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105. 숨 쉬고 있는 이유.
105. 숨 쉬고 있는 이유.
달을 올려다보던 카이오는 미소를 지었다. 저 달 아래 어딘가 있을 강흑성을 생각하면서다. 그가 헤쳐 나가는 길, 겪고 있을 고초를 생각하면 카이오 자신이 겪는 일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름대로 잘 해내고 있답니다.’
달을 향해 카이오는 마음속의 그 말을 전했다. 정말이지 자신이 생각해도 제대로 적응하고 있다. 대전 안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이곳에 정착했다. 들을 개간 하고 있고 서로를 지키고 있다. 핸드건은 늘 지니고 있다.
‘흑랑족을 죽인 일은······’
미소를 지운 얼굴에 고통스러운 표정을 떠올린 카이오는 이내 입술을 물었다.그건 살기 위해 한일, 명희를 해치려는 자를 죽인 건 당연하다.앞으로도 그런 일에는 목숨 걸고 맞설 것이다. 그러고자 숨 쉬는 거다.
‘다시 살게 된 이상. 이렇게 숨 쉬고 있는 한.’
허리에 차고 있는 핸드건에 손을 올린 카이오는 강렬한 눈빛을 흘려냈다. 심중에 들어찬 결의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이 목숨을 빼앗기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죽이려는 자에겐 죽음을 줄 것이라는 피 맺힌 의지다.
“달을 봅니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카이오는 흠칫하며 돌아섰다. 핸드건을 움켜쥔 채로다. 그 모습을 본 자, 다가서던 최창수는 멈춰 서서 시선만 던졌다.
“아, 네. 달이 곱네요.”
아닌 것처럼 손을 떼며 카이오는 미소 지었고, 최창수는 고갤 끄덕였다.
“보름달이군요.”“네, 마음이 푸근해져요.”
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달을 보며 섰다. 하지만 서로가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게 있다는 걸 느낀다. 그건 다름 아닌 정보장교의 일이다.
“군대에서 우릴 내버려둘까요?”
카이오가 결국 심중의 걱정을 말했다. 최창수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별일은 없을 겁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최창수는 설명했다.
“원필성이란 그 젊은 정보장교는 원하는 걸 얻어갔습니다. 우리가 샹그릴라일행과 관련된 사람들이란 걸 확인한 겁니다. 그 일 때문에 피해가 생기진 않을 겁니다. 우릴 잡아서 대륙에 있는 자들을 어쩔 순 없지요. 그래야 할 필요로 온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사실 확인이 목표였습니다.”“그래도 만에 하나······”“7군단은 명예를 최우선의 가치로 여깁니다.”
카이오는 걱정을 말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아는 내용이다. 7군단의 수장 그리샴장군이 어떠한 인물인지, 그 휘하의 7군단이 어떠한지 안다.
“그들은 명예롭지 않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총과 칼을 가진 자들은 그래야 한다는 것이 그리샴 장군의 철학입니다. 예, 그만이 가진 가치이죠.”
서글픈 빛을 보인 최창수는 다시 목소릴 이었다.
“나무가 크면 가지도 많고 뿌리도 깊은 법이라, 7군단이라고 전부 명예를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진 않을 겁니다. 그건 세상의 당연한 이치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7군단 내 핵심라인인 정보장교가 찾아온 건 그리샴장군의 지시라고 봐야 할 겁니다. 그런 일에 분탕을 칠 자는 없습니다.”
고갤 주억이며 카이오는 안도의 빛을 얼굴에 드리웠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7군단의 주목을 받는 처지라 더 안전해 졌다고 봐야할 겁니다.”“그런가요?”
일이 그렇게 되는 건가하며 카이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흑성이란 친구에 대해서 그들은 궁금해 합니다.”
강흑성의 이름이 나오자 카이오는 어깨를 경직했다.
“그분을······”
흔들리는 카이오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최창수는 말했다.
“유성대협의 후인이 아닌 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카이오는 다시 경직했다. 지금 들은 이름, 유성대협,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안다. 삼백년 전 프락시안의 공격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대영웅이다.
‘유성대협의 후인······!’
코흘리던 어린 시절부터 그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유성대협, 그는 신비롭게 사라졌다.그의 자취를 찾으려 많은 무인들이 세상을 헤매고 다녔다 했다. 그러나 아무도 찾지 못했다.그런데 강흑성이 후인이라고?
“그게 무슨 말인가요?”
뒤늦게 다급히 반응하는 카이오의 눈을 응시하며 최창수는 고갤 저었다.
“나도 모릅니다.”
시선을 돌린 최창수는 달 아래 저편으로 눈길을 던졌다.
“다만······ 바다건너 대륙 땅에서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압니다.”
카이오의 떨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최창수는 어금니를 물었다.
* * *
예측한대로 반란군의 형세는 엉망이다. 통일된 지휘라인도 없고 조직체계도 없다. 여기저기 농장에서 일하던 이들이 일거에 거사를 일으킨 게 전부다. 그래놓고 한 일이 이곳 조협산으로 도망친 것, 모인 결과다.
“모르겠습니까?”
