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102. 자유를 위하여.
102. 자유를 위하여.
오후 들일을 마친 전복은 개간해낸 밭을 뿌듯하게 바라봤다. 힘들게 일한 노동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보람이란 희열로 가슴에 들어참을 느꼈다. 마지막 돌무더기를 개간지 옆에 쌓아 경계를 만들고 수통의 물을 마셨다.
“후, 이런 기분으로 농사를 짓는 건가 보네.”
농부의 마음을 어림하며 미소 지은 전복은 돌아갈 준비를 마친 여인들과 눈길을 주고받았다. 이심전심의 미소 속에서 카이오와도 눈을 맞췄다.
‘볼수록 대단한 아가씨야.’
집을 향해 여인들을 인솔해 앞서가는 여인, 캐리언족 아가씨는 걸음이 당당하다.이제 사연을 알지만 처음부터 저런 여인이 아니었다.노예로 잡혀가던 신세, 절맥증이란 병으로 누워 있던 여자다. 그런데 변했다.
‘강흑성, 그 친구를 만나서.’
춘천으로 침을 구하러 왔던 젊은이, 그가 카이오를 구했다.침술을 어떻게 익힌 건지 알 수 없지만 그가 했다.독을 만들어 정찰대를 쓸어버렸다.그걸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여자들의 말과 은밀히 퍼진 소문이다.
‘북부지구 정찰대를······’
강흑성과 박준 일행이 궤멸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와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한 거다. 빠르고 은밀하게 평택항으로 이동해 왔다. 여자들은 대전으로 자신들은 대륙으로 넘어갔다. 그 과정에 남도의 제왕과 충돌했다.
‘남도의 제왕 문주 명일해가 대륙으로 넘어갔다고 하던데······’
복수하기 위해서, 혹은 다른 이유로, 어떠하든 그자가 기반을 버리고 대륙으로 갔다. 남도의 제왕은 지금 내분에 휩싸였다. 그 소문이 파다하다.명일해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건 그런 결과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 엄청난 일을 만든 그 친구에게 영향을 받은 건가······’
카이오는 홀로 이곳 대전에서 터전을 잡았다.핸드건을 쥐고 흑랑족과 대치하던 모습은 저 가슴에 뭐가 들었는지 보여준다.다시는 당하고 살지 않겠다는, 아이들과 여인들을 지켜내겠다는, 내 의지로 살겠다는 거다.
‘자유롭게 사는 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을까.’
고개를 주억거리며 걸음을 내던 전복은 어느새 집에 다 돌아온 것을 알았다. 대전 밖에 대전을 형성한 도심, 그 속의 골목을 걸어 건물 앞에 멈췄다. 아이들과 놀던 준후가 반갑게 달려온다.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진하게 놀아제낀 모양이구나?”
준후의 머릴 헝클던 전복은 최창수와 시선을 맞췄다. 집에 남아 있는 아이들을 지키던 최창수는 눈으로 수고했다는 말한다. 심드렁하게 그 눈길을 흘려버린 전복은 물통부터 들었다. 우물물을 길어오기 위해서다.
“수도가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제기랄이다.”
대전 안이 아닌 이상 바랄 수 없는 일, 우물을 향해 가던 전복은 카이오의 목소리를 들었다. 함께 사는 가족들 전부에게 전하는 말, 자유의지다.
“아이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려고 해요.”
흠칫 어깨를 경직한 전복은 물통을 내려놓고 카이오를 향해 돌아섰다. 엷게 미소 짓는 그녀는 곁으로 모여드는 다른 여인들에게 계획을 말했다.
“아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줘야 하는 건 우리 어른들의 책무라고 생각해요. 어렵겠지만 그 일을 하고자 해요. 우리가 힘을 합치면 할 수 있어요. 지금 이곳에 이렇게 사는 것도 우리가 한마음이어서죠.”
최창수와 전복의 눈길에 시선을 맞췄던 카이오는 남은 말을 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 * *
불길이 여기저기 치솟고 있다. 수확을 앞둔 곡식들이 재가 되고 있다. 그 불길을 잡기 위해 농장주들이 장비를 동원했다. 사방에서 물을 뿌려대는 중이다. 그와 동시에 무장한 경비대가 블랙팬더를 타고 기동중이다.
‘농장 노예들의 반란······’
상황을 주시하며 강흑성은 수통의 물을 마셨다. 들이 보이는 현재의 위치, 관목 숲 주변으론 이렇다 할 위험동정이 없다. 이곳까지 이동해 오면서 파악한 바로는 농장의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계획된 거사다.
‘짐승처럼 살기보다는 죽기를 선택한 거지.’
그들의 심정과 결의가 그렇다는 걸 의심치 않는다. 짐승처럼 잡혀 몸에 인식표를 새겨 넣고 노예로 산다는 건 비참하다는 걸론 부족하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삶, 그렇지만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것이 노예다.
‘내부의 누군가가, 혹은 외부의 누군가와 조력한 거사.’
