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94화 (95/172)

혹성강호. 94. 가라운.

94. 가라운.

“피해!”

그렉이 박준을 밀치며 굴렀다. 그 자리에 날아와 박히는 빔줄기와 화약총탄들은 지독하다. 일행은 다관 벽을 넘어가 피신했다. 그렇지만 공격은 더 거세진다. 죽은 자들이 뭉친 괴수들을 향한 서주사람들의 반격이다.

“개신발······!”

떨리는 숨을 내쉰 박준은 밖을 보기 위해 머리를 들었다. 하지만 머리카락을 치고 지나가는 빔줄기에 기겁하며 목을 움츠렸다. 귀로 들리는 바깥의 상황은 치열하고 맹렬하다, 진정 한편의 지옥도에 다름 아니다.

“흑성이는 괜찮을까?”“야야, 아우리엘이 걱정이지 흑성이가 걱정이냐?”

박현의 말에 바로 대꾸한 무슬란의 심정을 모두 공감했다.푸른 바람의 정령이란 사슴 칸타를 잃고 난 후부터 확실히 이상해진 아우리엘이다.그런데다 직전에 본 변화는 기이했다. 강흑성처럼 공격을 막아냈다.

“그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긴장한 얼굴로 박준은 동료들의 눈을 일일이 응시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잖아? 그놈이 칼로 푸른 벽 같은 걸, 고수들이 한다는 도막 같은 걸 만들어냈잖아? 그렇지? 빔을 막는 걸 다들 봤지?”

곤혹스러운 얼굴의 그렉은 중얼거렸다.

“도대체 뭔지······ 원래 그런 능력자인데 숨겼던 건가······?”

일행은 의문을 곱씹을 틈이 없었다. 다관 벽이 무너지며 괴수들이 들어왔다.

* * *

손에서 울고 있는 검의 울음에 아우리엘은 숨이 막힐 듯한 전율을 느꼈다.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설명을 할 수 없는 감정이다.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태워 불사르는 감각이다.세포하나하나가 다 터지는 것 같다.

‘너로구나! 너와 만나야했던 거구나!’

푸른 눈과 붉은 눈으로 무시무시한 안광을 폭사하며 아우리엘은 웃었다.

“으하하하하!”

* * *

매그넘을 향해 다가가는 아우리엘의 뒷모습을 보며 강흑성은 불길한 예감을 삼켰다. 내력이 바닥나 바로 서지도 못하는 지금의 자신에게서 패천마혈을 가져간 아우리엘, 저 모습은 분명히 위험하다. 이유를 모르겠다.

‘가라레.’

이 사이로 물리는 그 단어로서 강흑성은 깨닫는다.모르는 게 아니라 안다.아우리엘의 입으로 들었다.붉은 하늘을 여는 자 가라운이다.아우리엘은 붉은 엘프, 레드파운틴족이다. 지금 저 모습은 그자와 똑같다.크라폰, 샹그릴라에 마검 패천마혈을 가지고 왔던 붉은 엘프다.그자와 같은 모습, 아우리엘의 정체성은 이제 드러났다.그런데 그냥 붉은 엘프족이 아닌 거다. 패천마혈을 잡고 걷는 저 존재는 전설의 말한 존재다.

‘가라운!’

* * *

안개가 요동치고 있다. 저 붉은 엘프가 걸음을 내딛는 것에 놀라서다.두려움에 움찔거리는 토끼처럼 반응하고 있다.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아니 강흑성이란 저놈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예상했다.저놈의 속에 있는 힘 때문이라면.그런데 붉은 엘프다, 저놈이 쥔 검이 울부짖는다.

‘저놈, 혹시?’

하얀 얼굴에 한줄기 선을 만들며 매그넘은 의문을 씹었다.직전에 자신이 말한 내용, 붉은 엘프족의 전설에 관한 것이다.붉은 하늘을 여는 신인 가라운이다.지금 저놈의 괴이한 모습이 바로 그거라고 여겨진다.

“당치않아! 그건 전설일 뿐이야!”

부정을 부르짖은 매그넘, 자신도 모르게 소리친 그 외침 뒤로 오는 혈광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붉은 엘프가 휘두른 검이 터트린 벼락이다.

* * *

“뚫고 가자!”

소리친 박준은 t-rex를 연사하며 전진했다.서주를 벗어나기 위한 걸음이다.주술사가 만든 안개 속에 서주는 먹혔다.도처에서 비명과 피가 터지고 있다.출렁거리는 안개 속에선 시신들이 뭉쳐 괴수로 변하고 있다.

“강으로 방향을 잡아!”

