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130. 손님 2.
130. 손님 2.
“천지문 천각소속 명위군이라 합니다.”
정중한 음성으로 자신을 밝히는 자, 중년이 아직 되지 않았지만 그리 젊다고도 할 수 없는 사내다. 무심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천년의 풍상을 겪은 거악 같다. 천지문은 이 사내와 다른 무인들 여섯만을 보냈다.
‘저자들이 천지육검.’
등골에 돋는 소름의 무게를 느낀 볼프는 현실을 절감했다.천지문의 최강자로 손꼽히는 인물들이다.각자의 이름과 별호가 아닌 천지육검이란 이름 하나로 유명한 인물들, 그들을 호위처럼 대동한 자가 과연 누구인가.
‘이런 자가 있다는 소린 들어 본 적도 없어.’
명위군이라고 이름을 맑힌 사내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볼프는 곱씹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게 이 자리, 다른 자가 인사한다.
“삼월문 일월각주 우인홍이올시다.”
잔잔한 미소로 자신을 밝힌 인물, 중년의 얼굴이지만 정확한 나이를 모를 인물이다. 삼월문의 수뇌인물 중 일인, 일월각을 책임진 자다. 이자 역시 대외로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다. 대동한 사인의 무인만이 알려졌다.
‘일월검종(一月劍宗).’
그 이름으로 알려진 자들, 사인의 무인은 석상 같다.저들이 무섭다는 이야기를 무수히 들었지만 정확히 어떻게 무서운지는 모른다.그렇지만 저 눈빛과 기세만으로도 짐작이 간다.저들은 한 자루 검이 된 자들이다.
“백두파의 경운이 볼프사령관께 인사드립니다.”
낭랑한 음성만큼이나 환한 미소로 인사 하는 자, 백두파의 육장로 중 한명인 경운이다. 유일하게 사십이 넘지 않은 장로로서 알려져 있다.그 이유가 문주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돈 인물, 그 외엔 정보가 없다.
‘백두검.’
경운이 대동하고 온 인물은 셋이다.백두전진검을 거쳐 고련과 각성을 얻은 자만이 가진 다는 호칭 백두검.진정한 검의를 깨달은 고수들이다.저들이 알려진 것만큼 강한가는 모르지만, 의심해선 안 될 자들이다.
‘삼대문파, 진정 강한 자들을 보냈겠지.’
천지문에서 도합 일곱, 삼월문에선 다섯, 백두파는 넷이다.겨우 이런 숫자만 보낸 이유가 있다.이들만으로 가라운이라는 괴물을 잡는다는 거다.그럴 수 있다는 거다. 숫자와 물량으로서 할 싸움이 아니란 거다.
‘이들이 셔틀 하나에 함께 타고 온 이유가 있을 지도······’
상황의 총체적인 얼개를 더듬던 볼프장군은 현실에 집중하며 입을 열었다.
“원로에 노고가 많습니다. 좋은 일로 오신 길이 아니니 환영한다는 말은 밀어내겠습니다. 행보의 목적이 분명한 터, 길부터 안내하겠습니다.”
볼프장군은 마주한 인물들과의 사이에 놓인 통합테이블을 터치했다. 즉각 지도가 떠올랐다. 5군단의 남으로 펼쳐진 거대한 수림지역을 가리켰다.
“내몽고수림지대입니다. 적은 이 안에 든 것으로 확신합니다. 현재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수색대가 기동하고 있습니다만, 정확한 위치를 특정함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수림지대는 광활하고 목표는 점 하나와 같은 형국, 수림의 수많은 생명체 중에서 찾아내기란······”“그야말로 덤불속에서 가시찾기와 같겠군요.”
백두파의 경운이 미소 지은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 얼굴을 힐긋 본 볼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경로를 추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현재로선 어디선가 종적이 드러나길 기대하는 게 빠른 실정입니다. 그 붉은 엘프의 능력은······”
미간을 찌푸렸다 펴며 볼프는 말을 이었다.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수림 속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목표를 찾겠다는 말씀밖에 현재로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천지문의 명위군이 입을 연다. 역시 정중한 목소리다.
“사령관님과 5군단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조력을 얻는 처지에 요구할 입장은 아닙니다만, 이제부터는 직접 나서기를 원합니다.”
백두파의 경운이 바로 그 말을 받았다.
“수색대와 함께 움직이겠습니다.”
볼프는 삼대문파 인물들의 눈을 응시했다.가장 연장자인 삼월문의 우인홍 역시 같은 눈, 이들은 이렇게 하기로 뜻을 모은 거다.예감한 상황이다.결과는 어떻게 할지 모르지만 과정에 있어선 연수를 선택했다.
‘이들이 모를 리 없겠지.’
현재 돌아가는 형국과 내재된 위험을 알고 있다. 커다란 파국이 잉태된 흐름,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것인지 이뤄져야 할 필연이 만든 것인지 모르지만, 그 안의 손만은 확실히 알 터다.
“5군단은 삼대문파의 행보에 적극 협력하겠습니다만······”
말끝을 늘인 볼프는 강한 눈빛으로 뒷말을 냈다.
