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125. 자취.
125. 자취.
“유력한 후보지가 세 곳입니다.”
보고하는 루카스중령을 고개 들어 응시한 그리샴은 통합테스크를 다시 들여다봤다. 보고서 내용에 든 영상으로 확인된다. 화성연구소의 위치로 추정되는 세 곳의 장소, 철저하게 감춰온 그들의 꼬리가 보인 곳이다.
“운악산이 가장 유력한 곳으로 판단합니다.”
이어 나온 루카스중령의 확신어린 목소리에 그리샴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악산.’
데빌그라운드에 인접한 지역, 아니 거의 데빌그라운드다. 아주 오랜 역사에 의하면 궁예라는 인물에 의해 세워진 고대국가의 자취가 있던 곳이다.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곳.’
수림지대중의 최고 수림지역이라 하겠다. 그런 곳에 화성연구소가 터를 잡았을 가능성은 아주 크다. 그들에 대한 정보를 취하는 행위자체가 화성정부에 대한 반역행위로 돼 있다. 하지만 지금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최종확인은?”
그리샴은 물었고 루카스 중령은 눈 밑을 꿈틀했다가 대답했다.
“특임대를 투입해야 합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결과를 가져오겠습니다.”
루카스중령을 무심히 응시하던 그리샴 장군은 재가했다.
“시행해.”
바로 경례를 올린 루카스중령은 돌아서려다 물음을 냈다.
“지옥사신 강흑성과 관련된 여인들의 처리를 어찌하실지, 외람되지만 장군의 의중을 알고 싶습니다.”
데스크로 내렸던 시선을 느릿하게 든 그리샴은 루카스 중령의 눈을 응시했다. 이 밤에도 저렇게 뜨거운 숨을 다스리며 일하고 있는 루카스의 마음, 짐작하고 있다. 정찰대팀장이었던 아우의 최후를 품고 있음이다.
‘강흑성.’
그 이름을 파악한 것도 화성으로부터다. 지구로 온 삼대문파의 1차출정대가 상해 등을 거쳐 가며 파악한 것이다. 그 내용은 그들이 착륙한 5군단 송출기를 통해 화성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두절이다.
“북부지구정찰대에 아우가 있었지? 이름이 쉬타이너라고 했던가?”
루카스는 경직하듯 허릴 더 세웠고 그리샴은 목소릴 이어냈다.
“복수하고픈 마음은 안다. 혈육을 잃은 마음을 무엇으로 달랠 것인가. 그 누구도 헤아리지 못할 상처다. 어설픈 위로의 말 따위는 분노만 더 크고 깊어지게 하지. 그렇지만 사감(私憾)을 다스려야 할 자가 군인이다.”
루카스는 그리샴 장군의 눈에 든 엄정함을 인지했다.어떤 자도 저 눈을 마주하지 못한다.골상학을 아는 누군가는 장군을 제왕지상이라 했다.그러한 인물을 모신다는 자부가 있다. 저 분의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
“설분(雪憤)을 위한 행동은 뒤로 미뤄야 한다. 현재 일어나는 일, 진행되고 있는 위험에 대한 인과를 밝히고 대처를 강구하는 것이 우선의 과업이다. 우리가 당면한 일은 크다, 루카스 중령 네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크다, 그 한마디에 담긴 의미를 루카스는 무겁게 받아 들였다.
‘화성으로부터, 지구에서의······ 변화.’
전쟁으로 비화될 변화다.그 바람이 불었다.그렇기에 그리샴 장군인 반역행위가 될 화성연구소의 위치를 찾으라 명령했다.해야 할 일은 그거다.그렇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원한의 불은 계속 넘실거린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함께 해결하자.”
결론으로 나운 그리샴 장군의 말, 함께 해결하자는 소리에 루카스는 순간 울컥했다. 일개 참모에 불과한 자신에게 내주는 장군의 진심인 거다.
“감사합니다! 명령을 이행하겠습니다!”
결의에 찬 음성을 뜨겁게 뱉은 루카스는 돌아섰다. 군인의 걸음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런 루카스를 지그시 바라보던 그리샴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박준.”
구릿빛 얼굴에 기묘한 당혹을 드러내며 그리삼은 과거를 회상했다.박준과 처음 대면했던 과거, 대륙전쟁 당시다.신중화의 공격으로 전멸위기에 처한 11사단 소속 전투대대에 있던 자, 그가 달려와 상황을 알렸다.
‘피투성이로 전우들을 구해달라고 외치던······’
박준의 처절했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사지를 홀로 빠져나와 그리샴 자신에게 알렸다. 접근을 막는 자들에게 총을 겨누고 소리쳤다.
‘지금 반격하면 신중화의 정예전력을 분쇄하고 전우들을 구할 수 있다.’