답답한 얼굴의 그렉은 장년사내를 향해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농장주들이 토벌대를 벌써 움직였을 겁니다. 이곳 조협산이 집결장소라는 걸 모를 수가 없는 겁니다. 여기 모이기로 한 이들이 전부 모였습니까? 얼마나 인원이 빕니까? 잡히거나 투항한 이들이 말 안했겠습니까?”
그렇다, 고문을 하던 회유를 했든 벌써 정보가 샜을 터다.
“거사에 동참하는 자들만 아는 기밀인데······”
장년사내는 깡마르고 주름진 얼굴을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렸다. 그렉과 일행의 말을 들어서도 그렇지만, 이젠 상황의 흐름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애초에 무리한 일이었던 거야. 거사를 모르는 자들을 배제하고 벌인 이일은······”
장년사내의 넋두리 같은 말에 그렉은 바로 다그쳐 물었다.
“무슨 소립니까? 모르는 자들을 배제한 일이라고요?”
박준과 박현과 무슬란도 눈에 힘을 줬다.어둠속 장년 사내와 그 측근들은 서로 눈길을 피하면서 한숨을 쉰다. 그렇게 대답이 흘러나왔다.
“희생을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지······”
장년 사내는 슬픔과 분노를 억누르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자신들이 어떻게 거사를 일으키게 된 건지, 어째서 반쪽의 거사가 되어야 했던 건지.
“허.”
박현이 황당한 반응 뒤로 분노를 드러냈다.
“그러니까, 살 놈은 살고 죽을 놈은 어차피 죽는다?”
무슬란도 작두칼을 움켜쥐고 콧김을 뿜어냈다.
“여자와 아이들이 있는 집은 빼고 무기를 잡을 수 있는 자들만 거사했다고? 그들이 죽는 건 어쩔 수 없다? 희생은 당연한 거라고? 뭔 개소리야!”
버럭 소리친 무슬란의 기세에 장년사내 측근들은 바로 반응했다. 총기를 겨누는 그들에게 장년사내가 거두라고 했지만 눈동자는 응축해 있다.
“그게 아니라 농장주들이 굳이 그들을 해치진 않을 거라고 판단한 거지.”
장년 사내의 변명 아닌 변명의 대답, 그렉과 일행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견 맞는 말이다. 노동력을 그리 쉽게 없애진 않을 터다. 더군다나 거사에서 제외 돼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다. 그렇다 해도 황당한 일이다.
“애초에 거사를 계획하고 주도한 게 누굽니까?”
박준이 다그치듯 묻자 장년사내는 깊은 한숨을 쉰 후에 입을 열었다.
“가브리엘, 그자는 대체 왜 안 보이는 겁니까?”
장년사내의 측근 중 젊은 자가 성을 내듯 목소리를 냈다. 그 입에서 나온 이름, 가브리엘이 답이라는 걸 그렉과 일행은 알았다.
“가브리엘이 누굽니까?”
그렉이 묻자 장년사내는 찌푸린 얼굴로 다시 한숨 쉰 후 입을 열었다.
“농장의 수확물을 거래하는 상인이지. 그자가 무기를 공급해 줬어.”
이어지는 이야기로 일행은 전후를 파악했다.가브리엘이란 이름의 상인이 이들을 부추겼다. 아니 조종했다.무기를 손에 쥐어주자 이들은 감정과 충동이 앞서게 됐다.짐승 같은 삶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쥔 것이다.
“가브리엘, 그자가 이곳 조협산에 모이라고 한 겁니까?”
박준의 물음을 받은 장년사내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일단 거사를 벌인 후에는 안전하게 도주해야 한다고 했지. 이쪽에 집결하면 그가 도울 거라고 했어. 숨을 장소도 있고 이동수단도 있다고 했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렉은 다시 물었다.
“가브리엘이란 그자의 거사를 종용한 이유가 뭔지는 아십니까?”“그게, 그가 산동농장연합과 거래하다가 부당한 손해를 본 모양이야.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앙심을 품은 거지. 그 복수라고 했어.”
어처구니없는 마음의 백분지 십도 씻어내지 못한 얼굴로 그렉은 다시 물었다.
“정말로 그자 말만 믿고 이런 일을 벌인 겁니까?”
이렇게 황당할만치 허술하고 위험한 일을 이란 의미를 모를 수가 없다.장년 사내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주변으로 돌렸다. 자신의 곁에선 젊은 측근들, 노예로 잡혀 심증처럼 살아가던 이들, 그들과 시선을 맞췄다.
“그저······ 우리는······”
고통의 빛이 차오른 눈을 감은 장년 사내는 뒷말을 냈다. 깊고 무거운 숨으로,
“더는 이대로 싶고 싶지 않아서······ 우리 같은 것들도 목숨을 가지고 태어난 이유가 있다면······ 숨 쉬고 살아있는 이유를 찾고 싶었을 뿐이야······”
처절한 통한이 밴 목소리, 그렉과 일행은 시선을 돌렸다. 답답하게 미어지는 것 같은 가슴에 밤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그런데 섬광이 보인다.
“공격이다!”
무슬란의 외침과 더불어 불벼락이 들이쳤다.
