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118화 (119/172)

혹성강호. 118. 또 다른 전설.

118. 또 다른 전설.

“흥.”

야멸친 콧바람 소리로 식판을 내려놓은 여인, 명희엄마의 찬바람 나는 기세에 전복은 움찔했다. 푹푹 한숨을 내쉬며 식탁만 원망하듯 봤다.

“으이그.”

자신을 원망하는 숨소리를 내는 전복에게 최창수는 은근히 물었다.

“보긴 제대로 본 거야?”“뭐?”

고개를 확 든 전복은 눈을 부라렸다.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거야?”“아 오해 말고.”

전복의 무서운 눈길을 무시하듯 최창수는 수저를 들었다. 주변에서 재잘거리며 저녁을 먹는 아이들을 돌아보고 다른 여인들을 본 후 말했다.

“구해주다 그렇게 된 건데 뭘 그렇게 주눅 들어서 그래? 명희엄마도 부러 저렇게 행동하는 걸로 보이는데 말이지.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라고.”

뭔 소리래? 하는 얼굴인 전복은 흘끔 뒤를 돌아봤다.

‘음, 저거 아무래도······’

저녁을 먹는 그녀의 얼굴엔 홍조와 웃음이 있다. 자신과의 이야기가 진행 중인 거다. 여인들이 웃으면서 이쪽을 쳐다본다. 얼른 시선을 돌렸다.

“아 진짜,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니까?”“그래 누가 뭐라나, 자네 말을 믿지. 솔직히 보고 싶었을 수도 있고.”“아이 썅 뭐래냐?”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욕에 전복은 입을 막았다. 곁에서 저녁 먹던 아이들이 돌아봐서다. 웃는 얼굴로 아무 일 아니라고 달래고 숨을 돌린다.

“으, 내가 진짜.”“다행인건 탈이 없다는 거야.”

다시 나온 최창수의 말에 전복은 미간을 옅게 좁혔다.

“트라이울프에게 물려가던 일이었잖나. 상처도 깊지 않고 빠르게 아무는 중이라 다행이지. 중독증상도 없고 말이야. 다른 사람 같으면 탈났지.”

삼목울프의 이빨을 통한 감염증세 같은 게 없다. 그 이유가 강흑성이 여인들에게 목인 해독약 때문이라고 짐작하지만, 어떻든 다행한 일이다.

“뭐 그렇지, 암튼 강흑성 그 친구, 생각할수록 대단한 친구야.”

고갤 주억거리며 강흑성을 거론한 전복은 최창수의 눈을 응시했다.

“정보장교가 오늘도 왔다 갔다고?”

차갑게 번득이는 전복이 눈길을 받으며 최창수는 식판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랬지. 도움을 주는 고마운 친구야.”

전복은 최창수의 입가에 어린 흐릿한 미소를 비웃었다.

“천하의 최창수가 저런 얼굴이라니, 그러다 뒤통수 맞으면 볼만 하겠는데?”

수저를 들다 움직임을 멈춘 최창수는 전복의 차가운 눈을 직시했다.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가.”“내가 아는 최창수는 그렇게 물렁한 소리나 하는 자가 아니란 거지.”“뭐가 물렁한데?”“지금 그 얼굴, 지껄이는 소리.”“확실하게 말해.”“7군단의 정보장교가 우릴 찾아왔지, 매일 찾아오고 있어. 그래, 자네 말대로 그 친구가 카이오에게 빠졌다고 나도 판단해. 그래서 그게 다일까? 학습교재를 가져다주고 편의를 제공해 주고? 그래서 고마운 친구야?”“7군단은······”“알아.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군대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전복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군대란 말이야. 군대, 그곳이 어떤 조직인지 나는 잘 알아. 자네도 잘 알지. 그래, 자네와 내가 아는 군대가 다른 것 같지만 말이야. 자네에겐 배신감을 준 동시에 아직도 미련이 남은 곳이 바로 군대지.”

최창수는 눈썹을 미세하게 떨었다.배신감, 그것 때문에 군대를 떠났다. 그렇지만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군대야 말로 이 세상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여겨서다.7군단과 같은, 그리샴 장군과 같은 존재의 희망이다.

“나는······”“군대는 절대 그런 곳이 아니야.”

최창수의 말을 자른 전복은 나무 수저를 내려놓고 뒷말을 냈다.

“자네가 버리지 못한 희망 따위, 어디에도 없어. 그래, 그건 말 그대로 미련일 뿐이지. 자네도 알아. 그런데 인정 못하는 거지. 그게 전부니까.”

전부, 살아가는 마지막 숨 줄이다. 그게 전복은 아니라고 한다.

“군대는 살아 있는 존재야. 7군단과 그리샴장군은 그 생명체 안의 한부분일뿐이지. 괴수의 손이나 발쯤 된다고 할까, 그러니 결국 그 존재인 거야. 나는 절대로 자네가 바라는 일은 없다고 봐. 오히려 그 반대지.”