그렉이 외치며 빔을 연사했고 박현과 무슬란은 작두칼을 휘둘렀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괴수들은 삽시간에 늘어가는 상황, 이런 속에선 안전도모가 최우선이다. 강흑성을 돕겠다는 어설픈 생각은 오히려 독이다.

“흑성이가 독을 사용하면 안 될까!”

정신없이 작두칼을 휘두르던 박현이 의문을 토했다. 무슬란이 바로 응수했다.

“맞아! 이것들 독으로 싹 없애버리면 되겠네!”

박준은 탄환이 비어가는 t-rex를 발사하며 소리쳤다.

“헛소리들 말고 길이나 뚫어!”

그렉과 박준과 박현과 무슬란은 강을 향해 사력을 다해 이동했다.

* * *

깊고 긴 숨을 들이마신 강흑성은 무원진력의 운기에 사력을 다했다. 텅 비어버린 단전에 다시 내력이 들어차기를 기다리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조금만 더······!’

불씨가 되살아난 단전에 의식을 집중하던 강흑성은 충격파에 밀려 굴러갔다.신형을 수습하고 보니 아우리엘과 매그넘이 충돌하고 있다.패천마혈을 휘두르는 아우리엘은 혈광에 휩싸였다. 마검은 포효하고 있다.

‘패천마혈이!’

마검이 즐거워 어쩔 줄 모른다. 희열에 겨운 저 울음은 한건 자신의 내부에 깃든 마기를 출렁거리게 한다. 절로 손이 움찔거리게 하는 울음이다.

‘마기를 사용했다면······!’

오성에 이른 무원진력이 바닥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호수에서 흑강석 산의 본질을 바꿔버린 것처럼 할 수 있었다, 그만큼 내부의 마기는 가공하다. 그러니 사용했다면 다시 온전하게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철혼을 펼치는 것이 이런 결과를 만들 줄은······!’

철극문의 극의, 철마류의 검공을 펼친 대가다. 혁리추와 그 수하들의 합공을 물리쳤지만 이렇다, 원령의 에너지를 흡수해 강력해진 그들의 힘을 제대로 가늠 못해서고, 막 깨달은 철혼의 광대무변함을 몰랐기 때문이다.폭음이 터졌다.상념을 깨고 눈을 부릅뜬 강흑성은 그 광경을 봤다.아우리엘이 날아간다.매그넘의 내민 손으로부터 터져 나온 광휘에 맞아서다.매그넘의 몸으로는 주변의 기류가 빨려 들어간다.원령의 에너지다.

‘안개!’

죽은 자들의 기가 그렇게 매그넘에게 흘러들어간다는 것을 강흑성은 알았다. 그 힘에 아우리엘은 날아갔다. 그런데 다시 일어선다. 검을 세운다.

“가라레!”

아우리엘이 터트린 커다란 외침이 시공을 정지시켰다.그렇다는 걸 강흑성은 분명이 느꼈다.찰나 같고 영원 같던 그 순간이 지나가자 하늘이 소용돌이친다.안개가 밀려난 하늘이 열린다.붉은 하늘, 가라레다.

‘저게······!’

강흑성은 전율했다.붉은 하늘에서 뇌전이 내리친다. 하늘로 검을 세운 아우리엘을 강타한다.아우리엘은 커다랗게 웃는다. 혈광 속에서 웃는다.

‘아우리엘······!’

그 순간 매그넘이 공격했다. 피풍의의 검은 깃털이 모조리 곤두섰다. 그것들이 한순간 폭풍처럼 폭발해 나왔고, 그 뒤에서 암흑도가 발출했다.강흑성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철검을 쥐고 달렸다. 무원신풍보의 바람이 되어 매그넘에게 달려갔다.아우리엘을 향해 뻗어나가는 암흑도를 철검으로 받아쳤다.그런데 그 순간 옆구리에 불같은 감각이 피어올랐다.

“오호라!”

철검의 힘으로 밀려난 매그넘이 하얀 얼굴에 귀신같은 웃음을 피워낸다. 강흑성 자신을 보고서다. 아우리엘의 검, 패천마혈이 옆구리에 박혔다.

‘뭐?’

강흑성은 아우리엘의 미소를 봤다.파랗게 붉은 눈으로 웃는다.저 미소로 전하는 말이 뭔지 알겠다.네 속에 든 것을 가져야겠다는 소리다.

콰우우우!

댐이 무너지면 이러할까?강흑성으로부터 아우리엘에게 마기가 넘어갔다.마검 패천마혈을 통해, 혈광으로 이어진 그 통로를 타고 터져나간다.원한과 비통 속에 지옥에조차 들지 못한 에너지들이다.울부짖는다.

‘아우리엘······!’

