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120. 칼이 부딪치면 불꽃이 튄다.
120. 칼이 부딪치면 불꽃이 튄다.
사건기록 검토에 들어간 형포, 매화검문의 인물을 생각하며 패튼은 준비상황을 응시했다. 샤크에 분주히 장비들을 싣고 있다. 새로 지급된 대형전투로봇 빅풋 두 대가 한 기에 실린다. 지휘차량용 게틀러도 실었다.
‘나머지 네 기의 샤크엔 저들의 장비를······’
매화검문이 매머드에 싣고 온 장비들을 옮기는 중이다.형포의 수하들이 직접하고 있다.모두 열 명, 저 인원이 전부다.그런데 저들이 옮기는 강철상자들 안에는 뭐가 있을까? 왜 이리 뒷골이 자극받는 느낌일까?
‘너희가 원하는 대로 길잡이를 해주겠다만······’
새삼 미간에 골을 그린 패튼은 이 상황의 전후를 짚어내려 애썼다. 치안총국에서 블랙블러드에 이어 매화검문과도 손을 잡은 일, 가늠이 어렵다. 매화검문과 블랙블러드는 춘천 내전으로 표면적으론 대적상태다.
‘어디까지나 표면적, 일이라는 것이긴 하지만.’
블랙블러드는 춘천 자치대의 청부를 받은 일이다. 그들의 정체성을 생각하면 매화검문과 원한 같은 건 없다. 그렇지만 칼은 부딪쳤다. 그렇게 튄 불꽃은 이전과 같을 수가 없는 거다. 그래서 이 그림은 혼란스럽다.
‘치안총국은 두루두루 다 통한다?’
상황에 관계없이 그런 거라면 정말로 능력이 좋다고 하겠다. 치안총국이니까 그럴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그건 상대들도 마찬가지다.
‘응?’
패튼은 미간에 힘을 줬다. 못 본 인물이 눈에 들어와서다.강철상자를 샤크에 옮겨 싣는 십 인의 매화검문 무인들 사이에 어슬렁거리는 자가 있다.매화검을 지니지 않은 자, 눈만 내놓은 슈트용 마스크를 착용했다.
‘누구지?’
괴이하다, 저 행동으로 볼 때 아래 인물이 아니다.매화검문 무인들의 위에 있는 자다.형포 외에 저런 인물이 있다는 게 놀랄 일은 아니지만, 부조화스러운 그림임은 분명하다.저자가 실질적인 수령인 것만 같다.
‘그렇진 않겠지.’
부정하면서도 패튼은 괴이함을 곱씹었다. 때를 맞춘 것 같이 형포가 다가와서다. 어슬렁거리던 인물과 눈을 맞추더니 격납고 구석으로 간다.둘이 심각한 눈빛으로 이야기 한다. 역시 형포가 저자의 상관은 아니다.
‘저 자들······’
둘의 관계도 의문이지만 나누는 이야기가 궁금하다. 형포가 여태 훑어본 사건기록에 관한 것이 분명하다. 그 내용이야 패튼 자신도 수십 번에 걸쳐 확인했다. 맨처음 카슨이 반화성조직 ‘미래’를 토벌하면서부터다.
‘적호문의 무공을 쓰던 것들.’
모조리 섬멸하고 한 놈만 놓쳤다. 그놈을 잡자고 후속행동을 하다가 샹그릴라 일당과 얽혔다. 그 속엔 카슨이 밀거래 하던 크리듐이 있었다.
‘카슨 그놈이 방아쇠를 당긴 거지.’
브라이트까지 그 일로 죽었다. 데바족의 비참한 최후다. 상부 몰래 크리듐 광산을 차지하려다 맞은 결과다. 북부지구 정찰대 전원이 몰살했다.
“하.”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어 패튼은 실소를 흘렸다.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다 허황된 거짓 같다.레드스콜피온이 정체모를 일당에게 전멸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물론 그 일엔 테러조직이 끼어 있긴 했다.
‘퓨리엔트족 놈들.’
그것도 황당한 일이다. 반화성조직으로 뭉친 그놈들은 크리듐광산을 제대로 해 먹었다. 패튼 자신과 동부지구정찰대장 로이어가 발을 디뎠을 땐 배불리 챙기고 떠난 후였다. 끝까지 광산을 지킬 수 없단 걸 안 거다.
‘그것들 뒤를 쫓다가 이젠 대륙에 가게 됐으니······’
다시 샹그릴라 일당으로 생각을 옮긴 패튼은 형포와 정체모를 인물의 논의가 무엇일까 더듬었다. 사건기록을 요구하고 훑은 이유가 있음이다.그로부터 뭔가를 찾아낸 거다.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그놈들 일이다.
‘샹그릴라, 유성대협의 무공을 사용하는 놈, 도대체 어디서······’
생각의 더듬던 패튼은 순간 경직했다.
‘혹시?’
카슨이 맨 처음 ‘미래’를 공격했던 일이 시작이다.한 놈을 놓쳤다. 그놈이 누군지 모른다.샹그릴라엔 본래 사장 박준과 타이그란 직원 그렉이란 놈만 있었다.카슨이 찾아갔을 때 젊은 직원 하나가 더 있었다 했다.
