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96화 (97/172)

혹성강호. 96. 부르는 소리.

96. 부르는 소리.

거대한 나무가 쪼개지며 내는 비명을 아우리엘은 분명히 들었다. 귀로 들르지 않지만 들리는 소리, 심령의 거대수이기 때문이다. 물론 수림의 모든 나무들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들은 전부 그렇다.

‘너희의 고통과 두려움, 내가 없애 주마.’

푸른 눈과 붉은 눈에 환희의 미소를 머금은 아우리엘은 손을 들었다 다시 내리쳤다. 푸른 뇌전의 칼을 쥔 손, 아니 정확하게는 손으로부터 뻗어 나와 있는 번개의 칼이다. 그것이 푸른 가름을 땅으로 갈라 터트린다.

“매그넘! 두더쥐 꼴로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신이 난 얼굴로 아우리엘은 수림 속을 달렸다.계속해서 번개칼을 내리치면서다.좋다, 너무나 좋아서 죽을 것만 같은 지경이다.지금 손으로 뿜어내는 힘은 칸타가 폭우 속에서 받아내던 번개다. 그걸 뿌리고 있다.

‘칸타가 내게 불어넣어준 거야!’

매일 어루만지고 끌어안고, 서로의 영혼을 보듬으며 살아왔다. 그렇게 칸타의 뇌전지력은 아우리엘 자신에게도 흘러든 거다. 물이 흘러들듯 자연스러운 거였다. 고여 있던 그 힘이 깨어났다. 칸타가 죽던 순간이다.

‘나는 붉은 하늘을 여는 자! 가라운!’

그렇다는 걸 의심치 않는다. 아니 확신한다.아우리엘 자신은 운명이 점지해준 신인이다. 망가지고 더럽혀진 이 세상을 없애고 새 세상을 열 존재다.그럴 힘이 있다. 강흑성에게서 흡수한 이 힘은 지옥에서 온 것이다.

“내가 가라운이다!”

푸른 벽력같은 외침을 터트리며 아우리엘은 벽력뇌전도를 내리쳤다.거대하고 가공한 힘을 품은 그 가름은 수림을 쪼개고 들어갔다.마치 우거진 풀밭위로 칼날을 내리친 것 같은, 그렇게 수림은 갈라져 흩어졌다.거대수들이 쪼개지며 내는 수림의 비명 속에서 아우리엘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땅속으로 도망치는 매그넘의 존재감 말고 다른 걸 감지했다.

‘뭐?’

어깨위로 올린 오른손에서 발출한 푸른 뇌기가 산란하는 모습으로 아우리엘은 들었다.자신을 부르는 소리다.영혼에 울려 퍼지는 부름이다.

‘패천마안······!’

그 이름이다. 그렇다는 걸 알겠다.강흑성으로부터 힘을 흡수한 검의 이름은 패천마혈이고, 그 검의 핵심이자 정화가 바로 패천마안이다.그러한 내막을 강흑성에게 듣지 않았지만 알겠다.그의 염원이 녹아 있어서다.

‘너로구나! 네가 날 부르는 구나!’

부르르 진저리 치는 것 같은 모습으로 소름과 전율을 털어낸 아우리엘은 대소를 터트렸다. 수림이 떠나갈 것 같은 웃음, 그 끝에 다시 움직였다.

“태산으로 간다! 그전에 매그넘 너는 죽여야겠다!”

붉은 광휘를 전신으로 발산하는 아우리엘은 수림을 휩쓸며 들어갔다.

* * *

폐가를 말없이 응시하던 강흑성은 천리지청술을 다시 펼쳤다. 주변의 폐허와 그 뒤로 이어진 수림지대와 황무지, 접근하는 블랙블러드의 기감을 살폈다. 텅비어버렸던 내력은 이제 다시 샘물처럼 솟아 나오고 있다.

‘그래서 일까······’

단전이 완전히 비었던 것이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무원진력의 내력은 왕성하게 채워지고 있다. 기왕의 오성내공도 넘어설 기세다. 패천마혈에 심장을 찔리고 죽던 몸에 철혼의 의지가 깃들어 이뤄지는 결과인 거다.

‘오갑자의 내공이 있어야 펼칠 수 있던 벽뢰수는······’

사슴 칸타의 번개를 맞고 오히려 그 뇌전지력을 흡수해 벽뢰수를 펼쳤다.마교 비전 혼천무상비기의 역혈기공을 알았기에 가능했다.그렇지만 벽뢰수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이젠 불가능하다.

‘내 힘이 아닌 힘으로 펼치던 무공.’

벽뢰수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강흑성은 현실에 의식을 집중했다.

‘블랙블러드.’

그들이 다가오고 있다. 한반도에서부터 이곳 대륙에까지 쫓아왔다. 아니 이 땅에도 그들의 힘은 존재했으니 그런 표현은 맞지 않겠지만, 어떠하든 시작은 그곳에서다. 정찰대로부터 불씨가 커져 화마로 닥쳐온 거다.

