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99화 (100/172)

혹성강호. 99. 죽음의 의미.

99. 죽음의 의미.

탄환이 다 떨어진 t-rex를 허망하게 내려다보던 박준은 미련 없이 버렸다.쓸 수도 없는 커다란 총기는 행보에 짐만 될 뿐이다.박현과 무슬란이 지녔던 건 진즉에 버렸다. 원체 둘에게 잘 맞지 않았기도 했다.

‘이제 빔라이플 뿐인데.’

움켜쥔 소총의 감각을 느끼며 걸음을 내던 박준은 고갤 뒤로 돌렸다. 수풀에 묻어버린 괴수사냥총에 대한 새삼스런 미련이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렉의 시선을 느끼고 다시 앞을 봤다. 그렉은 제 무기를 양보했다.

‘자식이 으스대는 꼴은.’

솔직히 그렉이 그렇진 않다. 빔라이플을 건네면서도 아무 말 안했다.박준 자신도 그냥 받았다.그렉에겐 핸드건이 있고 본래가 무인이니까 하는 마음이었다.아니 그보다도 지금 가장 중요한 게 안전한 이동이어서다.

‘흑성이가 무사해야 할 텐데.’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세력 블랙블러드와 싸우는 거다.그놈들을 홀로 유인해 갔다.여태 봐온 강흑성이라면 절대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지만 초조하고 걱정이 된다.이전과 같지 않아서다.

‘마검이 불어넣었던 힘을 다 뺐긴 건데······’

강흑성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 제어하기 힘든, 불가사의한 힘이 내부에 있었다는 거다. 호수에서 주술사의 공격을 받을 때 그 힘을 썼다고 한다.흑강석 산을 흙으로 만들어 버린 힘이 그거라는 거다.이제 이해가 간다.

‘그런 건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건데 흑성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넘긴 거야.’

여태 겪어온 일이 그래서다.불가능한 사건들을 강흑성은 가능으로 만들어냈다.그래서 그 일도 그렇게 받아 들였다.주술사의 공격이었다는 걸 알고는 주술이 깨진 것이라고 여긴 거다.그런데 마기의 위력이었다.

‘그런 무서운 힘을 아우리엘 그놈이 빨아먹은 거야······!’

아우리엘을 생각하니 다시 분노가 치솟고 마음이 복잡해진다.어쩌다 그놈을 만난 건지 정말 모르겠다.여자라고 생각할 외모를 가진 놈, 하프엘프놈, 레트파운틴족이 정체인 놈.붉은 하늘을 여는 가라운이란 존재.

“제기랄 개신발······!”

이 가는 숨을 흘려내는 박준에게 앞서가던 그렉이 손을 들며 멈춰 섰다. 긴장한 박준은 즉각 자세를 낮췄고, 그렉은 전방을 주시하며 말했다.

“현이랑 무슬란이 뭔가 찾은 것 같습니다.”

그렉의 어깨너머를 박준은 넘겨다봤다. 웃자란 수풀들 저편 수림의 경계에 동생 박현과 무슬란이 있다. 이렇게 앞서나가면서 위험을 감지하는 거다. 수림으로부터의 위험과 들길로부터의 위험, 현재의 행보가 그렇다.

“수림 쪽에 뭔가 있는 건가?”

박준이 의문을 말하자 그렉은 우측으로 눈길을 돌렸다. 옛 도로가 사라진 자리의 들길이다. 아침햇살이 내리치는 그곳에 별다른 위험은 없다.

‘수림과 들길의 경계로 이동하는 건 잘하는 게 맞는데······’

거구지만 숲의 종족인 움바바족 박현과 무슬란이 앞서나가 살피는 것도 맞다. 이런 식으로의 이동은 더디지만 확실하게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그런데 마음은 강흑성에게 가 있다. 그가 홀로 무사할지가 걱정이다.

‘함께 있는 자체가 짐.’

그래서 이렇게 따로 행보하고 있지만, 그게 현명하고 냉철한 판단이지만 가슴이 무겁다. t-rex의 탄환이 떨어진 것도 한 몫을 더했다. 결국 빈총이 되고 말 것은 정해진 일이었던 터, 그게 마치 일행의 처지 같다.

‘탄환을 구할 수야 있겠지만······’

신남경이나 서주 같은 도시를 찾아가면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의 필요와 판단에 의해 버렸다. 흔적을 발견 못하도록 땅에 파묻었다.

‘재장전된 총처럼 된다고 해도 우리가 이 땅에서 뭘 할까······’

애초의 목표였던 박현의 다리를 구했다.목적을 이뤘으니 돌아가는 게 맞다.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강흑성인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정말로 강흑성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다.저마다 가슴에 품은 것들이 있다.

‘난 돌아갈 곳이 없어.’

