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108. 붉은 꽃.
108. 붉은 꽃.
해가 뜨거워지고 있다. 정오가 되어가니 당연한 거지만 이상하리만치 덥다. 목적지인 태산은 이제 시야에 들어오고 있지만 예감이 기묘하다.
‘아우리엘은 이미 와 있어.’
그렇다는 걸 본능으로 확신하며 강흑성은 기묘한 예감의 원인을 더듬었다.태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점점 사라져 가는 들판이다.주변은 관목 숲에서 수림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그런데 뭔지 모를 불길함이 있다.
‘뭔가 존재해.’
본능이 알려주는 존재감을 곱씹으며 강흑성은 계속 걸었다. 처음 보는 광경을 보면서다. 수림이 시작되고 있건만 거대수가 아니라 꽃들이 보인다. 나팔꽃처럼 생겼는데 붉은 색이다. 줄기는 희한하게도 덩굴이다.
‘이런 꽃은 처음 보는데.’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덩굴의 붉은 꽃, 그 군락을 지나가던 강흑성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려서다. 일체의 기척이 없다.
‘새소리, 벌레소리······’
어떤 소리도 없다. 태산으로 이어지는 이 곳엔, 수림이 시작되는 이 일대는 죽은 공간처럼 생명의 반응이 없다. 악마새의 울음도 아귀충의 꿈틀거림도 없다. 아니 있기는 하다. 기묘한 존재감, 그것은 분명히 있다.
‘뭐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강흑성은 뒤를 돌아봤다.지나온 길, 푸른 하늘 저편 아래엔 그들이 있다.그렉과 박준과 박현과 무슬란이다.갑자기 그들이 떠오른다. 반란군과 함께한다는 그들의 결정도 그렇다.
‘그들과 같이 싸우겠다는······’
무엇 때문인지 어렴풋이 짐작한다. 그렉의 마음속에 있는 것, 박준이 가슴 깊은 곳에 숨겨 두고 있던 것, 박현과 무슬란의 아픈 기억과 분노다.그걸 뭐라고 딱 잘라 말하고 이해하려 하는 건 부질없다.그들의 결정이면 되는 거다.철수와 영희 같은 아이들, 노예였던 이들과 함께하는 거다.
“다시 보게 될 겁니다.”
바람 속으로 그 말을 던진 강흑성은 다시 수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꽃덩굴들이 살랑이며 흔들리는 수림, 태산을 향해 멈췄던 걸음을 냈다.
* * *
서주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본래 균형을 유지하던 팔개문파의 세력이 와해돼 그야말로 군웅할거다. 아니 그 말은 격에 맞지 않는다. 잡스러운 흑도무리들의 패권싸움으로 아수라장이다. 이렇게 된 원인이 있다.
“지옥사신이란 자가 분명히 검에 찔려 쓰러졌었단 말이지?”
육대원의 무서운 눈을 감히 마주보지 못하고 파이곤족 여인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습니다······ 그날 제가 본 것은······”
이미 들은 이야기에 더해 다시 흘러나오는 파이곤족 여인의 목격담을 육대원은 진중한 얼굴로 들었다. 지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이곳, 서주반점의 주인 마상풍이란 자가 부리던 여인이다. 숨어서 지켜봤다.
“죽은 자들이 한데 뭉쳐서 괴수가 되는 끔찍한 광경이었습니다······”
여인의 주인 마상풍도 그랬다는 거다. 그렇게 만든 주술사가 샹그릴라 일행, 그중의 지옥사신과 싸웠다는 거다. 정확하게는 주술사와 함께 온 자들이었다는 거다. 혁리추와 명일해, 그들이다. 결국 강흑성에게 죽었다.
‘강흑성.’
그 이름을 철금련주 철무진에게 들어 알게 됐다. 철무진은 강흑성일행의 행방을 정말로 모르는 건지 이름 하나만 알려줬다. 그나마 알려준 것도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접대란 기분이다. 그자의 눈빛과 미소가 그랬다.
“주인께서 그렇게 되고 난후에 살기 위해······”
파이곤족 여인이 산 건 정말로 행운이라고 하겠다. 강흑성이 반점 밖으로 나가고 난후 샹그릴라 일행도 나갔다. 파이곤족 여인은 안개를 헤치고 허둥지둥 달리다 그 광경을 본 거다. 강흑성과 주술사패의 싸움이다.
“붉은엘프가 검을 찔렀습니다······ 분명이 그 광경을 봤습니다.”
말해 놓고 파이곤족 여인은 우르르 몸을 떨었다. 다시 생각해도 무섭고 몸서리쳐진다는 반응이다. 왜 그런지는 직전에 이야기했기에 안다.
