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158. 프락시안.
158. 프락시안.
프락시안놈이 그들 특유의 은빛 갑주, 아머를 입었다면 못 했을 일이다. 등을 갈라버린 그놈은 아머가 아니라 톱날의 칼로서 보호하고 있었다. 그것이 쉴드 역할을 못한 건 이종변이괴물들과 싸우던 상황이어서다.
‘그런 게 있을 줄은······’
식은 숨을 흘려내며 최준후는 프락시안의 무장을 떠올렸다. 빛덩어리로 나타난 놈은 톱날의 칼이 아머역할을 했다. 전신을 휘감고 돌아가는 그것이 에너지를 발산해 외부 공격을 막았고, 칼이 돼서 괴물을 쳤다.
‘하아.’
소리 내지 못하는 한숨을 거듭 내쉰 최준후는 골목길 밖을 내다봤다. 몸을 숨긴 이 다세대 주택 반지하방 바로 앞, 괴물들과 프락시안이 싸우던 곳이다. 더는 아무런 동정이 없다. 멀리서 비명들이 들려올 뿐이다.
‘자폭.’
프락시안 놈은 최후에 자폭했다.자신에게 몰려든 괴물들을 다 데리고 죽었다.푸른 번개를 토해내던 팔뚝의 비구, 그것이 폭발했다.프락시안 놈과 괴물들은 흔적도 안 남았다. 폭심에는 반경 10m의 분화구가 생겼다.
‘저 정도의 폭발력뿐인 건가?’
최준후는 의구심을 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프락시안의 자폭은 훨씬 강한 것이다. 본래 살던 세상에서도 삼백년 전의 일이지만 들어서 안다. 그보다 작은 위력의 이 폭발은 분명 자폭한 놈이 설정해 놓은 것이다.
‘비구의 빛을 보고 피하지 않았으면······!’
프락시안의 오른 팔에 장착돼 있던 비구, 은빛 금속재질의 그것이 빛을 내는 순간 반응한 덕분에 살아 있다. 새삼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그러나 그보다도 짜릿한 전율이었던 건 놈의 등을 갈라버린 일격이다.
‘한걸음 나아갔어.’
가르쳐 주고 올바른 길을 알려주는 이 없던 혼자만의 수련, 전복아저씨에게서의 짧은 배음만으로 지난 이십년을 피땀을 흘렸다. 정체의 벽 앞에서 나아가지 못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힌 일, 그런데 오늘 넘어갔다.
“후우.”
복잡한 감회 속에 소리 낸 숨을 흘린 최준후는 주변을 즉각 살폈다. 프락시안의 자폭이후로 이렇다 할 동정이 없다. 여기서 계속 있을 수는 없다.
‘가자.’
부서진 반지하 창문을 통해 굴러나간 최준후는 어둠을 헤치며 이동했다.애초에 목적한 곳, 왕정마트를 향해서다.골목길을 지나는데 참혹한 광경들이 보인다.괴물들에게 당한 사람들, 버려진 인형처럼 널려 있다.
‘죽일!’
치미는 분노를 이 악물어 삼키며 최준후는 이동했다. 마침내 왕정사거리를 지나 주공아파트 옆 왕정마트에 다다랐다. 예상대로 주차장은 아비규환이다. 불이 꺼져 있는 마트는 불행 중 다행하게도 불타지 않았다.
‘다 죽었구나.’
참담함을 삼키며 최준후는 마트 앞 주차장을 가로질렀다. 장을 보러 왔던 사람들, 갑자기 재앙처럼 닥친 괴물들의 출현에 놀란 이들, 전부 희생됐다. 두려움과 충격으로 감지 못한 눈은 아직도 세상을 보고 있다.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심정을 다스린 최준후는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손전등을 비추며 마트안의 아수라장을 확인했다.직원유니폼을 입은 남자는 상하체가 분리돼 죽었다. 진열대를 쓰러뜨린 여자는 머리가 없다.눈을 감았다가 뜬 최준후는 해야 할 일만 생각하며 움직였다.마트 안쪽의 아웃도어 매장에서 가장 큰 배낭을 찾았다. 그 안에 필요한 것들을 넣었다. 음식과 물, 그런데 아이들을 생각하면 왔다 갔다 해야겠다.
‘최소한 세 번은 해야겠군.’
그럴게 아니라 차를 마트까지 끌고 왔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고개를 흔들어 밀어냈다. 괴물들에 이어 프락시안까지 출현한 마당이다.놈들과 만나기 딱 좋다.차가 이동하는 걸 본 놈들이 파리떼처럼 달려들 거다.그런데 그건 왕정역주변도 마찬가지다.도심으로 들어온 이상 어디든 같다.그러니 차를 대고 이렇게 이동해온 것 자체가 운이 따라준 면이 있다. 아니 오피스텔의 괴물들은 기다렸다가 공격해 온 것이 분명하다.
‘돌아갈 길도 만만치 않겠는데.’
힘준 어금니를 풀며 최준후는 배낭을 조였다. 등에 메고 약국으로 이동했다. 역시 아수라장이 된 약국, 라이트를 비춰 확인하며 해열제를 찾았다.이곳까지 온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곳, 용진이를 위한 해열제다.
‘상비약을 이것저것 챙겨가야겠다.’
진통소염제를 비롯해 소화제등, 여려가지 약들을 챙긴 최준후는 마트를 나섰다.그런데 그 순간 밤하늘을 밝히는 빛을 봤다.정확하게 폭발화염이다.불꼬리를 만들며 지상으로 추락하는 저것은 군대의 전투기다.
‘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쥔 최준후는 몸을 떨었다. 무력하게 불나방처럼 떨어지는 저 전투기의 최후, 저것이 군대의 현실이고 지금 겪는 재앙이다.거짓이라고 소리치고 싶은 상황, 세상은 프락시안에게 공격당했다.
