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134. 초원의 노래.
134. 초원의 노래.
“지루해 지는 데.”
오른손을 휘둘러 푸른 뇌전의 칼을 폭발시킨 아우리엘은 심드렁한 눈을 했다. 초원을 가르고 나가 전차까지 갈라버린 결과가 화염으로 피어난다.
“기갑부대는 재미가 없다고.”
투정하듯 중얼거리는 아우리엘, 여태 만든 작품을 돌아본다. 어둠을 밀어내는 불더미는 초원 여기저기 널렸다. 공격해온 5군단의 기갑부대다.
“천붕이라는 걸 또 터트리든지 더 강한 선물을 줘.”
야공을 향해 미소 지은 채 아우리엘은 손까지 흔들었다.자신을 촬영하는 기체가 있다는 걸 알아서다. 목소리까지 들리길 바라지만 모르겠다.상관도 없다. 저들에게 인사는 할 만큼 했다. 그런데 더 놀고 싶다.
“무서움을 느끼게 해 달라고.”
정말 진지한 얼굴로 아우리엘은 바람을 말했다.천붕이 터졌을 때 아주 잠깐 느꼈던 것, 그건 다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그걸 느끼고 싶다.무엇이 있어 자신을 해칠 수 있을 것인지, 그런 일이 가능할지다.
“지금의 나를.”
환한 미소를 피워낸 아우리엘은 눈을 감고 큰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이 쫄깃해지는 그 느낌을 되새김질했다. 설레고 피부에 소름이 돋는다.
‘강흑성.’
그가 떠오른다.그를 처음 봤을 때 이랬다.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귀룡과 칸타와 다른 친구들이 죽을 거라는 생각에 공포를 느꼈다.
“넌 죽은 건가?”
눈을 뜨며 아우리엘은 물음을 던졌다.대답할 대상이 없는 물음, 허공에 흩어진다.그런데 대답이 들린다.초원의 바람이 몰고 온 대답이다.
“맞아, 아무래도 상관없지.”
붉고 푸른 눈을 빛내며 미소 지은 아우리엘은 느릿하게 내던 걸음을 멈췄다. 불잔치를 벌이는 것 같은 초원의 한 가운데 서서 두 팔을 벌렸다.
“노래를 불러야겠어.”
아우리엘은 정말로 노래를 불렀다. 여인과도 같은 미성으로 소리를 냈다. 연월을 알 수 없는 노래, 그 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너울지며 퍼져나갔다. 그런데 반응하는 소리들이 들린다. 수림과 초원, 모든 곳에서다.
“오거라 친구들아.”
반가운 웃음을 풀어낸 아우리엘은 계속 노래 불렀다. 그 소리에 화답하며 모든 존재들이 달려왔다. 수림의 괴수들, 초원의 짐승들, 모두 온다.
* * *
“저게 대체 뭐야?”
볼프장군은 경악을 삼키며 목소리를 떨었다. 고공에서 영상을 보내는 드론을 놈이 봤다.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손까지 흔들었다. 그러더니 저런다.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그 노래에 맞춰 괴수들이 모여들고 있다.
‘미친······!’
볼프는 치를 떨었다.천붕의 파멸 속에서도 멀쩡히 살아나온 저놈은 기갑부대를 전멸시켰다.천붕도 소용없는 놈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그렇지만 퇴각을 명령할 수도 없는 상황, 그런데 저런 꼴까지 본다.
‘블랙베어가 저렇게나······!’
괴수중의 괴수인 블랙베어들이 수십 마리, 아니 백 마리도 넘는 것 같다. 블루마운틴은 또 어떤가, 저렇게나 많은 숫자를 보는 것 자체가 괴변이다. 그런데다 삼바바들은 말할 것 없다. 초원에선 야무치들이 나왔다.
‘저놈은 대체 뭐야?’
눈자위를 경련하며 볼프는 근원의 의문을 삼켰다. 중소형 괴수들과 맹수들을 포함해 수림과 초원에 사는 모든 흉악한 것들을 불러 모았다. 저놈이 저럴 이유가 있다면 하나, 5군단의 병력을 상대하게 하려는 거다.
‘형님도 이 광경을 보고 있을 텐데······’
그리샴장군은 무슨 용무가 있는 건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화성과 담판 짓는 통신을 하고 있는 건가?’
그럴 수 있다. 붉은 엘프, 저 존재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존재다. 천붕의 파괴에너지 속에서 걸어 나왔고 기갑부대를 갈랐다. 생생한 그 모습을 화성에서도 다 봤다. 이 현황을 주제로 화성과 얘기 중일지 모른다.
‘형님.’
그리샴장군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물던 볼프는 뜻밖의 보고를 받았다.
