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88. 선연과 악연.
88. 선연과 악연.
철검, 묵직한 무게로 존재를 과시하는 오래된 병기를 강흑성은 말없이 응시했다.이검을 잡았을 때의 감각이 생생하다.그것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었다.영혼으로 느껴지는 운명, 인연이었다.이렇게 만날 것이었다.
“반인반수 연자지검.”
검갑에 음각돼 있는 글귀를 작게 중얼거린 강흑성은 패천마혈을 어루만졌다. 허리 뒤로 늘어지게 패용한 마검은 주인의 손길을 느끼는지 웅웅거린다. 그르렁거림 같은 울음, 철검을 잡았을 때의 그 반응은 아니다.
‘적수를 대하는 것 같은.’
격렬하고 무섭던 그 반응은 찰나에 사라졌다. 지금도 철검을 함께 잡고 있지만 그런 반응을 내진 않는다. 그런데 이건 발톱을 숨기는 것 같다. 처음엔 대적을 만나 본능적으로 포효했지만 이내 자신을 숨기는 거다.
‘뭘까······’
패천마혈과 철검, 이 검들이 강흑성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이해 못하겠다. 묘진위와 붉은 엘프 크라폰에 의해 갖게 된 마검 패천마혈이다. 그리고 이젠 철극문의 이 검이다. 강흑성 자신을 주인으로 새겨놨다.이 일들은 우연이 아니다.그렇다는 걸 안다.뭔지 모를 섭리가 작용해서 얽힌 것이다.그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구분하는 자체도 부질없다.무엇이든 주어진다면 그걸 이용해 살아남는 거다.
“아무리 더듬어도 알 수 없는 거겠지.”
패천마혈과 철검을 동시에 잡고 중얼거린 강흑성은 두 개의 검을 패용했다. 패천마혈은 이제까지처럼 허리 뒤로 늘어지게, 철검은 가로질러 멨다. 기울어진 십자가를 등에 진 것 같은 모습, 아우리엘이 힐긋댄다.
“칼을 두 개나 차니까 더 무섭네.”
역시 기회를 노리고 선회하던 악마새처럼 박준이 바로 달라붙는다.
“무섭냐? 그럼 집에 가라, 응?”
긴 머리를 거칠게 흔들며 고개 돌린 아우리엘은 버럭버럭 소리친다.
“더러운 인간놈! 나한테 왜 이러냐! 내가 네 밥이라도 먹었냐!”
박준은 몸을 물리고 황당해 한다.
“뭐래냐? 아 이 자식은 정말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는 하는 거냐?”“왜 몰라! 너 말야! 이 더러운 인간놈아!”“저 봐? 앞뒤 안 맞는 헛소리를 해대잖아?”
둘이 그러고 있는데 그렉은 선수의 강흑성 옆으로 갔다. 한편으론 자신 말고 아우리엘과 저러고 있는 박준이 신기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다.
“거북이는 더 필요 없잖아?”
그렉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린 강흑성은 배 뒤를 봤다. 맞는 말이다, 크리듐에너지 엔진으로 가는 이배에 더 이상 거북의 힘은 필요 없다. 그래서 저렇게 배 뒤를 따라오기만 한다. 아우리엘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아우리엘을 말함이다. 이젠 필요 없어져서라기보다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인 거다. 애초부터 생사를 함께 넘긴 일행이 아니다. 굳이 동행할 이유가 없다. 철금련을 떠나면서 그건 명백해졌다. 이젠 결정해야 할 때다.
“안 갈 겁니다.”
강흑성의 짧은 대답, 그렉은 미간을 좁혔다. 아우리엘을 보는 강흑성의 눈이 다르다고 느껴져서다. 비정하고 냉정한 이 하프타이그란 놈이 하프엘프를 보는 눈에 그러한 것이 있다. 서글픔 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인다.
“가라고 하면 갈 것 같습니까?”
다시 나온 강흑성의 목소리에게 이끌리듯 그렉은 아우리엘을 봤다.박준과 투덕대는 모습, 그렉 자신과 같은 모습이다.진짜로 악의를 가지고 싸우는 게 아니다.저건 서로 다독여 주는 거다. 상처를 덮어주는 거다.
‘그런가.’
아우리엘의 정체성에 대해 안다.하프엘프, 아버지가 인간이다. 그 인간 아버지가 엄마와 아우리엘을 버리고 갔다.둘은 숲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며 적응하며 살아왔다.강흑성의 처지와 유사한 삶을 살아온 거다.강흑성은 아우리엘에게서 그런 동질성을 느낌이다. 무슨 일에 있어서든 철저하게 비정하고 냉혹한 강흑성이지만, 그 자신이 겪고 살아온 세월의 무참함을 알기에 그렇다. 같은 것을 겪은 존재를 용인하는 것이다.그렇기는 박준도 마찬가지다.그렉 자신이 아니라 아우리엘을 상대로 저렇게 계속 도발하고 있다.아우리엘에게 틈을 안주는 거다.지난 기억을 돌아볼 틈, 아프고 고통스럽던 기억에 빠져들지 말고 놀자는 거다.