부들거림 속에서 강흑성은 하프엘프의 이름을 불렀다.인간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존재, 어머니와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친 자, 강흑성 자신과 같았던 이의 눈을 봤다.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저 눈은 즐거워한다.

“너어······”

아우리엘을 향해 손을 뻗던 강흑성은 휘청하며 무릎을 꿇었다. 아우리엘이 마검 패천마혈을 뽑아내서다. 강흑성의 피가 묻은 그 검을 뿌린다.후두둑.핏방울이 떨어지는 걸 보며 강흑성은 무릎을 다시 세웠다.속이 텅 비어버린 공허함 속에서, 단전이 빈 것과는 다른 상실감으로, 철검에 의지해 몸을 지탱하고 섰다.그 순간 아우리엘이 웃으며 말했다.

“잘 썼다.”

아우리엘의 손에서 마검 패천마혈이 떠났다.안착한 곳을 강흑성은 내려다 봤다.자신의 가슴, 심장을 파고들었다.마검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추잡한 주술사 놈은 내가 해결할게.”

오랫동안 사귄 친구에게 말하듯 아우리엘은 살갑게 말했다. 그렇게 돌아섰다. 상황을 주시하다 도주한 매그넘을 찾아서다. 안개는 흩어지기 시작했고 괴수들은 쓰러지고 있다. 그 속을 아우리엘은 태연히 걸어갔다.

“흐.”

가녀린 숨소릴 흘려낸 강흑성은 다시 무릎을 꿇었다.철검으로 지탱하던 몸도 더 이상은 버티지 못했다.하늘을 보며 쓰러졌다.등으로 빠져나갔던 마검 패천마혈은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렇지만 여전히 박혀있다.

‘이렇게 죽는 다고······?’

하늘을 보며 전신을 경련하던 강흑성은 거부했다.죽음을 거부했다.그렇지만 시야가 흐려진다.심장이 멈춘 몸은 차갑게 식어간다.죽음이다.

쩡!

철검이 소리는 낸 건 그 순간이다.심장으로부터 흘러나온 피가 검신을 적셨다.주인의 피를 머금은 검은 균열했다.유리가 깨지듯 산산조각났다.형체가 사라진 검신은 우유빛의 기류가 돼 강흑성의 몸을 기었다.영사가 기어가듯 죽은 자의 몸을 더듬으며 올라가는 유유빛 검.그것은 강흑성의 가슴에 올라 마검을 휘감았다.그 찰나 마검은 다시 깨어나는 것처럼 포효했다. 그리고 우윳빛 검신은 마검 속으로 스며들었다.검은 진동하며 울음을 토했다. 그렇게 강흑성의 가슴으로부터 떠올랐다.혈광이 사라진 검.철검의 혼이 스며든 검은 주인을 깨우며 울어댔다.시공을 떨쳐 울리는 울음, 그 소리에 강흑성은 눈을 떴다.

* * *

미친 듯이 돌파해 강에 다다른 일행은 강물의 뒤집힘을 봤다.

“저거 귀룡이잖아?”

박현의 놀람 뒤로 일행은 귀룡의 모습을 확인했다. 강물을 뒤집어 올리며 그야말로 바람처럼 강을 가르고 나아가는 거대거북, 귀룡이 분명하다.

“저놈이 어딜 가는 거야? 아니 그보다 왜 저래?”

박준의 의문과 놀림은 더는 관심사가 아니다. 안개가 흩어지고 있다. 그 속에서 준동하던 괴수들이 쓰러진다. 갑작스러운 이변화가 그냥 놀랍다.

“흑성이가 주술사 놈을 쓰러뜨렸나 보다!”“찾아 가보자!”“그래!”“다시 올라가자!”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온 길을 다시 달렸다. 파괴된 서주의 광경을 살필 사이 같은 건 없다.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 서주반점에 다다랐다.

“저쪽이야!”

그렉은 방향을 잡았다. 혼전 속에서 강흑성과 아우리엘이 있던 방향이다. 역시 대단한 접전이 있었던 모양, 주변에 제대로 남은 것이 없다.

“흑성아!”

그렉은 강흑성을 발견하고 달려갔다. 그런데 강흑성이 피투성이다. 옆구리와 가슴엔 옷이 구멍 나 있다.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 멀리 보고 있다.

“흑성아, 너 괜찮은 거냐?”

그렉의 걱정 가득한 물음 뒤로 박준이 물었다.

“아우리엘은? 그놈은 어디 갔어?”

꿈틀, 어깨를 경련처럼 움직였던 강흑성이 일어섰다. 나직이 말한다.

“떠났습니다.”

걸음을 옮기는 강흑성을 기이하게 바라보던 일행은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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