“군단남쪽경계가 적의 공격에 뚫렸습니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하는 얼굴로 볼프는 상황을 확인했다. 통합테이블에 뜬 군단 남쪽경계지의 영상이다. 비행체들이 날며 공격중이다.
“건쉽이 아닙니다!”
참모의 놀란 외침이 아니래도 볼프는 보고 깨달았다.비행하며 공격중인 존재들은 살아 있는 것들이다.야수족과 인간이다.그런데 괴상하다. 날개를 가졌고 육신은 금속화 되어 있다. 칼날과 탄환을 폭발해 낸다.
‘이종!’
정체를 확신하며 볼프는 명령했다.
“화력을 집중해서 섬멸해라! 초원지대에 다른 놈들이 있을 거다! 찾아내서 죽여!”
* * *
이종들의 바디캠이 보내는 영상을 보며 패튼은 소름을 삼켰다. 야간비행 끝에 5군단 남쪽경계지에 도달한 저들은 공격을 시작했다. 사막과 초원의 모래바람을 이용한, 화성연구소의 신기술로 인한 은신비행이다.
‘대단하구나.’
이종들이 5군단의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고 접근한 것도 그렇지만, 패튼 자신이 타고 있는 게틀러의 은폐도 그렇다. 기계적인 부분을 생물학적인 기술로서 덮은 거다. 게틀러는 지금 이종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다.
‘단순 위장포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게틀러를 덮은 외피는 주변과 동화한 모습으로 엄폐케 한다. 일체의 미세전류를 포함한 엔진열도 방출하지 않는다. 전파도 송신이 아니면 이렇게 접전 영상을 보는 것과 같이 수신이 가능하다. 대단한 물건이다.
‘정말 대단한건 이종들······!’
하늘을 나는 저들의 공격에 5군단 경계병력은 놀라고 당황했다. 대공포를 발사하고 있지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 이종들은 대공포에 맞아도 파괴되지 않는다. 육신을 무기로 만들어 군인들을 도륙하고 있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지?
로웰의 득의한 목소리, 바로 이어진다.
-5군단 수색대가 곧 올 거다. 여기 초원의 골에 숨어 있는 우릴 찾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실수하면 안 되겠지. 통신은 이동할 때 재개하겠다.
침묵으로 돌아간 통신기를 응시한 패튼은 영상에 눈을 고정했다. 이종들과 5군단 군인들의 전투, 치열하고 처절한 현장을 보며 주먹을 떨었다.
* * *
“장군!”“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참모들의 외침 아닌 외침을 무시하고 그리샴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움직여선 안 되는 부상, 아니 움직일 수 없는 중상을 무시하고 일어섰다.
“흑.”
휘청하며 쓰러지는 그리샴을 군의관이 바로 부축하며 간절히 말한다.
“장군, 이러시면 정말로 죽게 되십니다······!”
그리샴은 피가 나게 이를 악물었다.봉합수술을 마친 목과 어깨의 통증은 화끈한 열기로 몸을 짓누르고 있다.등에서 복부를 관통한 상처도 마찬가지다.천행이라면 장기 손상 없이 뚫리는 것으로 끝났다는 거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니란 거지.’
새삼스럽게 자신의 소임이 뭔지를 깨달으며 그리샴은 명령했다.
“전투상황실을 이곳에 설치한다.”
현실과의 타협이다. 전작실로 자신이 갈수 없으니 병실을 전작실로 만드는 것이다. 그 의미를 파악하고 받아들인 참모들은 서둘러 움직였다.
“현재 전황 보고해.”
침상을 올리고 상체를 기대는 그리샴에게 참모는 보고했다.
“붉은 엘프가 살아 있습니다. 천붕의 파괴력 속에서 거짓말처럼 살아나왔습니다. 5군단은 기갑부대를 배치해 뒀던 터라 대응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전멸했습니다. 현재는 붉은 엘프가 움직임을 멈춘 상황입니다.”
고통을 참으며 눈을 감았던 그리샴은 또 물었다.
“그들은?”
원필성대위와 루카스중령, 그들은 도주했다. 그리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후 집중화력을 받자 창을 깨고 달아났다. 그 후 어찌 됐는지 모른다.
“추적중입니다만······ 아직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면목 없어 고개 숙이는 참모에게 그리샴은 핵심을 던졌다.
“그들이 갈 만한 장소를 우선적으로 공략해야 한다. 원필성대위에겐 그런 장소가 있다. 물론 그가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지만, 가능성이다.”
눈을 반짝이는 참모에게 그리샴은 그곳을 말했다.
* * *
가슴이 이상하게 뛰어 카이오는 잠에 들지 못했다. 잘 자고 일어나야 내일 할 일을 잘 할 수 있을 텐데, 왜 그런지 눈은 초롱하기만 하다.
‘잘들 자고 있나.’
