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97. 피할 수 없는.
97. 피할 수 없는.
새벽부터 들일을 나가는 여자들을 따라 나선 전복은 아침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다. 포만감을 느끼며 소나무 아래서 잠시 게으름을 피우는데 여자들은 벌써 밭일을 시작했다. 황무지 개간에 다들 정말로 열심이다.
‘대전 안으로 들어가서 공장 같은데서 일하는 게 좋긴 하겠네.’
그걸 바라지만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래서 택한 차선책이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짓는 거다. 대전 경계 바로 바깥인 유랑민거주지를 벗어나면 땅은 많다. 하지만 개간에는 힘이 든다.
‘다들 정말 열심이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하며 전복은 개간하는 밭으로 들어갔다. 돌을 걷어내고 나무뿌리를 파내고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다시 숨을 돌렸다.
“후.”
거친 흙이 묻었던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전복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명희엄마와 진숙이 엄마를 제외하면 캐리언족이 전부인 여자들이다. 타고난 미모 때문에 원치 않는 삶을 살게 되는 이들이 거의 대부분이다.이들은 그런 운명을 거부하고 싸우는 거다.저렇게 힘들게 일하며 삶을 개척하고 있다.그렇지만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게 세상이다.이곳으로 들일을 나오는 것도 위험하다. 카이오는 언제나 무장하고 동행했다.
‘대단한 아가씨야.’
새삼 카이오에 대한 의미를 곱씹은 전복은 수통의 물을 마셨다.
“뭐 이젠 내가 있으니까.”
카이오의 역할, 그 이상을 해낼 자가 전복 자신이다. 박준이라는 기묘하고 예상치 못한 인연이 만들어준 인연이지만 흔쾌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 오줌 마렵네.”
갑작스런 요의에 전복은 엉거주춤 했고, 그 중얼거림을 가장 가까운 곳의 여자가 들었다. 움찔하더니 어색한 시선을 안 맞추려고 몸을 돌린다.
“으흠.”
헛기침하며 밭을 나온 전복은 잠깐 쉬던 소나무 뒤로 돌아갔다. 거대수만큼은 안 되도 엄청나게 큰 소나무가 모습을 가려준다. 시원하게 소변을 봤다. 어깨를 떨며 마무리 한 후에 다시 일하는 여자들을 바라봤다.
‘살겠다는 의지를 확실하게 갖고 있어.’
카이오를 선두로 여자들이 살고자 하는 의지는 아침 해처럼 빛난다.그렇다는 건 저들의 눈빛으로, 저 모습만 봐도 안다.약한 여자들, 죽음을 겪으면서 저렇게 변한 거다. 박준과 강흑성이란 그 청년으로 인해서다.
‘응?’
소나무 뒤로 전복은 몸을 감췄다.본능적이고 반사적인 그 움직임 속에서 봤다.여자들이 개간에 열중인 들 저편의 움직임이다.분명 야수족 같은 존재가 시야에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잘못 본 게 절대로 아니다.
‘그놈 패거리 구나!’
여태 살면서 만든 예감이 칼날처럼 곤두서며 외친다. 그놈들이 다시 찾아온 거라고.
‘명희를 납치해가려했던 놈, 그 패거리.’
흉하게 생긴 가면을 쓴 것처럼 인상을 험악하게 만든 전복은 소나무 아래 놓아뒀던 장비를 착용했다. 늘 한 몸처럼 지니는 단검 다섯 자루, 검과 소총과 핸드건까지, 빠르게 착용했다. 그리곤 들을 돌아서 달려갔다.
* * *
거대수들을 가르며 비상해온 반월륜, 블랙블러드의 사징과도 같은 병기들이 폭발하는 광경을 강흑성은 흑청빛 눈동자로 응시했다. 폭발력을 퍼트리는 동시에 무수한 비침으로 확산하는 공격, 휩쓸리면 죽음이다.
‘철벽(鐵壁).’
의지를 떠올리며 강흑성은 움직였다. 장봉처럼 만든 은빛 사슬을 휘돌렸다. 강력한 태풍을 일으키는 그 회전으로 철의 벽을 만들었다. 그 위를 폭발력과 비침들이 강타했다. 강흑성은 주르륵 밀려났지만 막아냈다.
“내 차례다.”
지옥사신이 뱉는 죽음의 선고와도 같은 한마디, 신음하는 수림 속으로 목소리를 흘려낸 강흑성은 발끝으로 땅을 차며 나아갔다. 탄환이 폭발해 나가는 것처럼, 흐르는 바람처럼 블랙블러드 살수들에게 쇄도했다.
‘철퇴(鐵槌).’
사슬의 장봉을 휘돌리며 강흑성은 내리쳤다.흑사검을 갈라내는 블랙블러드 특급살수의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갈라 내렸다.두쪽으로 흩어지는 그 육신을 몸으로 받으며 횡으로 돌았다.좌우의 두놈을 분리했다.허리가 나뉘어 뒹구는 두 놈의 살수, 그들이 착용한 라이트갑주의 효능 같은 건 애초에 없는 결과를 내며 강흑성은 휘몰아쳤다. 곤봉으로 화한 사슬을 후려치고 돌려 치고 찍어버리며 살수들의 형상을 파괴했다.
