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103. 그들이 가는 길.
103. 그들이 가는 길.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둠 속에서의 불이란 조건으로 특별히 더 위험할 것은 없다. 반란으로 인한 불길은 사방에 있다. 다만 그럴 조건이라면 이곳에서 죽은 경비대정도일 터다.
‘도처에서 접전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아직은······’
관목 숲 너머 바깥의 반란접전상황을 인지하며 강흑성은 아이들을 돌아봤다. 이제 꺼져가는 불 앞에 손을 잡고 앉아 있다. 신에게 기도드리는 모습이다. 아버지를 좋은 곳에서 편하게 쉬게 해달라고 염원하고 있다.
‘신······’
그 이름을 들이마시는 숨과 함께 삼킨 강흑성은 기억을 더듬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하직하던 날이다. 슬프고 고통스럽던 그날, 울면서 어머니의 죽음을 부정했지만 신에게 빌지는 않았다. 신이 뭔지도 몰랐었다.신이란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적호문에게 잡혀서다. 그들이 사육하는 짐승으로 전락한 후에 세상의 많은 것을 알게 됐다. 그러나 세상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죽어야 할 신세, 그것이 운명의 장난처럼 부서져 살았다.
‘카이오와 여자들도 신을 찾고 기도했지.’
그녀들이 간절하게 기원하고 치성 드리던 모습이 생각난다.일신의 안녕을 위해서, 아이들을 위해서 간구하던 마음이다.지옥 같은 이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하던 간절함이다.그렇지만 그런 마음을 세상은 비웃는다.
‘저렇게.’
손잡고 기도하는 아이들, 아버지의 죽음 앞에 무릎 꿇은 남매, 저런 운명을 만들어낸다. 신이란 존재가 있다면 저 남매의 가혹한 운명을 애초에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 처절한 이 세상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야 한다.
‘신이 있다면, 우릴 갖고 장난질 치는 신이겠지.’
끊는 쇳물 같은 눈빛을 순간적으로 뿜어낸 강흑성은 이제 움직일 때라고 결정했다. 아이들의 곁을 지나 꺼져가는 불을 파헤쳤다. 맨손으로 하는 그 행위에 놀란 아이들이 물러나 우물거리는데 유골을 끄집어냈다.
“이대로 가져갈 순 없다.”
남매를 향해 무감정한 그 한마디를 던진 강흑성은 배낭에서 파우치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 유골을 넣었다. 무원신수의 힘으로 가루로 만들어서다. 그 모습을 남매는 바라보며, 슬픔을 삼키며 서로의 손을 꽉 잡았다.
“됐다.”
파우치를 사내아이에게 넘긴 강흑성은 물었다.
“목적지가 있었을 테데?”
사내아이는 눈가를 순간 움찔했다.강흑성이 묻는 뜻을 바로 알아들어서다.농장노예들이 일시에 반란을 일으킨 상황, 아버지를 따라 어디로 가려했던 거냐는 질문이다.그런데 대답을 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우릴 구해준 사람이지만······’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정체를 모른다. 경비대일 수도 있다.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다. 경비대 한팀을 몰살하는 광경을 봤다. 무시무시하게 강한 남자, 무인이다. 농장주들이 고용한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모른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다시 입을 연 강흑성은 남매에게 질문의 목적을 밝혔다.
“너희들 돌봐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데려다 주겠다.”
그리고 바로 제 갈 길을 갈 거라는 강흑성의 눈빛, 아이들은 알아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도 확실히 알았다.그래서 마음이 복잡하다.누군가 도와줄 거라곤 생각해 본적이 없어서다.
‘무인인데······’
게다가 눈앞의 이 사람은 도와줄 것 같지도 않은 무인이다. 무인들은 무서운 존재일 뿐이지 남을 돕는 자들이 아니다. 그런데 돕겠다 한다. 자신 남매를 노예상에게 팔아먹든지 농장주에게 넘기든 지가 아닌 거다.
