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145화 (146/172)

혹성강호. 145. 다시 밟은 땅.

145. 다시 밟은 땅.

“통신기를 놓는 작업 중에 발견했습니다.”

참모가 내놓는 단말기에 든 녹색점들을 볼프는 미간 좁히고 응시했다. 세 곳의 점, 초원수림지대를 지나 동남 방향으로 선을 그으면 직선이 된다, 마지막 지점은 청도인근이다. 침투공격했던 놈들의 루트였던 거다.

“이종들로 공격했던 놈들이 놓은 통신기 위칩니다. 사용가능하도록 조치했습니다.”

고개를 깊게 끄덕인 볼프는 새삼 놈들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놈들······’

가라운과 접전이 시작되는 때에 5군단 남쪽을 공격해 온 놈들, 당연하게도 다 죽였다. 이종으로 인해 당황하기는 했지만 정해진 결과다. 놈들은 화성연구소가 보냈다. 그들이 정확하게 뭘 의도한 건지는 모호하다.

‘붉은엘프가 공격하는 시점에 혼란을 노린 건 분명하긴 한데, 애초부터 그럴 목적으로 이곳까지 온 거라고? 아니, 뭔가 다른 게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뭔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그래서 불안한 긴장이 떨쳐내지질 않는다. 파악하지 못한 뭔가가 있다. 그것이 스멀스멀 등을 기어오르는 흡혈충처럼 느껴진다. 손이 닿지 않는 등,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인 거다.

‘뭐냐?’

화성연구소와 매화검문, 그들과 연결된 치안총국의 수작이 뭔지를 가늠하려 애쓰며 볼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먼지바람이 지나간 5군단군영을 응시하고 있는 지금, 복잡하고 무거운 감회가 한숨으로 흘러나온다.

‘이렇게 다시 밟고 섰구나······’

5군단이 뿌리내렸던 자리, 군영은 이제 없다. 파괴된 자취만 남았다. 이곳을 버리고 물러난 결정은 잘한 것이었다. 이곳에서 아우리엘은 죽었다.

‘됐어. 의미를 두자면 끝이 없다. 잘한 결정이었어. 우리가 마무르는 곳이 5군단, 이곳을 내주고 그놈을 죽인 결과야. 대가로 여기면 약소하지.’

아우리엘이 흩어진 자리를 응시하며 볼프는 새삼 강흑성을 떠올렸다.

‘그가 없었다면 이렇게 이 땅을 다시 밟고 서진 못했을 지도······’

감회를 삼키는 볼프에게 참모가 다가왔다.

“강흑성이 출발했습니다.”

시선 돌린 볼프는 이어진 말에 미간을 좁혔다.

“산동농장연합에서 통신대면을 요청했습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며 볼프는 통신기 앞으로 갔다. 화면에 중년으로 보이는 사내가 있었다. 누군지 안다. 샹그릴라 일행 박준이란 사내다.

-사령관께 거두절미 하고 핵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삿말도 필요 없단 듯 박준은 정말 핵심을 말했다.

-적호문이란 세력이 있습니다.

볼프는 좁힌 미간을 꿈틀거리며 박준의 이야기를 들었다. 적호문이란 이름의 무인집단이 있다는 것, 그들이 신남경의 철금련을 공격해 왔다는 거다. 그런데 그들이 군대에서나 사용 가능한 무기들을 사용했단 거다.

-화성연구소나 치안총국의 은밀한 조력이 있었던 걸로 판단합니다.

이어진 박준의 말에 의하면 강흑성이 한반도로 떠나면서 이런 내막을 알리라 했단 거다. 볼프 자신과 마주 앉았을 때는 하지 않은 이야기다.뭔가를 더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곤 결론을 내리고 이렇게 알린 거다.

‘적호문이라.’

전차와 건쉽을 사용했다는 세력, 어쩌면 3군단이 배후인지도 모른다.

-그럼 이만.

박준의 모습이 사라진 통신기를 볼프는 한동안 바라봤다. 정확하게 가늠이 안 되는, 불안한 예감은 더욱 커졌다. 가슴 속의 돌덩이로 박혔다.

‘여기, 대륙에서도 뭔가 일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야.’

그것이 적호문이다.난데없이 튀어나온 그 이름은 대륙을 장악중이라 한다.주요 블랙시티들이 그들의 손안에 들어간 것으로 박준은 말했다.그들이 화성연구소나 치안총국 쪽인지 3군단과 연결됐는지 알아야 한다.

‘정확한 진상을 파악해야겠구나.’

어금니에 힘을 주며 큰 숨을 들이마시던 볼프는 참모의 긴장한 목소릴 들었다.

