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95화 (96/172)

혹성강호. 95. 철혼(鐵魂).

95. 철혼(鐵魂).

매머드가 기동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압도적이다. 게틀러를 소형으로 만들어 버리는 저 전투차량들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작전을 나가고 있다. 하늘엔 군용 샤크들이 떠올랐다. 어디선가 반화성조직이 준동한 거다.

“기이해.”

7군단 군인들이 작전 나가는 광경을 지켜보던 최창수는 새벽 어둠속으로 중얼거렸다. 전복이 다가온 것을 그때 알았다. 역시 혼잣말을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군대를 보면서 뭐가 기이하다는 거냐는 물음, 새벽잠 없는 노인처럼 이렇게 나와서 뭐하냐는 거다. 그런데 그렇기는 전복도 별 다를 게 없다.새로운 보금자리가 아직은 편치 않아서다. 여자들만 있으니 더 그렇다.

“집 지키는 개가 되겠다더니 정말이군.”

물음의 답이 아닌 다른 대답, 새벽잠 없이 너도 나왔구나 하는 최창수의 반응에 전복은 짐짓 인상 썼다.

“여자들한테 환심 사려고 한말이 아니야. 여기가 아무리 대전이지만 오는 날 봤듯이 위험은 상존해. 같이 살기로 한 이상 밥값은 제대로 해야지.”

최창수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오란 아가씨가 함께 살자고 한 부탁의 결과를 음미하면서다. 준후는 아주 좋아하고 있다. 명희랑 다른 아이들과 웃고 노느라 정신없다. 물론 여자들도 안심하고 좋아한다.

‘박준이란 이름 때문에 우릴 신뢰한다니······’

어이없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실제 그렇다. 카이오란 아가씨와 여자들은 강흑성과 박준을 은인으로 여긴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죽었다는 거다.그건 맞는 말이다. 처음 츄란족 노예사냥꾼들의 손에서 끝났을 거다.

“데빌그라운드 접경지역을 왜 군대가 안 맡고 정찰대가 맡은 거지?”

새삼스럽단 얼굴로 의문을 말한 전복이 돌아본다. 그 눈을 응시했던 최창수는 역시 다른 대답을 낸다.

“이 땅은 반골의 땅이야.”“뭐?”“한반도, 이 작은 땅에서 반화성조직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어. 대륙도 아니고 바다건너 섬나라도 아니야. 유라시아 대륙도 아니고 유럽도 아니야. 이 땅에서야. 지구의 다른 어떤 곳도 이곳과 같은 곳이 없다.”

전복은 힘 준 미간을 옅게 꿈틀거리며 최창수를 응시했다.

“그래서 여기 군대가 있는 거지. 대륙전쟁승리의 영웅 그리샴장군이 7군단을 이곳에 배치하고 여기 있는 거야. 신중화의 기치로 전쟁을 일으켰던 대륙보다 이 땅을 더 중요하게 보는 거야. 그래, 오랜 옛날부터 그랬지.”

최창수의 마지막에 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전복은 음미했다.어렴풋이 아는 이 땅의 역시다.무수한 외침의 공격을 받았지만 잡초처럼 살아난 민족이 살던 땅이다.부당한 것에는 언제나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반골.’

그 피가 흐르는 땅이 이곳인 거다.그래서다. 지구를 버리고 화성으로 떠난 자들을 향한 칼이 끊임없이 곤두서는 땅이 이곳이다.최창수가 기이하다고 한 말의 뜻이다.이 작은 땅에서 솟구치는 의혈의 피가 그러하다.

“제대로 밟히겠어.”

결과를 예상하며 전복은 감정 없는 목소리를 뱉었다. 어디에서 어떤 반화성조직이 생겨난 건지 모르겠지만, 군대의 저 화력에 흩어지고 말 터다.

“불의한 조직이라면 흩어지는 게 옳아.”

