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117. 바람이 분다.
117. 바람이 분다.
좌대에서 일어선 철무진은 길고 깊은 숨을 내쉬며 두 손을 모았다. 철마류의 극의만을 생각하는 이 순간에 몰입해 철극진기를 일으켰다. 쇠 빛으로 물든 두 손을 들며 일보를 냈다. 동시에 전방을 향해 떨쳤다.쉿, 미풍이 이는 소리를 남긴 무형의 힘은 손을 떠나갔다.연공실 앞 석벽에 스며들었다.반자의 깊이로 생겨난 손바닥형상, 다가가 어루만졌다.으스러져 내리는 돌가루로 손자국은 사라졌다.이제 진경에 들었다.
‘철극진기의 극의 철강진기를 이루는 걸음.’
천철정을 찾음으로서 이뤄진 일이다. 선조의 무공을, 완전한 철극문의 힘을 되찾았다. 피땀의 공덕을 들여 대성하는 길만 남았다. 강흑성 덕분이다. 그를 만나서, 천철정을 찾게 도와주어서다. 그런데 그는 위험하다.
‘삼대문파가 노리고 있는 인물.’
그 이유를 이젠 안다. 강흑성이 유성대협의 후인이라는 이야기다. 블랙블러드 역시 그런 이유로 강흑성을 추적하고 있다. 가늠키 어려운 일이다.
‘음?’
밖의 기척을 인지한 철무진은 벗어뒀던 상의를 걸치고 연공실을 나갔다. 총관 마테오가 긴장한 얼굴로 서 있다. 엘프족에겐 보기 드문 얼굴이다.
“련주, 흑도무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마테오는 긴장한 눈으로 연이어 보고한다.
“산동농장연합에 변고가 생겼다는 첩보입니다. 농장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합니다. 농장주들이 제압을 위한 무력을 동원중인 상황입니다.”
무슨 이야기 인지 철무진을 파악했다. 산동에 반란이 일어났고 농장주들은 흑도패들을 동원한다는 소리다. 낭인용병들, 이런 때를 기다리며 사는 놈들이다. 돈에 목숨을 팔고 남의 목숨을 앗는 걸 즐기는 놈들이다.
“산동이면 강흑성 일행이 행보한 방향입니다.”
조심스럽게 강흑성을 거론한 마테오, 그 얼굴을 철무진은 응시했다. 정통 엘프라고 자부하는 흰 엘프족이다. 대부분의 흰엘프들은 화성의 중심계층으로 산다. 마테오는 군부의 엘리트장교로서 지구보직을 자청했다.
‘누명이 아니지.’
여동생 때문에 부모님까지 살해당했다. 그 복수를 하고 지구로 도망 온 거다. 유랑자로 신남경에 흘러온 것을 철무진 자신이 알아보고 들였다. 흰엘프들이 대개 그렇듯이 참모로서 마테오의 역할은 백점에 가깝다.
“태산이 불타올랐다는 첩보도 들어왔습니다.”
이어 나온 마태오의 말에 철무진은 비로서 반응을 보였다. 산동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으로 누적된 심정의 표출, 강흑성을 떠올린 이유다.
“삼대문파의 동정은?”
즉각 반응하는 철무진의 시선을 받으며 마테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입니다.”
더 자세한 것은 사람을 보내든지 해야 안다는 대답이다.
“음.”
무거운 숨을 흘려낸 철무진은 다시 물음을 냈다.
“흑도무리들이 집결하는 곳이 있을 텐데?”“예, 운하가 이어진 대창호인근 승주(勝州)입니다.”
철무진이 다시 입을 열려는 그 순간 충격이 왔다.지진이 일어난 것 같은 진동, 그 원인인 폭음이 연이어 들린다.이건 분명 화기의 폭발이다.누가 먼저랄 것 없이 철무진과 마테오는 밖으로 달려 나갔다.
* * *
비는 그쳤다. 그렇지만 대지는 비를 흘려보내고 있다. 그 흐름 안에 든 붉은 빛은 죽음을 끌고 흘러간다. 낭인용병들의 종말,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것을 왜 그리 짐승처럼 공격했을까, 어째서 그렇게 악독한 걸까.
“퉤.”
거칠게 침을 뱉은 박현은 작두칼을 휘둘러 피를 뿌렸다. 동강낸 낭인 용병들의 시체를 밟으며 다시 칼을 내리쳤다. 아직 숨이 붙어 있던 자들의 목을 잘랐다. 곁에서 같은 일을 하는 무슬란을 돌아보고 물었다.
“모이지 않은 곳은 당했겠지?”
무슬란은 미간을 뒤틀 듯 좁혔다가 대답한다.
“그랬겠지.”