“용선풍이 불고 있습니다!”

회오리바람, 토네이도가 생겨났다.

‘뭐야?’

볼프는 눈을 치떴다.바람이 거세지고 있었지만 갑자기 저런 게 생겨난 상황이 당황스럽다.폐허가 된 군영 중심에서 휘돌며 솟구친다.자욱한 모레먼지를 하늘로 길게 뽑아 올리고 있다. 기세가 점점 강해진다.

“장군, 물러나야 하겠습니다.”

참모의 긴장한 목소리에 고개 끄덕인 볼프는 매머드에 올라탔다. 창으로 보니 용선풍은 5군단이 있던 대지 전체를 휩쓸며 휘돌고 있다. 원래도 강풍이 부는 곳이기에 이상할건 아니지만 저런 토네이도는 처음이다.

‘까짓 회오리바람.’

관심을 접고 몸을 돌린 볼프는 이동을 명령했다. 5군단은 이제 새로운 터전을 잡아야 하는 거다. 군대의 그 이동은 몽골초원을 밟고 나갔다.

* * *

흑호에게 매달려 있던 영희를 생각하며 강흑성은 바다를 봤다. 전속력을 내며 저공비행하는 샤크의 아래로 지나가는 서해다. 7군단의 경계는 없다. 그들은 3군단과의 항전에 돌입한 상황, 무인지경으로 날아간다.

‘3군단이 곧 바닷길을 막겠지.’

볼프장군의 말에 의하면 3군단은 특히 해전에 강하다 한다. 해남도라는 지형적인 특수성에 기인한 거다. 그들의 군함들이 전속항진 중이다.

‘다들 무사하기를.’

눈을 감고 강흑성은 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7군단 백호부대와 동행해 이동 중인 여인들, 안전하다는 것을 알지만 3군단의 위험이 지척이다.

‘곧 다시 보게 될 겁니다.’

강흑성은 목에 건 팬던트를 어루만졌다. 이걸 건네준 여인, 카이오를 생각하며 의지를 되새겼다. 아무도 다치는 사람이 없게 하겠다고, 그렇게 하려는 적은 그 누구라도 분쇄해 버리겠다고, 철혼을 잡고 맹세했다.

“이제 곧 도착합니다.”

도착을 알리는 청룡부대 지휘관에게 고개를 끄덕인 강흑성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돌아온 땅, 다시 밟게 될 고향의 냄새를 품어 들였다.

* * *

제강소의 쇳소리를 들으며 철무진은 통신기를 새삼스레 바라봤다. 5군단과 연결이 되는 통신기다. 산동농장연합을 통해 조금 전 막 설치했다. 군용 샤크가 날아와서 비상을 걸었던 것이 머쓱하고 놀라운 상황이었다.

‘강흑성, 한반도로 돌아갔구나.’

저간의 상황을 파악하고 놀란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강흑성 그가 어떤 싸움을 치렀는지, 현재 벌어지는 일이 무엇인지, 그냥 기함할 일이다.

‘그리샴 장군이 살해됐다니······!’

새삼 몸에 경직이 와 철무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대륙전쟁의 영웅, ‘신중화’를 쳐부순 그가 죽었다.3군단 사령관 왕중양이 살인자다.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왕중양이 마교의 무공을 사용하는 자란 거다.

‘마인······!’

그자가 흡성대법으로 그리샴의 참모들을 죽이는 광경을 봤다. 5군단이 설치해준 통신기 덕분이지만, 왕중양은 그걸 개방채널로 내보내고 있다.

‘이 싸움은 가늠하기조차 힘들구나.’

화성정부와 치안총국과 화성연구소와 지구군부와 적호문이란 세력까지 얽혀 있다. 뭐가 어떻게 얽혔는지, 아닌 건지도 모를 싸움이 이 싸움이다. 분명한 건 강흑성의 행보, 그는 5군단과 손잡고 한반도로 갔다.

‘누구도 그의 앞을 막을 수 없을 것이야.’

힘준 눈자위를 움찔거린 철무진은 5군단을 생각했다. 통신기를 설치해주고 간 청룡부대원들, 그들은 적호문세력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갔다.

‘적호문이 상해와 항주 같은 곳들을 점령했다는 말밖엔······’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런 단편적인 것뿐이었다. 그들을 걱정할 건 아니다. 5군단의 최정예 백호부대, 그들은 임무수행을 잘 할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철금련이 해야 할 일만 잘하면 돼.’

힘준 어금니를 풀고 된숨을 몰아 내쉰 철무진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지옥사신, 다시 만납시다.”