반대라는 말에 최창수는 미간을 뒤틀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칼날을 품은 것 같은 눈으로 전복은 말했다.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위험에 준비해야 한다는 거지.”

뒤튼 미간을 경직한 채 최창수는 생각했다. 지금 전복이 뱉은 말, 위험의 대비, 그것이 왜 필요한지다. 동시에 늘 자신이 하던 말임을 깨달았다.

‘이곳에서······’

대전, 7군단의 세력 안, 원필성의 조력, 그리고 전복의 말.

“군대는 명령에 죽고 사는 조직이야.”

쐐기를 박듯이 뱉은 전복의 한마디에 최창수는 흠칫했다.

‘우리가 수단으로 필요한 때가 온다면, 그런 일이 생긴다면, 명령이라면······!’

강흑성과 관련이 있는 이들이다. 강흑성은 대륙에서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를 잡기 위해 삼대문파가 행동에 나섰다. 여파를 알 수가 없다.

“그리샴장군이 아무리 명예로운 군인이라고 해도 군인이지. 군인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줄 아는 존재야. 그런 게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때가 오면, 우리에게 닥쳐올 위험을 앉아서 환영할 수는 없지. 안 그래?”

할 말을 다한 듯 전복은 다시 수저를 잡았다. 최창수는 허공만 응시했다.

* * *

암흑처럼 검은 독지가 꿇는다, 불에 올려둔 속안의 물이 끓듯이 부글거린다. 출렁임으로 범람한 독수의 수림 침범은 더욱 거세진다. 위험을 감지한 수림의 생명들은 울음을 내며 도망친다. 그렇지만 독에 잡힌다.해일처럼 밀려온 독수의 습격으로 블루마운틴이 울부짖는다. 다리부터 독에 물든 형상은 삽시간에 살과 뼈가 녹아내리며 무너진다. 그 곁의 거대수가 쓰러지며 붉은 혓바닥 원숭이들이 떨어진다. 설탕처럼 녹는다.독지를 중심으로 수림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괴수와 맹수들은 피하기 위해 혼비백산 달렸고, 거대수와 수목들은 암흑에 물들어 죽어갔다.그러던 한순간 독수의 확산이 멈췄다.암흑은 온 곳으로 되돌아갔다.빨려간다, 독수가, 죽음의 암흑이 넘쳐 나온 곳으로 돌아간다.독지는 소용돌이친다.중심으로 암흑이 모인다.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절정의 암흑컬러, 생명들을 녹이던 독의 정화는 한순간 거짓처럼 사라졌다.늪은 평온하게 가라앉았다.독지를 이뤘던 암흑빛은 사라졌다.투명한 물빛만이 잔잔하다.그 속에서 뭔가 떠오른다. 소용돌이의 중심에서다.강흑성이다.완벽한 나신의 형상으로 늪을 밟고 나온다.손에 쥔 것은 철검 철혼과 브리틀단도와 은빛 사슬 철룡이다. 그것들을 몸에 두른다.수림 위 밤하늘을 올려다본 강흑성은 바람이 돼 수림을 헤쳐 나갔다.

* * *

농장 곳곳에 구덩이를 파고 시체들을 쓸어 넣은 후 불을 붙였다. 기름을 부어 불태우는 시체들의 연기가 밤의 암흑을 더 하며 퍼져 올라간다. 동시에 어둠을 밀어내는 불빛도 낸다. 산동중앙농장 사방을 비춘다.

“오늘 밤이 고비야.”

박현의 긴장어린 목소리에 무슬란은 고갯짓으로 공감을 표시했다. 농장주들의 반격에 대비하고 있지만 실상 중과부적인 상황이다. 그들은 더 강력한 화기를 동원할 것이다. 혁명군이 가진 무기들은 초라한 것들이다.

“싸우는 것 밖에 도리 없지.”

결의의 숨을 뱉는 무슬란, 박현은 돌아보고 히죽 웃었다. 무슬란도 그랬다. 이심전심, 대륙에 넘어와 이렇게 하고 있는 기억과 감정의 공유다.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 하지만 하기로 했고 해야 할 일이다.

“내일은 술이라도 한 잔하자.”“그래, 오늘밤을 무사히 넘기고.”

둘이 그렇게 미소를 주고받는데 섬광이 터졌다. 어둠 저편에서 날아온 로켓이다. 농장의 망루를 강타했다. 다행히 아무도 없지만 공격은 이어진다. 로켓들이 날아와 곳곳을 파괴한다. 그리고 저 소리는 분명 게틀러다.

“제기랄!”“놈들이 게틀러를 가져왔다!”

반란을 부추겨 음모를 꾸민 놈, 가브리엘이 움직인 무기는 그냥 장갑차량이었다. 그런데 저건 게틀러다.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지만 다가온다.

투르르르르.

게틀러의 벌컨이 뿜어내는 불벼락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그 소리 이전에 농장의 시설물들은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농장주의 저택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안남기려고 작정한 거다. 게틀러들이 몰려온다.

“형!”

박현이 박준을 부르자 대답이 왔다.

