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116. 살기 위한 싸움.
116. 살기 위한 싸움.
제비새끼들처럼 큰소리로 노래 부르는 아이들을 보며 원필성은 미소 지었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 짓고 있다는 걸 안건 최창수의 시선을 받고서다. 당황을 숨기며 어색한 목례를 하자 최창수가 다가와 나직이 말한다.
“나는 이게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예?”
생뚱맞고 느닷없는 말이라 원필성은 의문으로 반응했다. 하지만 바로 답을 들었다.
“이 지독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싸움인 겁니다.”
좁혔던 미간을 편 원필성은 건물 창 너머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카이오의 지도아래 노래 부르는 아이들, 중년 여인이 나서서 글자를 가르친다. 카이오의 뜻에 동참하기로 한 선생님이다. 그런 이들이 온다고 한다.
‘살기 위한 싸움······’
원필성은 깊은 공감을 느꼈다. 카이오가 시작한 이 일은 미미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가슴에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살고자 하는 이들의 간절함, 스스로 배우고 익혀 지키고자 하는 생존, 저들은 투쟁을 시작했다.
“밝습니다.”
이번엔 최창수가 무슨 말인지 몰라 원필성을 미간 좁히고 응시했다.
“저 아침 해처럼 아주 밝습니다.”
의미를 알아차린 최창수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원필성을 응시했다. 아이들 앞에서 열심인 카이오를 바라보는 얼굴, 바라보다 해를 향해 돌아섰다.
‘어젯밤엔 지독하게 어둡더니······’
그 어둠이 어디로 간 건지 찬란한 아침이다.눈부신 해는 원필성의 말처럼 희망차다.그 희망이 더듬는 건물 안 아이들과 카이오가 행복해 보인다.그런데 불현 듯 그들이 떠오른다.대륙의 그들, 강흑성과 박준이다.
“아이들이 더 많아지면 이곳으로는 부족하겠는데요?”
돌아보는 원필성의 목소리에 최창수는 한 템포 늦게 반응했다.
“아 예, 그렇겠지요.”
최창수는 원필성의 눈을 보고 깨달았다. 사랑에 빠진 이 젊은 장교는 그 부분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거다. 반짝이는 저 눈을 보고 모를 수 없다.
“매일 올 생각입니까?”“예?”
두 번째로 의미파악을 바로 못한 원필성은 뒤늦게 깨우쳤다.
“아 그건······”
붉어지는 얼굴을 숨기며 원필성은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업무가 중복돼서 이쪽으로 행보하게 됐습니다. 음, 자주 방문하고 있군요. 다른 의도는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너희를 감시하거나 하는 건 아니다 라는 변명, 최창수는 카이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눈길을 따라가 카이오를 보는 원필성은 뭔가 예감했다. 최창수가 지금 한 말의 의미가 따로 있음을, 카이오와 관련된 것임을.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습니까?”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을 낸 최창수는 뒷말을 냈다.
“7군단에서 정보를 파악하려는 일 말입니다.”
네가 처음에 이곳에 온 목적을 잊은 거냐, 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아 원필성은 흠칫했다. 근원이고 핵심사안, 그러나 그걸 말할 수 없음을 최창수도 알 터다. 그런데 소문이란 게 있다. 대륙으로부터 오는 진실이다.
“상해에 이어 서주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서슴없이 대답을 낸 원필성의 반응에 최창수가 오히려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바다를 건너 소문이 오고 있다지만, 단파무전통신을 하는 세력들에 의해 진실이 알려지고 있지만, 이리 대담하게 답할 줄은 몰랐다.
“화성의 삼대문파와 블랙블러드의 행적도 포착됐습니다.”
최창수는 등골에 퍼지는 경직을 느꼈다. 삼대문파와 블렉블러드, 그들의 목표가 샹그릴라일행이다. 강흑성과 박준, 그들은 사냥감이 된 거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원필성은 입을 닫았다. 이미 퍼져나가고 있는 내용을 기밀이라고 할 것 없기에 말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더는 언급하는 것 자체가 좋지 않다.
“친구분은 오늘도 안보이시는 군요?”
화제를 돌리듯 원필성은 전복에 대해 물음을 냈다. 최창수는 담담히 답한다.
“그 친구는 들일을 나갑니다. 땅을 개간하는 중이지요.”“아 그러시군요.”“도와줘야 하는데 아이들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젠 가도 될 것 같습니다. 원대위님이 매일 오시니 이 거리는 안심해도 되겠습니다.”
농인지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최창수의 말에 원필성은 헛기침을 했다.
