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98. 내일을 준비한다는 것은.
98. 내일을 준비한다는 것은.
아침부터 신이 난 얼굴로 나가는 준후를 보며 최창수는 옅은 애상을 삼켰다. 명희와 제닌과 진숙이와 샤이닌을 달고 다니는 준후는 제 세상을 만난 것 같다. 주변의 다른 아이들과도 어울려 노느라 매일 정신이 없다.
‘한 번도 저렇게 놀아 본 적이 없으니까.’
이제 열 살에 불과한 사내아이다. 제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저렇게 즐거워 한 경험이 없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현실이다. 슬픈 그 현실을 곱씹을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 삶인 거다. 그렇지만 여기서 하고 있다.
‘춘천에선 주변 아이들과 접촉할 기회조차 없었지.’
블랙시티, 그곳은 분명 사람들과 이종족이 모여 사는 곳이었지만 주위와 교류하는 삶을 살수는 없는 곳이었다. 아이들을 위한 시설 같은 게 전무하다. 그런 생각조차 아무도 안 한다. 준후 역시 점포 일만 했다.
‘살아나가는 것만 생각해야 하는 세상······’
새삼스레 자각하게 되는 현실의 암울함에 최창수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건물 앞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야기 하는 준후의 목소리가 들린다. 입구로 나가 밖을 내다보니 준후의 뒷모습과 아이들이 보인다.
“절대로 이 주변을 벗어나면 안 되는 거야, 다들 알지?”
명회의 제닌과 진숙이와 샤이닌을 포함한 주변아이들은 십여 명이 넘는다. 모두들 제비새끼가 어미를 보듯이 준후를 본다.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사람을 보게 되면 도망치는 거고, 여차하면 신호를 내는 거야. 자 이게 오늘 우리가 만들 거야, 호루라긴데, 이걸 불면 돼.”
아이들에게 대나무 자른 걸 나눠주는 준후를 보며 최창수는 이제 깨달았다.저걸 구해달라고 전복에게 말한 이유가 바로 호루라기 제작이다.하나씩 목에 걸고 다니다가 위험한 상황에 되면 불도록 준비하는 거다.
‘저놈······’
준후에 대한 옅은 경탄으로 최창수는 부끄러움을 품었다. 아이가 저렇게 하는 동안 어른인 자신은 아무 생각도 없었던 거다. 준후가 저러는 건 이곳에 오던 날 명희가 당한 일 때문이다. 스스로 준비하고 있는 거다.
“준후가 정말 대견하네요.”
곁으로 다가온 카이오의 낭랑한 목소리에 최창수는 움찔하며 반응했다. 마음속의 부끄러움을 들킨 것 같아서다. 그런데 그 말을 카이오가 한다.
“저 아이들을 보기가 부끄러워요.”
아침 햇살을 받는 얼굴로 카이오는 목소리를 이어냈다.
“어른이 돼서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게 정말로 부끄럽고 안타까워요. 마음 놓고 뛰어 놀 곳조차 없는······ 배우는 것도 못하는 아이들······”
카이오의 안타까움 가득한 음성을 귀에 담고 최창수는 다시 현실을 삼켰다.가르침, 배움, 그런 공간이 있었다는 걸 안다.그건 학교다.최창수 자신도 이름만 들어봤을 뿐인 곳, 지구가 망하면서 다 사라진 곳이다.
‘사는 법을 배우고 익히는 것 자체가 삶인 세상.’
모든 곳이 학교고 모든 대상이 선생님인 거다. 그런 속을 살아왔다. 한사람 몫을 해낼 수 있을 무렵 들어간 조직에서 적당히 읽고 쓰기를 익혔다. 누가 가르쳐 준 게 아니고 터득한 거다. 지금도 복잡한 건 모른다.
‘총 쏘고 칼 쓰기가 제일 중요한 과목.’
생존해야 하기에 너무나 당연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는 혼이 나간 존재가 됐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그래서 살아 있음을.
“화성은 어떤 곳일까요?”
문득 하늘로 시선을 올린 카이오는 그 말을 냈고, 최창수는 잠시 뒤에 입을 열었다.
“지구처럼 바다도 있다고 하더이다.”
시선을 돌린 카이오는 놀람을 담은 눈으로 되묻는다.
“바다요?”
고개를 끄덕인 최창수는 자신이 아는 이야기를 했다.
“화성은 지구처럼 이렇게 숨 쉴 수 있는 곳이 아니었소. 태양이 풀어내는 자외선의 영향으로 대기밀도가 낮아서요. 화성으로 이주하자면 그걸 해결하는 게 문제였지만, 처음 이주민들은 기지를 건설했기에 문제는 없었소.”