* * *

평택이다.이 땅을 다시 밟았다. 대륙으로 떠날 때 밟았던 곳, 여기서 대전까지는 육로로 가야 한다.3군단이 장악한 제공권역을 뚫고 갈수 없어서다.강흑성 자신 혼자만이라면 무시했을 테지만 그럴 수가 없다.

“여기서 헤어져야겠습니다.”

청룡부대 지휘관은 엄중한 눈이다. 자신들은 이제 가장 가까운 곳의 야전전술부대와 합류한다는 거다. 가야할 곳의 위치는 멀티폰이 알려준다.

“대전 남동쪽 외곽입니다. 백호부대가 신호를 포착해서 접근해 올 겁니다. 물론 그전에 3군단의 수색대가 먼저 닥쳐올 가능성이 큽니다만, 잘 알아서 대처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시간 지체 없이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군인답게 경례로 인사를 한 지휘관과 청룡부대원들은 이내 사라졌다. 수림이 삼켜버린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뗀 강흑성은 바로 움직였다. 대전을 향해, 카이오와 아이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수림이 울기 시작했다.

‘야단 떨지 마라.’

수림에 사는 모든 생령들에게 강흑성은 의지를 발산했다. 달리는 앞길을 가로막거나 귀찮게 하면 멸살할 것이라는 경고의 살의, 수림은 떤다. 그러나 상공을 날아다니는 건쉽들은 아니다. 저들의 눈을 피해야 한다.

‘통신을 할 걸 그랬나.’

출발하기 전에 위치만 확인했다. 카이오와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위치가 발각되는 걸 막기 위해 계속해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착해서도 통신연결을 하지 않은 건 그러한 이유다.

‘직접 보면 돼.’

봐야할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강흑성은 수림 속을 달렸다. 벼락같고 바람 같은 그 질주 뒤에서 수림의 괴수들은 두려운 울음을 토해냈다.

* * *

‘감사합니다!’

카이오는 두 손을 부여잡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몽매에도 그리워한 이,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바라던 존재, 강흑성이 오고 있는 거다. 대륙에서 5군단과 연결된 그가 이곳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었다.너무나 감사하고 기뻐서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강흑성은 아이들을 위해서 달려오고 있다. 아니 어쩌면 카이오 자신도 포함인지 모른다. 물론 5군단과 손을 잡고 이 사태를 해결하려는 목적이이지만 기쁘다.

‘세상에 평안을 주십시오, 진실로 간절히 바랍니다.’

카이오는 신께 간청했다. 세상에 드리운 지옥을 거둬주시기를,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기를 간구했다. 하지만 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거, 그건 신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야 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은공처럼.’

그리고 카이오 자신이 여태 해온 것처럼이다. 손에 총을 잡고 싸워야 한다. 평화와 자유는 누군가 주지 않는다. 이 손으로 움켜잡는 것이다.

“누나에게 말해줘야 할까요?”

게틀러 옆에서 기도하는 카이오를 보며 준후는 슬픈 눈으로 말했다.

“네가 말해줘야겠다고 생각되면 말하렴.”

최창수의 조언 인지 아닌지 모를 대답, 준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원대위님 이야기는 누나가 모르는 게 좋겠어요.”

준후는 그렇게 결정했다. 카이오를 사랑한 원필성, 그가 왜 그렇게 죽은 것인지 카이오는 알 필요 없다. 저 가슴에 슬픔을 하나 더 얹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필성에 대한 고마운 마음만 가지고 살면 된다.

“너는 괜찮은 거냐?”

최창수의 걱정 어린 물음에 준후는 시선을 맞추고 대답했다.

“예.”

단단해진 아이의 눈에 든 슬픔을 최창수는 읽었다.강흑성을 연모하는 카이오의 마음을 모르고 원필성에게 해 버린 약속이 있음이다.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원필성은 카이오와 다른 이들을 구하고 죽음을 맞았다.

“나중에, 우리가 원대위 제사를 올려주자.”

원필성의 무덤은 없다. 그렇지만 그를 기리며 추도하는 거다.

“그렇게 해요.”

서글픈 미소로 고갤 끄덕이는 준후를 보며 최창수는 마주 미소 지었다. 그 순간 비상 신호가 점멸했다. 지급받은 멀티폰이 손목에서 떨어댄다.

“공습이다!”

숲의 하늘 위로 건쉽들이 지나갔다. 가파르고 위험한 그 비행궤적에 반응하며 게틀러들이 일제히 기동했다. 하늘로 벌컨을 뿜어대며 반격했다.

“승차! 이동한다!”

최창수와 준후와 카이오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게틀러에 올라탔다. 그 위로 건쉽들이 뿜는 빔의 불벼락은 쏟아졌다. 숲은 톱밥처럼 휘날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