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101화 (102/172)

혹성강호. 101. 태산을 향해.

101. 태산을 향해.

짐승의 울음 같은 소리를 내며 달리는 장갑차량에 앉아 그렉은 들을 봤다. 확실히 산동 땅에 들어선 게 분명한 광경, 곡창지대가 펼쳐져 있다.

“저 놈들이 우릴 경계하긴 하지만 무시하는 거지?”

뒷자리 박현의 목소리엔 옅은 화가 배어 있다. 대꾸하는 무슬란도 같다.

“그래봐야 농장의 경비견 새끼들이지.”

산동엔 대농장들이 있다더니 정말이다. 곳곳에 농사를 위한 기계들이 보이고 블랙팬더를 탄 무장병력이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눈을 끄는 건 사람들이다. 농지 속에서 쉬지 않고 일하는 이들, 농장노예들이다.

“이 차를 타던 놈들이 농장에 노예를 공급했을 거다.”

운전대를 잡은 박준은 확신에 찬 짐작을 말했다.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일행은 고개 끄덕임으로 반응했다. 드넓은 농장의 노동력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로봇을 사용하지 않는다. 잡으면 되는 거다.질긴 목숨을 이어가던 사람들, 어디에나 널린 유랑민들, 값싸고 질 좋은 그 노동력을 왜 외면하겠는가. 대농장주들은 노예상들로부터 제공받은 그 노동력으로 농사지어 수확하고 도시들에 공급해 많은 돈을 번다.그 돈으로 다시 노예를 사고 돈을 버는 구조인 거다.노예로 잡힌 이들은 죽을 때까지 그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죽어야만 끝나는 운명이다.가혹하고 비참한 운명, 잔인한 세상이다. 그 속을 지금 달려가고 있다.

‘언제까지 세상은 이렇게······’

농장의 풍경을 보며 생각하던 그렉은 문득 안면을 구겼다.뜨거워진 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렸다.속에서 지금 일어나는 생각 때문이다.피가 뜨겁던 시절에 품었던 가슴속의 사상과 가치, 변혁을 꿈꾸던 기억이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동료들의 죽음을 뒤로 하고 도망친······!’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자괴와 분노에 그렉은 움켜쥔 주먹을 가늘게 떨었다.

‘부질없어, 세상은 바뀌지 않아.’

바꿀 수 없어 라는 말을 입안에 머금고 그렉은 고개를 들었다.

‘내가 꿈꾼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거대한 악마와 같은 이세상은 그렇다. 부술 수가 없다. 그래서 혼자 가 아니라 여럿이 손을 모아 두드리려고 해봤지만 그 또한 마찬가지다. 이란격석처럼 참혹하게 깨질 뿐이다. 그런데 전부 다 그런 것만은 아니다.

‘명희와 여자들을 대전으로 보낸 건······’

잘한 일이다. 제대로 해낸 결과다. 그녀들을 위해 목숨 걸고 그 일을 했다.아니 그녀들을 위해서라는 말은 가당치 않다. 강흑성과 동료들과 그렉 자신을 위해서, 다 함께 해낸 일이다. 어떠하든 그 일은 칭찬할 만하다.

‘그렇게 된 시작은······’

정찰대와의 필연적인 운명이 그러해서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원인이 분명히 있다. 퓨리엔트족이다. 그들은 크리듐 광산을 두고 정찰대와 싸웠다.

‘퓨리엔트족이 그랬다는 건 누구도 쉽게 믿지 못할 거야.’

정말 놀랍게도 그들은 단합했다. 소수의 무리로 떠돌며 사냥꾼노릇만 하던 자들이다. 서로 반목하던 존재들이다. 그런 이들이 한마음으로 뭉쳤다.

‘반화성.’

그거다.그들의 기치는 반화성인 것이다.그 가치와 사상을 심어 준 것이 하프퓨리엔트라는 존재다.그런데 그자가 퓨리엔트족을 얼마나 더 합칠까?그렇게 해서 세상이 바뀔까?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쾅, 폭음이 차량을 흔들었다. 상념이 깨진 그렉은 눈을 치떴다.

“저거 봐! 노예들이 경비대를 공격한다!”

박현의 놀란 부르짖음 속에 일행은 그 광경을 봤다. 드넓은 농장 여기저기서 터진 폭발과 화염, 블랙팬더를 탄 경비대가 공격받는 모습이다.

* * *

“네놈은······ 절대······”

마지막 말을 뱉지 못하고 우인관은 절명했다. 검은 안대가 사라져 퀭한 눈은 하늘을 보고 굳었다. 그 눈을 내려다보던 강흑성은 검을 거뒀다.

“내가 할 소리다.”

우인관이 하려던 말, 절대로 살아날 수 없을 거라는 선언, 강흑성 자신이 블랙블러드에게 던지는 것이다. 아버지 유성대협이 숨통을 끊어버리려던 자들, 그러나 완수하지 못한 그 일을 강흑성 자신이 해내고 말 것이다.