강흑성에게도 말했고 일행에게도 말했다.그건 엄연한 현실이고 진실이다. 그런데 그렇기는 박준과 박현과 무슬란도 마찬가지다.저들도 모든 걸 잃었고 돌아갈 곳이 없다.그렇지만 이 땅에서 찾아가야 할 곳도 없다.

‘흑성이가 가려는 곳으로 우리가 간다는 건······’

호랑이 얼굴의 미간을 꿈틀거리며 생각하던 그렉은 박현의 수신호를 봤다.

“뭔가 확실히 있다.”

박준의 뜨거워진 숨소리를 느끼며 그렉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보죠.”

그렉이 앞서나가고 박준이 뒤따르며 수풀을 헤쳐 전진했다. 블랙블러드의 추적은 없을 거라고 확신할 정도로 시간이 흘렀고 거리가 벌어졌지만 방심할 수 없다. 둘은 거대수 아래 웅크린 박현의 뒤로 붙었다.

“뭐냐?”

박준이 물음을 내자 박현은 수림 안쪽의 무슬란을 가리켰다.역시 웅크린 모습의 그가 일행이 보라는 듯 뭔가를 들어올린다.짐승의 머리다.그런데 그냥 머리가 아니라 여러 동물이 엉겨 붙은 머리, 뭔지 안다.

“저거!”

자신도 모르게 소릴 냈던 박준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그렉도 안면을 경직했고 박현은 작게 이가는 소릴 냈다.일행이 모를 수가 없는 저것은 주술사의 작품이다.이곳에 저런 게 있다는 건 그놈이 있다는 소리다.

“가 보자.”

박준은 먼저 움직였다. 움찔했던 그렉은 박현이 따라가는 걸 보고 움직였다. 피해갈수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정말로 그 주술사 놈이 근처에 있다면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놈을 피할 방법을 찾거나 만들어야 한다.

‘흑성이가 없는 상황에서.’

새삼 강흑성이란 존재의 무게를 삼키며 그렉은 현실을 엄중히 곱씹었다.도움만 생각해야 하는 처지의 자괴다.도대체 무엇 하러 이 땅에 왔으며 무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이렇게 사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렉아, 두렵냐?’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며 그렉은 수림 안으로 들어갔다.

‘죽는 게 두려워서 도망쳐 왔잖아? 처음부터 그랬잖아?’

거듭된 자문을 심중으로 소리치며 그렉은 박준과 박현의 뒤로 멈췄다.

‘여기서는 더 도망갈 데가 없잖아? 그렇지?’

그렉은 자신의 얼굴에 자조가 피어나고 있는 걸 몰랐다. 처절한 비애가 깃든 미소, 안면의 일그러짐으로 변하는 그 미소 끝에 나직이 말했다.

“죽게 되면 죽는 거야.”

그렉이 뱉은 그 말에 박준과 박현과 무슬란이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셋은 기묘한 눈빛으로 그렉을 응시했다. 하지만 아무도 아무 말도 안했다.

“매그넘이란 그 주술사놈이 여기서 싸운 것 같은데요?”

현실로 의식을 완전히 고정한 그렉은 주변 흔적을 살피며 말했다.

“그래, 분명히 그런 흔적이다. 싸울 상대라면 아우리엘이겠지.”

역시 냉철한 눈빛이 된 박준의 대답, 무슬란이 생각을 보탠다.

“주술사 놈이 당한 것 같잖아? 그렇지?”

일행은 동의했다.수림 안으로 이어진 파괴의 흔적은 일방적이다.수림에 통로를 만들려는 것처럼 깊게 들어갔다.주술사가 부린 괴수들의 사체가 널려 있고 에너지를 빨린 거대수들이 고사목으로 변해 말라 있다.

“들어가 보자.”

박준의 이 악무는 목소리를 따라 일행은 수림 안으로 이동했다. 여기저기서 달려온 수림 안의 청소부 놈들이 괴수들의 사체를 뜯어먹다가 울음을 토한다. 덤벼드는 놈들은 박현과 무슬란이 작두칼로 동강냈다.

“저기다!”

소리친 박준은 달려갔다. 공터로 변해버린 수림의 한가운데 멈춰 섰다. 뒤따라 달린 그렉과 박현과 무슬란도 눈을 치뜨고 주변을 돌아봤다.죽음의 공간으로 변한 수림 안의 공터.이곳이 처음부터 공터는 아니었다.주술사 매그넘과 아우리엘의 싸움으로 이렇게 된 거다.괴수사체들이 널려있는 건 그저 장식수준이다.이 공간은 철저하게 죽음을 맞았다.

“주술사놈이야······!”

신음처럼 나온 박현의 목소리를 향해 일행은 시선을 돌렸다.거대수 아래 매그넘이 있다. 하얀 얼굴과 파란 눈으로 위를 보고 누워 있다.그런데 다리 하나가 없다.가슴엔 불태워진 큰 구멍이 있고 목은 잘려 있다.

“개신발······!”