이불을 걷고 일어서 카이오는 아이들의 잠자리를 확인했다. 엄마들과 떨어져 한방에서 자는 아이들은 이제 잘들 잔다. 엄마들도 코를 곤다.
‘잘들 자네.’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카이오는 방으로 돌아왔다.그런데 여전히 가슴은 두근거리고 눈은 똘망하다.다시 일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최창수와 전복이 길어다 놓은 물이 가득한 물통에서 물을 한사발 떴다.
‘이런 그릇이 땅 속에 파묻혀 있었다는 게 신기해.’
개간하는 땅에서 찾은 사발이다. 얼마나 오래 된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군데군데 이가 빠졌지만 정겨운 형상이다.
“아.”
시원한 물의 감각에 후련한 얼굴을 한 카이오는 물사발을 놓고 계단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창밖에 뭔가 보인다.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이다.
“헉!”
놀라 물러난 카이오는 바로 핸드건을 뽑아 겨눴다. 그 순간 계단 뒤에서 삼백이가 나왔다. 붉은 눈을 반짝이며 빔라이플을 겨누고 밖으로 나간다.
“삼백아.”
숨죽인 소리로 삼백이를 부른 카이오는 긴장한 채 따라 나갔다. 그리고 얼어붙었다.
“워, 원대위님?”
건물 밖 어둠 속에 망부석처럼 서 있는 존재는 원필성 대위였다. 그런데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충혈된 눈은 어디를 보는지 모를 공허함으로 찼고, 육신은 금속과 괴이한 근육들이 얽힌, 아니 합성된 모습이다.
“물러서요.”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카이오는 움찔했다. 그렇지만 전복의 목소리란걸 알기에 안심했다. 그가 삼백이처럼 라이플을 겨누고 옆을 지나간다. 최창수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삼백이와 같이 원필성은 조준했다.
“원대위, 무슨 일인지 압시다.”
최창수가 물음을 던지는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벼락처럼 튀어나왔다. 그것이 카이오를 향해 달려오는 순간 삼백이가 발포했다.
* * *
게틀러 밖으로 나온 명위군과 우인홍과 경운은 호흡을 가다듬느라 애썼다. 숨결을 떨게 만드는 존재, 붉은 엘프는 또 다른 놀람을 만들고 있다. 기이한 노랫소리로 괴수들을 부르고 있다. 갈수록 불가해가 커진다.
‘천붕의 폭발 속에서 살아나온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명위군은 뜨거운 숨을 억지로 삼켰다. 자신의 소임을 다시 되새겼다. 붉은 엘프가 가진 힘의 비밀을 풀고 확보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다. 그러나 그 일이 힘들다고 판단되면 종멸케 함이다. 누구도 갖지 못하게다.
‘삼월문과 백두파 역시 마찬가지······!’
그러한 목표인 붉은 엘프가 천붕을 맞았다. 5군단은 그 공격을 미리 알리지 않았다. 타격직전에야 물러서라고 했다. 먼지구름을 보고 허탈함을 삼켰다. 그런데 붉은 엘프의 건재함을 알았을 때는 공포가 엄습했다.
‘죽여야 해, 그것이 옳은 길이야!’
심중의 확신을 명위군은 외쳤다.마음의 이 외침을 화성의 천지문에 전해야 한다.붉은 엘프에 대해서 아직도 그릇된 판단을 가지고 있는 문주와 장로들에게 알려야 한다.품기엔 위험한, 아니 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곳의 영상을 보고 어떤 판단들을 할지······!’
명위군은 시선을 우인홍과 경운에게로 돌렸다. 자신과 같이 지구에 파견된 고수들, 수행한 인원들과 붉은 엘프를 상대하기 위해 왔다. 그럴 만한 무력을 가진 자들이다. 연수한다면 더없이 강한 결과를 만들 것이다.
‘그 조차도 붉은 엘프에겐 소용없단 것을 이젠······’
상념이 깨졌다. 경운이 돌아보며 침중한 음성을 냈다.
“우리가 함을 합쳐 싸운다면······ 동귀어진한다고 해도 저 붉은 엘프를 어찌할 순 없겠습니다.”
우인홍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애초에 잘못 짚은 일이오.”
붉은 엘프에게서 무엇인가를 취하겠다는 생각 자체, 잘못된 판단이다. 그러나 삼대문파의 입장에선 방관할 수도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화성과 지구에 부는 변화의 바람, 파괴의 불을 통해 얻을 것은 얻어야 한다.
“가만있으면 가마니가 돼서 다 잃을 테니까······”
공통으로 품은 것을 중얼거린 경운은 그 순간 눈을 치떴다. 우인홍과 명위군도 마찬가지다. 붉은 엘프에게 모여든 괴수들이 일제히 달려서다.초원의 지축을 뒤흔드는 괴수들의 질주, 5군단을 향해 가는 해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