“결정해라. 여기 있든지 움직이든지.”
마지막 말, 결정의 재촉을 강흑성은 던졌다.일단 개입했으니 마무리 지어야 하기에 이러고 있지만 결정은 본인들이 하는 것이다.남매의 삶에 개입하는 건 여기까지다.무엇보다 강흑성 자신에겐 해야 할 일이 있다.
“조협산으로 가려고 했어요.”
사내아이의 대답이 나왔다. 귀를 파고든 그 목소리가 전한 목적지가 어딘지 강흑성은 알았다. 자신이 가려는 방향, 태산으로 이르는 길목이다.
“그곳에서 모인다고, 아버지는 우릴 데리고 그곳으로 가려고 했어요.”
슬픔을 밀어내고 현실을 직시하는 눈빛이 사내아이의 눈동자에 어려 있었다. 여동생의 손을 꼭 잡은 저 마음, 살아야 한다는 심정이 강렬하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뒤늦은 인사를 사내아이는 했다. 꾸벅 고개 숙이는 그 행동에 여동생도 따라 고갤 숙였다. 머릴 든 사내아이는 제 이름과 동생 이름을 밝혔다.
“김철수입니다. 동생은 영희고요.”
철수와 영희,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익숙함을 느낀 강흑성은 고갤 끄덕였다.
“이제 가자.”
출발을 말한 강흑성은 바로 움직였다. 그러다 여자아이의 발이 불편하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와 오빠와 도주하다 발을 다친 게 분명하다. 바로 발목을 살펴봤다. 역시 접질렸다. 근맥을 풀어주고 죽은피를 빼냈다.
“내일이면 괜찮아 질 거다.”
눈도 못 맞추는 여자아이 영희에게 말한 강흑성은 관목을 잘라 부목을 만들었다. 영희의 발목을 완전히 고정한 후에 배낭을 벗어 철수에게 건넸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하는 철수 앞에서 영희를 등에 업고 일어섰다.그제야 철수는 배낭을 제 등에 멨다. 앞서가는 강흑성에게 다시 말한다.
“고맙습니다.”
영희를 등에 업은 강흑성은 반응 없이 관목숲을 헤치고 나갔다.
* * *
거칠어진 숨을 몰아 내쉰 박현은 작두칼에 묻은 피를 뿌렸다. 그러며 다리를 살폈다. 사이보그레그, 빔을 맞은 흔적이 옅게 남았지만 문제없다.
“퉤, 이 새끼들, 우리가 누군지 알고 뎀벼?”
어깨에 힘을 주던 박현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강흑성이 없는 일행의 현실이 지금 이 현실이어서다.농장 경비대 한팀 스무놈과 싸우느라 애를 먹었다. 아니 위태로웠다.엄연하게 이것이 일행의 현실인 것이다.
‘우리가 뭐, 음, 절정고수는 아니니까.’
피해 없이 이겼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크레몬을 사용했고 장갑차량을 이용해 놈들 중앙을 헤집고 공격한 기격이 먹혀서다. 애초에 상대가 전술적인 공격을 해 왔다면 이렇게 이기기란 어려운 일인 거다.
‘마을에선 최고전사라지만······’
새삼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며 박현은 된숨을 내쉬었다.
‘정말 강한 무공고수들이나 주술사 같은 존재들과 싸우는 건 완전히 달라.’
그런 자들과 싸웠다. 이기고 살아남았다. 그런데 그건 강흑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박현 자신과 무슬란이 숲의 전사족 움바바 최고용사라고 해도, 더 강한 존재들과 싸워 이기고 살아남는 건 어려운 일인 거다.
‘흑성이가 없으면······’
강흑성에게 빌붙어 있는 처지다. 물론 강흑성도 일행도 그렇다고 생각 안하지만 엄밀히 그런 거다. 그러니 강흑성이 태산으로 가려는 일에 끼는 게 아니었다. 도움이 아니라 짐이 된다. 이젠 확실하게 그게 구분된다.