최창수는 차갑게 생각을 뱉었다. 진정한 반화성의 목적이 아니라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자들의 거짓조직이라면 사람들에게 피해만 준다. 그런 조직은 사라지는 게 맞다. 차라리 블랙시티와 같은 곳이 백배 낫다.

“뭐 그건 그런데······”

샤크의 불빛이 사라진 새벽하늘을 보던 전복은 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륙에선 뭣들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최창수도 전복의 눈길을 따라 서쪽하늘을 응시했다. 저 하늘 아래 어딘가 있을 박준과 그의 동료들, 그리고 강흑성이란 청년을 떠올렸다.

* * *

“제기랄, 아우리엘이란 놈이 처음부터 속내를 숨기고 접근한 거라고.”

굵은 장작을 쪼개 불속에 던져 넣으며 박현은 분노를 드러냈다.아우리엘을 향한 분노, 그가 강흑성을 공격하고 떠났다는 것을 알아서다.강흑성은 차분하게 그 과정을 이야기했다.모두 놀라고 그다음엔 분노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냐?”

무슬란의 반응에 박현은 성난 눈으로 뭐가? 라며 본다.

“아우리엘 그놈이 처음부터 음흉한 속을 숨기고 그랬다기엔 앞뒤가 안 맞다 이거지.”

그렉과 박준도 시선을 모았고 무슬란은 제 생각을 말했다.

“그놈하고 우리가 만난 게 금교어족 때문이잖아? 귀룡이란 거북으로 공격했고 블랙베어들을 불렀고, 그러다 사슴이 죽을까봐 흑성이한데 무릎 꿇고 빌었지. 그건 누가 봐도 진심이었어. 그때까지 그놈은 괜찮았다고.”

괜찮았다는 의미가 뭔지 일행은 알았다.아우리엘은 그 후로 이상해진 거다.사슴 칸타가 블랙블러드의 공격을 받아 죽고 난 후부터다.눈동자의 색이 파랗고 붉게 변했고, 칼을 쥐고 고수 같은 능력을 발휘했다.그건 비정상적이고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됐다.그 이유가 아우리엘이 레드파운틴족의 전설인 가라레를 여는 신인 가라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말을 강흑성이 했다. 그렇지만 아직도 안 믿긴다.

“맞아. 아우리엘은 처음부터 흑성이를 노리고 접근했던 건 아니야.”

그렉이 모닥불의 휘청거림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그놈이 누군지 몰랐듯이 그놈도 우릴 몰랐어.”

느릿하게 시선을 돌린 그렉은 폐가의 바깥에 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강흑성을 응시했다.

“사슴 칸타가 뿜어낸 푸른 뇌전은 흑성이를 죽이려는 것이었어.”

강흑성의 내부에 깃들어 있던 마기를 흡수해간 아우리엘, 그게 어느 정도이고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모르지만 일행은 그 결과를 들어 안다. 그러니 아우리엘이 노린 거라고 생각되지만, 그건 분명히 아니었던 거다.

“누구라도 그런 걸 맞으면 죽을 수밖에 없지. 처음 부딪쳤을 때 흑성이를 죽이려고 했어. 지금 같은 결과를 만들려고 했다면 그러지 않았겠지.”

박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놈은 그때 놀라기만 했어. 흑성이는 사슴의 힘을 흡수해서 반격할 줄 몰랐던 거지. 황당무계한 기사였을 거야. 지금도 마찬가지야. 아우리엘 그놈은 흑성이를 몰라. 저렇게 살아 있는 걸 그놈은 모를 거야.”

곱씹을수록 솟아나는 분노를 이 사이에 물고 박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흑성이 속에 있던 마기를 아우리엘 그놈이 흡수해 간 거잖아?”

그것만이 아니다, 상해의 지하수로에서 받아들인 원령의 에너지들까지다. 그러나 그렇다는 걸 일행은 모른다. 그것까지 강흑성은 말하지 않았다.