“후퇴해!”

이차방어선으로 물러나라는 소리다. 그런데 밀고 오는 게 게틀러다. 매설해 놓은 크레몬의 화력으로는 파괴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당장 방법도 없다.

“가자!”

무슬란이 먼저 참호를 나갔다. 박현도 뒤따라 튀어나갔다. 거구의 움바바족이지만 비호같은 움직임, 그렇지만 주변에선 죽음이 꽃처럼 터진다.허둥지둥 달리던 혁명군, 농장 노예였던 이들의 형상이 흩어진다. 그 모습에 치를 떨며 달리던 박현도 고꾸라졌다. 옆구리를 친 화끈함을 안고서다. 앞서 달리던 무슬란도 쓰러졌다. 어깨를 움켜쥐고 땅바닥을 긴다.

“현아!”“무슬란!”

박준과 그렉이 안타깝게 부르는 소리를 향해 박준은 기어갔다. 옆에서 달리던 이의 형상이 터진 피와 살점을 뒤집어쓰고, 이를 악물며 포복했다. 그런데 왼쪽에서부터 벌컨의 불벼락이 바닥을 훑으며 다가온다.

‘이!’

치뜬 눈을 한 박현은 최후를 예감했다. 움바바족인 자신을 정확히 포착한 적의 공격이다. 일어서도 죽고 굴러도 죽는다. 여기가 마지막이다.

‘형, 그렉, 무슬란.’

세 사람을 부르며 박현은 눈을 감았다.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다시 눈을 떴다.옆에 누군가 서 있는 걸 봤다.알몸의 사내다. 검을 휘두르고 있다. 황당하게도 그 움직임에 벌컨공격이 갈라지고 있다.

‘강흑성!’

나신의 사내가 강흑성임을 깨달은 순간 박현은 얼어붙었다.한걸음을 낸 강흑성이 게틀러를 두 동강 내서다. 종이로 만든 걸 갈라버린 것 같다.그것이 끝이 아니다. 다른 게틀러들을 향해 흑청빛 벼락을 던졌다.강흑성의 검으로부터 이탈한 벼락은 최후를 연출했다.여섯 대의 게틀러가 산산조각 났다.한 번의 가름이 만든 무수한 가름, 그건 시작이었다.

“현아!”

달려와 부축하는 형 박준의 손을 잡으며 박현은 뜨거움 숨을 내쉬었다.

“흑성이가 왔어!”

이미 보고 있기에 박준은 몸만 부들거렸다. 너무 강격해서, 흥분해서다. 그렇기는 매한가지인 그렉이 무슬란과 곁에 섰다. 강흑성을 보는 눈은 넋이 나간 것 같다.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내는 중얼거림도 그렇다.

“타이그라툰······!”

타이그란 족의 전설, 그 이름을 흘려낸 그렉의 눈길 저편에서 강흑성은 움직였다. 지옥에서 온 사신으로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도륙했다.

* * *

운하의 철탑으로 올라간 철무진은 벌컨의 조종간을 잡았다. 다시 날아오는 무인건쉽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눈으로 쫓지 못할 속도의 무인건쉽, 그 진행 방향을 예측해 발포한 불벼락은 정확하게 목표를 맞췄다.폭발하며 추락하는 건쉽을 무시하고 철무진은 다른 기체를 타겟팅 해 발포했다. 불바다로 변한 신남경의 전경을 눈에 넣고, 분노로 치를 떨면서다. 난데없이 들이친 적호문, 이들의 공격은 분명 배후와 음모가 있다.

“이놈들! 모조리 죽여주마!”

하늘을 향해 올린 벌컨포신과 하나가 된 철무진은 불벼락을 터트렸다. 그런데 옆으로 날아온 무인 건쉽 비천이 섬광을 뿜었다. 그걸 인지한 순간 철무진은 신형을 날렸다. 20미터 높이 철탑은 이탈한 순간 폭발했다.

* * *

“추워지는 건가?”

바람을 느끼려 손을 들어 올린 아우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이 오려나 봐.”

듣는 이도 없건만 곁에 누가 있는 것 같은 모습.

“계속 가면 북경이 나오겠지? 그곳을 지나 장성을 넘어가면 몽고초원이 시작될 거야. 5군단이 거기 있어. 거기 도착하기 전에 보게 될 거야.”

시선을 반대로 돌린 아우리엘은 환한 미소로 그 이름을 불렀다.

“블랙블러드.”

붉고 푸른 눈을 빛낸 아우리엘은 몸을 돌렸다. 그런데 다시 멈칫했다.

“나처럼 전설들이 다 나오는 건 아닐까?”

레드파운틴족의 전설, 가라레를 여는 신인 가라운이 자신이다. 그런 존재들은 또 있다. 타이그란족에는 타이그라툰이란 존재가 있다는 걸 안다.

“정말 그렇게 되면 재밌을 텐데 말이야.”

아이처럼 천진한 미소를 피워낸 아우리엘은 멈췄던 걸음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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