‘그놈이 그놈?’
불길하면서도 강렬한 예감에 패튼은 어금니를 물었다. 동시에 부정했다.
‘아니야, 앞뒤가 맞지 않아.’
카슨이 못 알아 봤을 리 없다. 그러니 놓친 놈과 샹그릴라의 젊은 놈은 다른 놈이다.그런데 놓친 놈이 생기고 샹그릴라에 그놈이 생긴 건 뭔가?상관없을 게 분명한 이 결과는 어째서 뒷골을 자극하는 건가?
‘저들은······ 뭘 알고 있는 건가.’
형포와 정체모를 인물을 응시하던 패튼은 돌아섰다. 이젠 자신의 장비를 챙겨야 할 때다.
* * *
중토상인연맹의 하원옥이라고 밝힌 여인을 강흑성은 유심히 응시했다. 박준과 진지하게 이야기 하는 여인은 강흑성 자신을 힐긋댄다. 정체를 정확히 모르지만 아는 거다. 지옥사신이란 별호의 인물로 확신함이다.
‘상인들이란 지옥에서도 돈을 번다고 하더니.’
어머니가 해주신 말씀이다. 정말로 이 상황에 딱 맞는 말이다. 하원옥이란 저 여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다. 산동농장연합의 주인이 바뀌어서다. 이렇게 결과가 만들어지는 동안 상황을 지켜보고 기다린 거다.
“가브리엘이란 상인이 중토상인연맹에 속해있던 걸로 압니다만?”
박준의 날선 물음에 하원옥은 부드러운 미소로 시인했다.
“그렇습니다. 산동농장연합과의 거래를 거의 독점하던 인물입니다.”“그자가 이런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까?”“몰랐습니다. 일이 일어나기 직전에 눈치를 챘지요. 무기를 구하고 낭인용병들을 동원하다는 걸 알았지만 도리가 없었습니다.”
“모른 체 했다는 말로 들립니다.”“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인 하원옥은 자신이 아는 이야기를 꺼냈다.
“농장주들과의 파티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술기운에 언행이 과해졌고, 서로 간에 쌓아뒀던 거래의 불만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술이 낀 자리였던 만큼 원만한 결과가 없었지요. 그날의 일이 원인으로 봅니다.”
박준을 비롯한 일행과 농장주인이 된 수뇌부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봤다.
“가브리엘이 무슨 일을 꾸미든 상관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도의니 정의니 모릅니다. 장사꾼은 거래를 통한 이익창출, 그것만이 최선입니다.”
목소릴 이어낸 하원옥에게 박준의 날선 반응이 다시 나갔다.
“그래서 찾아온 것이고요.”
하원옥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다.
“예. 이미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박준과 모든 이들을 응시하며 하원옥은 다시 입을 열었다.
“산동농장연합과의 거래를 원합니다. 기회를 찾아온 행보가 맞습니다. 욕을 해도 무방합니다만, 냉정하시길 원합니다. 이곳의 수확물을 독점으로 수매하도록 해주시면 기왕의 수익률에 10프롤 더 드리겠습니다.”
그렉이 툭 튀어나왔다.
“판로를 확실하게 갖고 있다는 소리군요.”
하원옥은 그렉의 눈을 응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산서와 섬서, 청해와 감숙에 이르는 교역루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지역의 도시들에 공급하면 서로가 원하는 결과를 가질 수 있을 겁니다.”
박현이 자신도 모르게 속말을 흘려냈다.
“대단한 여자네.”
박준이 돌아보고 험악한 눈빛을 던지자 박현은 실수를 깨달았다.
“아뭐, 사실이잖아. 여자가 저만한 일을 한다는 게 말이야.”
무슬란에게 동의를 구하는 눈짓을 했지만 무슬란은 딴청을 했다. 박현이 작게 욕하며 무슬란에게 화내는 동안 박준은 다시 하원옥에게 말했다.
“이곳의 주인이 다시 바뀌면 어쩔 겁니까?”
하원옥은 미간을 옅게 좁혔다가 강흑성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눈길을 다시 박준에게 고정했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장사꾼은 거래이익을 좇습니다.”
박준은 말없이 하원옥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입니다. 세상이 그렇지요.”
의자를 밀고 일어선 박준은 농장의 주인들, 노예였던 이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결정은 여러분이 하는 겁니다.”
대표자격으로 이 자리에 참여한 이들은 서로를 보며 수군거렸다.목숨을 건 싸움이 막 끝나자마자 찾아온 일,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하는 거다.그래서 더 혼란스럽고 당황이 들지만, 주인으로서의 결의도 샘솟는다.
“거래 합시다.”
최종 결론을 말하는 자, 깡마른 얼굴의 장년인을 박준은 응시했다. 조협산에서 만난 초로인, 김원배라는 이름을 잊었던 이가 다시 말한다.
“농장을 재건하고 수확물을 거래하겠소.”