“현재상황의 엄중함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치안총국의 노력으로 붉은 엘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무서운 존재를 저지하려다 삼대문파의 전력은 물론 블랙블러드가 몰살했습니다.”
치안총국이란 말에서 반응하는 삼대문파의 눈빛을 볼프는 분명히 포착했다.
‘역시.’
치안총국의 의도가 깔려 있는 현실임을 삼대문파는 안다. 그래서 함께 왔고 함께 행동하는 거다. 그렇지만 각기 다른 계산과 의지를 품고서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입을 연 백두파 경운은 심중의 것을 던졌다.
“치안총국은 블랙블러드와 정확히 어떠한 관계일까요? 강흑성을 쫓기 위해 블랙블러드를 고용했다는 건 언 듯 전후를 이해할 만합니다만.”
모호함을 품은 경운의 미소, 차가운 기운에 밴 웃음을 볼프는 응시했다.말대로 치안총국은 그렇게 밝혔다.숨겨왔던 사건, 북부지구정찰대를 몰살한 강흑성을 잡으려 블랙블러드를 고용했다는 게 그들의 말이다.대륙엔 정찰대가 없기에 일견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북부지구정찰대 사건을 숨긴 것도 수긍이 된다.그렇지만 지금 이어지는 결론은 아니다.블랙블러드의 전멸에 놀라서가 아니라 치안총국은 다른 걸 꾸미고 있다.
‘큰불을 내기 위해 불씨를 사방에 던지고 있는 거지.’
볼프가 무거운 숨을 내쉬며 입을 열려는데 우인홍이 먼저 목소릴 냈다.
“지체할 것 없이 움직이는 게 좋을 듯하오이다.”
백두파 경운과 천지문 명위군은 눈을 빛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동차량을 준비하겠습니다. 나가시지요.”
볼프가 일어서자 모두가 일어섰다.
* * *
파괴된 흔적만이 남았지만 그래도 장성은 산자락에 있었다. 그곳을 넘어가자 광활한 수림지대가 맞아줬다. 내몽고수림지대, 끝없이 펼쳐진 바다 같다. 이 안으로 아우리엘이 들어갔다. 5군단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화성으로 가려는 거냐?’
수림의 바람을 맞으며 강흑성은 생각했다. 블랙블러드를 죽이겠다고 맹세한 아우리엘이니 그럴 가능성이 크다. 5군단에서 셔틀을 탈취해 화성으로 가는 거다. 물론 화성에서 알면 셔틀을 공격, 화성에 닿긴 힘들다.
‘간다고 해도 모르게 가야하겠지.’
그렇지만 그런 조건을 만들기 자체가 어렵다.군대와 싸워야 하는 거다.어불성설, 중과부적이란 말이 딱 맞는다.그런데 아우리엘은 그걸 하려는 것 같다.그의 능력이라면 군대도 부서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정면승부가 아니라면······’
흑청빛이 꿈틀거리는 시선을 북으로 던지던 강흑성은 문득 뒤돌아봤다. 남쪽의 저 파란 하늘 아래 있을 이들을 떠올렸다. 그리운 사람들이다.
‘다들······’
자신도 모르게 강흑성은 팬던트를 잡았다. 파괴된 차량에서 와이어를 뽑아 목에 다시 걸었다. 이걸 건네주던 카이오의 얼굴과 눈이 떠오른다.
“기다려요.”
하늘저편을 향해 말한 강흑성은 수림으로 들어갔다. 흑호는 그림자처럼 따랐다.
* * *
“흐으······”
흐릿한 의식을 잡으려 애쓰며 원필성은 주변을 분간했다.주변이 출렁거리듯이 움직이고 있다.운무의 출렁임이 아니라 원필성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허공에 떠 있다. 그냥 뜬 게 아니라 잡혀서다.
‘야무치에게 앞다리가······’
있다. 그 앞다리에 원필성 자신이 잡혀 있다. 미끄러져 가는 놈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고 있는 거다. 갈라진 대가리엔 요사한 여자가 그대로다.
‘어디로······’
운무를 헤치며 나가고 있다. 바닥을 보니 옅은 경사의 내리막길이다. 도로처럼 정비된 길, 화성연구소의 이동장비들이 드나드는 길이 분명하다.
‘전방에 화성연구소가 있구나······!’
점점 뚜렷해지는 의식 속에서 원필성은 상황을 되짚었다. 야무치에게 제로원복합소총을 난사하던 순간, 놈의 꼬리에 맞아 날려가던 순간이다.
‘그 후론 기억이 없어. 슈트가 파괴된 걸로 봐선······’
야무치의 공격을 더 받았다.
‘응?’
야무치가 멈추는 걸 느낀 원필성은 앞이 갈라지는 걸 봤다. 암벽이 좌우로 갈라진다. 그렇게 드러난 통로로 야무치가 미끄러져 들어간다.
‘역시······!’