그러나 그 후로 계속해서 지구의 이주민을 받아야했기에 근본적인 해결책을 만들어야 했다. 그 일을 해낸 거다. 화성과 태양의 사이에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어 올렸다. 위성이다. 그것이 자외선광해리 현상을 막았다.
“대기 밀도가 지구처럼 높아져 사람들은 숨 쉴 수 있게 됐지만 물은 여전히 문제였소. 대기가 해결돼서 그 문제도 자연히 해결될 것이었지만 화성은 더 빠르고 강력하게 해결한 거요. 화성 내부의 물을 찾은 거지.”
놀란 얼굴의 카이오를 돌아본 최창수는 그녀가 전부 처음 듣는 이야기한 걸 알았다. 그런데 정말로 궁금해 한건 그런 역사가 아니라 삶이다.화성에서 사는 삶, 지옥 같은 이곳과는 분명히 다를 안전하고 행복한 삶.
“화성은······”
다시 입을 열었지만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최창수는 망설였다. 그 순간 카이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말을 냈다.
“지구는 다시 예전처럼 될 수 없는 걸까요?”
꿈틀, 미간을 좁힌 최창수는 카이오의 간절함이 담긴 눈을 응시했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웃으면서 살 수 있는 그런 곳이 될 수 없을까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를 최창수는 이어 나온 카이오의 뒷말의 울림에 휩싸였다.
“우리가, 어른들이 그렇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 * *
미사일처럼 하늘로 날아 오른 카슨을 보며 강흑성은 철혼을 뽑았다. 자루 끝의 고리에 사슬을 넣어 연결했다. 그리곤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예상대로 카슨은 하강한다. 흡사 낙뢰가 떨어지는 것처럼 빠른 속도다.
‘와라.’
몸을 돌린 강흑성은 수림 속으로 질주해 들어갔다.거대수들 사이를 바람처럼 나아갔다.뒤에서 수평비행을 해오는 카슨을 느끼면서다.놈의 커다란 박쥐날개는 칼날 같다. 거대수들을 갈라버리는 파워가 엄청나다.수림은 갈라지며 수평의 통로를 만들고 있다. 강흑성을 쫓아가는 카슨의 날개가 모든 걸 갈라서다. 그런데 강흑성의 속도가 조금씩 따라잡힌다.
“끼야하!”
즐거운 괴성을 지르며 카슨은 오른 팔을 뻗었다. 하박을 덮고 있던 금속비구가 빛을 토했다. 광구가 포환처럼 날아간다. 강흑성을 강타했다.등에 광구를 맞을 찰나 강흑성은 트위스트로 돌았다.광구는 간발의 차로 스쳐지나갔고 수림을 폭발시켰다.그 순간 강흑성으로부터 검이 터져 나갔다.사슬과 연결한 검 철혼, 총구를 떠난 빔줄기처럼 뻗어나갔다.눈을 치뜬 카슨이 회피비행으로 몸을 돌렸지만 늦었다.작살처럼 날아온 검은 오른 날개를 뚫었다.그게 끝이 아니다.번개처럼 돌아갔다 다시 폭발해 나온다.날개와 팔과 다리가 그 궤적에 스쳐 화끈한 감각이다.
“이!”
분노를 가누지 못한 채 카슨은 땅을 밟았다. 검을 뽑아들고 터져 나오는 강흑성의 공격을 받아내면서다. 그런데 빗발 같은 공격이 한순간 멈췄다.철혼을 잡고 움직임을 멈춘 강흑성, 반응하며 멈춘 카슨.무섭게 응시하는 카슨의 시선 속에서 강흑성은 변화를 인지했다.
‘그렇구나.’
철혼을 날려 만들어준 카슨의 상처들이 아물고 있다.게다가 근육들이 팽창하고 있다.마치 갑옷을 두른 것 같다.
“놀라우냐?”
섬뜩한 미소를 입가에 피워낸 카슨은 전투대검을 빙그르 돌리며 뒷말을 냈다.
“네놈들이 준 선물이다. 난 그날 샹그릴라에서 죽었지. 그래, 그건 죽은 거야. 그런데 날 치안총국에서 데려갔어. 화성연구소에 재료로 줬다 이 말이야. 그게 무슨 이해관계로 인한 건지를 내가 따지는 건 부질없지.”
거기까지 말한 카슨 시선을 내리고 땅을 응시했다. 그러다 다시 강흑성을 응시했다.
“네놈을 처음 봤을 때부터 예감이 그랬어. 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고 하긴 그렇고, 뭔지조차도 모를 막연한 껄끄러움?”
카슨은 다시 입가에 미소를 피워냈다.
