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114. 태산대혈전 3.
114. 태산대혈전 3.
“쿠웩!”
선지피를 토혈한 고건은 애병 백혈검으로 땅을 찍었다.부들거리며 몸을 세웠다.그런데 산비탈이 무너지며 다시 엎어졌다.흙더미가 파고든 코와 입의 참담함을 현실로 느끼며 경련했다.수치와 분노로 부들거렸다.
‘내가! 백두전진검대주 백혈검 고건이!’
적의 일격에 나가 떨어졌다. 믿을 수 없는 이 결과는 내상으로 확인된다. 우연이나 실수 같은 게 아니다. 상대의 감당하지 못할 힘에 당한 거다. 검강지력을 발휘하는 고건 자신이 한수에 나가떨어진 패배인 거다.
‘백두검정기세로 막지 못했다면······!’
사문의 신공이 심부를 보호했다. 그마저도 못했다면 뇌전의 칼에 흩어졌을 것이다.그렇지만 이 상태는 처참하다. 운신조차 제대로 못할 부상이다.그렇기에 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적의 정체는 대체 뭐란 말인가?
‘가라운이라고?’
삼월문 초월단주 육대원이 그 이름을 말했다. 천지문 외당주 종초홍과 그의 눈은 위험을 예감, 아니 확신하는 눈이었다. 붉은 엘프가 정말 전설의 존재인지를 떠나서 그러함이다. 대응방법은 연수, 그 뜻을 내보였다.
“대주!”
소리치며 달려 내려오는 자가 누군지 고건은 봤다. 분대주 종명이다. 타이그란족 출신의 충성스러운 수하다. 그 모습 위로 시작된 혼전이 보인다.
“대주! 호심단을 어서 복용하십시오!”
벨트에서 호심단을 꺼낸 종명은 서둘러 고건의 입에 넣었다. 고통스러운 얼굴로 알약을 삼킨 고건은 기혈이 엉켜버린 몸을 부여잡고 물었다.
“부대주가······ 접전을 지휘하는 것이냐?”
여전히 입가로 피를 흘려내는 대주 고건을 응시하며 종명은 호랑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습니다만,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어떻게 안 좋은지는 고건도 눈으로 보고 있어 안다. 자신이 굴러 내려온 산비탈 저 위, 사원이 사라진 자리, 공지의 접전은 그야말로 개싸움이다. 삼대문파의 무사들이 뒤엉킨 혼전이다. 붉은 엘프가 의도한 것이다.
“올라······ 가자······!”
검으로 땅을 밀며 일어선 고건을 종명은 부축했다.
무섭게 달려드는 삼월문 무인들과 백두파 무사들의 공격을 갈라내며 종초홍은 분노를 삼켰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지만 적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꼴이다. 붉은 엘프는 삼대문파 무인들 사이를 유유자적 움직인다.그렇다, 저건 정말로 유유자적 노닐고 있는 거다. 골목싸움을 하는 아이들 틈에서 즐기는 큰 아이다. 싸움을 붙여놓고 즐거워한다. 붉고 푸른 눈동자는 그래서 치가 떨린다. 저 자를 해결하지 못하면 끝장이다.
“초월단주!”
육대원을 소리쳐 부른 종초홍은 그 순간 닥쳐온 살기를 감지했다.
‘읏!’
전신을 비수로 찌르는 것 같은 살기, 무지막지한 기세의 근원을 종초홍은 봤다. 붉은 엘프, 스스로 가라운이라고 밝힌 존재가 웃는다. 다가온다.
‘이런!’
낭패함을 삼킨 종초홍은 육대원을 돌아봤다. 부름을 인지하고 움직이려던 그가 멈춰 섰다. 마주 선 자 때문이다. 강흑성, 그자가 검을 든다.
“어딜 보는 걸까?”
날 봐야지, 하는 미소로 다가온 존재, 붉은엘프 가라운을 향해 종초홍은 검을 내밀었다. 모든 힘을 다해, 검과 하나가 되어, 붉은 엘프를 갈랐다.
천지문 외당주 종초홍이 부르는 소리에 반응하며 육대원은 움직였다. 그런데 수하들과 백두파 무인들을 가르며 나오는 기세가 좌측에서 다가왔다. 자신처럼 붉은 엘프를 향해 나아가는 기세, 서로를 보고 멈췄다.
“강흑성.”
상대의 이름을 부른 육대원은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현재 상황의 난맥이 주는 압박이다. 힘을 합쳐 목표들을 먼저 공략해야 하건만 당하고 있다.
‘무영검, 그대는······!’
뒤늦게라도 그리하자는 종초홍에겐 붉은 엘프가 다가갔다. 전력을 다한 그의 공격이 무섭다, 그런데 붉은 엘프는 즐거운 웃음으로 대응중이다.
“여유가 있구나.”
무심히 귀를 파고든 목소리, 강흑성이 던진 말에 든 의미를 육대원은 깨달았다. 이렇게 대적하게 된 상황인데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소리다.그렇다, 강흑성이란 존재는 그래선 안 된다. 전력을 다해야 할 자다.
“그렇구나, 애초에 네가 목적이었던 것을.”
