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93화 (94/172)

혹성강호. 93. 붉은 하늘.

93. 붉은 하늘.

철검의 울부짖음에 공명하며 강흑성은 무원도의 극의 속으로 들어갔다.중원강호를 떨어 울린 사천당문의 절학.도가 아닌 검으로 그려내는 무공은 이미 초식을 벗어났다.마음이 가는 대로 검과 하나 될 뿐이다.

‘할(割).’

그레이빛 로봇바디를 벼락처럼 움직여온 살수의 형상을 강흑성은 스쳐지나갔다. 철검이 가른 그 형상이 환영처럼 흩어질 때 두 번째 살수의 흑사검을 피했다. 푸른 뇌전을 품은 왼손 벽뢰수를 가슴에 박아 넣었다.

‘파(破).’

푸른 전류를 산란하며 흩어지는 두 번째 살수 뒤에서 세 번쩨 살수가 흑사검을 내리친다. 그 죽음을 향해 철검을 마주 뻗었다. 검극과 검극이 충돌했다. 철검은 포악한 포효를 터트렸다. 흑사검을 가르고 들어갔다.

‘단(斷).’

검과 살수로봇의 미간을 가른 강흑성은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살수의 검속에 들었다. 나아가던 움직임을 휘돌려 앉으며 철검의 수평을 그었다.검은 벼락이 횡으로 퍼져나갔고, 그 궤적 속에서 살수들은 나뉘었다.

“후우.”

비로소 내쉬는 한모금의 숨.흩어져 떨어지는 블랙블러드 살수들의 최후 속에서 강흑성은 검을 미간 앞에 세웠다.한 흐름으로 적들을 섬멸했다.마검이 아닌 철검으로 이룬 결과다. 때문에 마검은 몸부림치고 있다.

“흑성아!”

그렉의 급박한 외침에 강흑성은 현실로 돌아왔다.아우리엘의 변화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파랗고 붉은 빛을 내는 눈만이 아니라 전신에 그 빛이 어렸다.칼 하나를 잡은 모습, 밖으로 나가고 있다.

“아우리엘!”

강흑성은 불렀다. 하지만 아우리엘은 안개가 흘러가듯 밖으로 나갔다. 급히 따라 나갔더니 진짜로 안개가 가득하다. 서주반점의 주변에 가득한 시선들을 더듬듯이 스멀스멀 흐른다. 이게 무슨 일인지 직감이 든다.

‘주술사.’

그놈이다, 그놈이 왔다.블랙블러드 살수들과 싸우기 전에 이미 그놈의 존재를 느꼈다.살수 다섯 놈이 이동해 간 건 그놈들 때문이다. 아우리엘도 놈을 느낀 거다.어떠하든 아우리엘의 저 변화는 정말 예상 못했다.

“아우리엘!”

다시 소리쳐 부른 강흑성은 걸음을 멈췄다. 꿀렁대며 요사한 기운을 풀어내는 안개 속에 아우리엘이 보인다. 앞을 보고 있다. 역시 그 놈이 있다.검은 깃털로 된 피풍의를 걸친 주술사, 하얀 얼굴과 파란눈이 웃는다.

“기묘한 놈이 또 있구나.”

파란 눈을 섬뜩하게 빛내며 목소릴 낸 주술사 놈은 바로 뒷말을 던졌다.

“지난번엔 서로 이름도 모르고 헤어졌지? 그래, 나는 매그넘이다.”

사이한 미소를 풀어내듯 이름을 말한 주술사, 매그넘은 아우리엘을 거쳐 강흑성을 응시했다.

“하프엘프의 이름이 아우리엘인건 알겠고, 이젠 알려줘도 되지 않나?”

대답은 강흑성이 아닌 아우리엘이 했다.

“저 친구는 강흑성이다.”

꿈틀, 미간으로 반응하며 아우리엘을 응시한 매그넘은 미소 짓는다.

“너구나? 신남경에서 괴수거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 배를 끌고 왔다는 거대거북이, 네가 부린 거로구나? 블랙베어들도 당연히 너일 것이고.”

고갯짓하는 매그넘에게 아우리엘이 되물었다.

“원령을 더 흡수하기를 기다리는 거지?”

매그넘의 얼굴에선 순간 미소가 지워졌다.안개 뒤에 있는 혁리추와 명일해와 수하들 일곱 놈, 지금 그러고 있다.서주반점의 안팎에서 죽어 넘어간 자들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중이다.이 안개는 그래서 펼친 거다.

“뭘 아는 놈이구나?”

강흑성을 경계하는 눈의 매그넘은 아우리엘을 향해 차가운 미소를 던졌다.

“엘프, 숲의 종족, 너희들은 가진 신비한 힘들을 알지, 그러나 비루한 것들이야. 너희는 본래 지닌 힘을 잊고 살아가는 것들이지. 그저 전설로만 그 힘을 동경하는 것들, 붉은 엘프족에는 확실하게 그런 게 있지.”

