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113. 태산대혈전 2.
113. 태산대혈전 2.
찢어질 것처럼 부릅뜬 눈의 육대원은 뒤늦게 잔해를 피해 신형을 날렸다.
‘무슨!’
방금 있던 자리에 내리박힌 건쉽, 산산조각 나 터진 최후가 충격을 넘어 거짓인 것 같다. 그런데 현실이다. 붉은 엘프가 건쉽들을 떨구고 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어찌 가능 한지 이해할 수 없다. 받아들일 수 없다.붉은 엘프는 허공으로 비상해 올라가더니 건쉽들을 밟으며 이동하고 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던 기체를 밟아 다른 기체로, 계단을 뛰는 아이처럼이다.
‘저 푸른 칼은······!’
뇌전을 뿌리는 칼이다.붉은 엘프의 오른 손에 발출해 있는 유형의 무형도다.저것은 금속으로 이뤄진 것이 아닌 내력의 정화, 심검과 같다.저러한 경지는 꿈으로만 바라보는 것, 그런데 지금 현실로 겪고 있다.
‘저놈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의문과 충격 속에서 육대원은 그녀를 떠올렸다. 서주반점에서 살아남은 파이곤족 여인, 그녀가 목격한 이야기 중에 흘려버린 것이 있었다.강흑성을 검으로 찌른 붉은 엘프의 머리 위에 있었다는 붉은 하늘이다.
‘붉은 엘프, 레드파운틴족······ 붉은 하늘을 여는 자의 전설······’
불현 듯 엄습하는 깨달음으로 육대원은 소름을 삼켰다.
‘가라레! 가라운!’
붉은 엘프족의 전설이다.언젠가 붉은 하늘을 여는 신인이 도래할 것이라는 그들의 믿음이다.그때엔 세상을 붉은 엘프족이 차지할 것이라고 한다.그런데 그런 헛소리는 종족마다 다 있다. 헛된 망상과 기대다.
‘저놈이 그거라고?’
부릅뜬 눈을 부들거리며 육대원은 붉은 엘프를 봤다. 마지막 건쉽까지 푸른 뇌전도로 갈라버린 놈, 바람을 타고 내리는 것처럼 내려오고 있다.열기의 건쉽은 모조리 추락했다. 정녕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결과다.
“어차피 볼 얼굴인데 뭘 그리 부끄러워 해?”
착지와 동시에 날아온 붉은 엘프의 낭랑한 목소리, 그리고 환한 미소.
‘저놈이 정말로······?’
안면의 경련을 멈추지 못한 육대원은 붉은 엘프의 부름을 받았다.
“이봐 데바족, 삼월문이지? 곧 동료들이 도착할 거야. 나오라고.”
흠칫하며 하늘을 돌아본 육대원은 또 다른 기체들을 봤다. 열기의 무인 건쉽 비천(飛天)을 먼저 보낸 초월본대의 병력을 실은 샤크 다섯 대다.그런데 그들만이 아니다. 천지문의 상징을 새긴 기체들이 오고 있다.
‘천지검대.’
그 이름을 삼키는 순간 붉은 엘프의 목소리가 다시 귀를 파고들었다.
“천지문 친구도 나오라고. 이제 다 같이 웃으며 볼 시간이잖아?”
반가운 이웃을 초청하는 것 같은 미소와 목소리, 그에 반응하여 공지로 발을 내미는 자가 있다. 천지문 외당주 무영검 종초홍, 그가 묻는다.
“네 정체가 무엇이냐?”
심중의 충격과 혼란을 다스리고 던진 물음, 종초홍은 검자루를 움켜잡고 상공의 기류를 인지했다. 삼월문의 샤크 다섯 대가 정지비행을 하며 쏟아내는 초월단 무사들처럼 천지문의 샤크들도 천지검대를 내는 중이다.
‘건곤일척······!’
이제 이곳에서 이뤄야 할 일이 그것이다. 삼월문과 백두파를 혁파하고 강흑성을 확보해야 하는 거다, 놈이 절대로 순응할 리가 없으니 숨만 붙은 채로 잡으면 되는 거다. 그런데 저놈이 있다. 붉은엘프, 황당하다.
“네놈이 설마······”“가라운이다.”
종초홍의 물음을 자르고 나간 아우리엘의 대답, 명확하고 확고하다.
‘가라운!’‘가라레의 신인!’
종초홍과 육대원은 동시에 전신을 경직했다.더 이상 경직이 올 일이 없을 것 같은데도 그랬다.붉은 엘프가 명징하게 뱉어낸 대답이 그렇게 만든다.가라운, 붉은 하늘을 여는 신인, 붉은 엘프족의 전설이란 거다.황당하고 웃기는 헛소리다.그런 전설을 믿을 자가 어디 있겠나.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보고 겪은 일은 거짓이라고 할 수 없는 거다.저 붉은 엘프는 무인 건쉽 비천을 밟고 허공을 이동하며 모조리 파괴했다.