박준의 떨리는 욕이 퍼져나가는 가운데 일행은 떨리는 숨을 이어냈다.

* * *

“크아아아!”

고통스러운 괴성을 지르며 카슨이 튀어나왔다.검은 근육갑옷 같던 육체가 불나무수액을 뒤집어써 녹고 타들어간다.커다란 날개는 뼈대만 남았다.그마저도 수액이 녹여내는 힘을 이기지 못해 꺾어지고 떨어진다.땅바닥을 뒹굴며 몸부림치는 카슨.그 모습을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며 강흑성은 움직이지 않았다.화성연구소에 의해 만들어진 육신이 타고 녹아들어가고 있다.온몸이, 어깨와 가슴과 팔다리의 뼈가 다 드러났다.

“크어어······!”

부들거리는 경련 속에서 카슨은 고개를 들었다.처참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묻는다.이게 대체 뭔지,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하질 못한다.수림을 모르는 자, 불나무에 대해 알지 못하니 당연하다.

“난 죽음과 함께 살아왔거든.”

카슨을 향해 그 말을 던진 강흑성은 지난 기억을 더듬었다.어머니와 같이 살던 시절의 기억, 언제나 모든 걸 경계하고 살아야 했던 시절이다.수림의 작은 풀 한포기라도 의심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불나무는 그런 것 중의 하나다.수림 밖의 존재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수림의 짐승들도 피하는 것이 저것이다.괴수를 사냥한다는 자들도 수림 깊은 곳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기에 알지 못하고, 불나무는 희귀하다.

“크으, 너어······!”

부들거리는 몸을 다시 세우는 카슨을 강흑성은 멈춰 선채로 지켜봤다.불나무수액에 타들어가면서도 일어서는 힘의 원천이 눈에 보인다.육신이 재생되고 있다.드러났던 뼈들이 감춰지고 갑옷 같은 근육이 덮인다.

“도마뱀 같은 몸이구나.”

무덤덤하게 그 말을 던진 강흑성은 철혼을 가슴 앞에 세웠다. 그 순간 카슨이 복원한 날개를 펼쳤다. 악귀 같은 괴성을 터트리면 폭발해 나왔다.

* * *

“무슨 일이 있었군.”

최창수의 물음에 전복은 무기들을 내려놓으며 힐긋 시선을 던졌다. 오전 일을 마치고 들에서 돌아온 여자들이 휴식을 취하는 걸 본 후 말했다.

“명희를 남치하려고 했던 놈들을 손봐줬어.”“뭐? 그놈들이? 패거리가 기회를 보고 있었다고?”

단박에 전후를 파악한 최창수의 놀람과 분노에 전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과 야수족으로 구성된 흑도패거리였어. 해결했지. 다른 놈들은 없는 걸 확인했고. 그런데 그건 해결한 놈들뿐인 거고. 일이야 또 생길 수 있지.”

물을 마시는 전복을 보며 최창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는 말이야. 그런 일은 언제 어디서든 생길 수 있지.”

물 잔을 내려놓은 전복은 호기를 부렸다.

“그래서 우리가 있잖아. 오늘처럼 내가 해결하는 거지.”

전복의 눈을 응시한 최창수는 뭔가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그걸 전복은 알았다.

“뭔데? 왜 그런 얼굴인데?”

최창수는 의자에 앉으며 깊고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마주 앉은 전복은 눈으로 계속 물음을 던졌고, 다탁을 보던 눈을 든 최창수는 입을 열었다.

“어떻게 죽어야 하나 생각해 봤어.”“뭐?”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린가 하는 전복에게 최창수는 뒷말을 냈다.

“언젠간 죽겠지. 영원히 살수 없으니까 당연한 거야.”“그래서?”“살기 위해 발버둥치며 여기까지 왔는데······”

최창수의 눈에 든 것의 크기를 전복은 가늠키 어려웠다.뭔지 모를 깊고 무겁고 큰 것이다.회한이면서 깨달음이기도한, 그런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마지막은 죽음이란 걸 알겠더군.”

이어 나온 최창수의 결론, 전복은 죽음이란 말을 곱씹었다.

‘죽음? 죽어? 그렇지, 마지막엔 죽지. 누구나 다 그렇지.’

갑자기 오한 같은 게 밀려와 전복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최창수가 하는 말이 뭔지는 정확히 몰라도 알 것 같은 기분이다.이 삶의 한계다.

“그래서? 어떻게 죽어야 잘 죽는 걸까를 생각했다는 건가?”

반발처럼 튀어나온 전복은 반응에 최창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어떻게 죽는 게 잘 죽는 건지 생각했지. 그게 뭘 것 같나?”

뭐라고 반응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이는 전복에게 최창수는 말했다.

“우리처럼 살지 않아도 되게 만들어 주는 거지, 아이들에게.”

전복은 순간 안면을 경직했다. 그러다 눈꺼풀을 떨며 시선을 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