화성연구소의 내부가 분명하다. 상하좌우 금속 벽이다. 앞에 나타난 벽은 역시 좌우로 열린다. 그 안으로 들어가자 야무치가 앞발을 떨쳤다.휙 날아간 원필성은 바닥을 구르는 충격 속에서도 주변을 살폈다. 장방형의 공간이다. 자신은 중앙에 팽개쳐 졌다. 그런데 왼쪽에 그가 있다.
‘루카스중령!’
소리쳐 부르고 싶은데 육신의 충격에 더해진 엄혹한 상황에 원필성은 혀만 깨물었다. 파괴된 슈트가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내는 가운데 기어갔다. 벽 앞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루카스중령, 역시 슈트는 걸레짝이다.
“주, 중령님······”
힘겹게 입을 연 원필성은 루카스의 눈이 떨리는 걸 봤다. 호흡도 확실히 있다. 역시 죽진 않은 거다. 원필성 자신처럼 생포돼 잡혀온 거다.
“중령님······!”
원필성이 흔들자 루카스는 부르르 눈을 떴다. 시야를 구분하는 빛이 돌아오자 반가움부터 낸다.
“원대위······ 무사했구나······”“예, 살아 있습니다.”
감격스럽게 루카스의 손을 쥔 원필성은 그 순간 다른 존재의 등장을 느꼈다. 들어온 벽 앞에 대가리를 새우고 있는 야무치의 옆, 남자가 있다.
“귀한 손님들이 오셨군.”
화성정부관료들이 입는 것과 같은 관복차림의 남자가 다가온다.서늘한 눈빛과 서늘한 미소를 품은 자다.외모는 젊은데 눈길은 깊고 어둡다.마치 한세상을 살아본 존재의 눈빛 같다.미소로 내는 목소리도 그렇다.
“화성연구소에 손님이 온건 처음이야. 그래, 말 그대로 손님, 내가 청하지 않은 손님이지. 나는 그 누구에게도 찾아오기를 청하지 않거든?”
차가운 미소를 흘린 사내는 다시 입을 연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지. 바보들이 아닌 이상 영원하겠나?”
어깨를 으쓱한 남자는 짙은 눈썹을 손으로 쓰다듬고 뒷말을 냈다.
“내 소개를 하지, 나는 화성연구소를 책임지고 있는 종리운이다. 내 집에 온 걸 환영한다. 대접이 소홀했다면 사과한다. 여긴 그런 곳이거든.”
섬뜩한 미소를 흘려낸 자, 종리운은 다시 목소릴 냈다.
“역시 7군단사령관 그리샴인 거지. 화성정부에서 눈엣가시로 여기는 전쟁영웅, 그의 존재를 확인하는 날이로군. 그런데 말이야, 화성정부의 명을 어기면서 내 집을 염탐한 대가를 알고 있겠지? 그리샴은 결심한 거지?”
뭘 결심한단 말인가, 원필성과 루카스는 모르지 않기에 눈썹을 떨었다.
“그래, 이런 정도로 화성정부에서 그리샴에게 반역혐의를 씌울 순 없을 거야. 그렇지만 뭐, 그림은 계획대로 그려지고 있으니까 어렵진 않아. 무엇보다 그리샴도 마음을 먹은 것 같고. 남은 건 화려한 축제겠지?”
살가운 미소로 표정을 바꾼 종리운은 두 팔을 벌려 다가왔다.
“이제부터 손님맞이를 제대로 해주지.”
종리운의 뒤에서 움직이는 야무치를 보며 원필성과 루카스는 절망을 삼켰다.
* * *
감지기엔 괴수들의 움직임만 잡히고 있다. 반경 일키로 영역의 모든 생명체를 인지하는 휴대용레이더, 화면의 붉은 점들 머리엔 알림이 뜬다.
‘식별된 생명체의 정보, 블루마운틴 따위뿐인데······’
한인철 중위는 굳어가는 어깨를 펴며 다시 수림을 주시했다. 자신의 1소대가 맡은 이 지역엔 별다른 특이동향이 없다. 감지기엔 방향성을 가지고 이동하는 붉은 점이 포착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안심할 순 없다.
‘영상 속의 그놈은······!’
출동 전에 영상을 봤다.붉은 엘프가 블랙블러드를 몰살하는 광경이다.그건 그냥 거짓이다.단 하나의 존재가 그런 일을 만들 순 없다.그런데 그렇게 됐다. 때문에 포착하되 교전은 절대로 금지한다는 명령이다.
‘교전은 기갑부대가 하는 거지.’
준비된 화력을 떠올린 한인철은 어깨를 떨었다. 아무리 불가해한 능력의 괴물이라고 해도 지상과 공중에서 퍼붓는 군대의 화력을 당할 순 없다.
‘응?’
감지기를 본 한인철은 미간을 확 좁혔다. 붉은 점 하나의 움직임이 포착돼서다. 확실하게 방향성을 가진 이동이다. 그런데 속도가 빨라진다.
“1소대가 알린다! 목표가 포착됐다!”
통신기에 대고 알리는 그 순간 한인철 중위는 봤다. 푸른 바람을 몰고 오는 존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