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121. 투쟁.
121. 투쟁.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적호문 무리들은 강하고 흉맹하다. 적호검법을 펼치고 삼합장을 뿌리는 고수들이 수두룩하다. 수하들이 속속 쓰러진다.
‘이놈들이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이야?’
분노를 거검으로 펼치면서도 철무진은 당황과 의문을 삼켰다.일이 이렇게 불거지기까지 아무런 낌새를 채지 못한 거다.멸문한 적호문이 다시 나타났다.물론 적통후예라고 자처한 무리가 끊임없이 있기는 했다.그렇지만 지금 이일, 현재 상황은 전혀 다르다.적호문이라고 밝힌 이 공격자들은 은밀하고 강력하게 준비했다.철금련 자신들을 치고 신남경을 차지하기 위해 때를 노려온 거다.기습과 암격, 현재까진 성공이다.
“놈들이 물러갑니다!”
총관 마테오의 외침처럼 적호문은 썰물처럼 물러가고 있다. 하지만 곧 다시 공격해 올 것이다. 이런 식의 공방이 벌써 하루째다. 놈들은 신남경의 주요지점을 장악했다. 남은 곳은 등지고 있는 북쪽 제강제련소다.
‘어처구니가 없어······!’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허탈감에 철무진은 검을 떨궜다. 주변에 널린 적호문 무인들의 시신을 생경하게 바라봤다. 그 순간 저격이 왔다.팡, 귀청을 때리는 타격음을 낸 것은 구식 화약총의 탄환이다.검을 들어 막아내지 않았으면 미간을 뚫었을 터다.철무진은 전방을 노려봤다.
‘소용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계속해서 기회만 생기면 저격하고 있다. 철무진 자신의 심기를 자극하려는 의도다. 그런데 완전히 소용없는 짓은 아니다, 적호문은 목적의 반이상을 성공했다. 이렇게 철무진 자신과 남은 영역까지 차지하면 끝이다.
‘저렇게 갑자기 강세로 불거져 나올 수가 있는 건가?’
적호문의 실체가 뭔지 철무진은 더듬었다. 뒷걸음으로 물러나면서다. 제강소의 외곽 울타리를 경계 아닌 경계지역으로 삼은 상황, 그 뒤로 섰다.
‘저들은 진짜야.’
적호문의 이름만 가진 자들이 아닌 거다. 적호검법과 삼합장을 사용하고 있다. 철금련의 수하들을 제대로 공략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그동안 호되게 수련하고 훈련한 거다. 아니었다면 현재 결과는 더 비참했을 것이다.
“문주, 아무래도 조력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곁으로 다가온 마테오의 조심스러운 눈을 철무진은 돌아보지 않았다.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만 조력이란 말자체가 부질없는 거다.어디 가서 누구에게, 어떤 세력에게 조력을 청할까. 이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니다.
“지옥사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시 나온 마테오의 의견, 철무진은 홱 고개를 돌렸다.
“지옥사신? 강흑성에게?”“그렇습니다. 그는 비록 혼자이긴 합니다만, 유성대협의 독을 사용하는 인물입니다. 고강한 무공도 가졌습니다. 그 정도의 고수는 흔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현황과 같은 접전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는 회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문주와 같은 고수가 한명 더 있다면 다를 겁니다.”
눈썹을 꿈틀거리는 철무진에게 마테오는 덧붙였다.
“그가 처음 나타났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기억한다. 귀룡이란 괴수거북이 끄는 배를 타고 나타났었다. 캐논포를 무력화 시켰다. 그와 마주섰던 순간의 긴장은 지금 생각해도 숨 가쁘다.그렇지만 그는 태산에 있다. 그를 찾아 삼대문파의 고수들이 갔다.
“강흑성, 그의 안위조차도 확실치 않은 상황이다.”
무겁게 나온 철무진의 대답에 마테오는 강렬한 안광을 흘려냈다.
“그래도 기대할 방법은 그뿐입니다. 은밀하게 빠져나가 태산으로 가겠습니다. 외곽비트에 숨겨놓은 바이크를 타고 달리면 하루 만에 도착할 겁니다.”
하루, 미친 듯이 쉬지 않고 달려야 가능하다. 마테오라면 해낼 거다. 혼자만 살겠다고 도주할 인물이 아니다. 저 눈은 반드시 해내겠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산동농장 연합의 반란은 그들과 관계가 있지 싶습니다.”
흑도낭인용병들의 움직임, 그 원인이 된 반란, 강흑성과 그 일행이 간 곳이다. 마테오의 짐작처럼 철무진 자신도 연관이 있다는 예감이었다.그렇지만 정확히 모른다, 아무 것도 모른다. 조력요청도 가 봐야 안다.
‘강흑성이 삼대문파 고수들에게 당했거나, 그 자신조차 돌보기 힘든 처지라면······’
그래도 시도해야 한다. 현재 상황으로는 적호문의 공격을 막아내기 힘들다. 마지막 보루인 제강소에서도 밀려나면 떠나야 한다. 물론 죽지 않았다는 전제에서다. 복수를 꿈꾸겠지만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철금련주는 들어라!”
