒤로 박현과 무슬란과 그렉도 감탄했다. 철무진의 손길을 따라 제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만한 솥, 천철정이란 철극문의 보물이 놀랍기만 하다. 삼백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그 세월을 건너 뛴 것 같아서다.
“찾던 것이 그것인가?”
강흑성은 물음을 던졌다. 뒤에선 우물 밖으로 나온 귀룡을 아우리엘이 끌어안고 있지만, 박준이 혀를 차고 있는 가운데 철무진과 눈을 맞췄다.
“맞다.”
짧고 명료하게 대답을 낸 철무진은 천철정을 굴렸다. 바닥 부분의 때도 벗겨내려고다. 그런데 솥 안에서 구르릉 하는 울림이 들리며 뭔가 떨어져 나왔다. 기다란 물건, 자세히 보니 검의 형태다. 역시 이끼가 덮였다.
“이것이······?”
미간에 힘을 주며 물건을 잡은 철무진은 단번에 때를 벗겨냈다. 그렇게 검으로서의 본모습을 드러낸 철검, 육중한 무게에 길이도 긴 장검이다.특이한 것은 검갑에 음각된 글귀다. 그것을 철무진은 느릿하게 읽었다.
“반인반수 연자지검······?”
반은 사람이고 반은 짐승인 자에게 인연이 닿는 검이란 소리.철무진은 미간을 가득 좁혔다.자신이 찾아낸 옛 기록에 의하면 천철정에는 철극문의 절예인 철마류가 비장돼 있다.삼백년 전 프락시안의 공격으로 문파가 무너질 때 천철정에 기록해 저 우물에 넘었다는 비사다.그것을 찾은 거다, 삼백년 만에 철극문의 진체를 찾은 것이다.세상에 퍼져나간 철극문의 자취가 아닌 진정한 힘을 되찾은 거다.그런데 이런 검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더군다나 검갑에 새겨진 이 글귀는 뭔가?
‘응?’
철극진은 뒤늦게 강흑성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자신이 잡고 있는 철검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그건 강흑성만이 아니다.
“저 검, 흑성이가 주인이라는 소리잖아?”
박준이 그렉을 돌아보며 맞지? 하는 얼굴을 했다.그렉은 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무슬란과 박현도 비슷하다, 모두가 검을 바라보고 있다.
‘이자들······’
기묘함을 삼키며 철무진은 물음을 던졌다.
“이 검의 주인이라 했소?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줄 수 있겠소?”
박준이 바로 대답하려다가 멈칫하며 강흑성을 돌아봤다. 고정된 것처럼 철검만 응시하고 있는 강흑성을 바라보다 침을 삼키더니 대답을 낸다.
“그 검에 새겨져 있는 말대로라면 검 주인은 이 친구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철무진의 눈.
“반인반수, 이 친구 하프타이그란 이거든.”
철무진은 눈동자를 경직했다. 숨 쉬는 것도 그랬다.
‘하프타이그란이라고?’
강흑성을 바라봤다. 지금도 철무진 자신이 잡고 있는 검만을 바라본다. 저자가 하프타이그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검에 새겨진 말대로 주인이다.그런데 정말 그런 거라고?삼백년 만에 찾은 천철정에 그런 게 있다고?
“검 좀 봅시다.”
강흑성이 손을 내밀었다.너무나 자연스러운 그 요구에 철무진은 검을 건네줬다.그런데 강흑성이 검을 잡은 순간, 철검이 포효했다.그것을 철무진은 분명히 들었다. 찰나에 사라졌지만 영혼으로 그 울음을 들었다.
‘무슨!’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한 철무진, 그 손으로부터 철검을 넘겨받은 강흑성은 패천마혈의 몸부림을 느꼈다. 더할 수 없는 분노와 파멸의 욕구로 진저리치고 있다. 철검을 적으로 느끼는 거다. 그런데 한순간에 사라졌다.죽어버린 것 같은 패천마혈을 느끼며 강흑성은 검을 뽑았다.스스릉 하는 울음으로 검신이 드러났다.보통 검의 배는 될 두께의 검신에 흑청빛이 어려 있다.면도날 같은 날에선 충직하고 우직한 신뢰감이 느껴진다.
“허, 저 날 봐라, 저게 수백 년 동안 우물 속에 있던 검이냐?”
박준과 일행의 감탄 속으로 아우리엘이 끼어들었다.
“저게 누구 건데?”“으이그, 너는 거북이랑 사슴이랑만 놀아라.”“이 더러운 인간 놈이 아까부터 정말!”“뭐래! 이한심한 하프엘프쉐이가!”
그렉이 아닌 아우리엘과 박준이 멱살잡이를 하는 사이 강흑성은 검을 검갑에 넣었다. 철무진에게 돌려줬다. 줄 때처럼 자신도 모르게 받은 철무진은 눈가를 꿈틀거렸다. 그러다 검을 강흑성에게 다시 내밀었다.
“그대의 검이다.”
강흑성은 철무진을 말없이 응시했고 철무진은 미소 지었다.
“확실해.”
* * *
“자자, 오늘 밤은 볶음밥이다.”
전투식량을 데운 용기를 전복은 준후에게 내밀었다. 받아든 준후는 캄캄한 주변을 돌아보며 새삼 긴장과 두려움을 삼켰다. 이렇게 밤에만 이동하는 게 힘들지만 자신으로 인한 결정이었다. 대전으로 가자는 결정.
“연료는 충분한 건가?”
