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123화 (124/172)

혹성강호. 123. 적호문.

123. 적호문.

확실히 전과 달라지긴 했다. 물통에 물이 이렇게나 풍족하게 들어 있다는 것이 실감케 한다. 최창수와 전복이 노력한 덕이다. 물을 길어다 채우는 일은 힘들다. 그들이 있기에 안전하고 편한 날을 누리고 있다.

‘고마운 분들······ 우린 이렇게 잘 지내는데 어떻게 계시는지······’

허리를 편 카이오는 서쪽하늘을 바라봤다.세수하고 난 얼굴을 닦을 수건은 손에 들기만 한 채 한사람을 떠올렸다.무심한 눈동자와 얼굴, 강흑성이 생생하다.어느 곳에 있는지, 무사한 것인지, 가슴이 조여 온다.

‘이젠 아무런 예감이 없어. 왜 그럴까.’

강흑성을 만나고 난 후, 그가 대륙으로 떠나고 난 뒤로는 그렇다. 카이오 자신에게 있던 무녀로서의 능력은 사라졌다. 강흑성이 간 대륙에 도사린 위험을 예감하는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젠 애를 써 봐도 안 느껴진다.

‘무사하시기만 하다면······’

간절히 바라고 기원하는 것이 그것이다. 강흑성이 안전하기만 하다면 그 무엇도 상관없다. 무녀로서의 예지감 같은 건 애초에 없었던 게 좋다. 그러나 지금 아쉽고 안타까운 건 강흑성의 안위를 알 수 없어서다.

‘7군단에서도 그분을 주시하고 있는 거야.’

지옥사신 이란 별호가 소문으로 퍼지고 있다.대륙에서 파란을 일으킨 주인공이다.그 존재를 찾아서 화성의 삼대문파가 움직였다고 한다.이건 정말 엄청난 일이다.그런데 역으로 생각하면 아직은 안전하단 소리다.

“하아.”

무거운 숨을 뱉어낸 카이오는 저녁 준비하는 여인들에게로 돌아섰다. 그런데 아이들의 와르르 달려 나간다. 원인을 보니 원필성 대위가 또 왔다.플라잉카에서 내린 원필성 대위에게 아이들이 매달린다.

“자자, 배터리를 구했으니까 어서 삼백이한테 가보자.”

명희와 진숙이와 제닌과 샤이닌의 성화 속에서 원필성은 건물로 향했다. 아이들과 웃으며 걸음을 옮기다 그녀를 봤다. 세면대 앞에서 바라본다.

“아, 또 왔습니다.”

미소로 맞아주는 카이오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원필성은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멈춰 서서 카이오를 봤고, 이 저녁에 방문한 용건을 밝혔다.

“삼백이란 로봇의 배터리를 교체해주기로 아이들과 약속해서요. 배터리 자체가 수명이 다해서 충천으로는 소용이 없겠더군요. 워낙 오래된 기종이라 맞는 배터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운이 좋아서 하나 찾았습니다.”

중언부언 변명하듯 말한 원필성은 잡아끄는 아이들에게 딸려갔다.

“그래그래, 서두르지 마라.”

아이들을 다독이며, 카이오의 미소 짓는 눈길을 아쉬워하며 원필성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뒤 구석에 삼백이는 여전히 앉아 있었다. 사람으로 치면 수명이 다해 죽은 모습, 정말 해골같다.

“어디 보자.”

고몰 로봇 앞에 쪼그려 앉은 원필성은 배터리 교체를 위해 삼백이의 바디를 열었다. 썩었다고 말해야 맞을 배터리를 빼내는데 진숙이가 돌아선다.

“준후 오빠 온다.”

과연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곳의 남자들 중 전복이라는 사내의 목소리다.

“얌마, 보법이 중요하다고 몇 번을 말했냐? 무공수련이란 건 피나는 반복연습이 중요 한 거야? 애들하고 놀 생각만 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뒤통수를 치는 전복을 노려본 준후는 입을 비죽거렸다.

“이제 시작했는데 아저씨 맘에 들게 잘 할 순 없잖아요?”“아쭈구리?”“앞으로 열심히 수련하면 나아질 거라고요.”“요놈이 아주 입만 살아가지고설랑.”

전복은 입술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는다. 그 순간 준후는 냅다 달렸다. 플라잉카를 봐서다. 원필성 대위가 왔다. 삼백이 배터리를 가져온 거다.

“오빠!”“배터리 가져왔어!”

진숙이와 제나가 건물 앞에서 손을 흔든다. 준후는 번개처럼 달려갔다.

“얌마! 야, 너 그래가지곤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등신 된다!”

준후에게 소리치던 전복은 뒤늦게 플라잉카를 봤다. 곁을 함께 걷던 최창수도 그랬다. 둘은 동시에 서로를 돌아봤다. 그리도 동시에 한숨 쉬었다.