* * *
지독하게 어둡던 밤이 지나갔다. 그 어둠 속에 빛나던 불빛도 이젠 사라졌다.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삼켜버렸다.그건 분명 태산의 불이었다.비행체들이 날아간 그곳에서 벌어졌던 일을 알려주는 불빛이었다.
“동료 중에 전복이라는 자가 있었다.”
지난밤의 불빛과 그 내막을 가슴에서 밀어내며 박준은 계속 말했다.
“어떻게 싸워야 할지 잘 아는 친구였지. 어떤 적이든, 어떤 상황이든 그랬어. 그래, 정말 귀신같은 놈이었다고. 그 놈을 보면서 내가 깨달은 건 결국 그거였다. 살기 위해서,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싸우는 법.”
힘이 꿈틀거리는 박준의 눈을 응시한 그렉과 박현과 무슬란은 고개를 끄덕였다.뜨거워진 숨으로 현실을 되새겼다.이제 닥칠 싸움의 의미다.살기 위해 일어선 사람들과 살기 위해 싸워야 한다.이겨야 한다.
‘흑성이의 일은······’
잊어야 한다고, 이제 할 싸움 앞에선 그래야 한다고 그렉은 이를 물었다. 불타는 태산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궁금해 미치겠지만 참아야 한다. 박준과 박현과 무술란도 마찬가지다. 하겠다고 한 일을 마쳐야 한다.
‘흑성이가 그러고 있듯이······!’
호랑이 눈에 칼날 같은 결의를 품은 그렉은 미간을 뒤틀었다.
“왔습니다.”
그렉의 목소리에 일행은 바로 반응했다. 은신한 창고 밖으로 총구를 내밀었다. 기다리던 손님들이 드디어 왔다. 세찬 비가 내리는 농장의 입구에 적이 나타났다. 블랙팬더를 탄 낭인용병들이다. 괴성을 질러댄다.
“어서 와라.”
차가운 살기의 미소로 박준이 방아쇠를 당겼다.타앙, 빗속을 울리는 총성보다 먼저 블랙팬더를 달려오던 낭인 용병의 머리통이 터졌다.그것이 시작이었다.말을 달려오는 낭인들의 발밑에서 크레몬들이 폭발했다.
* * *
“어, 누가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양쪽 귀를 후빈 전복은 허리를 펴고 해를 올려다봤다. 힘차게 올라가는 태양빛이 지난밤의 짙은 어둠을 잊게 해 준다. 뭣 때문인지 잠을 설치게 한 밤이었다. 어젯밤의 심란함이 지금은 없다. 대신 허리가 아프다.
“아 정말,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
개간지 한 복판에 서서 전복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여인들과 같이 들일을 나왔다. 이게 일과가 된 과정을 더듬어 보지만 돌이킬 수 없다. 여인들을 곁에서 지키겠다고 나선 게 전복 자신인 거다.
“쓰벌, 누굴 탓하겠냐?”
다시 쟁기를 움켜쥔 전복은 박혀 있는 돌덩이를 후려치며 파냈다.그런데 비명이 들린다. 반사적으로 움직이며 상황을 파악했다.수림의 경계에서 일이 났다. 명희엄마다, 그녀가 트라이 울프에게 물려 끌려간다.
“저 개자식이!”
눈 세 개 달린 맹수, 늑대에게 개자식이란 말이 안 맞는다는 건 생각할 겨를 없다. 수림에서 튀어나와 명희엄마를 문 놈 하나가 다가 아니다.
‘최소 세 놈!’
삼목울프들의 사냥습성을 알기에 전복은 전력으로 움직였다.놓아둔 장비벨트를 움켜쥐고 달리며 몸에 둘렀다.수림으로 뛰어 들어가 총을 겨눴다.명희엄마의 어깨를 물고 끌고 가는 놈, 조준선에 놓고 발사했다.삼목울프의 머리통이 터졌다.핏덩어리로 흩어지는 걸 보는 이 순간 박준이 떠오른다.백발백중 박준, 사격이란 이런 거라면서 자랑질 하던 얼굴이다.그에게서 사격의 요령을 배웠다.그런데 역시 사격이 전부가 아니다.좌우에서 도약하며 공격하는 트라이울프들 사이로 전복은 굴러나갔다. 빔라이플을 던지고 뽑아든 장검으로 달려드는 늑대의 몸통을 갈랐다. 연속해서 치고나갔다. 뒤돌아보니 네 마리가 피를 뿜으며 꿈틀거린다.
“괜찮습니까?”
명희엄마에게 달려간 전복은 다급히 상처를 살폈다.왼 어깨에 늑대의 이빨자국이 선명하다. 피가 철철 흘러내린다.그대로 옷을 찢었다. 상처를 지혈하고 소독하기 위해서다.그런데 힘이 과해 상의가 죽 찢어졌다.