쾅하는 총소리처럼 귀청을 강타한 목소리에 철무진은 눈을 치떴다.전방을 다시 보니 한 인물이 파괴된 건물 꼭대기에 서 있다.바람에 옷자락을 표표히 휘날리는 모습, 스포츠머리를 한 사십대의 사내가 웃는다.
“본인은 적호문 동북분타주 연강이다!”
자신의 신분과 이름을 밝힌 사내는 거듭 소리쳤다.
“투항하고 적호문의 휘하로 들어온다면 환영할 것이다!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해라! 철금련은 이제 무너졌다! 마지막 숨통이 끊기는 것은 시간문제다! 본문은 대륙 각지에서 동시에 기치했다! 적호문의 시대다!”
겁박과 회유를 동시에 외친 자, 적호문 동북분타주 연강은 호탕한 웃음을 이어냈다. 자부가 가득한 대소다. 저 말대로라면 적호문은 철금련을 공격하는 것 말고도 다른 곳을 장악한다는 거다. 그러니 거듭 놀랍다.
‘기밀을 유지하면서 조직을 유지해 왔다는 건가?’
적호문의 실체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지금 겪는 일은 그냥 날벼락 같은 일인 거다. 연강이라는 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적호문은 무서운 자들이다. 이런 거사를 준비하는 동안 자신들을 철저히 숨겨온 거다.
‘중심에 어떤 인물이 있기에······!’
검자루를 강하게 움켜잡은 철무진은 마테오에게 말했다.
“마테오. 가라.”
철무진의 커다란 등을 응시하던 마테오는 고개 숙이고 즉시 돌아섰다.
* * *
“보기 좋지?”
그렉의 물음 아닌 물음에 든 흐뭇함과 희열을 강흑성은 여실하게 느꼈다. 농장노예였던 이들이 진심으로 일하는 모습이다. 파괴된 농장을 재건하는 저들의 숨소리가 뜨겁다. 지금 흘리는 땀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저들과 싸울 거다.”
이어 나온 그렉의 말은 남은 생을 건 결의다.왜 그렇게 결정했는지 모르지만 강흑성은 묻지 않았다.느껴져서다.그렉의 눈엔 늘 불안이 있었다. 과거로부터 도망쳤기 때문이다.그런데 이젠 그 불안이 안 보인다.
“언제 떠날 거냐?”
시선 돌려 묻는 그렉에게 강흑성은 비로소 대답을 냈다.
“곧 갈 겁니다.”
농장으로 눈을 돌린 그렉은 아무런 말을 않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안 갈수는 없는 거냐?”
강흑성은 아무 반응도 내지 않았다. 그렉도 다른 말을 더 하지 않았다. 부질없는 소리를 했다는 자책만 했다. 정확하게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강흑성이 가려는 길과 하려는 일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안다.
“화성의 삼대문파에서 다시 움직일 겁니다.”
강흑성은 입을 열었고 차분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태산에서부터 자취를 쫓을 겁니다. 이곳에서 싸운 것도 알아낼 겁니다. 그 상황이 되면 어떤 결과가 생길지 모릅니다. 강흑성이란 존재가 떠난 곳이니 그냥 내버려 둘지, 화풀이로 공격할지, 그런 일은 막아야 합니다.”
그래서도 떠나야 한다는 거다. 그들의 이목을 끌고 가겠다는 거다.
“위험은 그들만이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곳에 닥칠 수 있는 현실적인 위험, 그걸 대비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단 소리다.
“그럴 게 뭐······”“철금련에 가겠습니다.”
그렉은 전후를 알아듣고 눈을 크게 떴다.아우리엘을 쫓아가는 일이 우선이지만 그 일부터 하겠다는 거다.이곳에 남은 동료들을 위해서인 거다.이 비정하고 차가운 하프타이그란의 가슴에 들어 있는 진심인 거다.
“갑니다.”
일어서는 강흑성을 따라 그렉은 황망히 일어섰다. 둘이 앉았던 농장 외곽의 둔덕엔 바람이 더듬고 지나갔다. 일하는 이들의 수고를 격려하며.
* * *
제강소의 커다란 굴뚝으로 올라가는 연기를 돌아본 마테오는 의지를 삼켰다. 지하로 연결된 터널입구는 은밀하게 엄폐했다. 이곳을 적호문 놈들은 찾을 수 없다. 최악의 경우 문주 철무진과 형제들은 탈출할 것이다.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강흑성을 찾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마테오는 움직였다. 수림을 헤치고 나가 비트를 찾았다. 거대수 아래를 판 지하공간이다. 구비해 놓은 장비들이 그대로 다 있다. 플라잉바이크를 확인하고 밖으로 밀고 나왔다.
‘더 거리를 벌린 후에.’
힘으로 플라잉바이크를 밀고 간 마테오는 됐다 싶은 곳에서 시동을 걸었다. 지면에서 둥실 떠오른 바이크에 올라타고 수림을 가르며 질주했다.
* * *
보급창고 안에 이렇게나 많은 물건들이 있는 줄 몰랐다. 구석으로 갈수록 오래된 물건들이다. 그렇게 구역이 나뉘어져 있다. 폐기품에 가까운 것들을 따로 구분해 놓은 거다. 이곳이라면 배터리가 있을지 모른다.