‘아무튼 기묘하고 대단한 사람이라니까.’
박준에 대해 품고 있던 이면의 감정을 더듬은 그렉은 아우리엘을 다시 응시했다. 저 눈에 든 것을 자신도 읽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던,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은, 인간이 밉지만 인간에게 붙은 마음이다.
‘물론 같은 인간은 아니지만.’
강흑성이란 존재, 박준과 그렉 자신, 박현과 무슬란이란 특별한 존재들에게다. 싸움을 통해 맺어진 기이한 인연이다. 세상은 이렇게 새로운 인연을 계속 얽어준다. 지옥 같은 세상, 그러나 그 속에 이 인연들이 있다.
“좋은 인연이든 나쁜 인연이든.”
중얼거리는 그렉을 강흑성이 돌아봤다. 그렉은 눈을 맞추며 나쁜 인연을 말했다.
“철금련주의 말에 의하면 황금대호방주와 남도의 제왕 문주가 손잡고 우릴 추적한다는 건데, 그놈들 단단히 준비를 하고 쫓아오지 않겠냐?”
말하면서도 그렉은 의구심을 품었다. 그것들의 세력은 와해된 것이나 같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한 세력을 세웠던 자들이다. 그런 존재들이 절치부심 쫓아온다는 건 절대로 무시할 일이 아니다.
“그들은 걱정되지 않습니다.”
강바람에 눈썹을 꿈틀거리며 강흑성은 심중의 것을 말했다.
“걱정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잡니다. 주술사.”
그렉은 호랑이 눈에 힘을 주며 이를 물었다.
‘그렇구나!’
강바람은 조금씩 더 강하게 불고 있었다.
* * *
정체를 숨기고 통행세를 지불한 혁리추는 배를 정박하고 선교를 내렸다. 어디를 봐도 자신들이 탄 목선은 없다. 부서질 것 같은 배들도 다 크리듐엔진을 단 것들이다. 그래서 눈에 띄는 터, 서둘러 식당에 들었다.
“신남경퓨전레스토랑이라, 이름 한번 그럴듯하군.”
비웃음 같은 사이한 미소를 흘려내며 앞서 들어가는 존재, 주술사 매그넘의 검은 깃털 피풍의를 노려보며 혁리추와 명일해는 식당에 들었다. 황금대도객 육인이 옆 테이블에 앉는 걸 보며 자리를 잡고 주문했다.
“분명히 이곳에 있거나 거쳐 갔소.”“맞소, 자취가 있을 거요.”
명일해와 혁리추가 밀담을 나누는 동안 매그넘은 테이블에 물 잔을 엎었다. 물이 번지자 명일해와 혁리추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해서다. 그런데 매그넘이 주문을 외우는 걸 보고 낯빛을 경색했다.주문을 끝낸 매그넘이 파란 눈에 은빛을 번득이며 말했다.
“샹그릴라, 들려라.”
순간 기이한 일이 생겨났다. 테이블에 번진 물에 파문이 일었다. 아니 진동하는 거다. 그 진동이 말소리가 돼서 명일해와 혁리추의 귀를 파고든다. 이 음식점 밖, 어디선가 나누는 이야기다. 샹그릴라를 언급했다.
-샹그릴라 일당들 말이지, 정말로 대단한 자들이잖아?-왜 아니야? 어제 그 일당 중의 젊은 무인이 검 휘두르는 것 봤지? 캐논포를 무용지물로 만들었잖아? 하참, 내가 그런 무용은 처음 봤다니까?-맞아, 진짜 대단한 인물이야, 그러니까 철금련주가 그렇게 대응한 거지. 손님으로 맞았잖아, 평소 같았으면 어림도 없지. 사생결단을 냈을 걸?-철금련주의 성정상 틀림없지.-그런데도 그렇게 한걸 보면 역시 영웅은 영웅인거야.-그럼그럼, 무조건 싸우는 게 능사가 아니란 거지.-그러게, 샹그릴라 일당을 손님으로 대하고 필요한 걸 주면서 철금련도 원하던 걸 찾은 거지. 역시 큰 세력을 이끌어가는 자들은 그릇이 달라.
이어폰을 낀 것처럼 귀에 들어오는 어딘가의 대화를 들으며 명일해와 혁리추는 눈동자를 응축했다. 역시 샹그릴라 일당은 떠난 거다. 이곳 신남경의 주인 철금련과 충돌할 뻔했지만, 서로 상생의 결과를 만들었다.
“식사 후에 필요한 것들을 배에 싣고 서둘러 출발해야겠소.”“그럽시다. 이제 반나절 거리정도니까 부지런히 따라붙읍시다.”