‘강흑성에게서 붉은 엘프에게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이동했다는 거다.강흑성을 찌른 검을 통해서다.그건 마치 둑이 무너져 격류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고 한다.그렇게 강흑성은 쓰러졌고 붉은 엘프는 주술사와 싸웠다는 이야기다.
‘둘은 사라졌고 강흑성은 살아났다······’
결과가 그렇다, 붉은 엘프가 주술사의 힘을 파훼하고 쫓아간 직후에 안개가 흩어졌다는 거다. 죽은 자들이 뭉친 원괴들도 쓰러졌다. 주술이 깨졌으니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중요한건 그렇게 한 존재, 붉은 엘프다.
‘가라레······’
레드파운틴족의 전설, 붉은 하늘을 여는 신인 가라운이다.그 붉은 엘프가 그렇다는 거다.그자가 하는 말을 파이곤족여인이 안개 속에서 들었다.산자와 죽은 자들의 마지막 숨과 기운이 혼재한 속에서 들은 거다.
‘파이곤족 여인이 주변에서 보고 들었다는 것을······’
붉은 엘프도 주술사도 되살아난 강흑성도 몰랐다. 그들의 상황이 그랬고 주변 환경이 그랬다. 산 자의 숨소리를 찾아 확인할 일도 아닌 거다.
‘알았다고 해도 상관없고.’
고개를 주억거린 육대원은 이마에 솟은 뿔을 무의식적으로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붉은 엘프가 정말로 전설의 그 존재인가 하는 것, 그자가 어떻게 강흑성 일행과 합류했으며 무슨 이유로 강흑성을 죽이려한 건지다.
‘신남경, 거기서부터야.’
강흑성 일행에 붉은 엘프가 합류한 시점이다. 그곳에 그들은 함께 나타났다. 거대괴수거북을 이용해 배를 끌고 왔다고 한다. 철금련이 염원하던 모종의 일을 함께 했다는 정보도 확인했다. 그 일후 그들은 떠났다.
‘블랙블러드의 공격까지 파훼하고 북으로······’
지옥사신이란 별명이 붙은 자, 강흑성은 북으로 이동하고 있다.그 뒤를 육대원 자신처럼 천지문의 종초홍이 뒤쫓고 있다.백두파에서도 곧 따라붙을 것이다. 종국엔 얼굴을 보고 서서 병기를 부딪치게 될 터다.
‘애초 예상보다 일이 복잡하고 어렵게 흘러가는데······’
레드파운틴족의 전설이 더해진 현황, 곱씹던 육대원은 목소리를 들었다. 눈앞에 조아리고 있는 여인, 파이곤족 여자는 조심스럽게 확인한다.
“약속을 지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지만 용기 내 하는 말, 파이곤족 여인의 절박한 현실이다. 아수라장이 된 서주에서 숨어 지내는 것도 한계가 있는 거다.
“약속은 지킨다.”
육대원이 답하자 파이곤족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기쁨이 드러난 얼굴엔 아직도 의구심이 남아 있지만 진심으로 고개를 조아린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육대원은 수하들에게 손짓했다. 대기하던 초월십검 중 이인이 여인을 데리고 나갔다. 애초에 약속한 돈과 삼월문의 보호령를 주는 거다. 미치지 않고서야 삼월문의 보호령을 가진 여인을 해칠 자는 없을 것이다.
‘천지문에서도 이곳을 거쳐 갔으니 내막을 파악했을 텐데.’
종초홍이 어디까지 얼마나 알고 있는 건지 궁금해 하며 육대원은 일어섰다.
“서둘러 이동해야겠다.”
신남경에서 이곳 서주까지 미친 듯이 주파해 왔듯이 속히 가야 한다. 천지문을 따라잡고 백두파의 접근을 따돌리고, 강흑성을 확보해야 한다.
“가자.”
육대원을 필두로 초월십검은 다급한 행보를 시작했다.
* * *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들의 흔적은 전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나는 곳은 산동농장연합의 곡창지대,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사달이 났다.
“아무래도 반란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우호위의 조심스러운 의견에 좌호위가 덧붙인다.
“농장노예들이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필경 배후가 있을 것입니다.”
무심한 눈을 돌린 종초홍은 플라잉카 밖으로 보이는 광경을 조망하며 말했다.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좌우호위는 입을 다물었고 종초홍은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신경 쓸 일이 아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인 거다.해야 할 일이 있어서 온 것이고 지구는 애초에 버려진 곳이다.이곳에서 무슨 일이 생기든 알 바 아니다.
‘그렇기는 한데······’
뭐지 모를 기묘한 예감이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다. 그건 잘 놓아둔 물항아리가 흔들리는 느낌이다. 미세한 진동이 항아리에 퍼지고 있는 것 같다. 그로인해 물이 찰랑대는 것 같다. 진동은 점점 더 커질 것만 같다.