박준의 일방적인 주장을 믿은 게 아니라 전황의 반전이 필요했다. 인지하지 못한 그들의 정예부대 공격을 그렇게 박살냈다. 그렇게 승기를 잡았다. 그 일 이후로 박준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이름을 다시 듣는다.
‘샹그릴라란 술집을 하고 살았단 말이지······’
데빌그라운드로 가는 길목에서, 위험한 야수족 등을 상대하면서 장사했다는 거다. 그런데 북부지구정찰대와 충돌했다. 그 사건에 퓨리엔트족 반란세력이 끼어있고 크리듐광산도 들어 있다. 그리고 강흑성이 있다.
‘헤아리기 힘든 내막의 사건이야.’
유성대협의 무공을 사용한다는 자, 지옥사신 강흑성. 그 인물과 박준은 동료다. 평택을 거쳐 대륙으로 넘어갔다. 박준은 분명히 그 박준이다.
‘자네가······’
데스크에 띄운 박준의 사진을 응시하며 그리샴은 곤혹을 삼켰다. 북부지구 정찰대가 일을 당하기 전에 신원파악을 위해 찍은 사진, 가장 최근의 것이다. 과거보다 나이가 든 얼굴이지만 눈빛만은 그때 그대로다.
‘냉소를 품은.’
박준의 얼굴을 응시하던 그리샴은 손을 흔들어 데스크를 끄고 일어섰다. 창가로 걸어가 달을 봤다. 낚시 바늘처럼 휘어진 달이 처량히 떠 있다.
“화성의 정세는 혼탁하고, 지구에는 전쟁의 바람이 부는 구나.”
낮은 울림의 중얼거림 뒤로 그리샴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 * *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접전의 결과로 생긴 불길이 어둠을 밀어내는 밤이다. 신남경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철금련의 피해는 막심하다.
“재건이 어렵진 않을 겁니다.”
철무진은 제강소를 돌아보며 자신 있게 말했다. 자신들의 뿌리이자 자금력의 원천이 되는 제강소는 무사하다. 적호문의 침공을 물리쳤다는 위세도 가졌다. 철금련의 이름은 이제 한층 더 강고해진다. 전화위복이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강흑성을 향해 철무진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투는 절로 경어가 흘러나온다, 처음 만나 헤어질 때까지 존대하지 않았지만 이젠 아니다.
‘삼대문파가 어찌 된 건지 모르지만 그들로부터 달려온 은인.’
지옥사신은 구명지은을 베푼 대상이다. 이전과 같은 마음일 수가 없다.
“적호문의 세가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죽어버린 적호문 무인들을 응시하며 강흑성은 무감정하게 상황을 말했다. 그래서 철무진은 내심 한기를 삼켰다. 적호문 무인들을 잡아 빨래를 쥐어짜듯이 정보를 취한 자가 강흑성이다. 죽은 자의 숫자가 일곱이다.
‘저런 고문을 당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친 철무진은 대답했다.
“괴이하고 헤아리기 쉽지 않은 일로 생각됩니다.”
철무진은 진정으로 곤혹을 삼켰다.적호문은 멸문한 문파, 그 무공이 펴져 적통을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나는 건 이상할 것 없다.그런데 그동안 그런 일이 없었다는 거다.아니 눈길을 주고 유의할만한 세가 없었다.
“적호문이란 이름으로 이렇게 일거에 기치한 세인데······”
철저하게 자신들을 숨기고 있었다. 적호문이란 이름을 품고 활동한 이들은 대륙의 남과 북에 있었다. 그런데 강흑성이 알기로 그게 다가 아니다. 자신이 겪은 적호문, 반화성조직 ‘미래’에 속한 자들이 있었던 거다.
“미래라는 이름을 확인하려는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만?”
조심스레 묻는 철무진에게 강흑성은 덤덤히 대답했다.
“한반도에서 적호문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미래’ 라는 반화성조직에 속해 있었습니다.”
놀란 철무진은 바로 또 물었다.
“적호문이 그곳에도 있었다? 이 갈래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모릅니다. 확실한건 한반도의 적호문은 아류나 사이비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곳의 문주 모인걸은 적호문의 대법을 알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그렇다면······”“한 뿌리에서 갈라진 것이거나 미래라는 큰 이름으로 협조하던 것이거나, 그러한 속에서 개별적인 이득을 위해 속이던 정황, 다 가능합니다.”
강흑성은 모인걸을 떠올렸다.강흑성 자신을 제물로 삼으려던 자다.그자의 눈엔 야욕이 있었다.강흑성 자신의 존재를 숨겼을 걸로 짐작된다.그러하던 어떻든 그자는 적호문, 그 세력이 대륙에 있음을 확인했다.
‘어쩌면, 미래라는 이름에 속한 세가 적호문만이 아닐 수도 있어.’
심중의 어림을 더듬던 강흑성은 철무진의 목소리에 상념을 밀어냈다.
“이제부터 산동농장연합과 철저한 연수 속에 대응해야겠습니다.”
