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109. 해가 지는 때에.
109. 해가 지는 때에.
건물 앞으로 다가오는 플라잉카를 보고 카이오는 잠들었던 불안을 깨워냈다. 7군단의 전술차량, 정보장교 원필성이란 이가 타고 왔던 차다.최창수는 위험 같은 건 없을 거라고 했는데 저차를 역시 다시 보는 된다.
‘뭣 때문에?’
다시 찾아온 이유가 뭔지 긴장을 삼키며 카이오는 밖으로 나갔다.멈춰선 플라잉카에서 내리는 사람은 역시 원필성 대위다.미소 지은 얼굴로 목례한다.웃는 얼굴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되긴 하는데 아직 모른다.
“또 왔습니다.”“아예.”
어색한 미소를 마주 내는 카이오에게 원필성은 바로 용건을 꺼냈다.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하겐 와서 봤다. 그렇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기에 원필성은 계속 말했다.
“7군단에서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할 수 있지 않냐고 하신 말씀, 그겁니다.”“예?”“미흡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플라잉카의 뒷문을 연 원필성은 화성박스를 꺼냈다. 아직도 영문몰라하는 카이오의 앞에 내려놓고 박스를 개봉했다. 카이오는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이건?”“예. 아이들 학습교재와 교구입니다.”
박스 가득 든 물건들을 보고 카이오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기쁘고 당황스러워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는 것들인 거다.
“대전 내 학교에서 사용하는 것들입니다. 사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웃는 얼굴로 설명하려던 원필성은 멈칫했다. 왜 그러는지 카이오는 안다.
“네, 알고 있답니다. 좋은 검이 있다고 검술을 펼치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주변에 뜻을 함께할 분들을 구하고 있어요. 읽고 쓰는 것이 가능한 분들, 역사를 가르칠 수 있는 분, 수학을 아시는 분, 하게 될 겁니다.”
하게 될 거란 카이오의 말에 든 힘을 원필성은 강하게 느꼈다. 어떤 어려움과 난관이 있어도 의지를 굽히지 않겠다는, 이루고 말리란 희망이다.
“분명 그렇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환한 웃음을 피워낸 원필성은 카이오의 미소 뒤로 날아오는 질문을 받고 흠칫했다.
“여길 찾아오셨던 목적은 이루신 건가요?”
최창수에게서 그렇다고 들었지만 카이오는 확인하는 눈빛을 던졌다. 교재교구를 가져다 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야 하는데 마음이 먼저 나왔다. 강흑성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어찌해도 다스리지 못하는 마음이다.
“그건······”
순간적인 당황을 털어내고 원필성은 다시 미소 지었다.
“도움이 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지만, 뭐, 그럭저럭 된 셈입니다.”
카이오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원필성이 찾아와 샹그릴라 일행에 대해 묻는 질문에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그 일로 인해 죽게 된다고 해도 아무 말 안할 참이었다. 그러나 7군단은 그저 확인이었다.
“그 일로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이오를 향해 진심어린 미소로 말한 원필성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서쪽하늘로 돌렸다. 노을이 물들고 있는 저 하늘 아래 대륙 땅, 걱정은 그곳에 있다. 화성의 삼대문파와 블랙블러드가 움직이고 있는 일이다.
“차라도 한잔 하시겠어요?”
뒤늦은 감사인사를 하려는 카이오, 원필성은 돌아보고 어색하게 웃는다.
“아예, 주신다면 기꺼이 폐를 기치겠습니다.”“거친 맛이라고 욕하진 마세요.”
직접 딴 야생찻잎이라고 설명하며 카이오는 원필성은 안으로 이끌었다. 그 순간 건물 뒤에서 아이들이 우다다 뛰어왔다. 준후와 명희를 비롯한 아이들, 천진한 웃음소리가 퍼지는 가운데 들일 갔던 이들도 돌아왔다.
* * *
“괴이합니다.”
좌호위의 말처럼 괴이하다.태산의 앞에 왔건만 산으로 진입할만한 틈이 없다.붉은 꽃이 열린 덩굴숲이 산을 둘러싸고 있다.그렇다, 이건 둘러싸고 있다고 하는 게 맞다. 저 꽃덩굴이 뭔지 생전처음 보는 것이다.
“식물도감에 등재가 안 된 것입니다.”
멀티폰을 조작하던 우호위의 목소리는 다소 날이 서 있다. 지구에 온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이곳에 대해선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기록된 정보와 일치하지도 않는다. 지구는 그런 곳, 그러함에 대한 짜증의 발로다.
“저 소리는 뭘까요?”