“폭멸!”
귀청을 강타하는 강력한 일갈이 공격지시라는 걸 강흑성은 알았다.블랙블러드 살수들은 일제히 거릴 벌리고 물러난다.그 뒤에서 포신을 어깨에 멘 놈들이 나섰다.저게 이동형 캐논포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철강(鐵鋼)!’
온 몸의 힘을 다 모아 강흑성은 그 의지를 발산했다.그 찰나 블랙블러드 놈들의 발사관이 섬광을 토해냈다.전부 다섯 문의 화기, 시야를 멀게 하는 광휘가 덮쳐온다.마치 산탄총처럼 퍼져 나오는 화력이다.형용키 어려운 충격을 받은 강흑성은 뒤로 날아갔다.거대수와 충돌하고 연속해서 튕기는 공처럼 수림 속을 굴렀다. 그렇게 다시 숨을 쉬었다.온몸이 뜨거운 것과 마찬가지로 뱉어내는 숨도 뜨겁다. 하지만 견뎠다.
‘멀쩡해······!’
사지육신 아무 곳에도 피해가 없는 걸 확인하며 강흑성은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아무 피해가 없는 건 아니다. 의복은 걸레가 됐고 머리카락은 다 타버렸다. 그렇지만 근골의 부상은 없다. 내상도 전혀 입지 않았다.
‘철강의 의지를 해냈구나······!’
공격 받던 그 순간에 솟구쳐 나온 의지의 결과를 확인했다. 블랙블러드가 사용한 저 무기가 뭔지 모르지만 무지막지 하다. 강흑성 자신이 서 있던 곳으로부터 이십여미터를 날아왔다. 주변수림은 공터로 변해 버렸다.
“이젠 정말로 내 차례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은 강흑성은 다시 걸음을 냈다.
* * *
개간지의 뒤로 돌아간 전복은 놈들의 숫자를 파악했다. 여자들이 일하는 개간지 쪽으로 옅은 비탈이라 자연히 형성된 둔덕 뒤로 몸을 숨긴 놈들, 모두 여섯이다. 츄란족과 흑랑족에 검은 엘프와 라이피언까지 있다.
‘대전인근에서 암약하는 흑도패 놈들.’
상대에 대한 정체성을 짐작하며 전복은 소총을 잡았다.바위 밖으로 총신을 내놓고 조준했다. 그런데 우측에서 섬광이 터졌다.본능적으로 몸을 피했고 바위에 불꽃이 튀었다.돌가루를 맞으며 미친 듯이 굴렀다.
‘날 주시한 놈이 따로 있었던 거야!’
상대에 대해 경시하는 마음을 전복은 완전히 버렸다. 맹수는 작은 짐승을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한 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야 하는 거다. 하찮은 흑도패라고 얕봤다가 큰 코 다친다. 어쨌거나 이젠 돌려줄 때다.
‘이새끼들!’
전복은 수림을 향해 달리며 쫓아오는 놈들을 돌아봤다. 여자들을 염탐하던 여섯 놈이 전부 달려온다. 수림 경계에서 저격한 놈은 계속 총을 쏜다.
‘이런 일, 수백 번은 겪었다!’
수림 안으로 몸을 던져 구른 전복은 방향을 바꿔 달렸다.저격수 놈이 있는 곳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당황한 놈이 저격위치에서 이동하는 게 보인다.거리를 따라잡히는 데 놀란 얼굴로 돌아보는데 인간이다.당황한 놈이 핸드건을 발사하는 순간 전복은 몸을 앞으로 날렸다.소총을 양손으로 쥔 모습으로 고양이처럼 바닥을 굴렀다. 그 탄력으로 점프해 오르며 거대수룰 차고 방향을 바꾸는 것과 같이, 단검을 던졌다.섬광처럼 날아간 단검은 목표를 맞췄다.미간에 정확하게 박혔다.핸드건을 놓치고 저격소총도 떨군 인간은 부들거리는 경련을 보이며 쓰러졌다.
“계산은 하고 가셔야지.”
죽은 자를 뛰어넘어 달리며 그 말을 던진 전복은 다시 수림을 우회해 달렸다.
* * *
장봉으로 내려친 사슬은 땅을 치고 튕겨 오르며 연편이 됐다. 용틀임처럼 휘어지고 풀리며 살수들의 형상을 휘감았다. 발사관과 같이 살수의 육신을 휘어 감고 흩어버렸다. 다섯 문의 화기는 한순간에 동강났다.
‘저놈!’
충격으로 치뜬 눈을 다스리지 못한 채 우인관은 적을 바라봤다.블랙블러드 특급살수들을 어린애들처럼 살상하는 놈, 저놈이 지금 펼치고 있는 무공은 분명히 그것이다.유성의 무공 철룡이십사식, 의심의 여지없다.