“등신이 또 있네.”“음, 안타까운 일이지.”

카이오와 저녁 준비하는 여인들을 눈에 넣은 둘은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 뒤에 모인 아이들과 원필성 대위를 확인했다. 삼백이의 배터리를 교체하고 있다. 박준과 함께 있던 로봇, 여인들과 대전으로 온 일행이었다.

“저걸 살릴 수 있을까?”“글쎄.”

모호한 최창수의 반응을 심드렁한 얼굴로 받아낸 전복은 뜻밖의 말을 했다.

“저 친구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어.”

최창수는 시선을 돌렸고 전복은 모르는 것처럼 작게 말했다.

“우리에게 위험한 때가 닥치면.”

최창수는 알아들었다.원필성 대위의 도움, 조력이다.전복의 생각처럼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닥친다면, 그 위험이란 건 7군단으로부터 일 것이다.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인지할 수 있다면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카이오를 연모하는 원대위를 이용······’

준후에게 들은 이야기를 최창수는 떠올렸다. 원대위에게 삼백이 배터리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거다. 그러면 카이오와 잘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거다. 그 말을 듣고 헛웃음을 삼켰고 준후를 다시 봤다.

‘주변상황을 캐치하는 눈썰미가 좋아.’

준후의 장점이다. 그렇지만 아직 어린 아이라 전후내막까지 짚어 생각하진 못한다. 이 일의 경우가 그렇다. 원대위가 계속 찾아오는 이유가 카이오 때문이란 걸 눈치챘지만, 카이오의 마음이 딴 데 있음을 모른다.

‘명희나 다른 아이들도 모르는 건지 아직 그런 이야기를 안 한 건지.’

준후가 알았으면 그런 약속을 안했을 거다. 알면서도 상대를 이용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인물이라면 역시 옆에 있는 전복이다. 지금 한 말이 그거다. 원필성이란 인물을 이용하자는 소리, 비겁하지만 필요한 거다.

“어디 다녀오시나 봅니다.”

원필성의 목소리에 최창수는 현실로 돌아왔다. 삼백에 앞에서 일어서는 그에게 전복이 형제를 보는 얼굴로 웃으며 다가간다.

“아이고 원대위님, 아이들 소원을 들어주시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습니다.”

입에 발린 치사를 내는 전복에게 원필성은 웃는 얼굴로 계면쩍음을 숨겼다.

“예, 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서요. 아, 로봇은 새 배터리로 교체했으니까 작동이 가능 할 겁니다. 프로그램 재부팅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원필성의 말대로 삼백이는 붉은 눈을 명멸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 앞에 모여 앉아 눈을 반짝이고 있다. 먹을 걸 기다리는 제비새끼들 같다.

“좋습니다. 훌륭합니다.”

거듭 치사를 낸 전복은 은근한 눈짓으로 원필성은 유인한다.

“일과는 끝나셨을 시간이고, 오늘 우리랑 저녁 함께 하시죠. 음, 이건 비밀인데요. 제가 여기 와서 위스키 한 병을 구했거든요? 맛 한번 보시죠?”“위스키요?”

원필성은 정말로 놀란 반응을 냈다. 위스키라면 장교인 자신도 접하기 쉽지 않다. 전복의 눈웃음을 보건데 잡스러운 물건아 아니라 진짜다.

“자자, 식전주로 한잔씩 하십시다.”

원필성은 끌고 가는 전복을 보며 최창수는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와!”“삼백이가 살아났다!”“아냐 깨어난 거야!”

귀청을 때리는 아이들의 환호에 반응한 최창수는 로봇의 부활을 바라봤다.

‘정말 살아났구나.’

기지개 켜듯 일어나는 로봇을 보니 그들이 떠오른다. 박준과 강흑성, 대륙에 있는 그들의 안위가 궁금하다. 강흑성, 그는 지옥사신이라고 불린다.

‘무사하기를.’

기원을 삼키던 최창수는 자신을 향해 손 흔드는 로봇 삼백이를 보고 미소 지었다.

* * *

뒤따라오는 플라잉바이크의 속도를 감안하며 강흑성은 질주했다.해는 저물고 있다. 어쩌면 신남경에 도착해도 늦었는지 모른다.물론 철금련주 철무진이 쉽게 당할 인물이 아니지만, 적호문의 공세가 유별났다.

‘밑도 끝도 없이 튀어 나왔어.’

플라잉바이크를 전력으로 몰아 따라오는 인물, 철금련 총관 마테오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렇다. 강흑성 자신도 마찬가지다. 물론 대륙의 정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지만, 적호문에 대해선 들어보지 못했다.