강흑성은 기억해 냈다.샹그릴라에 마검 패천마혈을 가져 왔던 자 크라폰이 붉은 엘프였다.그들의 전설을 묘진위가 얘기해줬다.가라레를 여는 신인의 재림이다. 가라운이라는 호칭의 그 존재가 세상을 바꾼다했다.

‘가라운.’

그 이름을 새삼 되새긴 강흑성은 매그넘의 부름을 들었다.

“강흑성.”

이제 확실히 알게 된 이름을 친구처럼 부른 매그넘은 윙크를 했다.

“오늘은 정말로 진하게 놀아보자꾸나.”

매그넘의 그 목소리가 흩어지기도 전에 아우리엘이 입을 열었다.

“붉은 하늘을 여는 거야.”

매그넘은 미간을 찌푸리듯 좁혔고 아우리엘은 뒷말을 이어냈다.

“가라레, 붉은 하늘, 그 세상을 열 신인이 오는 거야.”

아우리엘은 주워서 잡고 있던 칼을 무심하게 들어 올려 응시했다. 도신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보듯이다. 붉고 푸른 눈이 강렬해 진다.

“엄마가 늘 얘기해 줬지. 가라레를 여는 가라운은 반드시 온다고.”

말이 끝난 순간 아우리엘의 모습이 변했다. 인간과 같던 얼굴빛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니 본래의 붉음이 발현됐다. 레드파운틴족의 얼굴이.

“붉은엘프였구나!”

매그넘의 놀란 외침과 동시에 아우리엘의 전신에서 퍼져 나온 붉고 푸른 광휘가 강흑성의 몸을 밀었다. 그 순간 매그넘의 다급한 외침이 터졌다.

“죽여라! 피의 파티다!”

안개를 밀고 달려오는 자들의 형상을 강흑성은 목도했다.본능적이고 반사적인 살기와 투기를 불러일으키는 자들, 그 의지를 흑청빛 눈의 번득임으로 발산했다.뒤를 추적해 온다던 자들이다.황금대호방주 혁리추와 남도의 제왕 문주 명일해와 그 수하들이다. 저들과 해결할 시간이다.온몸에 소름처럼 돋아나는 투기의 전율 속에서 강흑성은 움직였다.

* * *

“이런 개신발같으니라구!”

박준은 기함하며 뒤로 물러났다. 반점 밖으로 나가려다 괴이한 안개 때문에 망설이던 순간이다, 왜 그러는 지 다들 눈으로 확인했다. 시체들이 일어서고 있어서다. 그냥 일어서는 게 아니라 다른 시체와 뭉친다.

“그놈이다!”“주술사!”

무슬란과 박현의 동시 외침 뒤로 다른 목소리가 경악으로 터져 나왔다. 3층에서 이동형캐논포를 발사한 거구사내, 서주반점의 보스가 분명하다.

“이런 미친! 저게 뭐야!”

충격과 두려움과 분노에 사로잡힌 자, 서주반점 보스 마상풍은 캐논포를 연속해서 발사했다. 반점 안으로 들어오려던 뭉쳐진 시체들에게다.그런데 캐논포를 맞고 산산조각 난 시체괴수들이 다시 뭉쳐 일어선다.

“으아아아!”

패닉과 분노로 캐논포를 미친 듯이 발사하는 마상풍, 그를 올려다보던 일행은 서로를 돌아봤다. 위험하고 급박한 상황, 저 밖에 강흑성이 있는 거다. 그에게 도움이 되진 못한다지만 짐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우선 여길 뚫고 안전한 곳으로 가자!”

박준이 결정을 내리자 그렉과 박현과 무슬란은 일체의 반론 없이 즉각 움직였다. 아우리엘이 강흑성보다 먼저 밖에 나가긴 했지만 지금 그를 신경 쓸 때가 아니다. 게다가 아우리엘이 신비한 힘을 발휘하는 걸 봤다.

“뒤쪽 창문이다!”

박준이 먼저 t-rex를 연사해 창틀과 벽을 파괴했다. 그렉도 빔라이플을 발사했다. 그 직후 박현과 무슬란이 돌진해 나가 몸통으로 부쉈다.

“나가!”

외침을 던진 박준은 등 뒤의 서늘함에 흠칫했다. 그 순간 동생 박현이 작두칼을 던지는 걸 봤고, 옆으로 잘려 떨어진 시체괴수의 일부를 봤다.

“헉!”