침묵 속에서 둘은 계속 작두칼을 내리쳤다. 치열하게 치른 전투의 결과, 승리를 확인하는 이 걸음 아래 밟히는 다른 죽음들의 안타까움을 밀어냈다. 산동중앙농장, 이곳에 모이지 못한 이들의 죽음은 불가항력이다.모두를 구하진 못한다, 그것은 엄연한 한계고 현실이다. 거사를 위해 나섰던 이들은 이곳에 모였지만 남아 있던 이들은 화를 피하지 못했을 거다.그나마 급하게 연락이 닿아 움직인 이들은 이곳에서 함께 싸웠다.그렇게 이룬 승리다.빗속에서 블랙팬더를 몰고 달려온 낭인용병들을 무찔렀다.계회하고 대비한 결과, 크레몬의 폭발로 농장은 까뒤집혔다.흩어지는 흙더미처럼 분해된 낭인용병들 시신은 이제 거름이 될 것이다.그렇지만 그렇게 둘 순 없다. 수림의 잡것들이 달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비가 그치기 전에 치워야겠는데?”
뒤에서 다가오며 목소리를 낸 그렉을 박현과 무슬란을 돌아봤다. 피곤하고 험한 몰골이지만 눈동자는 차갑게 번득인다. 이어내는 목소리도 그렇다.
“2차 공격에 대비해야 해.”
박현과 무슬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선 박준이 소리친다.
“어서어서! 구덩이를 파고 시체들을 묻어야 합니다!”
비가 그치고 드러난 하늘 아래서 모두가 분주히 움직였다.
* * *
‘아버지.’
또렷하게 보이는 아버지의 얼굴을 강흑성은 바라봤다.거울 앞에 선 아버지.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면도를 하고 있다. 그리곤 시합준비를 한다.서울격투장에 선다.상대는 데바족 전사 얀 크라이튼, 쓰러뜨렸다.환호 속에서 승리를 만끽하는 아버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 선명하다.저 기쁨이 느껴진다.멸시받는 자로서 만들어낸 승리이기에 그렇다.그런데 반격이 시작됐다.크라이튼 가문과의 싸움, 처절한 기억이다.
‘아버지······!’
얀 크라이튼의 아비 베른 크라이튼에게 잡혀갔다. 블랙블러드를 고용한 그자의 손에서 지옥 같은 고초를 겪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당외룡이란 괴노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지옥의 지옥을 그렇게 겪었다.
‘당외룡, 삼백년을 산 자.’
아버지가 기억 속 당외룡은 그런 존재다. 그자는 아버지 유성을 상대로 실험했다. 상선약수를 주입하고 아버지의 신체를 가지려 한 거다. 그 방법이 바로 마교 비전 혼천무상대법이다. 그러나 운명은 다르게 흘렀다.
‘당외룡을 죽이고 아버지가······’
아버지 유성은 당문의 무공과 비전을 갖게 됐다.절대독인이 됐다. 그리고 천웅대협과 만났다.또 다른 중원세상에서 넘어온 존재, 그와 함께 싸운다.프락시안의 침공에 맞선 두 영웅은 지구라는 세상을 구한다.
‘아아 아버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강흑성은 꿈틀거렸다. 그 몸을 담고 있는 독지는 파문을 일으키며 출렁였고 사방으로 퍼져나가 수림을 중독 시켰다.거대수들이 죽고 짐승들은 녹았다. 그 중심인 독지는 계속 출렁였다.
* * *
정박한 배들이 폭발하고 있다. 엄청난 폭발이다. 화기를 실은 배들이 폭발하는 거다. 저렇게 하기 위한 의도로 신남경에 들어온 배들, 공격이다.
‘어떤 놈들이!’
치뜬 눈으로 거검을 움켜잡은 철무진은 벙커로 달려오는 한 무리를 봤다.저 움직임은 확인해준다. 저들은 신남경을 차지하기 위해 온자들이란 거다. 철금련을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다.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놈들!”
철무진은 신형을 날렸다. 수하들의 반격을 뚫고 올라오는 무리를 향해 나아갔다. 선풍처럼 휘돌며 거검을 내리쳤다. 선두의 인물을 두동강냈다.촤악, 양편에서 잡아당긴 것처럼 둘로 갈라진 죽음, 그 순간 모두가 멈췄다. 치고 올라오던 무리도, 반격하던 철금련도, 철무진을 보며 경직했다.
“누굴 죽이는 건지 알아야겠다.”
철무진이 던진 한마디, 받아내야 할 자가 움찔하며 나섰다.
“철금련은 오늘 이후 사라질 것이다! 적호문은 신남경을 접수한다!”
적호문이란 말을 들은 순간 철무진은 당혹을 삼켰다. 그 이름은 세상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이다. 십대문파의 한곳이었지만 멸문한 세력이다.
“네놈들이 적호문이라고?”
철무진이 반문을 내는 순간 적호문의 수괴는 소리쳤다.
“공격해라! 모조리 죽여라!”