박준은 다른 이들의 눈에 든 불안과 기대를 확인했다. 노예로 일하던 농장이 이젠 자신들의 것이 된 거다. 열심히 일해 돈을 벌고 살 수 있다.
“분명히 알아둬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단호한 음성으로 입을 연 박준은 단호한 눈빛으로 뒷말을 냈다.
“이제부터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김원배와 다른 이들은 알아들었다. 노예라는 비참을 깨고 주인이 된 삶을 지키는 거다. 그것을 받쳐줄 땅을 지켜야 한다. 오늘 이 자리는 그냥 생긴 게 아니다. 어제 옆에 있던 이가 죽었다. 그럴게 쟁취한 거다.
“중토상인연맹은 도와주는 친구가 아닙니다. 거래를 통한 이익만이 목적입니다. 그렇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 더럽고 무서운 세상에 거짓을 말하지 않은 것도 대단한 선의입니다.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지켜야 합니다. 해내지 못한다면 다시 노예가 되고 말 겁니다.”
꿈틀거리는 숨소리와 눈빛이 김원배에게로 모였다.
“뼈에 새기고 있소, 우리는 지켜낼 것이오.”
박준의 눈을 응시한 김원배는 허리를 숙였다.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다른 이들도 모두 인사했다. 박준과 그렉과 박현과 무슬란을 향해 진심을 전했다. 박준은 아무 말 없이 눈길만 던지다가 김원옥에게 돌아섰다.
“거래합시다.”
김원옥은 환하게 미소 지었고 박준은 뒷말을 이어냈다.
“우린 칼을 휘둘렀소. 살기 위한 칼이었고 내 것을 찾기 위한 칼질이었소. 칼이란 부딪치면 불꽃이 튀는 법, 중토상인연맹엔 튀지 않기를 바라오.”
하원옥은 알아들었다. 마주한 이들의 뒤편에서 말없이 눈길을 던지고 있는 인물을 응시했다. 지옥사신, 저 사내가 있는데 그럴 일은 없다. 적어도 중토상인연맹이 장난 칠 일은 없다. 미친 자들만이 이곳을 넘볼 거다.
“여러분들이 만족할 만한 거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원옥은 일어서 인사했다. 그렇게 환호가 터져 나왔다. 산동농장 연합의 새 주인이 된 이들의 웃음, 기쁨이다. 이제 새 삶을 시작하는 거다.
* * *
“삼백아, 히잉.”
명희는 울었다. 진숙이와 샤이닌과 제나도 울었다. 그 옆에 서서 준후는 한숨 쉬었다. 이곳에 오던 날 본 로봇 삼백이는 그 이후로 이렇게 앉아 있다. 수명이 다 한 거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작동불능이 될 줄 몰랐다.
“삼백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으아앙.”
진숙이의 울음은 결국 합창으로 변했다. 움직이는 건 못하지만 그래도 앉아서 붉은 눈빛은 내던 삼백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것마저 사라졌다.
“하아.”
한숨을 내쉰 준후는 때마침 귀를 파고든 바깥의 기척을 들었다.
‘군인아저씨다!’
원필성이란 이름을 가진 7군단의 정보장교다. 처음엔 무서웠는데 교재를 가져다주고 도와주는 고마운 아저씨다. 저 아저씨면 방법이 있을 거다.후다닥 밖으로 튀어나간 준후는 차에서 내린 원필성에게 다가갔다.
“아저씨!”“어 준후구나.”
반가운 미소를 지은 원필성은 건물부터 살폈다. 카이오가 있는지, 있다면 어디쯤에 있는지를 빠르게 스캔했다. 그런데 준후가 비수를 확 찌른다.
“카이오 누나는 오늘 들일 나갔어요.”“어? 아, 그, 그래?”
아이에게까지 속마음을 들킨 건가 하며 원필성은 얼굴을 붉혔다.
“아저씨 도와주세요.”“응? 도와줘 뭘?”“안에 들어가서 좀 보세요.”
손을 잡아끄는 준후를 따라 원필성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로봇을 봤다. 지독하게 오래된 고물 로봇, 폐품으로도 남지 않았을 로봇이 있다.
“잘 움직였는데 갑자기 저렇게 됐어요.”“그래? 아이고, 이건 정말 고물인 걸?”“배터리를 바꾼다든지 하면 안될까요?”“글쎄, 요새는 크리듐배터리도 예전 거하곤 달라서 말이지.”
진숙이와 명희와 제나와 샤이닌이 왁하고 달려든다.
“아저씨! 삼백이 살려주세요!”“아저씨 우와앙!”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 할지 몰라 원필성은 난감함에 빠졌다.
“삼백이 고쳐주시면 저도 아저씨 도울게요.”
이건 무슨 소린가 하는 원필성은 준후가 귀에 대고 속삭이는 소릴 듣고 움찔했다.
“카이오누나하고 잘 되게 도와줄게요.”
뜨거운 숨이 올라온 입을 후 하고 터트린 원필성은 아이들에게 약속했다.
“내가 로봇을 살려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