경악한 박준의 등을 그렉이 잡고 미는 동시에 박현이 달려와 작두칼을 다시 잡았다. 박준을 잡으려던 일부가 잘려나갔지만 여전히 끔찍하게 움직이는 시체괴수, 그 몸에서 작두칼을 잡아 뽑음과 동시에 휘돌려쳤다.박현보다 큰 시체괴수는 사선으로 갈라졌다. 본래 죽은 사체였던 존재들, 흉악하고 끔찍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그것이 다시 뭉친다. 다른 시체들과 합쳐져 더 커진다. 그런데다 바깥에선 끝없이 비명이 터지고 있다.

“크아아!”

3층에서 비명을 지르며 떨어진 거구사내를 일행은 목격했다.서주반점의 보스다.제가 부리던 수하들이 뭉친 괴수에게 죽는다.권각과 도검도 소용없는 괴수, 마상풍이란 존재를 죽여 제 일부분으로 흡수해 버린다.

“어서 나가!”

그렉의 외침 속에 일행은 밖으로 달려 나갔다.

* * *

혁리추의 대도와 그 수하들 황금대도객 육인의 대도가 이뤄내는 압력 속에서 강흑성은 피부가 찢어질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제까지 이런 정도의 압력은 겪어보지 못했다. 이들의 내력은 원령의 에너지로 채워졌다.

‘매그넘.’

주술사의 수작이다. 그놈이 강흑성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이들을 이용했다. 그렇다는 걸 이젠 알겠지만 이들도 받아들인 거다. 거부할 이유가 없다. 주체하지 못하게 넘치는 저 힘을 무인이라면 누구라도 반길 거다.

‘철의 의지.’

심중에 솟아나는 한줄기 심득에 강흑성은 전율했다.마치 암천을 가르며 작렬하는 뇌전 같은 깨달음의 순간이다.움켜잡고 있는 철검으로부터 피어나 영혼을 울리는 공명이다.그렇게 알아진다. 철마류의 검이 뭔지.

‘철극문의 모든 것.’

움직임을 멈춘 강흑성은 모든 걸 받아 들였다. 피부를 스쳐가는 대도의 기세와, 흑색군복을 가르는 칼날의 첨예한 감각, 전부 받아 들였다.그렇게 다시 걸음을 냈다. 철검을 앞으로 뻗어내며 철의 의지를 펼쳤다.

‘철혼(鐵魂).’

철벽이 나아갔다.수십 수백, 수천자루의 철검이 뻗어나갔다.대도를 후려치는 혁리추와 황금대도객 육인의 형상을 밀고 확산했다.그렇게 정적이 찾아왔다.강흑성은 휘청하며 한쪽 무릎을 접고 앉았고, 결과를 봤다.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강흑성 자신을 죽이고자하는 의지로 대도합격진을 펼치던 자들, 혁리추와 황금대도객 육인의 형상은 사라졌다.그들이라고 여겨지는 파편들만이 널려 있다. 그 뒤에서 매그넘이 박수를 친다.

“대단해, 정말로 훌륭해!”

짝짝 소리를 내며 박수치는 자, 매그넘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오는 걸 강흑성은 들었다. 그 주문이 흩어진 혁리추와 황금대도객들을 다시 뭉치게 한다는 것을, 그 광경을 보고 있다. 그런데 내력이 바닥나버렸다.

‘이렇게 되면······!’

철검으로 짚은 땅바닥을 노려보며 숨을 내쉰 강흑성은 철검을 놓고 마검을 잡았다. 적은 아직 건재한데 힘이 소진된 상황, 이후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이젠 마기를 풀어야 한다. 그 힘에 먹히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오호, 그것이지?”

매그넘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는 걸 보며 강흑성은 마검 패천마혈을 뽑아냈다. 지옥의 아우성 같은 검의 울부짖음에 몸을 떨면서다. 그런데 아우리엘이 옆에서 걸어온다. 손에는 명일해와 그 수하의 수급을 들었다.

“이것도 필요하지 않으냐?”

아우리엘은 명일해와 수하의 수급을 던졌다.매그넘의 발밑을 굴러간 그것은 다시 뭉치는 혁리추와 그 수하들의 덩어리에 흡수됐다.주변의 시신들을 끌어당겨 점점 커지는 괴수, 바라보던 아우리엘은 피식 웃는다.

“저런 걸로 뭘 하겠다는 거야?”

경직한 매그넘이 반응하려는 순간 아우리엘은 몸을 돌렸다. 강흑성에게 다가왔다. 쥐고 있던 칼은 어디로 갔는지 없다. 그래선지 손을 내민다.

“그거 좀 쓰자.”

강흑성의 승낙이나 대답은 애초에 필요치 않았던 듯, 아우리엘은 마검 패천마혈을 뽑아냈다. 마검의 혈광이 확 퍼지는 속에서 눈을 감고 진저리를 친다. 다시 눈 뜨는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붉은 레드파운틴족이다.

“이런 기분이구나.”

너무나 즐거운 듯한 얼굴로 아우리엘은 매그넘을 향해 걸음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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