함성을 터트리며 덤벼드는 자들, 적호문이라는 무인들의 공격을 향해 철무진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천철정을 통해 습득하고 있는 철마류의 진정한 무공을 펼쳤다. 거검믜 폭풍을 일으켜 적호문 무리들을 도륙했다.
‘이놈들! 진짜가 따로 있구나!’
적호문 수괴의 어깨를 갈라버린 직후 철무진은 깨달았다. 이들은 하찮은 자들일 뿐이라고, 진정한 힘과 수괴는 따로 있다고, 그 증거를 봤다.하늘에서 화기가 떨어졌다.하늘상어다. 벙커를 강타했다.철무진은 굴렀다.
* * *
노을이 흩어지는 창 앞에 그가 있다. 그림자를 밟는 것도 조심스러운 존재, 그리샴 장군이다. 절로 일어나는 긴장을 삼키며 원필성은 보고했다.
“특이 동향은 전혀 없습니다. 우려할 만한 부분도 없다고 판단합니다.”
느릿하게 돌아선 그리샴징군의 눈을 원필성은 마주 보지 못했다.
“결정을 내린 판단인가?”
결정, 카이오와 그 일행, 아니 가족들에 대한 것이다. 그들과 접촉하고 파악한 결론인 거다. 만일 이후 불상사 생긴다면 책임진다는 의미다.
“예, 결정입니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원필성, 그 눈동자를 그리샴장군은 말없이 응시했다. 전장에서 입은 흉터가 훈장처럼 새겨진 얼굴은 무표정하다. 그렇지만 원필성은 가슴 속을 뚫어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절로 침이 넘어간다.
“아이들을 가르친다고?”“예, 보고 드린 대로입니다.”
교재를 가져다주었다는 보고를 상기하며 그리샴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창을 향해 돌아선다. 노을의 종말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한다.
“바람이 불고 있다. 다시 바람이 불고 있어.”
그리샴 장군이 바라보는 서편 하늘, 노을 아래에 있는 대륙을 원필성은 떠올렸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고 있음이다. 어디로 갈지 모를 바람이.
* * *
“무참하군.”
평지로 변해 버린 수림을 응시하며 곽산은 미간을 찡긋거렸다. 삼백 명의 수하들이 이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대적자는 붉은 엘프 단 한명이었다.
“가라운이라······”
붉은 엘프족의 전설을 되새기며 곽산은 커피를 음미했다. 텀블러에 담아온 커피는 향기와 맛이 일품이다. 이 현장의 죽음과 디커플링한 맛이다.
‘커피는 커피니까.’
그렇다, 커피 맛이 수하들의 죽음에 동조해 맛이 변할 까닭이 없다.이 결과도 마찬가지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다.적에게 못 미쳐서다. 다만 놀랍고 당황스러운 건 강흑성이 아니라 붉은 엘프의 등장이다.
“가라레를 여는 가라운.”
그 놈은 그런 놈이다.태산에서 놈의 정체를 확실하게 확인했다. 추락한 샤크의 블랙박스를 해독했다.접전 시의 영상엔 놈의 엄청난 무력이 담겼다.이곳과 같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존재를 붉은 엘프가 죽였다.
“엄청난 일이 생겨버렸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린 곽산은 곁으로 다가오는 수하를 돌아봤다.
“짐승들이 삼킨 바디캠을 찾아냈습니다.”
수하가 내민 칩을 멀티폰에 삽입한 곽산은 영상을 봤다. 붉은 엘프가 자신의 수하들을 도륙하는 광경이다. 그냥 황당하고 허탈하기만 하다.
“삼대문파의 움직임은?”“예, 5군단에 남아 있던 자들이 긴급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5군단, 몽골초원의 군부 대륙거점이다. 그곳에 있는 송출기를 통해야만 화성에 연락이 가능하다. 우주선의 이착륙도 마찬가지, 화성에서 또 올 거다.
“누가 움직였나?”“그 부분까진 아직 본부에서 연락이 오질 않았습니다만, 상황에 맞춘 고수들을 보낼 것으로 판단합니다.”
당연한 순서다. 천지문은 외당주 종초홍 이상을, 삼월문은 초월단주 육대원을 능가하는 고수와 병력을 보낼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 분명하다.지금 당면한 상황은 그 누구도 예상 못한 초유의 것, 놀라고 분노했다.
‘내가 나선 것처럼.’
곽산은 자신의 위치와 존재를 새삼 가늠했다. 블랙블러드 지구본부의 총사다, 지구의 모든 전력을 투입하는 행동에 나섰다. 그래야 할 일이다.
“바람이 분다.”
희미하게 흘려낸 곽산은 목소리에 수하는 미간을 좁혔다. 의혹 어린 그 눈길을 무시하고 곽산은 멀티폰의 영상을 봤다. 다시 또 중얼거렸다.
“피바람이 불어 닥칠 것이야.”
곽산의 중얼거림은 바람을 타고 노을 속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