최창수는 수저를 들다 말고 전복에게 확인했다.전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새삼 한심한 생각이 든다.이렇게 야반도주하는 꼴로 전락해서다.마음 같아서는 자치대와 힘을 합쳐 싸우고 싶지만, 부질없는 짓이다.대륙에서, 그곳의 전쟁에서 다 겪은 일이다.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건 바보다.이 길이 옳다. 최창수와 함께 준후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는 거다.이 세상 어디가 안전할까마는, 그래도 더 나은 곳을 찾는 거다.
“그 형이 자주 생각나요.”
볶음밥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하는 준후를 최창수와 전복은 바라봤다.
“샹그릴라에서 왔던 형이요, 이름이 강흑성이었잖아요? 잘 있을까요?”
최창수와 전복은 서로를 응시했다. 그리고 전복이 말했다.
“잘 있을 거다. 잘 있게 생긴 놈이었잖아? 그렇지?”
준후는 웃었고 전복은 그런 준후의 옆구리를 찌르며 같이 웃었다. 그 곁에서 최창수는 별을 봤다. 저 별을 박준도 보고 있을지, 강흑성이란 그 청년도 보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기를 바라지만 힘든 세상이다.
‘다시 볼 수 있기를.’
마음속의 기원을 밥과 함께 삼킨 최창수는 준후와 전복과 같이 밤을 보냈다. 부서진 도로변에 멈춘 차 밖에선 온갖 짐승들의 울음이 들려왔다.
* * *
“네가 익힌 무공의 뿌리가 철극문이라고?”
박준이 기묘하다는 눈으로, 아니 못 믿겠다는 불신의 눈으로 반응하자 그렉은 화가 났다.
“왜 그런 눈입니까? 내가 그런 거 가지고 거짓말할 것 같습니까? 그럼 뭐가 생기는 데요? 철갑기공의 뿌리가 철극문이라는데 왜 그런 눈입니까?”“야야, 그 어설픈 철갑기공인지 뭔지를 십대문파의 한곳이었던 철극문하고 엮으려고 드냐? 밤새 생각한 게 그거냐? 여기서 한자리 해먹으려고?”“아 정말!”
그렉이 의자를 밀고 일어나자 박준도 똑같이 했다. 그런 두 사람을 철금련의 문도들이 다 돌아봤다. 그들의 식당인 이 장소에선 처음인 일이다.
“아 바보들, 진짜 보는 맛이 있다니까.”
아우리엘이 키득키득 웃으며 둘을 조롱했다. 박현과 무슬란은 모르는 척하며 옆 테이블에서 먹기만 했다. 그것도 구경거리였다. 둘이 먹어대는 양이 엄청나서다. 그렇거나 말거나 박준과 그렉은 계속 드잡이질이다.
“개호랑이새꺄!”“저질 악덕장사꾼!”
멱살잡이를 하는 두 사람을 식당안의 모두가 구경하는 가운데 평온한건 강흑성과 철무진 뿐이다. 찻잔을 앞에 두고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다.
“배를 준비해 뒀다. 필요한 물자들도 실어 놨다.”
가볍게 이야기한 철무진은 강흑성의 눈을 응시하고 물음을 냈다.
“어디로 무엇 하러 가는 건가?”
찻잔을 내려놓은 강흑성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태산, 찾을 것이 있다.”
철무진은 묵직한 눈길을 던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바를 이루길 바란다.”
화답하듯 고개를 끄덕인 강흑성은 일어섰다. 동시에 일어선 철무진과 눈을 맞춘 뒤 돌아섰다. 여전히 드잡이질 중인 일행을 지나치며 말했다.
“갑니다.”
그렉과 박준은 번개처럼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무식하게 먹어대던 박현과 무슬란도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고, 아우리엘은 제일 빨리 움직였다.
* * *
선수에 홀로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존재, 주술사를 바라보며 명일해는 혁리추와 눈길을 교환했다. 맞바람을 맞고 있기에 속삭였다.
“저자는 확실히 도움이 되겠지만 종국엔 위험이 될 거요.”“이를 말이겠소, 때가 되면 기회를 만들어야 하오.”
때, 기회. 둘이 그 말과 눈빛을 주고받는데 선수의 주술가가 갑자기 돌아섰다.
“내 이름을 아직 말하지 않았군.”
하얀 얼굴에 파란 눈동자를 빛내며 주술사는 뒷말을 뱉었다.
“매그넘, 내 이름은 매그넘이다.”
사이한 미소를 바람결에 퍼트린 주술사는 다시 돌아섰다. 그 등을 바라보는 명일해와 혁리추는 소름을 삼켰다. 숨을 옥죄며 퍼지는 소름이다.
* * *
배에 오르던 강흑성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편의 퓨리엔트족과 같이 선 사내 때문이다. 자신을 바라보고 강변에 서 있다. 저자를 안다.
‘하프퓨리엔트.’
정찰대와 싸운 그자다. 퓨리엔트족을 규합해 세력화한 장본인이다. 그가 여기 대륙에 있다는 게 생경하다. 강흑성 자신과 같은 시공간에 있다.
‘나처럼 이 땅을 밟아야 할 이유가 있겠지.’
하프퓨리엔트 사내를 바라보던 강흑성은 시선을 거두고 배에 올랐다. 그 시선을 받던 자, 강변에 선 우란테는 복잡하고 무거운 숨을 흘려냈다.
‘철금련과의 충돌을 마무리하고 이제는 또 어디로 가는가?’
알 수 없다, 짐작도 안 된다, 어젯밤에는 철금련이 비상을 발동한 가운데 무슨 작업인지를 했다. 매머드까지 동원한 일이었다. 통금경계를 뚫고 접근할 수 없었다. 그 일을 끝내고 저렇게 떠나는 거다. 신비한 자다.
“다시 보게 될 거야. 반드시.”
우란테의 중얼거림이 강바람에 밀려가는 것처럼 강흑성의 배는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