‘철금련을 공격을 정도의 세력이라면 이름정도는 들어봤어야 해.’

상해로부터 태산에 이르는 동안, 대륙을 이동하는 여정에서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적호문이란 이름을 아는 것은 강흑성 자신의 고유한 경험 때문이다. ‘미래’ 라는 이름의 반화성 조직, 그 실체가 적호문이었다.

‘연관이 있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있다. 적호문에 잡혀있는 동안 그들의 형세가 간단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미래’ 라는 이름의 반화성 조직은 다른 곳에도 있는 거다. 정확한 실체는 모르지만 놈들이 흘리는 대화에서 눈치 챘었다.

‘내가 경험한 적호문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

가능성이 충분하고 현실로서 확인되는 상황이지만, 중요한건 그들의 행사다. 철금련에서 아무 동정을 눈치 채지 못한 공격이었다. 적호문이란 세력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만큼 은밀하고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는 거다.

‘저런 물건 따위가 전부가 아닌 자들.’

마테오가 타고 쫓아오는 플라잉바이크, 그를 죽이려고 추적해온 적호문의 것이다. 저런 기초적인 장비 외에 뭘 더 가진 것인지 알 수 없다.마테오의 말에 의하면 중화기를 가진 자들이다. 그 실체를 곧 보게 된다.

‘십분.’

철금련 제강소에 도착하는 시간을 가늠하며 강흑성은 수림을 가르고 달렸다.

* * *

“전차입니다!”

수하의 외침처럼 철무진은 눈동자를 경직했다. 제강소를 향해 굴러오는 육중한 울림의 주인, 전차다. 기다란 포신을 앞세운 괴수다. 두 대의 전차, 무인건쉽 비천에 이어 저런 장비를 어떻게 구한 건지 모르겠다.

‘적호문! 대체 어떤 놈들인 거냐!’

애병 거성을 움켜잡은 철무진은 철극진기를 끌어올렸다. 철마류의 진의, 이제 깨닫기 시작한 진정한 그 힘을 분노로 불사르며 적을 응시했다.

“철무진!”

이름을 부르는 자는 그자다. 적호문 동북분타주 연강, 놈이 전차 위에 올라섰다.

“배수진을 치고 있구나! 그런다고 죽을 자리가 살 자리로 바뀌진 않는다!”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 연강의 목소리는 다시 날아왔다.

“마지막 기회다! 제강소와 철극문의 유진을 넘긴다면 목숨은 살려줄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을 약속한다! 본문의 형제로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다!”

연강의 회유이자 협박이 날아온 직후 전차가 불을 뿜었다. 빔의 기둥이 쭉 뻗어 나왔다. 제강소의 굴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하늘로 사라졌다.

‘죽일 놈들이!’

철무진은 격노로 치를 떨었다. 제강소를 원하는 놈들이 정말 파괴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최후에는 작정 할지도 모른다. 두 대의 전차, 그 화력은 벌컨의 불벼락과 또 다른 차원의 것이다. 한순간에 흩어진다.

“문주······!”

수하들의 분노에 찬 눈을 돌아본 철무진은 검을 움켜잡았다.

“길을 열겠다. 기회가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움직여라.”

철금련 무인들은 문주 철무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눈을 치떴다.도망치라는 거다.철무진이 나가 싸울 동안 생길 혼전을 이용하라는 거다.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해야 하는데, 현실은 백여 명이 남은 전력뿐이다.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마라.”

수하들에게 단호한 명을 던진 철무진은 돌아섰다. 제강소의 외곽 울타리를 향해 걸음을 냈다. 거리를 두고 멈춘 전차, 연강을 바라보며 멈췄다. 그런데 뒤로 수하들이 따라온다. 철무진 자신처럼 결사의 눈들이다.

‘이놈들······’

수하들을 돌아본 철무진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자신처럼 아무 말 없이 검을 움켜잡은 수하들과 일일이 눈을 맞췄다. 그렇게 미소를 지었다.다시 앞을 본 철무진은 전차 위 연강에게 소리쳤다.

“연강이라고 했더냐! 자신이 있다면 나서라!”

제강소를 울리는 저렁한 철무진의 외침, 연강은 소리 내서 웃었다.

“으하하하하!”

웃음 그친 얼굴에 살기를 드리운 연강은 차갑게 명령했다.

“발포해라!”

전차 포신이 움직이는 그 순간 철무진은 움직였다. 커다란 검과 하나가 되어 벼락처럼 달렸다. 그렇지만 전차의 발포가 먼저였다. 눈부신 섬광, 빛기둥이 뻗어왔다. 그 찰나에 곁을 스치며 나가는 흑청빛이 있었다.

‘뭐!’

철무진은 얼어붙었다. 전차의 빔을 가른 흑청빛이 전차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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