“어머나!”
고통스럽고 경황없는 와중에도 명희엄마는 놀라 반응했다.가슴이 활짝 드러나서다.그렇게 만든 자, 전복은 얼어붙었다.양손에 찢어버린 옷자락을 붙잡고 눈을 치떴다.뭔가를 보는 눈, 명희엄마가 소리친다.
“뭐하는 거예요!”
쫙, 명희엄마가 날린 따귀를 맞고 전복은 쓰러졌다.
* * *
“크어어······”
공포와 죽음에 먹히는 생명의 마지막 몸부림이다. 이손으로 움켜잡고 있다. 블랙블러드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겁주던 자들, 이렇게 떨고 있다.그런 거다. 죽음 앞에서는 다를 게 없다. 더구나 이건 내가 준 거다.
“지옥이 보여? 보이지?”
아우리엘은 웃으며 손아귀에 힘을 줬다.콰드득, 뼈와 살이 파괴되는 소리로 블랙블러드 지휘관의 숨은 끊어졌다.죽이기 전에 마기가 원하는 대로 길을 열어줬다.그렇게 보게 된 지옥 때문에 에너지는 극대화됐다.
“아, 좋아, 정말로 좋아.”
눈을 감고 황홀경을 음미하듯 아우리엘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죽여 버린 자들에게서 흡수한 에너지가 흘러넘친다.한 달은 아무것도 안 먹어도 되겠다.알아내야 할 것도 알아냈다. 블랙블러드의 지구 근거지다.
“너희가 오는 게 빠른지 내가 가는 게 빠른지 모르겠구나.”
쏟아지는 비속에서 아우리엘은 주변을 돌아봤다. 이전의 형체가 사라진 수림, 그 안에 죽음이 널려 있다. 수백 명의 블랙블러드 살수들이다.
“어?”
옅은 놀람을 품은 눈으로 아우리엘은 수림 속을 응시했다.거대한 형상이 움직이고 있다. 격렬한 흉기를 발산한다. 점점 가까이 다가와 모습을 드러낸다.흉악하고 강력한 괴수 삼바바다. 눈알을 희번득 거린다.
“피 냄새를 맡고 온 거야?”
다정한 친구에게 하듯 말을 거는 아우리엘, 삼바바는 바로 반응했다.
콰우우우워!
커다란 입을 벌린 삼바바가 벼락처럼 공격해 온다.아우리엘은 흐르는 바람처럼 피했다. 삼바바의 다리에 붙었다. 가볍게 손을 들어 휘저었다.허공으로 뜬 삼바바는 휘돌아 처박혔다.왜 그렇게 된 건지 의문과 분노를 품고 일어섰다.그 빠른 반응보다 빠르게 아우리엘은 움직였다. 삼바바의 머리를 밟았다. 다시 처박힌 삼바바의 머리 위에 서서 속삭였다.
“너도 먹혀봐.”
아우리엘의 손에서 발출된 푸른 뇌전도는 삼바바의 다리를 끊었다. 고통스러운 울음으로 몸부림치는 삼바바에게서 물러난 아우리엘은 지켜봤다. 수림에서 다가온 것들, 그 이빨들이 시체들과 삼바바를 먹는 광경을.
* * *
블랙팬더의 목을 쓰다듬은 강흑성은 밀어 보냈다. 올 때처럼 수림을 달리며 블랙팬더는 사라졌다. 쏟아지는 비가 감춰버린 그 자취를 응시하다 돌아섰다. 어딘지 모를 곳, 수림 속의 이 장소로 온 건 본능으로서다.
‘독지(毒池).’
흑강석으로 갈아 만든 것 같은 늪지대다. 이곳으로 접근하는 걸 블렉팬더는 두려워했다. 들이마시는 숨만으로도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물들조차도 살수 없는 곳.’
이곳은 그런 곳이다. 수림이 수백 년에 걸쳐 만든 곳이다.독의 정화, 에너지의 결정체다.이런 곳을 찾아야 한다고 깨달았다.아버지의 씨앗이 이곳으로 달려오게 했다. 그건 자석의 음극이 양극을 찾는 것과 같았다.
‘여기서······’
눈을 감고 검은 늪을 가슴에 품은 강흑성은 다시 눈을 떴다.철혼을 내려놓고 옷을 벗었다.태어날 때의 모습이 되어 늪으로 들어갔다.피부에 닿는 절독의 감각을 전율로 느끼며, 늪 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비는 세찬 울음을 토해내듯 계속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