그렇다는 걸 강흑성은 짐작했다. 폭발물과 총기를 확보해 거사를 일으켰다. 정해진 시간에 동시다발적으로 경비대를 공격했다. 드러난 결과도 그렇지만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하지 않았으면 성공 못할 일인 거다.그런데 의문이 든다.반란을 일으킨 후에는 어떻게 하려고 한 건가?경비대를 공격하고 도주, 이후는 어딘가에서 합류해야 하는 게 상식적이다.세력을 형성하고 무장한 후에 대적하는 거다.그렇게까지 준비한 건가?
‘거사에 전부 찬성하고 동참한 건가?’
가족들이 있을 거다. 그런 이들은 거사에 참여할 수 없었을 거다.그렇다면 그런 이들을 제외하며 벌인 행동인가?그들이 받을 결과는 무시하고?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차가운 눈빛을 흘려낸 강흑성은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쓸데없는 상황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택한 길, 관목숲을 헤치고 전진했다.작은 짐승들이 놀라서 흩어지는 기척이 들린다.그런데 앞쪽에 다른 것이 있다.
‘삼목울프.’
그놈들임을 냄새로서 확인했다. 놈들의 냄새 말고 다른 냄새도 바람을 타고 온다. 사람의 피냄새다. 그리고 소리가 들린다. 두려운 울음소리다.눈동자에 서늘한 흑청빛을 번득인 강흑성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냈다. 한걸음을 내는 순간 무원신풍보를 펼쳐 나갔다. 관목숲의 바람이 됐다.강흑성은 다시 멈춰 섰다.백여미터의 거리를 그야말로 바람처럼 이동해 멈춘 걸음.앞쪽에 트라이울프들이 있다. 참혹하게 물려 죽은 남자의 사체 뒤로 단도를 움켜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향해 으르렁댄다.남자아이는 열세 살 정도 돼 보인다. 그 등을 잡고 있는 여자아이는 열 살 정도다. 울면서 아빠와 오빠를 말하고 있다. 전후 상황이 그려진다.
‘농장 노예.’
트라이울프 중 한 놈이 앞발을 올려놓은 사체, 죽음을 맞은 남자가 아이들의 아버지다. 드러난 팔목에 노예라는 걸 표시하는 인식표가 있다.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단도를 내밀고 있는 사내아이 팔목에도 표시가 있다.
크르르르.
잔혹한 울음을 흘려내던 트라이 울프들이 한순간 움직였다.사내아이가 움찔하는 반사작용으로 얼어붙었다가 소리를 지른다.죽음을 맞이하는 반발이다.이렇게 늑대먹이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한 분노다.흑청빛 벼락이 쳤다.아이들에게 덤벼들던 트라이울프들이 동강났다.세 마리가 허리가 끊어져 떨어지자 다른 놈들이 썰물처럼 물러난다.그 앞에 강흑성이 섰다. 철혼을 땅으로 내린 모습으로 늑대들을 향해 말했다.
“도망가지 마라.”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트라이울프들은 다시 덤벼들었다.남은 네 마리가 흉악한 이빨을 벌리고 도약했다.철혼은 철혈의 포효를 터트렸다.후두두둑, 비가 내리는 것처럼 삼목울프들의 잔해가 휘날렸다.엄청나고 무시무시한 그 광경에 남매가 얼어붙던 그 순간, 관목숲 밖에서 빔이 날아왔다.아이들을 노린 공격, 강흑성은 철혼을 후려 빔을 튕겨냈다.
‘경비대.’
달려오는 블랙팬더들의 울음과 동시에 빔이 마구 날아왔다. 노예인식표를 가진 아이들을 타겟팅한 공격, 수십줄기의 빔을 강흑성은 갈랐다.
“이렇게 되면 그냥 안 간다.”
달궈진 쇳물과 같은 안광을 뿜어낸 강흑성은 허리에 감은 사슬을 철혼에 연결했다. 아이들에게 엎드리라는 짧은 말을 던짐과 동시에 휘둘렀다.강흑성을 중심으로 커다란 회오리가 일어났다. 철혼과 사슬이 만들어내는 회오리, 그 궤적 안의 모든 형상이 모래가 흩어지듯이 흩어졌다.
* * *
“아 정말······!”
미치겠네라는 말은 안했지만 박준의 심정이 그렇다는 걸 일행은 안다.자신들도 그렇기 때문이다. 앞을 막은 자들 때문이다.구식 화약총과 빔소총으로 무장한 자들, 반란을 일으킨 농장노예들이 분명한 자들이다.
“어서 내려!”
복합광탄발사기를 겨눈 자가 소리친다. 노예들의 거의 대부분이 인간이기에 인간남자다. 길을 막고선 자들도 그렇다. 캐리언족과 파이곤족이 더러 끼어 있을 뿐이다. 모두 이십여 명, 차를 강탈하려는 겁박이다.
“저것들 확 쓸어버릴까?”
박현이 작두칼을 움켜쥐고 움찔하자 그렉이 말렸다.