‘너희와의 악연은 내가 끊어버리겠다.’

검을 움켜쥔 강흑성은 눈동자에 흑청빛을 드리웠다.그래서일까, 혈기가 사라진 마검은 더 이상 패천마혈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검신에 그 빛을 띠웠다.그렇게 운다, 마검으로서의 울음이 아니라 철혼의 의지로서다.

“철혼, 네 이름은 이제 철혼이다.”

검에 이름을 말해주며 강흑성은 몸을 돌렸다. 폐허를 지나 수림 속으로 걸음을 냈다. 수림이 시작되는 곳에 서서 블랙블러드의 접근을 기다렸다.

* * *

파괴된 전차들이 널려 있는 폐허 넘어, 수림이 시작되는 곳에 그놈이 서 있다. 사진속의 인물처럼 저렇게 서 있는 이유는 기다리는 거다. 자신들 블랙블러드의 접근을 인지하고서다. 저건 손 흔들어 부르는 거다.

‘그래, 네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구나.’

우인관은 미소를 피워냈다. 오른 눈에 댄 검은 안대가 실룩이는 미소다.

‘네놈의 얼굴······!’

드디어 보게 된 목표의 모습을 눈에 넣으며 우인관은 흑사검을 움켜쥐었다.그렇게 지금의 흥분을 달래보려 하지만 역부족이다.혈관 속에서 끓는 피의 뜨거움은 주체 못할 정도다.이건 마치 열탕에 들어간 것 같다.

‘북부지구 정찰대를 몰살한 놈······!’

물론 그 일은 저놈 혼자서 한일이 아니다. 퓨리엔트족 반화성세력이 끼어 있다.어떠하든 그 틈바구니에서 그런 일을 만들었다.황당한 사건, 저놈이 유성의 독을 뿌렸다. 고강한 무공을 가진 놈, 아니 그 이상이다.

‘상해를 거쳐 신남경의 철금련을 지나 서주를 뒤집어 놓은 놈.’

저놈을 건드려 본 결과를 확인했다. 송골매를 이용한 일급살수들은 소용없었고 초혼살수들까지 갈라버렸다. 강력한 로봇바디에 사망한 일급살수들의 혼을 불어넣은 존재들이었다. 무공을 업그레이드해 더 강했다.

“네놈이 유성이 아닌 이상 우리 손에 죽는다.”

우인관은 나지막하게 그 말을 흘려내고 미소를 피워냈다. 잔인한 의지와 기운이 들어 있는 미소, 아침이 밝아지는 하늘을 날던 새들이 비켜간다.꿈틀, 미소 짓던 미간을 우인관은 경직했다.목표, 샹그릴라 일당의 젊은 무인놈이 수림으로 돌아서 사라졌다.저건 쫓아오라는 초대의 손짓이다.

‘다른 놈들은?’

여태 이상하게 여기던 부분이다. 샹그릴라 일당은 저놈만이 아니다. 박준이란 사장놈과 그렉이란 이름의 타이그란족 놈이 있다. 거기에 더해 움바바족이 두놈이 일당이다. 그런데 그놈들이 안 보인다. 기감도 없다.

‘서주를 벗어나 여기까지 온 흔적은 분명 함께였는데······’

폐허와 폐가들을 훑어본 우인관은 다시 목표가 들어간 수림을 응시했다.

‘조호이산지계.’

이건 분명히 그런 거다. 수림으로 들어간 놈은 우인관 자신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한 거다. 다른 일행들의 종적은 감추고서 저런다. 계략이다.그런데 저놈들이 계략을 펼친다고 해서 결과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서주에서 일어난 일의 정확한 내막도 네 놈을 통해 듣겠다.’

우인관은 오른 손을 들었다 내렸다. 그 신호를 따라 블랙블러드의 특급살수들이 수림을 향해 검은 바람처럼 나아갔다. 그 뒤를 따라 걸음을 내며 우인관은 서주의 일을 다시 곱씹었다. 정확한 내막을 파악 못했다.

‘안개 속에서 괴수들이 출몰했다······’

그냥 괴수가 아니라 죽은 자들이 뭉쳐진 원괴였다.그런 걸 만들어 내는 존재가 주술사다.서주에 주술사가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다른 의문점은 샹그릴라 일당에 엘프가 끼었다가 사라진 점, 추적하던 자들이다.

‘혁리추와 명일해······’

그들은 서주까지 샹그릴라 일당을 추적했다. 그런데 종적이 사라졌다. 초혼살수들이 샹그릴라 일당을 공격한 직후 안개가 확산했다. 그 안개가 다시 사라졌을 때 그들도 없었다. 안개 속에 있던 저놈은 알 터다.

‘네놈만 잡으면 모든 게 끝나.’

의문도 종적이 사라진 다른 일당들도, 무엇보다 중요한 핵심의 임무도 해결이다. 유성의 독을 사용하는 내막, 유성의 진전을 이은 것인지다.

‘유성이 아닌 이상 네놈은 끝장이다.’