미간을 가득 좁힌 좌호위의 의문은 종초홍 자신도 품고 있는 거다. 기류의 휘돎으로 생겨난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듣는 새울음 같기도 한 소리다. 바람을 타고 퍼지는 저 소리는 기묘하게도 걸음을 재촉하는 것 같다.“당주, 저기 길이 있습니다.”
우호위가 가리키는 곳으로 종초홍은 시선을 돌렷다. 정말로 덩굴숲 사이로 틈이 있다. 분명 조금 전까지도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드러났다.
‘정말로 괴이해.’
불길한 예감이 돋아나오는 가운데 종초홍은 걸음을 옮겼다.덩굴 숲 사이로 난 길 앞에 섰다.안으로 긴 터널처럼 돼 있다.붉은꽃들은 바람에 흔들리며 살랑거린다.귀를 파고드는 기이한 소리는 가냘프게 흐른다.
“어찌할까요?”
묻는 좌호위를 돌아보지 않고 종초홍은 미간을 꿈틀거렸다. 유성대협의 후인으로 짐작되는 자, 강흑성이란 이름의 존재는 분명 이곳으로 왔다.
‘어디든 덩굴숲 따위 헤치고 들어가면 되지만······’
살며시 속살을 보여주는 계집처럼 이렇게 길이 드러났다. 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고자 온 길이다. 주술사를 죽인 붉은 엘프도 이곳에 왔다.
‘좌고우면할 일이 아니지.’
결정한 종초홍은 좌우호위에게 명했다.
“들어간다, 현상황을 알려라.”
걸음을 내는 종초홍의 뒤에서 좌호위는 멀티폰을 조작했고 우호위는 검을 움켜잡았다. 이렇다 할 위험동정도 없고 살기도 없지만 무인의 본능이다. 기이한 기류소리와 살랑대는 붉은꽃들과 은은한 향기가 불길하다.
“짐승들의 기척이 전혀 없습니다.”“벌레들도 마찬가집니다.”
긴장을 품은 좌우호위의 목소리를 들으며 종초홍은 계속 전진했다. 그런데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갑자기 귀를 파고든 목소리가 그렇게 만들었다.
-네놈들이 벽뢰수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냐!
흠칫하며 경직했던 종초홍은 벼락처럼 반응했다. 검을 뽑아들고 좌우를 돌아 봤다. 좌우호위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호통을 출처를 알 수 없다.
“상패천의 목소리가 분명합니다!”
흥분한 좌호위는 우호위를 돌아봤다.
“그렇습니다! 상패천입니다!”
강한 고갯짓을 한 우호위는 검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시퍼런 검광 발산하는 검을 덩굴 숲에 겨눈다. 그렇지만 정확한 방향을 찾진 못한다.
‘어디에서······’
눈썹을 꿈틀거리던 종초홍은 재차 경직했다.
-네놈들은 죽을 것이다! 절대로 벽뢰수를 가질 수 없다! 으하하하하!
다시 귀를 파고든 상패천의 목소리, 사방에 울리고 있다.
‘이런!’
종초홍은 당황하는 동시에 분노했다. 지금 들린 상패천의 외침은 마치 회음전성과 같아서다. 어디인지 정확한 방향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기이한건 덩굴숲의 붉은 꽃들이다. 흡사 경련하는 것처럼 떨고 있다.
“꽃들이 괴이합니다!”“뭐야 이건?”
좌우호위의 반응 속에서 종초홍은 다시 또 목소리를 들었다.
-상패천! 구차한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싶다면 벽뢰수를 내놓아라! 금혈신도 위하문은 허언을 하지 않는다! 내 반드시 후한 대가를 치르리라!-으하하하! 위하문 웃기는 구나! 네게 그런 위엄과 명예가 있었더냐? 그러하다면 바로 나 운드라이다! 벽뢰수를 내게 넘겨라! 그게 살 길이다!
종초홍은 미간을 거칠게 경련했다. 금혈방주와 단천문주의 목소리, 상패천을 추적해간 자들이다. 이번엔 그들의 목소리다, 역시 방향성이 없다.
‘진법에 갇힌 것인가······!’
전신에 내력을 끌어올린 종초홍은 그 순간 기척을 감지했다. 발로 다가오는 미세한 움직임이다. 그것이 덩굴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 검을 후렸다.팅, 식물을 자른 것이라고 여길 수 없는 소리가 터졌다. 발을 휘감으려 뻗어온 덩굴줄기다, 그랬다는 것도 놀라운데 강철와이어를 자른 것 같다.
“당주!”“덩굴들이 움직입니다!”
당황한 좌우호위에게 종초홍은 호통치듯 명령했다.
“뚫고 나간다!”