‘항아리를 진동하게 만드는 건······’
지진일 수도 있고 누군가 손을 대고 흔드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뭔지 정확하게 구분 안 되고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느껴진다.이 진동과 흔들림은 그칠 게 아니라는 것, 종국엔 항아리가 깨진단 걸.
‘지구라는 항아리가······’
눈을 감으며 종초홍은 명령했다.
“속도를 최대로 높여라.”
자동운전 상태의 플라잉카는 엔진이 터지도록 달려 나갔다.
* * *
마치 터널처럼 수림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려 있다. 거대수들이 밀려나듯 만들어진 자리, 붉은꽃덩굴들이 좌우로 담장을 만든 듯한 길이다.그 속을 걸어가며 강흑성은 냄새를 맡았다.은은하고 달큰한 꽃향기다.
‘그렇군.’
확신을 냄새로 확인하며 강흑성은 멈춰 섰다.고개를 숙이고 움직임을 그쳤다.그렇게 약 20여초가 흘렀을 때, 기다리던 반응이 스르르 다가왔다.덩굴이 움직인다.지면을 스치면서, 느린 것 같으면서도 빠르게 다가온다.좌우에서 동시에 뻗어온 그 접근은 강흑성의 다리를 휘감았다. 그리곤 좌우로 잡아당겼다. 그 파워가 엄청나다. 맹수도 찢어버릴 힘이다.하지만 강흑성은 요지부동, 한치도 움직이지 않았다.당굴들은 당황한 건지 꽃과 잎을 오므렸다.그러나 그건 찰나, 더 거세게 옭아매고 당긴다. 그렇지만 강흑성의 부동은 여전, 차가운 미소만이 입가에 번진다.
“너희구나.”
기묘한 존재감, 그 원인을 찾아낸 미소로 강흑성은 걸음을 냈다.두두둑 하는 소리로 덩굴들이 끊어졌다.마치 강철와이어가 끊어지는 것 같은 소리, 실제로 그런 장력이다. 그런데다 끊어진 덩굴이 강산을 흘린다.치이익, 의복이 녹아버리는 가운데 강흑성은 철룡을 풀었다. 불나무 수액과 같은 강산을 흘려내는 붉은꽃덩굴, 기이한 공명음을 내는 것들에게 은빛분노를 발산했다. 내딛는 걸음을 회오리로 만들며 휘몰아쳤다.
* * *
천지문과 삼월문이 머물렀던 시간과 비교할 수 없게 짧은 시간을 머무른 백두파는 떠나갔다. 천지문과 삼월문을 따라잡겠다는 조급한 행보다.
“허.”
복잡하고 무거운 숨을 내쉰 철무진은 미간을 확 좁혔다. 강 저편 하늘에서 날아오는 것들이 있다. 커다랗게 빠른 비행, 이내 정체가 뭔지 보인다.
“비룡!”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저 괴수들은 분명 비룡이다. 독수리와 뱀의 형상을 합쳐놓은 것 같은 괴수, 사라진 것들이다. 삼백년전 백두파가 부리던 괴수들이다. 백두산과 천산산맥에서만 산다는 그 괴수들이다.
‘백두파가 부른 거구나!’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친 철무진은 움켜쥔 주먹까지 떨었다.
* * *
수림이 타고 있다, 아니 녹고 있다. 붉은꽃덩굴에서 흘러나온 수액이 만드는 결과다. 엄밀하게는 강흑성 자신이 철룡을 휘둘러서다. 독향기를 흘려내 목표를 잡아 찢는 괴식물, 강흑성 자신을 노린 대가를 안겨줬다.
“너희 독은 내겐 안 통한다.”
담담한 목소리를 흘려낸 강흑성은 철룡을 땅에 끌며 다시 걸음을 냈다. 촤르르르 하는 그 소리가 수림에 퍼지는 가운데 붉은 꽃덩굴들은 물러났다. 강흑성이란 존재가 위험하다는 걸 깨달은 결과, 그런데 뭔가 있다.다시 터널처럼 길이 열리는 속을 걷던 강흑성은 또 멈춰 섰다. 떨어져 있는 병기 때문이다. 새카만 빛이 바랬지만 분명히 기억하는 흑궁이다.
‘단천문주 운드라이의 병기.’
그것이다. 난데없이 저것이 보인다. 붉은꽃덩굴들이 덮여 있던 곳이다.
‘여기에서?’
미간을 뒤튼 강흑성은 흑궁을 차올려 잡고 빠르게 걸음을 냈다. 그 행보에서 썰물처럼 물러나려 붉은꽃덩굴들의 모습은 기괴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