“너희를 살려두지 않을 거다.”

철혼을 뒤 허리에 걸치고 돌아선 강흑성은 자신이 만든 죽음의 흔적들을 눈에 넣었다. 핏물로 변한 블랙블러드 살수들의 자취다. 무원진력이 육성을 넘어가자 가능해진 무공, 만천화우를 펼쳐서 이렇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독과 내 독은 달라.”

죽은 자들의 자취 사이로 걸음을 내며 강흑성은 가만히 그 말을 던졌다.그렇다, 이곳의 결과로서 그렇다는 걸 증명했다.해독제를 복용한 블랙블러드를 독으로 쓸어버렸다.이들은 이런 결과를 예상 못했을 것이다.

‘철강지력(鐵鋼之力).’

심중에 떠오른 것을 붙잡고 강흑성은 걸음을 멈췄다.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다.블랙블러드가 자폭용 진돗개들로 공격하던 순간에 솟구친 것이다.무원진력만으로는 대응이 안 되는 찰나, 그 무서운 폭발을 받아냈다.

‘철혼을 통해서.’

깨우침이 이뤄졌다. 깨달은 순간 펼쳐냈다. 철강와류를 풀어낸 폭발의 가공할 힘을 흘려보냈다. 무원진력과 하나 된 철강지력이 영육에 공명했다.

‘나를 통해서 이뤄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철혼을 잡고 강흑성은 그 마음과 의지를 전했다. 운명이 만나게 해준 철극문의 이 검이 가는 길은 강흑성 자신이 가는 길, 주저 않을 것이다.

‘응?’

미풍에 실려 온 서늘한 기운에 강흑성은 눈썹을 세웠다. 그렇게 냄새를 맡았다. 흉악하고 무서운 냄새, 점점 다가오는 기운, 그 형상을 봤다.

‘삼바바.’

공터로 변한 수림의 경계에서 불덩이 같은 눈을 빛내는 거대한 형상이 있다.퓨터의 대형모델인 삼바바다.크기가 오미터에서 육미터는 될 것 같다.숨죽인 그릉거림을 흘려내면서 바라본다. 하지만 더 다가오진 않는다.강흑성은 고요한 시선으로 삼바바를 바라봤다. 수림의 절대자인 놈도 고요하게 바라만 본다. 공터로 변한 공간이 독으로 덮인 위험지역이라는 걸 알아서고, 강흑성이란 존재가 그보다도 더 위험하단걸 느껴서다.푸르르, 하는 숨소리를 낸 삼바바가 느릿하게 돌아선다. 거대한 형체를 소리도 없이 움직여 사라지는 그 모습을 강흑성은 그대로 서서 지켜봤다. 삼바바의 모습과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후 무심히 움직였다.

* * *

앞을 막고 있는 농장의 경비대는 당장이라도 빔소총을 쏘아댈 것 같이 험악하다. 왜 저러는지 이유를 알기에 일행은 눈썹을 곤두세운 채 대응했다.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 비켜!”

무슬란이 험악한 인상으로 버럭 소리쳤다.블랙팬더를 탄 경비대는 움찔하는 기색이었지만 물러서 길을 터줄 생각은 없다. 마주 소리친다.

“정체를 파악해야겠다!”

박준이 운전대를 쾅 치며 소리쳤다.

“농장에서 반란이 일어난 걸 가지고 왜 지랄이야!”

그렉은 박준의 거친 반응의 이유가 자신이 쥐고 있는 투척용 크레몬때문이란 걸 알기에 속으로 한숨 쉬었다. 사냥꾼 놈들에게 빼앗은 이 차에 들어 있던 것이다. 그놈들이 이걸로 대응했다면이란 생각에 서늘하다.

“그 차는 파리안패의 차가 분명한데 너희는 누구냐!”

다시 소리치는 경비대의 말에 박현이 인상구기며 묻는다.

“뭐래? 파리라고?”

고개를 홱 돌린 박준이 뭐라고 한소리 하려다가 다시 앞을 향해 외친다.

“이 차 타던 놈들은 다 뒈졌다! 그 꼴 나기 싫으면 비켜!”

길을 막고 선 경비대 십여 명은 또 움찔했다. 서로를 돌아본다. 말인즉슨 파리안 패거리를 죽이고 차를 빼앗았다는 거다. 그렇게 한 자들이 차에 타고 있는 거다. 노예사냥꾼들,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은 일상다반사다.

“정말 해보자는 거지?”

무슬란이 흉악한 작두칼을 차 밖으로 내밀었다. 몸도 삼분지 일쯤 냈다. 빔소총을 겨눈 자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지만 그게 먹혀들었다.

“이 지역을 빨리 벗어나는 게 좋을 거다!”