“죽을 때 나는 맹세했다. 너희들을 다시 찾을 거라고.”
걸음을 내며 카슨은 무지막지한 살기를 발신했다.
“네가 뭐든 상관없다. 널 죽일 거다.”
세 걸음 째에 카슨은 폭발해 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강흑성은 나직이 말했다.
“나도 그래.”
* * *
“흐윽······!”
고통스러운 숨을 삼킨 매그넘은 다가오는 상대를 봤다. 왼다리를 잘라버린 장본인, 아우리엘이란 이름을 가진 하프엘프, 아니 저놈은 가라운이다. 레드파운틴족의 전설이 말하는 존재다. 왜 저놈을 만나게 됐을까.
‘어째서······!’
심중의 절규를 부르짖으며 매그넘은 주변을 돌아봤다.자신의 목숨을 건 주술은 전부 파훼됐다.수림에서 불러낸 괴수들도, 그들이 뭉친 원괴도, 흑강석인간들도, 모조리 아우리엘의 푸른 뇌전의 칼질에 흩어졌다.
‘이렇게 죽는 다고? 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세상을 바꾸고 지배해야 할 존재가 매그넘 자신이다.주술사로서 태어났다는 걸 자각하고, 그 힘을 깨우치며 그려온 세상의 지배자가 자신이다.그런데 붉은 엘프족의 전설 가라운에게 죽는다.
“쿠헥!”
토혈하는 매그넘의 십미터 앞에 아우리엘이 멈춰 섰다. 엷은 미소를 품은 눈으로 좌우를 돌아본다. 초토화된 수림 안의 잔해들, 자신이 파괴한 존재들을 눈에 넣는다. 그 원인이 되는 자, 매그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죽인다고 했잖아.”
내가 사탕 준다고 했지?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아우리엘, 그 푸르고 붉은 눈을 매그넘은 고개 들어 응시했다. 절로 악물리는 입을 힘겹게 열었다.
“넌······ 뭘 어쩌려는 거야?”
아우리엘은 환한 미소를 풀어내며 되묻는다.
“그게 궁금해?”
피 흐르는 입술을 악문 매그넘은 처절한 심정을 토해냈다.
“나는 세상을 가지려고 했다······! 할 수 있었어······!”
쿠웩하는 소리로 또 토혈한 매그넘은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아우리엘을 다시 응시했다. 그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자조인 동시에 비웃음이다.
“그렇다고 생각했지, 믿었어,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사이를 둔 매그넘의 남은 말이 나왔다.
“네놈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듣고 있던 아우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소린지 알겠어.”
짐짓 미간을 좁힌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한 아우리엘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네 꼴처럼 될 수 있겠지.”
아우리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 뭐 어때?”
부들거리는 매그넘의 창백한 얼굴을 행해 아우리엘은 한층 더 환한 미소를 던졌다.
“난 강흑성이 살아서 찾아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재밌잖아?”
아우리엘의 얼굴에선 미소가 느릿하게 사라졌다. 그 대신 손이 푸른 뇌전의 칼이 나타났다.
“나는 붉은 하늘을 여는 자 가라운이다.”
아우리엘의 벽력뇌전도가 매그넘을 향해 뇌전을 터트렸다.
* * *
괴수들의 특질로서 존재를 다시 이룬 자, 카슨의 벼락같은 공격을 강흑성은 흘려냈다. 그야말로 뇌전이 스쳐간 것 같은 카슨의 움직임을 피해 달렸다. 이비 봐둔 불나무와 그 덩굴지대다. 그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도망치게 안 둔다!”
카슨은 지상비행하는 건쉽처럼 움직였다.강흑성의 뒤를 따라 덩굴지대로 들어갔다.검을 휘둘렀고 날개로 덩굴과 나무들을 갈랐다.그 결과가 왔다.불나무수액이 터져 비처럼 덮쳤다. 강산(强酸)의 비를 맞는 거다.
“뭐야!”
생각지 못한 상황에 카슨은 당황했다. 몸을 태우고 들어오는 산성수액이라니, 이런 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날개가 구멍 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전신을 불구덩이에 든 느낌이다. 이대로 있다간 녹아서 죽게 될 거다.
“이!”
몸을 돌린 카슨은 덩굴숲을 빠져나갔다. 커다란 박쥐날개로 몸을 덮은 채로다. 그런데 그놈, 강흑성이 앞에 있다. 사슬을 연결한 검을 날린다.벌컨의 포화처럼 터져 나오는 철검의 회오리, 그 아래서 갈라지고 동강나고 조각나는 불나무와 덩굴 숲은 강산의 폭우를 카슨에게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