데바족의 명검 디스토챠를 가슴 앞에 세운 육대원은 가이요라를 일으켰다.데바족만이 가진 능력, 타고난 에너지 발현과 운용이다.그 힘에 내력을 더했다. 뼈를 깎고 살을 바르는 고련으로 얻은 힘, 검에 실었다.화르르르, 불길이 피어나는 것처럼 검이 실리는 강기가 주황빛으로 찬란하다. 그 빛과 기세를 무심한 눈으로 응시하던 자, 강흑성은 철혼을 세웠다. 두 손으로 머리위로 들었다가 천천히 내리며 중단세로 내밀었다.
“그래서 너희가 죽는 거다.”
철강기가 꿈틀거리는 검극을 겨눈 강흑성의 나직한 음성.육대원은 알아들었다.강흑성이란 존재를 목표로 삼았기에 그렇다는 거다.건드리지 않았으면 아무 일 없었을 것인데, 너희가 자초한 죽음이란 선고다.
“광오한 놈.”
살기와 투기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육대원은 걸음을 냈다. 내디딘 순간 탄환처럼 튀어나갔다. 주황빛 검강지기를 전신에 두른 형상으로 나아갔다.같은 순간 강흑성의 형상도 움직였다. 철혼이 포효하며 뻗어 나왔다.
“흐윽.”
휘청거리며 공지에 발을 디딘 고건은 결국 주저앉았다. 분대주 종명의 부축으로도 육신을 지탱하기가 힘들다. 적의 일격에 이렇게 됐다는 것이 새삼 황당하고 치떨린다. 그렇게 만든 자, 붉은 엘프가 싸우고 있다.
‘무영검 종초홍, 사자검 육대원······!’
천지문과 삼월문의 수뇌, 두 인물은 각기 붉은 엘프와 강흑성과 얽혔다. 종초홍의 공격은 무섭지만 붉은 엘프는 장난을 받아내는 아이처럼 웃고 있다. 육대원은 강흑성과 숨 막히는 접전 중, 그런데 우세하지 않다.
‘이대로는······!’
부들거리는 시선만큼이나 떨리는 숨을 흘려낸 고건은 하늘로 눈길을 올렸다. 백두전진대를 실어온 샤크, 저 기체에 실린 공간폭탄이면 쓸어버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선 못한다, 수하들이 얽혀 싸우는 중이다.
‘공간폭탄을 사용한 결과도······!’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애초의 목적을 상실하는 결과다. 뇌인걸의 무공도 유성대협의 유진도 날아가는 거다. 그렇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방법을······!’
고통스러운 숨으로 이를 물던 고건은 그 순간의 변화에 눈을 치떴다. 붉은엘프와 싸우던 종초홍이 날고 있다. 고건 자신처럼 피를 뿜으며 뒹군다.
공지의 끝까지 날아가 처박힌 종초홍은 반사적으로 신형을 세웠다. 그렇지만 입으로 튀어나오는 토혈을 막진 못했다. 웩 하는 소리로 선지피를 토했다. 다시 무릎을 접었다. 땅으로 손을 집었다. 그런데 손이 없다.
‘뭐?’
허전한 손, 아니 팔이 안보이고 붉은 피만 보인다.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선혈은 종초홍 자신의 것이다. 양팔이 잘려나가서다. 아무것도 없다.
‘팔! 내검이!’
경련하며 종초홍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이곳으로 날려 보낸 존재, 붉은 엘프가 웃고 있다. 그 발아래 팔이 있다. 왼팔과 검을 쥔 오른팔이다.
‘이······!’
숨이 끊어지는 격노 속으로 종초홍은 침몰했다. 이성이 사라진 영혼으로 부들거렸다. 이대로 활활 타올라 재가 돼 흩어질 것 같은 분노다. 그런데 그 소멸을 붙잡아 주는 소리가 있다. 백두파 백두전진검대주 고건이다.
‘뭐······’
자신보다 먼저 붉은 엘프의 일격에 날아갔던 자, 그가 상공을 가리킨다.
‘샤크.‘
명령을 기다리며 떠 있는 기체들, 저 안에 실린 것이 떠오른다.
‘공간폭탄.’
폭발력이 미치는 공간 자체를 소멸시키는 위력의 화기, 그것이 있다. 고건이 처절한 모습으로 전하고자 하는 바를 알겠다. 폭탄을 사용하잔 거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
그것이다. 방법은 오직 그것밖에 없다. 혼전 중의 수하들을 구하겠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이 상태로 폭탄을 투하해 붉은 엘프를 처치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 붉은 엘프 손에 다 죽는다. 이건 현실이다.
‘육대원······!’
강흑성과 어우러져 무섭게 격돌중인 삼월문 초월단주, 저자에게 의견을 구할 게 아니다. 그럴 틈도 없다. 어차피 종국엔 적, 결정해야 한다.
‘애초에 없었던 것······!’
유성대협의 유진도 뇌인걸 선조의 무공도 없던 거다. 지난 삼백년간 그랬다.
‘가질 수 없다면 없애는 게 답.’