“개신발······”
형 박준이 입에 달고 사는 욕을 흘려내던 박현은 부르는 소리에 반응했다.
“한사람 살았다!”
그렉이 소리쳐 알린 곳으로 박현은 바로 달려갔다. 시체들이 널린 들길 한가운데다. 애초에 차를 막아섰던 농장노예들이 서 있던 위치다. 빔에 가슴이 구멍 난 사람, 일행에게 총을 겨누고 소리치던 리더 사내다.
“조, 조협산에 가야······ 거기 다 모여서······”
뚫린 가슴으로 피를 흘려내던 사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허공을 더듬던 눈동자를 경직하며 숨을 거뒀다. 죽어가면서 본 동료들의 죽음을 저 눈에 넣고 낸 마지막 말이다. 조협산에 가야 한다는 절규였다.
“조협산에서 반란군이 모이기로 한 모양인데?”
박준이 심각하게 미간을 좁히고 죽은 자를 응시했다. 중요한 정보를 유언처럼 흘려낸 이 사내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헤아리는 게 아니다.조협산은 태산으로 가는 길목이다. 그곳을 거쳐야만 태산으로 가는 거다.
“농장주들이 토벌대를 꾸릴 거야.”
이후의 대응을 예상하며 박준은 어둠에 내린 들판을 돌아봤다. 아직도 곳곳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는 산동의 들판, 노예들의 피땀이 어린 곳이다. 저 들의 주인은 한사람이 아니다, 산동농장연합이란 이름이다.
“조협산에서 모인다는 정보를 알아야 토벌할 거 아냐?”
박현이 의문으로 반응하자 박준은 눈매를 꿈틀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걸 모를 것 같냐? 이미 파악하고 대응행동을 준비하고 있을 거다.”
반 박자 사이를 둔 박준은 다시 목소릴 냈다.
“이상하지 않냐? 농장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죽기를 각오하고 벌일 일인데 허술하다는 생각 안 드냐? 물론 무기를 확보하고 일거에 행동한건 맞는 것 같은데, 그렇게 한 거에 비해 이후가 별로란 말이지.”“별로라는 게 무슨 소리야?”
박현이 무슬란과 같은 눈으로 물었고 박준은 그렉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끝장을 내는 게 아니고 도망친다 이거지.”“뭐?”
아직도 이해 못하는 박현과 무슬란의 눈을 직시하고 박준은 설명했다.
“네가 농장노예라고 생각해 봐라. 반란을 계획했다 이거야. 실패하면 죽는 거고 도망쳐도 죽는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할 원인을 없애는 게 최선이지. 널 노예로 만든 자를 죽이면 되는 거잖아? 그게 당연하지 않냐?”
박현은 눈썹을 꿈틀했고 무슬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네, 무기까지 확보하고 벌인 거사인데 끝장을 봐야지. 그런데 이자들은 그런 기색이 아니었어. 경비대가 기동하는 형세도 전혀 그게 아니고, 농장주들을 공격했는데 실패한 건지는 몰라도 확실히 도망 중이었어.”
일행이 여태 보고 겪은 상황들이 그랬다. 뭔가 아귀가 안 맞는 부분이다. 아무리 농장주들의 힘이 강하고 무섭다고 해고 도망부터 치는 것 같다.
“조협산에서 모이기로 한 것 같은데······”
중얼거리는 박준에게 그렉이 생각을 말했다.
“그곳으로 도망친 사람들이 농장연합의 공격을 받으면 몰살 하고 말 겁니다. 한번 탈출한 노예는 살려두지 않는 게 노예주들의 철칙이죠. 일벌백계, 철저하게 응징합니다. 노예들이야 얼마든지 충원 가능하니까요.”
