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100. 악연은 필연으로.
100. 악연은 필연으로.
‘저런 게 있었다니!’
나무의 수액이 강산이라니 놀랍다. 그 수액을 맞은 카슨은 거의 녹아버렸다. 그렇지만 다시 육신을 복원하고 저렇게 싸운다. 화성연구소의 능력이 새삼 감탄스럽다. 그곳에선 또 어떤 것을 만들어낼지 궁금하다.
‘그건 나중 일, 지금은 저놈을 해결해야 해······!’
안대를 꿈틀거리며 우인관은 접전을 지켜봤다.샹그릴라 일당의 젊은 무인, 유성의 독을 사용하는 놈과 카슨의 싸움은 치열하고 위험하다.누가 이길지를 점치기가 어렵다.확실한건 저놈이 유성의 후인이란 거다.
‘철룡이십사식을 펼쳤어······!’
삼백년 전 유성이 블랙블러드를 유린한 무공 중 하나다.그가 무공을 펼치는 영상을 수없이 봤다.물론 그와 관련해 남아 있는 영상이 거의 없지만 블랙블러드는 그 치욕을 간직하고 있다.있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하니까.’
그래서 지금 이렇게 하고 있다. 이곳까지 저놈을 추적해 온 거다. 마침내 유성의 자취를 확인했다. 저놈이 어떻게 유성의 무공을 사용하는지 알아내야 한다. 그렇지만 사로잡는 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마취제 따위가 들어 먹을 놈이 아니야.’
유성의 독을 사용하는 놈, 약품을 이용한 방법은 애초에 글렀다. 그러니 결국 무력으로 제압해야 하는 건데, 화성연구소가 만든 카슨 같은 저런 자와 대등하게 싸우는 놈이다. 죽일 생각으로 공격해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다 죽는 다면······!’
그걸 조절할 수가 없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그러한 점을 고려할 상황이 아니라는 게 현실이다. 최선을 다하고 전력을 투입해 상대해야 한다. 죽을 작정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러다 목숨이 붙어 있으면 성공한 거다.
‘네놈과 우리가 이렇게 만난 건······’
순간 우인관은 생각을 흩고 눈을 치떴다. 카슨의 날개가 잘려나가서다.
‘저!’
칼날처럼 휘두르던 날개가 떨어져 나갔다. 샹그릴라 놈의 손에서 검이 날아가 만든 결과다. 검자루에는 사슬이 연결돼 있다. 이미 본 기술이다. 땅과 하늘을 장악하고 공격하던 카슨은 잠자리처럼 휘돌아 떨어진다.
* * *
“여길 뜨자.”
박준의 결정은 모두의 마음,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지옥의 한 공간처럼 변한 접전의 현장을 벗어났다. 그러다 일행은 깨달았다. 매그넘의 시신에는 수림의 청소부들이 달려들지 않는 다는 거다.
“주술사놈들은 정말 뭐야?”
수림을 헤치고 나가며 박준은 의문을 던졌다. 항상 갖던 의문이었지만 늘 상관없던 것이다. 누구에게랄 것 없는 그 물음을 무슬란이 받았다.
“신이 내리는 존재라고 합니다.”“뭐? 신?”
그런 말을 듣기는 했지만 정말 그렇다고? 라는 박준의 눈은 째려보는 것 같다. 그렇거나 말거나 박현의 뒤로 움직이는 무슬란은 대답했다.
“절대신이니 하는 그런 신만이 신은 아니잖아요. 무쟈게 많은 잡신들이 있다 이겁니다. 각 종족마다 섬기는 신들이 따로 있고 만물에도 신이 있다고 하잖습니까. 그런 존재들의 선택을 받아 태어난다고 하더라고요.”“그래? 너희 부족도 주술사가 있었다고 했지?”
선두의 박현이 힐긋 돌아보는 가운데 무슬란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있었죠, 오래전에 맥이 끊겼지만요. 주술사라는 게 원한다고 생겨나고 원하지 않는다고 사라지고 하는 게 아니라서요. 어떤 신이든 신의 계시를 받거나 점지된 자가 주술가가 되는 겁니다. 우린 그게 안됐죠.”
안됐다, 주술사가 안 생겼다는 소리.
“이유는 모릅니다. 족장님의 말로는 주술사의 맥이 끊긴 게 삼십년도 넘었다고 하더군요. 우리 마을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부족마을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렇다고 세상 전체에 주술가가 사라진 건 아니고, 뭐 그렇죠.”