피로 물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펴며 종초홍은 고개를 끄덕였다.고건에게 뜻을 전하는 몸짓, 그리고 손을 들었다.멀티폰으로 명령하기 위해서다.그런데 손이 없다. 멀티폰을 장착했던 왼팔은 붉은 엘프에게 잘렸다.
‘어······’
황망한 눈을 한 종초홍은 고건의 모습을 봤고, 그의 명령에 반응하는 상공의 샤크들을 봤다. 눈부신 섬광이 기체의 머리에서 폭발해 나왔다.
삼월검, 그 이름만큼이나 선명한 기억들을 강흑성은 떠올렸다.아버지 유성대협의 기억이다.데바족들과 얽힌 시초의 악연은 그 후로도 진행됐다.삼월문은 때로 싸우고 때로 협력했다.프락시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침공이 없었다면 갈라버렸을 자들.’
아버지 유성의 기억으로 인한 분노를 되새기며 강흑성은 검을 내리쳤다. 삼월검법의 극의로 오는 자, 데바족무인의 무시무시한 검세를 받아쳤다. 철혼은 갈수록 더 힘차게 포효한다. 적의 피를 발라달라는 요구다.
‘이제 끝이다.’
무원진격의 베기에 이어 무원일격의 찌르기와 무원혈을 연속해서 펼친 강흑성은 철마류의 검을 떨쳤다. 데바족의 검을 치고 들어가 인후를 갈랐다. 그런데 데바족이 눈을 부릅뜨는 그 순간 다른 위험을 감지했다.
‘이건?’
검극이 비껴나가는 찰나 데바족이 받아치며 신형을 날렸다.그 순간 강흑성은 아우리엘을 봤다.하늘을 향해 뇌전도를 뿌린다.그러한 이유, 백두파의 샤크에서 눈부신 섬광이 튀어나왔다.그것들이 허공에서 터졌다.
감당할 수 없는 거력에 휘말리며 육대원은 낙엽처럼 굴렀다. 공지를 벗어나 비탈에 이르고서야 상황을 인지했다. 숨조차 쉴 수 없는 이 화력의 근원을 깨달았다, 백두파에서 공간폭탄을 사용했다. 허공에서 터졌다.
‘이런······!’
참담한 분노와 충격 속에서 육대원은 상황을 파악했다.백두파의 공간폭탄 발사는 실패했다. 붉은 엘프가 저렇게 갈라 올리고 있다.다섯 기의 샤크에서 모두 발사했다. 하지만 뇌전도에 맞아 허공에서 소멸하고 있다.이렇게 된 전후가 파악된다. 백두전진검대주 고건의 결정이다.벽뢰수고 유성대협의 유진이고 섬멸을 택한 거다.이 결정은 삼대문파의 전면전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저 붉은 엘프라는 위험을 제겨하려는 거다.
‘강흑성 저 놈도······!’
새삼 경직하게 되는 존재, 강흑성은 육대원 자신을 능가하는 고수다. 그렇다는 걸 이제 분명히 안다. 마지막에 펼친 검은 받아낼 수 없었다. 백두파의 공간폭탄 공격과 그걸 갈라버린 붉은 엘프가 없었으면 죽었다.
“헛!”
상공에서 샤크가 폭발했다. 서로 거리를 벌리며 공격한다. 백두파가 공간폭탄을 발사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이 상황은 공멸, 붉은 엘프의 의도다.
“물러서라! 모두 물러나라!”
수하들에게 외치고 샤크에게 명령하며 육대원은 다시 움직였다.
불의 폭풍이 지나갔다. 흑청빛 기운으로 물들었던 강흑성은 결과를 봤다. 허공에서 터진 화기, 아우리엘이 가른 그것의 여파가 태산의 산비탈을 휩쓸었다. 불의 바람이다. 수목들은 부러지고 뽑힌 채 불타 뒹군다.
“아우리엘.”
강흑성은 불렀다.아우리엘은 미소 지은 얼굴로 눈을 맞췄다.둘은 서로를 보고 섰다.화력에 휘말린 삼대문파의 무인들이 뒹구는 속에서다.
“아, 이젠 시간됐지?”
천진한 아이처럼 미소를 흘려내는 아우리엘, 역시 자랑하는 아이처럼 말한다.
“잘 봐, 보기 좋을 거야.”
아우리엘은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마치 검이나 도를 잡듯이다.그 손에 정말로 푸른 칼이 잡혔다.푸른 바람의 정령 칸타가 뿔로서 이뤄내던 뇌기, 그 힘이 뇌전도의 형상으로 뭉쳤다.그 칼을 머리 위로 올렸다.
“이것이 내가 가진 힘이다.”
마지막한 한마디를 뱉어낸 아우리엘, 그 형상으로부터 푸른 폭발이 일어났다.천지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힘.그 속에서 강흑성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칼을 봤다.벽력지도.그 칼을 향해 철혼의 포효를 마주 뿌렸다.영혼을 강타하는 충격 속에서 강흑성은 봤다. 삼대문파의 무인들이 푸른 거력에 흩어지는 모습을, 공중전을 벌이던 샤크들이 흩어지는 광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