잔인한 미소를 만면에 피워낸 우인관은 수림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 * *

최대한 부드럽게 힘을 쓰며 박현과 무슬란은 전차장갑을 치웠다. 귀식대법으로 굳어 있던 몸을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주변을 돌아보고 기감을 살피지만 위험한 동정은 없다. 강흑성의 예상대로 놈들은 갔다.

“전부 흑성이를 따라갔어.”

그렉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든 무게로 일행은 현실을 인식했다.이렇게 넷이 파괴된 전차잔해 밑으로 은신한 결과다.강흑성의 주장이었다.그의 예측대로 블랙블러드 놈들은 이곳을 떠났다. 아무 미련도 두지 않았다.

“에고, 흑성이가 점혈한 곳이 아프다. 야 현아 이거 괜찮은 거냐?”

박준이 엄살인지 아닌지 모를 얼굴로 묻는다, 그 흔적을 그렉과 박현과 무슬란도 느끼고 있다. 강흑성이 강제로 귀식대법이 가능하도록 혈도를 누른 감각이다. 의식은 있으나 호흡과 기감을 차단한 방법이었다.

“아무 일 없을 거니까 걱정 마.”“그래? 야 아무튼 움직이는 걸 참느라고 애 먹었다.”

움직이면 강흑성이 해 놓은 일이 소용없게 되는 거였다. 물론 그럴 위험상황이라면 당연히 움직여서 반응해야 한다. 그래서 의식이 있던 거다.

“혼자서 정말로 괜찮을까?”

무슬란의 수림을 보며 걱정 가득한 중얼거림을 냈다.박준은 바로 반응했다.

“짐이 될 뿐이라고 했잖아.”

차갑게 나온 박준의 걸론, 일행은 무겁게 곱씹었다.서주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그렇다.현재의 힘으로는 강흑성에게 도움이 안 되는 거다.그렇다는 걸 알기에 강흑성의 의견을 따른 거다. 그래도 걱정이 크다.

“전하고는 다를 텐데······”

마기를 아우리엘에게 빼앗긴 강흑성을 박현은 걱정한다. 모두 알고 있기에 마찬가지다. 그래도 강흑성을 믿고 맡겨야 한다는 게 박준의 결정이었다. 일견 비정하고 이기적인 결정이지만 그게 옳다는 걸 다 안다.

“자, 흑성이가 벌어놓은 시간을 우릴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어서 가자.”

박준이 먼저 움직였다. 이곳의 일은 오롯이 강흑성에게 맡기고 태산을 향해 먼저 가는 거다. 강흑성이 뒤따라 올 것이고, 여의치 않은 상황이 생긴다 해도 결국엔 태산에서 만나는 거다. 그런데 마음이 아주 무겁다.

‘이렇게 짐스러운 존재로 흑성이와 함께 하는 게 현명한 건가?’

돌덩이처럼 가슴에 자리 잡은 그 생각을 품은 채 일행은 은밀하게 폐허를 이동했다.

* * *

무원신풍보를 펼쳐 수림을 헤치고 나가는 강흑성의 모습은 한줄기 바람 그 자체였다. 단전으로부터 퍼져 나와 사지백해를 돌고 있는 무원진력은 기이한 공명으로 몸과 혼을 깨워내고 있다. 그 울림이 황홀하다.

‘벽을 넘는다······!’

법열과도 같은 전율 속에서 강흑성은 깨달았다.자신의 내공이 또 하나의 벽을 넘어서고 있음이다.오성을 넘어 육성의 관문을 돌파하고 있다.당황스러운 이 월장은 고무줄을 당겼다가 놓을 때처럼 갑자기 찾아왔다.그런데 갑자기가 아니다. 그래야할 때가 돼서다.물론 촉발의 계기는 있다. 마검의 힘과 지하수로에서 흡수했던 원령의 에너지들, 그러한 힘들이 강흑성 자신의 내부를 넓히고 단련하고 바꿔 놨다.이건 그런 결과다.

“이제 보자.”

목소리를 뱉은 강흑성은 무원신풍보의 질주를 멈췄다.거대수들이 밀집한 수림 한가운데서 돌아섰다.지나온 길을 달려오는 존재들을 바라봤다.블랙블러드의 살수들, 분명히 특급살수들이다. 그들도 멈춰 선다.허리 뒤로 기울어지게 걸친 검, 철혼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인 애병을 강흑성은 잡았다가 놓았다. 그 대신 허리에 감은 은빛사슬을 풀어냈다.촤르르, 소리를 내고 땅에 늘어진 4미터 길이의 사슬, 강흑성은 힘을 줬다. 무원진력의 의지를 불어넣었다. 사슬은 장봉인 것처럼 형체가 섰다.

“철룡이십사식이 무엇인지 다시 알려주마.”

강흑성이 걸음을 내는 순간 블랙블러드 살수들은 일제히 반월륜을 날렸다. 거대수들을 가르며 비상하는 그것들은 한순간 섬광으로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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