“좋다는 거지”
아우리엘은 환한 미소를 풀어냈다. 그 눈길은 상공에 멈춘 샤크들과 그곳으로부터 나온 무인들을 좇았다. 여전한 미소를 품은 눈길은 다시 돌아갔다.
“강흑성, 여기 정말 재밌게 됐잖아? 그렇지?”
아우리엘의 부름을 받은 자, 강흑성은 철혼은 움켜쥔 모습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 막히는 위압감을 주는 상공의 비행체들, 샤크에서 낙하하는 삼월문의 무인들이다. 그것은 천지문도 마찬가지다.
‘검을 쥔 자들.’
공지를 좌우로 나눈 것 같은 형세다. 좌측에선 삼월문의 무인들이, 우측에선 천지문의 무인들이 낙하해 포진하고 있다. 저들의 눈에 든 의지와 기백은 무인으로서의 것이다. 손에 쥔 검과 무공으로 존재하는 자들이다.
‘너희만이 아니지.’
하늘 저편에서 세 번째로 다가오는 기체들을 강흑성은 확인했다.비룡을 이용해 공격했던 자들, 백두파다.화성의 삼대 문파가 움직인다더니 정말로 이리 만났다.그렇다면 아직 한곳, 블랙블러드가 남아 있음이다.
“오, 멋진 걸?”
아우리엘은 진심으로 감탄하는 반응을 냈다. 그 이유가 뭔지 강흑성은 확인했다. 삼월문 무인들, 초월이라고 쓴 슈트를 착용한 자들이 기세정연하게 포진했다. 천지문도 마찬가지다. 천지검대라고 가슴에 표기했다.
“저거 봐? 저들은 비룡을 부린 자들이지? 백두파?”
뒤늦게 온 손님을 반가이 맞이하듯 아우리엘은 웃음 지었다. 삼월문과 천지문의 샤크들 사이로 날아와 멈춘 백두파의 샤크들은 역시 무인들을 쏟아냈다. 백두전진대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 일백 명이 벌려 섰다.
“와, 여긴 넓긴 하지만 그래도 산 중턱인데 너무 많은 거 아냐?”
아우리엘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강흑성은 현상황을 눈에 넣었다. 자신과 아우리엘이 대치하고 선 공지, 사원이 있었던 터에 수백 명이 발을 디뎠다. 좌측은 삼월문 우측은 천지문, 중앙에 백두파가 섰다.
‘각기 일백 명.’
숫자를 맞춘 것처럼 동일하다. 샤크 한 대에 스무 명의 인원씩 총 다섯 대다. 삼대문파에서 뽑아 보낸 정예들, 병기를 잡은 기세가 살벌하다.
‘최소한 검기(劍氣)를 이룬 무인들.’
가라앉은 숨을 고요히 흘려내던 강흑성은 한 인물이 나서는 걸 봤다.
“백두파의 백두전진검대 수장 백혈검 고건이다!”
눈매가 부리부리한 중년사내가 자신을 밝혔다. 그 외침에 육대원과 종초홍이 반응했다. 놀람과 긴장을 품은 눈, 백두파의 백혈검 고건을 본다.
“본파의 선발대가 몰살했다! 이제부터 그 책임을 묻겠다!”
검을 뽑는 고건의 기세에 맞춰 백두파의 백두전진대 무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시퍼런 검기를 두른 일백의 검들, 그 위세가 퍼져나갔다.
“누구의 짓인지는 알고 하는 소린가!”
종초홍이 고함을 터트렸다. 태산과 지나는 바람을 휘청이게 한 호통이다. 백두파의 백혈검 고건은 부라린 눈을 돌렸고 종초홍은 뒷말을 터트렸다.
“누구에게 하는 소린지 알고 하는 겁박인가!”
고건이 반응할 사이 없이 종초홍은 연이어 소리쳤다.
“천지문을 모욕하는 자는 참수한다! 본문은 그 어떤 세력과 인물의 희롱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허장성세는 때와 장소와 상대를 가려 하라!”
고건이 왁하고 터지려는 순간 육대원이 입을 열었다.
“여기 온 목적이 있을 터인데?”
선발대 몰살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 이곳에 온 게 아니라 유성대협의 자취, 뇌인걸의 무공을 찾아 온 게 아니냐는, 선발대가 왜 왔냐는 말이다.
“비룡을 탄 백두파의 무인들을 도륙한 자가 저기 있다.”
바로 이어낸 육대원의 말, 손을 들어 가리키는 대상을 고건은 봤다.
‘붉은 엘프······!’
예감을 삼키는 데 귀를 파고드는 말이 있다.
“본문이 동원한 무인건쉽 비천편대를 저 자가 파괴했다.”
움찔, 눈 밑을 경련처럼 경직한 고건은 공지의 사방 여기저기와 산비탈에 떨어진 잔해들을 눈에 넣었다. 화염덩어리가 된 저것이 삼월문이 동원한 비천인 거다. 레이더로 존재를 확인했었지만 사라진, 결과가 저거다.
‘붉은 엘프가 그랬다고?’
경직한 눈길을 돌리는 고건에게 종초홍이 다시 목소리를 던졌다.