‘그 모델은 원체 고물, 아니 골동품인데······’
높이 솟은 보급품 진열대 사이를 누비며 원필성은 아이들을 떠올렸다. 울면서 매달리던 간절함이 새삼스럽다. 그런데 준후의 말이 더 그렇다. 카이오와 잘되게 도와준다는 말, 그 말에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하,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고개를 흔들던 원필성은 앞에 누가 있는 걸 알았다. 조명 아래로 걸어오는 사람의 얼굴이 누군지 확인했다. 정보참모인 루카스 중령이다.
“원대위.”“루카스중령님.”
경계하는 원필성을 향해 루카스중령이 다가왔다. 무심한 얼굴로 묻는다.
“보급창고엔 무슨 일인가?”
순간 머뭇거린 원필성은 대답했다.
“구형로봇에 사용하는 배터리를 찾고 있습니다.”“그래? 그런 물건이라면 G구간일 텐데.”
루카스중령은 바로 돌아섰다. 안내하겠다는 말은 안했지만 원필성은 그 뒤를 따라갔다. 과연 G구간 보관대에 여러 종류의 배터리들이 있었다.
“아 이거면······”
놀랍게도 골동품 로봇에 맞을 만한 배터리도 있었다. 그걸 잡은 원필성은 루카스중령의 시선을 느꼈다. 감사인사를 하려는데 그가 묻는다.
“그 곳의 로봇에게 필요한 건가?”
그곳, 카이오오 여인들이 있는 곳을 말함이다. 그렇다는 걸 원필성은 깨달았다. 루카스중령은 정보참모답게 모든 걸 파악하고 있다. 그곳에 로봇이 하나 있다는 것도 아는 거고, 원필성 자신의 행동도 파악했음이다.
“그렇습니다. 구형 로봇이 있는데 배터리 자체의 수명이 다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말한 원필성을 응시하며 루카스중령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책무 범위를 넘어서 충실한 이유를 물어도 되겠지?”
원필성은 순간 움찔했지만 바로 대답했다.
“최대한 협조하라는 장군의 말씀을 따르고 있습니다.”
루카스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금발에 푸른 눈, 전형적인 서양인종의 외모를 가진 루카스중령은 언제나 그렇듯 차가운 눈을 번득인다.
“장군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신건지 이해는 하고 있는 건가?”“그건······”“화성에서 셔틀이 왔다. 삼대문파의 인물들이 차례로 타고 왔던 셔틀 말고.”
그 부분은 안다. 몽골 5군단 기지에 그들은 착륙했다. 하루 전에도 왔다. 바로 이곳 7군단의 착륙장에 도착한 셔틀이 있다. 보급품으로 안다.그 셔틀을 말하는 게 분명한데, 루카스의 눈은 다른 걸 말하고 있다.
“보급품 외에 사람이 왔다.”
이어 나온 루카스의 말에 원필성은 눈썹을 세웠다.
‘사람?’
의혹으로 힘이 실리는 원필성의 눈을 응시하며 루카스는 이어 말했다.
“신분을 알 수 없는 인물이 타고 왔다. 7군단을 떠난 후의 행적도 파악이 안 된다. 화성정부의 요청이었지만 추적 자체가 불가능하게 움직였다. 여러 정황과 단서들로 추정컨대 매화검문과 접선한 걸로 판단된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원필성은 물었다.
“누군지 신원파악이 전혀 안 되는 겁니까?”
그가 누구길래 매화검문과 접촉한 것이냐는 물음이 포함된 반응.
“치안총국의 인물로 짐작한다.”
원필성은 표정을 경직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서다. 군대와 늘 대척관계인 치안총국이란 이름을 들어서가 아니다. 이 상황이 그렇다.
“그곳의 여인들이 누구와 관계 돼 있는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시 목소릴 낸 루카스중령은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샹그릴라 일행, 그중에 낀 유성대협의 후인으로부터 시작해 벌어지는 일들이다. 지옥사신 강흑성, 그자를 찾아 삼대문파의 무인들이 지구에 왔다. 치안총국도 마찬가지야. 북부지구 정찰대가 전멸했을 때도 움직이지 않은 그들이 움직인 거지. 매화검문과 화성연구소와 연결해서다.”
짧게 숨을 돌린 루카스는 모르던 이야기를 냈다.
“북부지구 정찰대, 그곳에 내 동생이 있었다. 쉬타이너, 골칫거리인 놈이었지만 하나뿐인 형제였지. 그래, 형제였다. 그놈의 목숨을 앗은 존재가 바로 지옥사신 강흑성이다. 정찰대장 브라이트까지 그놈이 다 죽였지.”
불꽃이 이글거리는 루카스의 눈은 확 팽창했다가 응축했다.
“그곳의 여인들, 장군의 명령으로 보호 아닌 보호를 하고 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들의 효용이 무엇인지 명확히 구분하고 행동해야 할 거다.”
시선을 거두고 돌아서는 루카스의 등을 보며 원필성은 눈가를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