혁리추와 명일해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매그넘은 한쪽을 응시했다.식당 반대편 창문 밖에서 은밀한 눈길을 던지는 자들, 명일해와 혁리추도 봤다.검은색 경갑주차림에 철검을 지닌 자들, 철금련의 무인들이다.
“죽일까?”
사이한 미소로 말한 매그넘은 엉덩이를 들었다. 그 순간 혁리추와 명일해가 제지했다.
“부질없소!”“조용히 갑시다!”
낮고 작지만 강한 음성, 둘의 눈을 응시한 매그넘은 고개를 끄덕이며 엉덩이를 붙였다.
“그렇지,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겠지.”
미소 짓는 매그넘, 이제 보니 정말로 행동하려고 한 것도 아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철금련을 건드려 본래 해야 할 일에 지장을 만들 일이 없다. 그러니 방금 전 행동은 떠본 거다, 아니 희롱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식사나 합시다.”
감정을 억누른 혁리추의 말대로 명일해는 테이블에 차려지는 음식에만 집중했다.
* * *
“그들이라고?”
미간을 뒤틀 듯 좁힌 철무진은 부하가 통합데스크에 띄워주는 영상을 봤다.신남경퓨전레스토랑의 창가에 삼인의 인물이 앉아 있다.사진으로 봐서 알고 있는 인물, 황금대호방주 혁리추는 확실하게 알아보겠다.
‘이자가 남도의 제왕 문주 명일해로군. 그런데 이자는?’
다른 두 사람 중에 한사람을 철무진은 뚫어지게 응시했다.검은 깃털로 만든 피풍의를 두른 젊은 사내다. 얼굴은 하얗고 눈동자는 파랗다.사내의 전신에선 기이한 기운이 느껴진다.음유하고 사이한 기운이다.
‘누구지?’
미간에 내천자를 그린 철무진에게 수하가 묻는다.
“어찌할까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철무진은 답을 냈다.
“본련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손님이다. 신남경을 찾고 거쳐 가는 자들 모두가 마찬가지다. 지켜보되 자극하지 마라, 떠날 때 다시 알려라.”“명을 받듭니다.”
고개를 깊게 숙인 수하가 돌아나가고 예정된 손님이 들어왔다. 한반도에서 온 손님들, 무기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 쓰고 찾아온 이들이다.
“어서들 오십시오.”
환영하는 미소를 만면에 두르고 철무진은 손님들을 맞았다. 퓨리엔트족 사내와 하프퓨리엔트 사내다. 둘 중 하프퓨리엔트 사내가 보스다.
“우란테가 철금련주 뵙겠습니다.”
환한 미소를 마주 내는 자, 우란테를 향해 테이블을 돌아 나온 철무진은 자리를 권했다.
“원로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자 앉으시지요.”
응접용의 원형테이블에 우란테와 아론은 앉았다. 철무진은 곧바로 찻물을 끓였다. 진한 녹빛이 우러나오는 차를 찻잔에 따라 둘에게 내놨다.
“드시죠.”“감사합니다.”
우호적인 미소 속에 우란테와 철무진은 차를 마셨다. 그리곤 이내 본론을 꺼냈다.
“그에 대해서 안다고 하셨습니까?”
철무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본래 이렇게 마주앉을 일이 없었지만 그자 때문에 이렇게 됐다. 강흑성이란 이름을 가진 하프타이그란 사내다.
“압니다.”
우란테는 담담한 얼굴이지만 찻물처럼 뜨거운 숨을 삼켰다. 원래대로라면 무기중간상과 거래하고 끝났을 일이다. 그런데 공급자가 철금련이란 걸 알았다. 이왕이면 원 공급자와 거래하는 게 나중을 위해서도 좋다.
“어떻게 아십니까?”
이어 나온 철무진의 물음에 우란테는 담담한 시선을 맞추고 담담히 이야기했다. 바다건너에서의 일, 정찰대와의 전투, 그 속의 그 사내에 대해서.철무진은 눈을 점점 더 키웠다. 강흑성이란 존재에 대해 더 큰 놀라움을 갖게 됐다. 그런데 그만이 아니다, 마주 앉은 이 사내도 마찬가지다.
‘퓨리엔트족을 규합해서 세력화했다니······’
특별한 능력과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진 사내다. 그렇다는 걸 저 눈을 보면 안다. 지닌바 무공도 굉장한 수준이 분명하다. 과연 어느 계열일까.
“그렇군요.”
놀람을 털어내는 숨으로 철무진은 찻잔을 들었다. 그 모습을 응시하던 우란테가 물었다.
“그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적대하는 관계가 아니기에 묻는 것이고 대답해줄 수 있는 물음이다. 그러나 대답해 줄 수 없다. 운하를 타고 북상한다는 것만 알지 목적지는 모른다. 아니 목적지는 태산이다. 그러나 그곳에 왜 가는지는 모른다.
“모릅니다.”
담담히 대답한 철무진, 고개를 끄덕인 우란테, 둘은 찻잔을 비웠다. 그리고 진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기구입과 조달, 진지하게 논의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