“그럴 거 없어, 저들은 상황에 치여서 저러는 거야.”“아니 그렇다는 건 알겠는데, 저러고 있는데 뭐 어쩌자고?”
무슬란의 반발, 현재상황이다. 차량탈취를 위해 당장 죽이겠다고 달려들 자들을 어쩔 텐가. 대화로 물러나게 할 상황도 그런 이들도 아닌 거다.
“겁을 주자고.”
그게 무슨 소리냐는 박현과 무슬란은 물론 박준도 운전석에 돌아봤다. 셋의 시선을 받으며 그렉은 차량 상부해치를 열고 상반신을 드러냈다.
“우린 지나가는 길이다. 그냥 우리 갈 길만 가면 된다.”
그렉은 양손에 쥔 크레몬을 흔들 듯이 보였다.
“비켜서면 아무 일 없을 거다.”
이십여 명의 농장노예들, 남자들은 움찔한다. 크레몬이 터지면 일시에 몰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우린 장갑차량 안에 있어서 다칠 일이 없어.”
그렉이 크레몬을 다시 흔들며 말하자 남자들은 슬금슬금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빔이 날아왔다. 노예들은 몸을 두부처럼 뚫었다.
“헛!”
기함한 박준은 바로 차를 움직였다. 남자들이 막고 있던 길을 우회해 관목들이 우거진 수림 경계로 밀고 들어갔다. 그런데 빔들이 차를 때린다.
“경비대놈들이 우릴 공격한다!”
소리친 박현에게 반응하듯 무슬란이 차창 밖으로 팔을 내밀고 크레몬을 던졌다. 움바바족의 팔힘으로 날아간 크레몬은 경비대를 강타했다.
“야이! 무턱대고 그러면 어떡해!”
박준의 호통에 무슬란도 마주 소리쳤다.
“어쩌라고요! 그냥 당하잔 말요!”
좌우로 차를 몰던 박준은 왁하고 소리쳤다.
“개신발! 조져버려!”
완전히 차를 돌린 박준은 블랙팬더를 타고 달려오는 농장 경비대를 향해 달려 나갔다. 박현과 무슬란은 크레몬을 던졌고 그렉은 빔소총을 쐈다.
* * *
겁에 질려 부들거리는 아이들을 말없이 바라보던 강흑성은 결정했다. 저대로 두면 결국엔 아이들이 죽을 거라는 생각보다도, 개입했으니까다. 처음부터 트라이울프든 뭐든 그냥 지나갔으면 모르지만 이젠 아닌 거다.
“너희들······”
갈 데는 있냐, 돌봐줄 사람은 있냐라고 물어보려던 강흑성은 부질없는 소리임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 대신 아이들이 응시하는 시신을 말했다.
“아버지 시체는 저대로 두면 짐승을 먹이가 될 거다.”
땅에 묻어도 마찬가지라는 의미, 남자 아이가 떨리는 시선을 맞춘다. 경비대를 한순간에 도륙한 당신이 누구인지 전에, 그럼 어떻게 하냐는 눈.
“태워야 한다.”
간명하게 말한 강흑성은 기다렸다. 아이들이 결정할 일이어서다. 짐승들의 먹이가 되든 어떠하든 이대로 두고 갈 것인지, 아니면 태울 것인지.
“태워주세요······!”
떨림으로 나온 사내아이의 결정에 강흑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 초토화된 잡목들을 모았다. 그 위에 아이들 아버지 시선을 올리고 불을 붙였다. 고기타는 냄새를 내며 시신은 불타올랐고 아이들은 울었다.죽음이 연기로 변해 올라가는 하늘을 강흑성은 올려다봤다. 곧 어둠을 내려 보낼 하늘은 노을의 토혈을 내고 있다. 소리 없는 통곡이 퍼진다.
* * *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게, 그게 학교 같은 걸 만들겠다는 소리잖아?”
카이오의 말을 떠올리며 전복은 최창수에게 자신의 심정을 말했다.
“가능할까?”
최창수는 땅거미가 내려앉는 저녁 하늘을 응시하며 덤덤히 입을 연다.
“그러다 저녁 먹은 거 얹히겠군. 하면 하는 거지 안 될 건 뭐야.”“하 이 친구 의외로 태평한 소리하네? 이봐,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자면······”
현실적인 어려움을 말하려던 전복은 미간을 확 좁히고 입을 닫았다. 골목길 저편에서 차량이 다가와서다. 군대의 전술차량, 소형 플라잉카다.최창수가 긴장한 얼굴로 평상에서 일어서는 순간 전복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풀어놓은 무장을 빠르게 챙겼다. 그러는데 말소리가 들려온다.
“7군단 정보부 소속 원필성대위입니다.”
소속을 밝히는 목소리, 살기라고는 일체 없는 음성이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기 위해 창에 붙었다. 젊은 군인이 정중하게 용건을 이야기 한다.
“이곳에 정착한 여러분들에게 몇가지 확인할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게 뭔지 전복은 들었다.
“정찰대와 관련한 정보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복은 기묘한 소름을 등에 돋는 걸 느꼈다. 최창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