‘삼황포의 공격을 견뎌내다니!’
충격의 충격 속에서 우인관은 결정을 내렸다. 이런 상황에 대비한 준비다.
“흑관을 열어라!”
우인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블랙블러드 살수들은 새카만 암흑빛의 흑관을 대령했다. 잠금장치를 해제하자 흑관은 하얀 기류를 사방으로 뿜어냈다. 그렇게 정확히 일초가 지난 순간 흑관의 덮개가 하늘로 치솟았다.
* * *
뒤쫓아 오는 흑도패 놈들 뒤로 우회해 달리며 전복은 놈들의 당황을 확인했다. 저격수가 당한 결과, 상대가 오히려 뒤로 돌아오는 상황인 거다.
‘난 계산하나는 확실하다니까?’
차가운 미소를 얼굴에 두르고 전복은 흑도패 놈들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설마 이렇게 바로 달려들 줄은 몰랐기에 놈들은 더 당황한 얼굴이다. 하지만 그건 짧은 순간, 각자의 병기를 쥐고 마주 공격해 나온다.머리 위를 스쳐가는 핸드건의 궤적을 느끼며 전복은 몸을 던졌다.여섯 놈의 중앙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칼날 두 개가 지나가는 아래로, 놈들의 사이를 지났다.브레이크를 밟듯이 흙을 밀고 돌아 일어섰다.검을 두 손으로 움켜잡은 전복은 당황해 돌아보는 츄란족 놈의 머리를 후려쳤다.그 옆의 흑랑족놈을 향해 휘돌린 몸의 회선각으로 칼을 쳐내고 연속해 돌아 목을 쳤다.놈의 머리가 떠오를 때 블랙엘프를 갈랐다.
* * *
하늘로 치솟아 올랐던 관 뚜껑이 바닥에 떨어질 때 관에서 누군가 일어섰다.새카만 나신의 몸을 한 자다. 마치 먹물에 담갔다 뺀 것 만 같다.그런데 저 얼굴을 안다.백인인간 남자의 얼굴, 푸른 저 눈동자를 안다.
‘카슨!’
강흑성은 호흡을 멈추고 경직했다. 관에서 걸어 나오는 자가 던지는 시선엔 든 감정을 읽었다. 의혹과 분노와 살의, 강흑성 자신을 알아봐서다.
“너로구나.”
카슨은 웃었다. 그리고 걸음을 냈다. 샹그릴라에서 죽음을 맞고 후송된 북부지구정찰대 팀장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서다. 그 힘을 드러낸다.
“나는 날개를 달았다.”
사악하고 무서운 미소를 피워내는 카슨의 등에서 날개가 돌출했다. 거대한 박쥐의 날개다. 그것이 펄럭대며 내는 바람이 강흑성을 흔든다.
“네놈이 누군지 전혀 몰랐다.”
카슨은 악마의 현신 같은 모습으로 목소릴 이어냈다.
“뭐든 상관없어. 샹그릴라에서 날 죽음으로 몰아넣은 붉은 엘프놈도, 마인 놈도, 너희들 샹그릴라 일당도. 내가 널 죽일 거라는 거. 그것만 알자.”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호한 그 말을 던지고 카슨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크흐······!”
잘린 팔을 움켜잡고 부들거리는 놈, 라이피언 족의 목에 전복은 검을 들이밀었다. 턱이 들린 놈은 죽음의 공포로 더 부들거린다. 곁에는 동강난 사체로 변한 동료들이 있다. 그 피를 깔고 있는 이순간이 두렵다.
“마, 말한대로요, 다, 다른 패거리는 더 없소, 제, 제발 목숨만은······”
그 순간 전복은 검날을 강하게 찔러 넣었다. 라이피언 족은 경직했다. 인후를 파고 든 검날이 목뒤로 빠져나간 감각 속에서 죽음으로 끌려갔다.
“내가 왜?”
미소 지은 전복은 뒤늦은 대답을 던졌다.그렇다, 왜 살려준단 말인가?전복 자신을 죽이려한 놈들이다. 여자들을 노리고 접근한 악종들이다. 살려둘 이유가 하나라도 있다면 모를까, 이것들은 죽이는 게 정답이다.
“아 오랜만에 피 봤더니 개운하네. 음, 오랜만은 아닌가?”
춘천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미간을 옅게 찌푸렸던 전복은 검을 갈무리했다.죽인 자들을 돌아보며 전후를 다시 점검했다.이놈들 말대로 다른 패거리는 더 없는 걸로 확신된다. 그렇지만 위험이 사라진 건 아니다.
‘이런 놈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으니까.’
퉤 하고 침을 뱉은 전복은 수림을 나갔다. 뒤에선 기다리던 것들이 움직이는 기척이 들린다. 군대의 토벌로 수림을 벗어나오지 못하는 것들, 죽어버린 자들의 시신에 달려들어 으르렁거린다. 그 소리가 새삼 지겹다.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여전히 들을 개간하는 여자들을 바라보며 전복은 긴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