이미 이야기 한 내용, 그곳과 협력체재를 만들기 위해 오던 행보였다 했다. 철금련으로서도 적호문의 재침공에 대응하자면 세불림이 필요하다.
“서주의 흑도무리를 끌어들일 수 있을 겁니다.”
세력 확장을 하겠다는 거다. 무주공산이 된 서주의 무인무리들을 흡수할 자금도 능력도 있음이다. 그럴 준비를 해 왔다는 것으로 들린다.
“선조의 유진으로부터 원하는 바를 얻으셨습니까?”
강흑성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철무진은 당황했다. 하지만 묻는 이유가 철무진 지신을 위해서라는 걸, 연강과의 싸움을 봐서란 걸 깨달았다.
“작은 득심은 있었지만 가야 할 길이 멀고 높습니다.”
무심히 응시하던 강흑성은 손을 내밀었다.
“도움이 될 수 있을 걸로 생각합니다.”
무슨 소린가 하던 철무진은 강흑성의 눈동자를 보고 알았다.본래의 흑청빛 눈동자에 어린 철기(鐵氣)다.저것은 철극문의 고유한 영혼이다.
‘지옥사신 이자는······!’
당혹을 넘은 충격을 이에 물고 철무진은 손을 마주 내밀었다.강흑성의 손과 맞댔다. 그렇게 유유히 밀려드는 기운을 받아들였다.철마류.궁극의 경지 철강지력을 향해 나아가는 인도다. 그 흐름에 올라 전율했다.
‘아아.’
무아지경에 빠진 철무진, 그에게서 손을 떼고 물러난 강흑성은 말없이 바라봤다. 자신이 가진 것이 본래 저들의 것이기에 돌려준 것이다. 벽을 넘도록 길을 열어줬다. 무엇을 손에 쥘지는 이제 철무진에게 달렸다.
‘나도 마찬가지.’
가야 할 길은 멀고 높다, 철무진의 말대로다. 그 길을 가고 있다. 그 길 앞쪽에 아우리엘이 있을 뿐이다. 이제 그를 찾아서 가야 할 시간이다.
“다시 보게 될 겁니다.”
철무진에게 작별인사를 한 강흑성은 돌아섰다. 뒤에서 총관 마테오가 달려오는 걸 봤지만 고갤 저었다. 그가 선채로 무아지경에 든 문주 철무진의 곁에 서는 걸 눈에 담고 걸었다. 달과 별을 보며 북으로 향했다.
* * *
“흐어······”
팔이 사라진 어깨를 부여잡고 곽산은 상대를 봤다. 푸른 아우라를 두른 것 같은 형상의 존재, 스스로의 이름을 아우리엘이라고 밝힌 붉은 엘프다.
‘이건 꿈이야, 악몽이라고 해도 이런 악몽은······!’
저 존재에게 몰살당했다. 오백의 블랙블러드가 고혼이 됐다.남은 것은 곽산 자신 혼자다.블랙블러드 지구총사라는 지위를 가진 자, 그렇지만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됐다.붉은 엘프는 유희를 즐기고 있는 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해하려고 해선 안 될 일이다.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레드파운틴족의 전설, 가라레를 여는 가라운이 저 존재다.그 전설을 지금 실감하고 있는 거다.가라운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뭘 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혼자 남았네?”
천진한 아이의 목소리처럼 붉은 엘프의 목소리는 밝고 낭랑하다. 그래서 곽산은 더 소름끼쳤다. 백린의 불도 소용없고 중화기도 소용없으며 생화학무기를 비롯한 모든 공격을 무력화한 존재가 저 붉은 엘프다.
“너희 블랙블러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지?”
생글거리는 미소로 물음을 던진 아우리엘, 그 얼굴이 악귀처럼 변했다.
“칸타를 죽였어.”
곽산은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어 휘청거리며 물러섰다.붉은 엘프는 다가온다.
“내 친구, 푸른 바람의 정령, 그 아이를 너희가 죽였어.”
아우리엘의 전신에서 피어나오는, 푸른 혈광의 산란에 밀리듯 곽산은 연신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동강난 수하의 시선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헉!”
몸을 돌려 일어나던 곽산은 그 순간의 충격에 경직했다.
“컥!”
강철바이스로 조이는 것 같은 목의 충격, 붉은 엘프의 손에 잡힌 결과다.
“난 맹세했다. 블랙블러드를 죽인다고.”
공포에 먹히는 곽산에게 속삭이듯 말한 아우리엘은 오른손을 찔렀다. 곽산의 가슴, 심장에 쑤셨다. 그곳으로 푸른 혈광의 마기를 불어넣었다.
“끄어!”
입 벌리고 버르적대던 곽산은 눈동자가 터졌다. 코와 입과 귀로 선혈이 폭발했다. 온몸의 모공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재로 변했다.흩어지는 곽산의 흔적을 손에서 털어내며 아우리엘은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