박준은 찌푸린 미간으로 고갤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그렇지만 뭐 우리가 어쩌겠냐. 처음부터 우리랑 상관없는 일이었고 상관 할 일은 더욱 아니지. 한다면 더러운 세상 탓을 해야지.”
그 순간 그렉이 한마디를 뱉었다.
“상관하죠.”
박준은 미간을 확 좁혔고 박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으며 무슬란은 벙찐 얼굴을 했다. 셋 모두 그렉이 한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바로 반응했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상관하자니?”“조협산에 가자는 소리냐?”
세 사람의 뜨거워진 시선을 받으며 그렉은 대답했다.
“그들이 죽게 될 거란 걸 알잖습니까? 빨리 가서 알려주면 살 수 있습니다. 토벌대가 달려올 곳에 모여 기다리지 말고 다른 행동을 하도록요.”
황당한 얼굴을 한 박준은 목소리를 높였다.
“야 그렉?”“등 돌리고 도망치는 건 다시 하고 싶지 않습니다.”
명료한 그렉의 대답.벌린 입을 우물거리던 박준은 그렉의 눈을 응시하다 시선을 내렸다.무슨 말을 하는지 저 마음이 뭔지 알아서다.동료들의 죽음으로부터 돌아선, 그렉의 과거가 그러했다. 그리고 거건 박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조협산을 지나갈 때 나만 내리겠습니다.”
이어 나온 그렉의 말에 박준은 고개를 휘뜩 들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굳이 같이 해야 할 일은 아니란 겁니다.”
상관하자는 말의 한계가 그거란 거다. 어차피 태산으로 가는 길, 조협산에서 자신만 내려달란 거다. 죽을 처지의 이들에게 달려가 돕겠다는 거다.그런데 그건 헤어짐을 뜻하는 결정이다.박준은 버럭 소리쳤다.
“개소리하고 있네!”
박현과 무슬란이 놀랄 정도로 반응한 박준은 그렉의 멱살을 잡았다.
“너 혼자 영옹 놀이 하겠다는 거냐? 그래서 뭐가 남는데? 돈이라도 생기냐? 지금 한 소리가 얼마나 개뼈다귀 같은 소린지 알지? 헛소리 마!”
다시 소리치는 박준에게 그렉은 덤덤한 눈으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 잘 아시잖아요.”
박준은 눈동자를 흔들었고 그렉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둘이 그렇게 눈싸움 아닌 눈싸움을 벌였다. 그 시간이 흘러가는데 박현이 끼어들었다.
“하자 형.”
박준은 고개를 홱 돌렸다. 눈빛으로 죽일 듯이 박현을 노려봤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잖아.”“그래, 할 수 있는 일이다 너란 새끼가 밥 처먹고 똥 싸는 거하고 다를 바 없지. 그래서 뭐? 그걸 왜 해야 하는데? 우리가 뭣 때문에 해야 하는데?”
무슬란이 입을 열었다.
“이미 했잖습니까?”“뭐?”
칼날같이 돌아온 박준의 시선을 똑바로 응시하고 무슬란은 말했다.
“샹그릴라를 버리고 여자들을 도왔잖습니까?”
흔들리는 박준의 눈을 박현이 돌이켰다.
“우린 흑성이를 돕는 게 아니야. 그렇다는 걸 누구보다 형이 잘 알거야.”
동생 박현을 응시하는 박준의 눈은 더 심하게 흔들렸다.
“우리가 실제로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돕자. 빨리 달려가서 위험상황을 알려주는 거야. 그리고 태산으로 가든 어쩌든 우리 길을 가는 거지.”
태산으로 가든 어쩌든, 그 말에 든 의미를 박준은 무거운 숨으로 삼켰다. 그렉의 멱살 잡았던 손을 풀고 돌아섰다. 시선을 멀리 던졌다. 가야하는 곳, 태산이 있는 북쪽이다. 어둠은 짙고 하늘엔 별만이 총총하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등 뒤에서 불어온 바람에 밀린 박준은 허탈한 미소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