경비대놈은 꼬리 말고 돌아서는 게 아니란 듯이 소리치며 블랙팬더에 올라탔다. 모두 함께 동시에 질주해 달려간다. 노예들을 잡기 위해서다.

“퉤, 뭐만한 놈이 웃기고 자빠졌네.”

거칠게 침을 뱉은 무슬란은 주변을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상황이 간단하지 않은 건 확실한데, 그렇지?”

박현은 물론 그렉과 박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평원 여기저기서 화염이 치솟고 있다. 농장노예들의 반란이 만든 결과다. 계획적으로 한 일이다.

“감시하는 경비대를 공격하고 일거에 탈출을 시도한 것 같은데······”

성공할 수 있을 거 같냐는 뒷말을 박준은 내지 않았다. 멈췄던 차를 다시 출발했다. 들길을 따라 달리는 그 진동 속에서 그렉은 또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바뀌는 게 있을까······’

하늘 높이 올라간 해는 뜨겁게 사위를 달구고 있었다.

* * *

블랙블러드의 이동차량, 비륜거라고 부르는 플라잉카를 발견한 강흑성은 내부를 뒤졌다. 예상대로 흑색전투복이 있었다. 걸레처럼 된 옷을 벗고 전투복을 입었다. 전술배낭에 물과 간단한 음식을 챙기고 돌아섰다.

-들리는 가.

차량 내부의 통신장치에서 목소리가 들려와 강흑성은 멈춰 섰다. 느릿하게 다시 돌아서 통신기로 다가갔다. 운전석에 작은 화면이 떠올랐다.

-왜 상황보고를 아직도 안 하고······

거기까지 말한 화면 속 상대방은 경직했다. 강흑성을 봤기 때문이다. 누군지 모르지만 수하들이 아닌 자, 불길한 예감이 확 밀려드는 존재감이다.

-너, 너는 누구냐?

강흑성은 표정 없는 얼굴로 화면 속 남자를 향해 말했다.

“내게 보낸 놈들 중에 대답할 수 있는 놈은 없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강흑성은 주먹을 질렀다. 통신화면은 박살이 났고 잡음만 흘러나왔다. 잠시 서서 플라잉카를 움직일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봤다. 원래 운전자의 유전자인식과 생체신호로만 가동하는 터라 안 된다.

‘거의 다 왔어.’

태산을 생각하며 몸을 돌린 강흑성은 북쪽방향으로 걸음을 냈다.

* * *

육중한 기세로 다가오는 세 사람을 철무진은 경직한 호흡 속에서 응시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들, 자신이 아무리 철금련이란 세력을 만들어 신남경을 장악했다곤 하지만 조족지혈이다. 저들의 이름에는 그렇다.

‘천지문.’

거대하고 강력한 그 이름을 속으로 뇌이며 철무진은 현실을 곱씹었다.화성의 삼대문파인 저들이 지구에 온 이유다.당연히 파문제자 천지도 상패천 때문이다. 그가 가진 뇌인걸의 무공 때문이다. 그런데 더 있다.

‘상패천을 쫓는 자들이 날 찾아온 이유.’

그것이 무엇일까 철무진은 생각하고 생각했다. 잡히는 건 하나다.

‘강흑성.’

그 청년 무인이다.한반도에서 넘어와 상해를 뒤집고 태산으로 가는 존재, 저들은 그를 쫓고 있다.그가 천지도 상패천과 상해에서 얽힌 것도 분명 이유가 될 것이지만, 그 이면에 더 큰 내막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천지문의 불청객들이 철금련주를 뵙겠소이다.”

공수례를 취하며 엷은 미소로 인사하는 자, 중년의 미남자를 향해 철무진은 마주 인사했다.

“궁벽한 지구의 이름 없는 자를 찾아와 주신 천지문의 귀빈들을 환영합니다.”

만면에 미소를 띤 철무진은 원탁에 앉을 것을 권하고 손수 차를 따라줬다.

‘이 자는 누굴까? 천지문에서 어느 정도 위치일까?’

아직 상대가 정확히 누구인지 모르지만 대단한 자인 건 분명하다고 여기며 철무진은 자리에 앉았다. 여전한 미소로서 궁금한 것을 돌려 물었다.

“소생은 철무진이라고 합니다. 비루한 이름이지만 귀빈들께 밝히는 것이 도리일터이겠지요.”

중년의 미남자는 좌우의 두 사람을 느릿하게 돌아보곤 입을 열었다.

“천지문의 외당을 맡고 있는 종초홍이라고 하오이다.”

순간 철무진은 흠칫하며 소름을 피워냈다. 상대는 생각한대로 거물이다.

‘천지문 삼십대 고수 중 한사람!’

경직한 숨을 삼키는 철무진에게 천지문 외당주 종초홍은 핵심을 꺼냈다.

“이곳을 방문했던 샹그릴라 일당, 젊은 무인에 대해 묻고자 하오이다.”

철무진은 거듭해서 뜨거운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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