매그넘이란 놈을 겪었다. 특정종족에 속하지 않은 주술사다. 그런 주술사라면 이렇게 위험한 일을 겪진 않았을 것이다. 마을과 부족의 안녕을 위해 길흉화복을 점치고 작은 주술을 펼치는 정도의 존재였을 것이다.매그넘은 그런 주술사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바꾸고 왜곡하는 대주술사였다. 달리 말하면 역천주사(逆天呪師)다. 그렇게 무서운 놈이었는데 죽었다. 레드파운틴 족의 전설 가라운, 그것이 된 아우리엘이 죽였다.
“역천주사 같은 놈들은 누가 가르치는 거야? 저절로 생겨난다고?”
그 부분이 정말로 궁금하단 박준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 들었다. 그런데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하기에 대답할 수가 없다. 주술이란 것이 신의 점지에 의해 저절로 깨우치게 되는 것인지, 공부해 익히는 건지 모른다.
“주술사를 누가 가르친다는 이야긴 못 들어 봤습니다.”
등 뒤에서 목소릴 낸 그렉을 힐긋 돌아본 박준이 뭐라 반응하려는데 선두의 박현이 멈췄다. 자세를 낮췄다. 뒤따르던 셋은 일제히 따라 행동했다.
“사냥꾼들이야.”
숨죽인 박현의 말대로다.거구의 박현과 무슬란까지 감춰줄 정도로 웃자란 수풀너머로 보인다.이십여 명의 야수족과 인간조합 무리다.괴수사냥과 동시에 유랑민들을 사냥하는 놈들이다. 떠들며 식사하고 있다.
“맞바람이라서 우리 냄새를 못 맡았어.”
무슬란의 말처럼 놈들 무리에는 괴수견들이 있다. 삼목울프와 들개의 잡종견, 흉악한 놈들이 뼈다귀를 뜯느라 열심이다. 놈들 쪽에서 일행 쪽으로 바람이 불어서다. 반대방향이었다면 벌써 짖어대고 난리쳤을 거다.
“저것들 죽일까?”
박현이 작두칼을 움켜잡고 움찔거리자 박준이 그 팔을 잡았다.
“피해가자.”
고개 젓는 형 박준의 눈을 응시한 박현은 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불필요한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어서다. 물론 저 무리를 해치우면 차량을 확보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일이 아니다.
“가자.”
박준이 작게 말하고 몸을 돌리던 순간이다.휘잉 하고 수풀이 흔들렸다.일행으로부터 사냥꾼무리 쪽으로 돌풍 같은 바람이 불어갔다. 바람의 방향이 역전된 거다. 그걸 깨달은 순간 사냥꾼무리의 괴수견들이 짖었다.
“죽여!”
소리치며 몸을 돌린 박준은 빔라이플을 미친 듯이 쏘아댔고, 박현과 무슬란은 먹이를 덮치는 블루마운틴처럼 튀어나갔다. 그 뒤로 그렉이 달렸다.
* * *
비행하는 상대의 움직임은 강흑성 자신보다 크고 넓을 수밖에 없다. 상대에겐 유리하고 내게는 불리한 그 조건을 먼저 파훼해야 한다. 그럴 방법은 상대의 크고 넓은 움직임에 대응하는 공격, 한발 앞선 차단뿐이다.그것이 성공했다.철혼에 연결한 사슬, 철룡이십사식의 묘용을 더한 기격으로 카슨의 날개를 잘랐다.놈의 날개는 곧 복원되겠지만 움직임에 제약이 생겼다.그걸 알기에 카슨은 팔에 착용한 비구로 광구를 터트린다.휘청거리는 뒷걸음으로 물러나며 빔에너지의 결정체인 광구를 발사하는 카슨, 그 앞으로 강흑성은 벼락처럼 나아갔다. 움켜잡은 철혼으로 광구를 후려치고 가르면서 전진했다. 눈을 치뜬 카슨에게 검을 후려쳤다.
“크악!”
카슨의 왼 팔이 떨어져 나갔다.광구를 토해내던 비구가 달린 팔은 생선토막처럼 떨어져 뒹군다.그 가름을 만든 강흑성은 검은 벼락을 연이어 냈다.전투대검을 광구와 같이 폭발해내는 카슨의 오른팔을 내리쳤다.갈라졌다.카슨이 동귀어진과 같은 수법으로 펼친 한수, 검과 광구의 폭발력을 강흑성은 철혼으로 갈랐다.철혈의 뇌전 같은 그 가름은 카슨의 어깨까지 갈랐다.그 찰나에 떠오른 강흑성은 회전하며 뒷차기를 뻗었다.쾅, 철벽을 강타한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카슨은 날아갔다. 제 날개로서의 비행이 아니다. 왼팔이 잘리고 오른 어깨가 잘려나간 채 뒹굴었다.
“크어······!”