“그게 대단한 거잖아? 호수에서 흑강석 산을 흙더미로 만든 것도 그 힘이잖아? 그때 흑성이가 이상했잖아? 그렇지? 그 마기가 원래 마검 속에 있던 거라고 했지? 그런데 이젠 마검도 완전히 다른 검이 됐잖아?”

일행은 모두 폐가 밖의 강흑성을 돌아봤다. 바라보며 그렉과 박준은 묘진위를 떠올렸다. 마검을 쫓아왔다 떠난 마인, 그가 했던 말들을 더듬었다. 그렇게 강흑성의 검을 봤다. 철금련의 철검이 사라지고 남은 검이다.

‘철검에서 나온 철혼이 살렸다는 소리가 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철검과 마검이 합쳐졌고 흑성이를 살렸다는 건데······’‘저 검은 그럼 마검이야 뭐야?’‘기묘한 느낌의 검이긴 한데······’

붉은 빛이 완전히 사라진 검은 더 이상 마검이라고 부를 수 없다.피를 먹을수록 강렬해지던, 그러한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이젠 그냥 철검이다.철무진이 건네 준 철검, 철극문의 오래된 검과 합쳐진 검이다.

“자자, 이제 목적지는 얼마 안 남으니까 힘들 내자.”

박준이 현실을 상기시키며 손바닥을 비벼댔다.말처럼 이제 산동 땅에 들어섰다. 태산이 있는 제남까지 부지런히 가는 거다.강흑성의 목적이 있는 곳이다.그 목적이 뭔지도 강흑성은 말했다.패천마안이란 것이다.

“마검도 사라진 거나 같은데 그걸 찾는 게 의미가 있을까?”

박현의 중얼거림, 일행 모두가 공감하지만 말하지 않고 입술을 굳게 다무는 가운데 모닥불만 일렁거렸다.

* * *

깊고 고요한 적막 속에서 강흑성은 눈을 떴다.육중한 무게를 가진 어둠이 끝 모르게 눈에 들어온다.암흑의 저 빛깔은 대지를 내리 누르고 있는 것 같다. 압살하려는 듯이다.그렇지만 산 생명들은 버티고 있다.

‘철혼.’

철검에 깃들어 있는 기운이 그것이라는 걸 강흑성은 깨달았다.마검과 합쳐 자신의 생명을 살린 철검의 혼이다.그 존재의 내막을 알 길 없다.아버지의 기억도 떠오르는 게 없다.철극문에 관한 피상적인 수준이다.

‘철극문.’

철을 다루는 문파였다. 검과 도를 만들던 장인 가문이 시작이었다.철의 의지를 깨우쳐 각성하고 철마류를 만들어낸 가문이다.그 뿌리로부터 이어져온 근원의 힘, 그것이 철혼이다. 그 철혈의지가 영혼에 맺혔다.

“반인반수 연자지검.”

검에 새겨져 있던 글귀를 중얼거리며 강흑성은 새삼 자신의 운명과 인연의 섭리를 더듬었다.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를 철검은 강흑성 자신을 위한 것이다. 부정할 수 없는 인연, 수백 년 간 우물 속에서 기다렸다.

‘아우리엘 너는······’

카이오가 말했다. 패천마안의 곁에는 무서운 존재가 있다고.

‘너였던 거냐.’

알 수 없다. 그러나 결과가 그렇다고 말해준다. 그러니 아우리엘은 패천마안을 찾아갈 거다. 갖게 해선 안 된다. 아우리엘의 목을 잘라야 한다.

“철혼의 의지로.”

가부좌를 풀고 일어선 강흑성은 검을 쥐고 일행에게 돌아섰다.

* * *

팔이 잘린 고통 속에서 매그넘은 치를 떨었다. 붉은 엘프놈, 아우리엘이란 이름을 가진 그놈은 포기를 모른다. 그놈이 정말로 전설이 말하는 가라레의 신인 가라운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지독한 놈에게 걸렸다.