* * *
묵묵히 따라오는 철수를 힐긋 돌아본 강흑성은 영희의 고른 숨소리를 들었다. 등에 업혀 잠이 든 아이는 뭐가 그리 무서운지 목을 안은 손에 힘을 풀지 않는다. 제게 드리운 가혹한 운명에 잡히지 않으려 것 같다.
“가브리엘이 기다릴까요?”
철수가 던진 물음에 강흑성은 순간 걸음을 멈칫했다. 아이로부터 들은 이야기, 농장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킨 내막이다. 그 핵심이 가브리엘이다.
‘농장 거래상인이 앙심을 품고 일을 만들었다······’
그자가 무기를 공급해주고 반란을 획책 종용한 거다.그렇다는 내막을 이제 알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다른 흑막이 있다는 게 눈에 보인다.모든 게 너무 허술하다. 철수 아버지가 기밀을 아는 것도 그렇다.주동자들 중 누군가에게 들었다는 거다.그래서 철수아버지는 따로 탈출을 준비했다는 거다. 가족들이 있는 이들은 버려진다는 걸 알고서다. 발설하지 않고 기회로 삼으려 한 거다.그렇지만 결국 죽음을 맞았다.
“성공한 걸까요?”
다시 묻는 철수에게 강흑성은 대답했다.
“아니, 이용당한 거다.”
강흑성을 뒤따라가던 철수는 멈춰 섰다. 강흑성은 멈추지 않았고, 철수는 다시 서둘러 걸었다. 강흑성의 바로 뒤로 붙어서 흥분을 토해낸다.
“가브리엘에게 이용당했다는 건가요? 우리가요?”
거침없이 걸음을 낼뿐 강흑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대답으로 들은 철수는 열세 살의 머리와 가슴으로 생각하고 짐작했다. 무서운 힘을 가진 농장주들로부터 탈출하려는 몸부림, 그 가여운 운명의 절망이다.
“어?”
멈춰선 강흑성에게 부딪치고 철수는 봤다. 어둠 저편에서 섬광이 피어나고 있다. 저곳이 목적지인 조협산이라는 걸 알겠다. 저 섬광도 알겠다.
“어, 어떻게 하죠?”
두려움에 물든 철수의 목소리를 강흑성은 듣고 있지 않았다. 어둠 저편의 목적지인 조협산에 피어나는 섬광도 보지 않았다. 야음의 공기를 타고 밀려오는 살기에만 반응했다. 그 속에 배어 있는 피냄새를 들이켰다.
“돌아갈 수도 없겠구나.”
조협산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는 길, 이젠 돌아설 수도 없다. 피냄새와 살기의 근원들이 다가오고 있다. 노예인식표로 인한 감지가 분명하다.
“여기서 움직이지 마라.”
철수 옆에 영희를 내려놓은 강흑성은 흑청빛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철수의 눈을 응시했다. 항거하지 못할 그 눈을 향해 철수는 고갤 끄덕였다.느릿하게 몸을 돌린 강흑성은 철혼을 잡았다가 놓았다. 허리에 감은 은빛 사슬을 풀었다. 마음속으로 이름을 정한, 철룡의 차가움을 움켜잡았다.
“철룡, 피를 먹자.”
잡목지대를 한줄기 바람처럼 강흑성은 달려 나갔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총격섬광을 인지하며, 그 죽음을 피하며 철룡을 휘둘렀다.죽음이 어둠속에 혈화로 피어났다.철룡이십사식의 광포한 힘이 몰아치는 속에서 공격자들은 흩어졌다.태풍이 몰아치는 것 같은 기세에 모조리 휩쓸린다.철수와 영희에게로 접근 하던 자들의 뒤에서도 덮쳐버린다.잠에서 깬 영희를 안고 철수는 부들거렸다.동생 영희가 아무것도 못 보게 하고 자신은 눈 부릅뜬 채 봤다.목숨을 구해준 청년이 만들어내는 파멸이다.지옥에서 온 사신처럼 움직이는 존재들 전부를 짓이겼다.
* * *
“이젠 빼도 박도 못해!”
박준의 거친 외침에 담긴 의미를 그렉은 뜨거운 숨과 함께 삼켰다. 토벌대가 저렇게 벌컨 공격을 해오는 마당,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 자신들 일행이야 노예인식표가 없으니 타겟팅 될 일은 없지만 다를 게 없다.
“개신발! 나가서 조져버리자고!”
바위 뒤에 엄폐해 흥분하는 박현에게 그렉은 냉정한 목소리를 던졌다.
“너희는 안 돼! 그 덩치로 움직였다간 바로 벌집이 될 거다!”“그럼 어쩌자고!”
바로 반응하는 무슬란에게 그렉은 계획을 말했다.
“내가 우회애서 접근 할 거다! 산 입구만 막으면 독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벌컨부터 처리할거니까 그게 되면 바로 반격해!”
그렉은 박준에게도 소리쳤다.
“여긴 애초에 도망칠 데도 없는 곳입니다! 죽지 않으려면 싸우라고 해요!”
박준이 뭐라고 반응할 새 없이 그렉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