공터처럼 변한 수림의 끄트머리 거대수를 들이받고 멈춘 카슨은 부들거렸다. 육신의 충격과 고통으로 부들거렸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이 결과에 부들거렸다. 격렬하게 흔들리는 그 눈동자 앞에 강흑성이 다가섰다.
“나도 예감했었다.”
처참한 몰골로 몸을 일으키려 애쓰는 카슨, 그 눈을 향해 강흑성은 뒷말을 던졌다.
“널 처음 봤을 때부터야.”
카슨은 알아들었다.자신이 상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예감을 품었듯이 상대도 그랬다는 거다.이런 날이 올 거라고, 이렇게 죽이게 될 거라고.
“너······!”
피 흘리는 입을 악물고 카슨은 일어섰다. 그 순간 강흑성이 철혼을 휘둘렀다. 수평의 철빛가름은 카슨의 목을 지나갔고, 머리가 떨어져 굴었다.부릅뜬 눈으로 하늘을 응시하는 카슨과 아직도 경련하는 그 몸을 바라보던 강흑성은 돌아섰다. 더이상 복원되지 않는 죽음을 뒤로 두고 말했다.
“이제 너희 차례다.”
블랙블러드 살수들을 향해 강흑성은 걸음을 냈다.
* * *
팔과 다리에 생긴 상처를 동여매고 처치한 그렉은 새삼 주변을 돌아봤다.이십여 명의 사냥꾼 무리를 처치한 현장, 피와 시체로 물들었다.그사이에 괴수견 한 마리가 아직 숨이 붙어 소리를 낸다. 박현이 밟았다.퍽하고 머리가 터진 괴수견은 더이상 아무소리도 내지 않았다.흉악하게 반격하던 샤냥꾼무리도 마찬가지다.방심한 상태에 술까지 마신 놈들이라 이길 수 있었다.작정한 적이었다면 작은 부상만이 아니었을 거다.
‘운이 따라줬어.’
새삼 안도의 숨을 내쉰 그렉은 사냥꾼무리의 차량을 살폈다. 커다란 케이지가 짐칸으로 구성된 트럭엔 아무것도 없다. 이것도 다행인 결과다.
‘이놈들 본격적인 사냥 전이었어.’
노예로 잡을 대상은 널리고 널렸다. 이런 놈들에게 걸리면 짐승의 처지로 전락하는 거다. 그 처지를 벗어날 방법은 없다. 아니 죽음이 있긴 하다.
“이 차를 쓰면 될 것 같은데?”
박준의 목소리에 그렉은 시선을 돌렸다. 사냥꾼무리가 타던 차, 크리듐에너지로 구동하는 중형장갑차량이다. 무슬란과 박현이 타도 될 형태다.
“그래, 그거타고 태산으로 가면 되겠네.”
박현의 웃는 얼굴을 만들었고 무슬란도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렉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순간 가슴에 차는 무거움은 여전하다.
‘태산에 가서······ 우리가······’
강흑성을 생각하며 그렉은 스르르 고개를 숙였다.
* * *
‘미친!’
기함한 눈을 수습하지 못한 채 우인관은 신형을 뒤로 날렸다. 카슨의 죽음을 확인하자마자 내린 명령, 자폭공격용 진돗개들의 폭발이 소용없다.수림이 까뒤집히는 엄청난 화염 속에서 저놈은 검을 갈라내고 있다.
‘폭발을 가르다니!’
보고도 믿을 수 없다.흑청빛의 검광이 폭발의 중심에서 퍼져 나왔다.놈의 검이 만들어낸 것이다.진돗개 수십마리가 폭발한 힘을 파훼하고 오히려 밀어냈다.폭발이 집중한 중심엔 흑청빛 와류가 솟구치고 있다.
‘저놈은 대체 뭐야!’
경악으로 물러나던 우인관은 이어지는 변화를 목도했다.하늘 높이 솟구쳐 사라지는 와류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놈, 그로부터 터져 나오는 섬광이다.확산 각도로 퍼져 나오는 섬광들, 그 힘이 수하들은 강타했다.
‘뭐?’
엉거주춤한 우인관은 결과를 봤다. 섬광이 스치거나 강타한 수하들의 변화다. 라이트갑주의 손상 속에서 중독이 일어났다. 경련하며 쓰러진다. 피를 토하다 늘어진다. 라이트갑주 속의 육신은 삽시간에 핏물이 된다.
‘독!’
유성의 독이다. 해독제를 복용했지만 소용없는 독이다. 저놈이 독을 날렸다. 삼백년 전 유성이 한 것처럼 독암기를 뿌렸다. 당문의 만천화우다.
“이, 이······!”
부들거리는 숨을 흘려내던 우인관은 경직했다. 유성의 후인, 놈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