‘여기까지 쫓아오진 못할 거다.’

심령의 거대수 아래, 땅 속 깊은 이 공간을 찾아낼 순 없을 거다. 그러니 여기서 팔을 치료해야 한다. 심령의 거대수로부터 흘러내리는 에너지를 받아서다. 팔 하나 잘린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다. 복원하면 된다.

‘반드시 돌려주마, 나는 팔이 아니라 네놈 목을 칠 것이다······!’

저주 같은 결의를 삼킨 매그넘은 주문을 암송했다. 흙속으로 파고든 벌레와도 같은 신세지만, 이 흙속에서 다시 완전해지라란 확신으로 의지를 발산했다. 그 의지대로 잘린 왼팔은 꿈틀거리며 원래형태로 자라난다.

‘됐어!’

복원된 왼팔의 감각이 환희로 인지하던 순간 매그넘은 경직했다.에너지를 내려주던 심령의 거대수가 터트리는 비명 때문이다.영혼을 울리는 저 소리가 왜인지 알겠다.그놈, 아우리엘이한 엘프놈이 쫓아온 거다.

‘이!’

몸을 뒤틀며 매그넘은 이동했다. 마치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땅속을 나아갔다. 그런 매그넘의 위에서 뇌전의 칼날이 미친 듯이 내려박혔다.

* * *

일행에게 떠날 것을 말하고 폐가 밖으로 나선 강흑성은 주변을 돌아봤다.여명의 푸르스름함이 어둠을 대체하는 시간, 전쟁의 흔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파괴된 전차를 비롯한 전쟁병기들의 잔해가 사방에 널려 있다.

‘이런 곳에서도 전투를 벌였구나.’

새삼스럽게 폐가를 돌아본 강흑성은 전쟁 당시의 참상을 상상했다. 저 집과 주변의 폐가들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을 터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던 일, 희생된 이들의 피와 눈물이 밴 곳이다.

‘어느 곳이든 피하지 못했겠지. 그래서 지구는 버려진 거고.’

복잡한 감정 속에서 강흑성은 걸음을 옮겼다.폐가 앞 작은 시내를 건너 부서진 전차 앞에서 멈췄다.원래의 형체를 겨우 구분할 정도로 파괴됐다.캐논포를 발사하던 전차의 위용은 이제 녹슨 고철로만 남았다.

‘응?’

눈동자를 번득인 강흑성은 파괴된 전차의 바닥을 파헤쳤다.은빛을 언듯 보인 정체가 드러났다.사슬이다.시린 은빛을 오랜 시간 흙속에서 드러내지 못했던 것, 용도가 뭔지 모르겠지만 전차의 부품인 것 같다.

“그게 뭐야?”

뒤에서 박준이 눈에 힘을 주며 다가왔다. 강흑성이 쥔 길이 4m 가량의 은빛 사슬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파괴된 전차를 번갈아보고 짐작을 말한다.

“동력 축 연결사슬 같은데?”

그렉이 역시 눈동자를 빛내며 묻는다.

“저거 혹시 브리틀합금 아닙니까?”“이 전차가 네오원 전차라면 그럴 수 있지. 근데 그게 데바족으로부터 브리틀합금을 원활히 얻지 못해서 소수생산에 그치고 만 기종이거든?”

박현과 무슬란이 다가와 합세한다.

“저게 그런 거라고?”“브리틀합금이면 귀한 거잖아?”

그 순간 강흑성이 사슬을 촤륵 소리 나게 뿌렸다. 허공에 은빛 몸부림을 남긴 사슬은 땅바닥을 파고 들어갔고, 강흑성은 흑청빛 눈으로 말했다.

“블랙블러드가 왔습니다.”

박준과 그렉과 박현과 무슬란은 경직했던 몸을 돌리며 병기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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