어느새 열려 있던 길이 사라진 곳을 향해 종초홍은 전진했다. 천지문의 독문검법 천지조화검을 펼쳤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덩굴들을 갈랐다.
‘산(酸)이구나!’
덩굴이 잘린 단면에서 뿌려지는 수액이 강산임을 알고 종초홍은 외쳤다.
“슈트를 발동해라!”
라이트슈트를 머리까지 착용한 모습으로 세 사람은 덩굴의 확산에 부딪쳤다.
* * *
해가 지고 있다. 여전히 귀를 파고드는 건 붉은 꽃들의 속삭임이다. 감미로운 여인의 혀처럼 파고드는 속삭임, 그러다가 한순간 호통으로 변한다. 천지도 상패천과 단천문주 운드라이와 금혈방주 위하문의 목소리다.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는 꽃덩굴.’
붉은꽃덩굴의 정체를 강흑성은 이제 파악했다. 이 식물은 독향기로 동물을 유혹하고 찢어 죽인다. 사체를 자양분으로 번성하는 괴수식물이다.
‘짐승은 물론 새와 벌레도 없는 이유.’
위험하다는 걸 아는 거다. 그렇지만 붉은 꽃덩굴은 끊임없이 짐승들을 유혹한다. 발정난 암컷에겐 수컷의 소리와 냄새를, 수컷에겐 암컷의 소리와 냄새를, 어미에겐 새끼의 울음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들어 끌어들인다.
‘그들이 여기 들어온 건 확실해.’
천지도 상패천과 단천문주 운드라이와 금혈방주 위하문, 세 사람은 이곳에 왔다. 어째선 행보가 태산으로 향한 것인지는 알길 없다. 하지만 이조차도 우연이라는 이름의 필연인 것인가 생각된다. 세상의 흐름이다.
‘그래야 하는 흐름이라면.’
그들과 다시 만나야 할 운명이라면 거부하지 않겠다.애초에 운명 따위에 좌우되며 살지 않았다.아니 휘둘리며 살아온 게 분명하지만 도망치지 않는다.운명이란 놈은 맞서 싸워야만 물러나는 놈, 숨통을 끊겠다.
‘분명 이대로 물러서진 않을 텐데.’
거리를 벌리고 물러난 붉은꽃덩굴을 응시하며 강흑성은 계속 걸었다. 내딛는 걸음만큼 길을 열어주는 덩굴은 요사하게 꽃을 흔든다. 마치 공격할 때를 기다리는 독사의 기세 같다. 그 공격이 뭐고 언제일지 궁금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비탈이 시작되는데.’
태산, 그 산자락을 밟으며 강흑성은 걸음을 멈췄다.덩굴 숲이 갈라져서다. 전진하는 만큼 물러나는 게 아니라 길을 활짝 열어준다.그 이유가 눈에 들어온다.암벽의 앞에 좌정해 있는 인물, 눈을 뜨는 자가 있다.
‘금혈방주 위하문.’
일어서는 인물을 바라보며 강흑성은 깨달았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위화문의 눈이 그렇고 형상이 그렇다. 붉은 꽃이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피어나 있다. 팔다리를 비롯한 전신에 덩굴줄기가 덮였다. 애병 금혈신도를 들어 올리는 것은 위하문 아니라 덩굴, 의지를 토해낸다.
“너를······ 죽일 것이다······”
걸음을 내며 다가오는 자, 위하문을 응시하며 강흑성은 철혼을 뽑았다.
“할 수 있다면 해 봐라.”
철혼을 양손으로 움켜쥔 강흑성의 눈동자엔 흑청의 철빛이 돋아나왔다.
* * *
거품을 무는 블랙팬더들을 버려두고 육대원은 산을 보고 섰다.한눈에 다 넣을 수 없는 태산, 그 장엄함이 느껴진다.그런데 산으로 접근할 길이 없다. 붉은꽃을 피워낸 덩굴숲이 에워쌌다. 은은한 향기가 퍼진다.
‘기이한 느낌인데······’
미간을 좁히던 육대원은 순간 소리를 들었다.덩굴 숲 안쪽에서 퍼져 나온 소리, 틀림없이 천지도 상패천과 그를 쫓던 자들의 목소리다.저희를 언급하는 말로 알겠다.그런데 이상한건 기척이 안 느껴진다는 거다.
“대주!”
초월십검 수좌의 긴장한 반응을 돌아봤던 육대원은 명령했다.
“들어간다!”
때맞춰 길이 열리는 것처럼 붉은꽃덩굴 숲 사이의 진입로를 찾았다. 육대원은 초월십검과 함께 지체없이 들어갔다. 그런데 그 길은 바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