“그대가 보고 있는 존재, 저 붉은 엘프는 전설속의 존재다.”
미간 좁히는 고건의 눈을 응시하며 종초홍은 남은 말을 던졌다.
“레드파운틴족의 전설, 붉은 하늘을 여는 신인, 가라레의 주인 가라운이다.”
고건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
종초홍은 표정 없이 시선만 던졌고 육대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자의 주장이다.”
애병 백혈검을 움켜잡은 채 고건은 붉은 엘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그렇게 해서 뭐든 해 봐야잖아? 그래야 살 확률이 높아.”
환하게 미소를 피워내는 아우리엘,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고건은 바로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삼월문 육대원과 천지문 종초홍의 눈을 보고 알았다. 저들이 자신에게 한 말로서 깨달았다. 붉은 엘프의 위험함이다.
‘연수······!’
그것이다.지금 이곳에서 서로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은 자멸이란 거다.육대원과 종초홍은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저 눈들이 말하고 있다.붉은 엘프는 그래야 할 상대란 거다.비천을 갈라버린 존재가 맞는 거다.
‘천지문과 삼월문의 격돌로 인한 게 아니라······!’
비로소 현실감각을 잡은 고건은 그래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 상황을 다시 눈에 넣었다. 강흑성이 보인다. 저 젊은 자가 분명히 강흑성이다. 유성대협의 무공을 사용하는 자다, 그런데 지금 붉은 엘프가 위험하다.
‘가라운이라고?’
전설의 그 이름을 속으로 씹던 고건은 붉은 엘프의 부름을 들었다.
“고건이라고 했지?”
만개하는 꽃처럼 환한 미소를 지어낸 아우리엘, 걸음을 성큼 낸다.
“시작은 네가 좋겠다.”
내딛는 걸음과 함께 아우리엘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푸른 번개가 그 손에서 폭발해 나갔다. 공간을 뚫고 나간 푸른 뇌전은 고건을 강타했다.
* * *
아무도 강흑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렇게 모여 앉은 농장주의 화려한 저택에 대한 감탄도 욕도 하지 않았다. 태산으로 비행체들이 날아간 걸 알지만 숨으로 삼켰다. 지금 마주 앉은 목적에만 집중했다.
“가브리엘이란 놈의 무기도 다 확보했고, 이제 모인 사람들은 혁명군이라고 부를 만하다. 농장주들이 용병들을 몰고 온다고 해도 해 볼만 해.”
박준의 감정 없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농장주들이 도망친 농장을 차지하고 다가올 싸움을 준비하는 터, 각오와 태세는 이뤘다. 죽음 따윈 두렵지 않다. 하지만 지금 가슴엔 돌덩이가 들었다.
“형······”“하지 마.”
박현의 입을 열자마자 박준은 차갑게 잘랐다.박현은 침통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고 기다린 식탁에 모여 앉은 일행은 침묵에 잠겼다.박현이 하려던 말이 뭔지도 알고 박준이 잘라낸 마음도 안다.가슴 속의 돌덩이다.
“똥오줌은 구분하자.”
침묵을 깨고 입을 연 박준은 단호한 눈빛으로 뒷말을 이어냈다.
“흑성이에게 달려가 봐야 개죽음밖에 할 게 없어. 우리가 가진 힘으로는 그게 현실이다. 그래서 우린 여기 남은 거다. 여기선 우리가 할 게 있으니까, 우리 도움이 정말 도움이 될 이들이 있으니까. 그걸 잊지 마라.”
애초에 도움이란 말 같은 건 모르는 인물이 박준이다. 그런데 하고 있다. 억압과 굴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들을 위해 행동했다. 그 진심을 알고 있다. 일행모두가 품은 것이다. 그래서 기원한다.
“흑성이가 무사하기를 바라자, 그리고, 우린 우리 할 일을 하자.”
결론을 뱉은 박준이 일어섰다. 박현과 무슬란과 그렉은 무기를 잡았다.
* * *
벽뢰에 맞은 백두파의 인물, 고건이 날아가는 순간 접전은 시작됐다. 백두전진대라는 무인들이 공격에 반응하며 움직였다. 그런데 아우리엘은 그들이 아닌 삼월문에게로 이동했다. 데바족 우두머리에게 뇌전도를 쳤다.
‘혼전을 만들려는 거구나!’
아우리엘의 의도가 그러함을 강흑성은 깨달았다.그 의도대로 됐다.지휘자가 공격받은 백두파는 천지문과 삼월문을 공격했다.두 문파도 대응함은 당연한 결과, 삼대문파가 뒤섞였다.삽시간에 격전이 일어났다.
‘아우리엘.’
즐거운 웃음을 흘려내며 무인들 사이를 누비는 존재, 붉은 엘프를 응시하며 강흑성은 철혼과 함께 나아갔다. 그런데 앞을 무인들이 막는다.철혼을 뻗어내고 철룡을 휘두르며 강흑성은 전진했다. 시퍼런 검기를 발산하는 삼대문파의 무인들 공격을 받아치면서, 파괴하면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