‘그 많은 무기와 전략자산들이 다 소용 없었다는 건가?’
지상으로 떨어져 불을 퍼트리는 전투기의 최후를 바라보며 최준후는 분노와 의문을 씹었다. 대한민국의 군대는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강군이다. 군사력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런데다 미군도 이 땅에 있었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그러한 것들이 작동한 징후를 보지 못했다. 유사시 북한에 대비하기 위해 얼마나 훈련을 해왔던가, 미군이 가진 힘은 얼마나 커다랬던가, 그런데 당한 거다. 어떻게 얼마나 당했는지 모르지만 이 현실이 말해준다.
‘저!’
밤하늘에서 산란하는 빛을 보고 최준후는 눈을 부릅떴다.
‘프락시안!’
놈들이다. 전투기를 추락시킨 원인이다.톱날의 칼이 돌아가며 형상을 감췄던 놈처럼 저것도 그렇다.비행선, 건쉽이 정체를 드러냈다.기체를 감싸고 돌아가던 톱날이 멈추고 빛이 사라지자 확실히 보이는 거다.
‘보이지 않으니······!’
채찍처럼 휘어져 돌아가는 저 톱날 같은 것이 원인이다. 주변의 빛을 굴절시켜 보이지 않게 하는 거다. 그런데 기체의 모양이 삼각형이다.
‘저건······’
무인 건쉽 비천을 연상케 하다, 거의 흡사하다.
‘저놈들 것을 본 따 만들었던 건가?’
그렇게 여겨진다. 비천보다 훨씬 크고 강해 보인다는 차이점 외엔 거의 비슷하다. 저건 걸 타고 프락시안들은 세상을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
‘죽일 것들······!’
새삼 치미는 격노에 몸을 떨던 최준후는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건쉽의 자취를 찾아 눈을 돌렸다. 하지만 밤하늘 어디에도 더는 안 보인다.후, 하고 숨을 뱉어낸 최준후는 현실에 집중하며 다시 움직였다.
* * *
웅찬이는 시종 심각한 얼굴이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경찰도 군대도 다 도망친 걸까요?”
윤미령은 웅찬이의 눈을 응시하며 서글픔을 억눌렀다. 경철이 혜진이와 같이 독립해야 할 아이, 왜소한 체격처럼 언제나 말이 없던 아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아요.”
웅찬이의 마른 얼굴이 만들어 내는 표정, 가슴에 품은 감정을 윤미령은 읽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현실, 영화에서나 보던 일인 거다. 그런데 거짓이 아닌 현재의 일이다. 분노와 두려움이다.
“여기만 이런 거고 다른 곳은 안전하지 않을까요?”
말을 뱉어 놓고 웅찬이는 미간을 찌푸린다.얼척없는 말이란 걸 알아서다.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겪었다.괴물이 날뛰고 있다.원장 윤미령이 오기 전까지 뉴스에선 도시가 파괴되는 상황을 토해내고 있었다.sns상엔 난리가 났었다.외계인이 침공했느니 지구 멸망이라느니, 온갖 소리들이 난무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전세계가 공격받고 있다는 거다.그런 소식조차도 뉴스가 끊어졌듯이 끊겼다.이게 지금 현실인 거다.
“웅찬아.”“죄송해요.”
바로 나온 웅찬이의 반응에 윤미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는 건지······!’
가슴에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윤미령은 다시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하자, 우리는 서로를 보호해야 해, 그 일만 생각하자.”
웅찬이의 눈동자에 강한 빛이 들어찼고 혜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미소 지은 윤미령은 웅진이의 물수건을 갈았다.
“원장 엄마······”“그래 용진아 조금만 참아, 준후아저씨가 약 가지고 올 거야.”
열에 붉어진 용진이의 뺨을 쓰다듬으며 윤미령은 미소 지었다.
* * *
‘시동을 걸고 도로로 나가면······’
이제 벌어질 일을 예상하면서 최준후는 스타트버튼에 손가락을 댔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픽업트럭, 사륜구동의 강력한 힘은 오면서 느꼈다.이제 이걸 타고 돌아가야 한다. 아이들에게 약과 먹을 걸 줘야 한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
어금니를 물었다 푼 최준후는 시동버튼을 눌렀다.우르릉 하는 소리로 차는 깨어났다. 그대로 악셀을 밟으며 도로로 달려 나갔다.전복된 차와 건물 벽을 부딪쳤지만 무시하고 달렸다.역시 괴물들이 튀어나온다.
‘개자식들이!’
룸미러와 사이드 미러로 괴물들을 확인하며 최준후는 속력을 냈다. 굉음을 내며 달리는 픽업트럭 주변, 도로엔 파괴된 차량들로 질주가 힘들다.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추돌하면서 왕정 구사거리를 지나 달려 나갔다.
‘가자!’
마음의 외침을 들은 건지 픽업트럭은 맹수처럼 오르막도로를 차고 올라간다.그런데 앞쪽에서 괴물이 달려온다. 놈이 멈춰 선다.트럭과 승용차가 쓰러진 사이, 빠져나갈 길을 막았다. 놈을 피할 방법은 이제 없다.
“해보자!”
있는 힘을 다해 악셀을 밟은 최준후는 괴물을 향해 돌진했다.괴물은 칼 네 개를 사마귀처럼 비벼대며 불꽃을 피우더니 휘두른다.칼 두 개가 차창을 뚫고 들어왔고 두 개는 수평을 갈랐다.그 순간 놈을 받았다.추돌의 충격을 느끼며 최준후는 상체를 숙였다.수평을 가른 칼날 두개가 가위처럼 엇갈리는 아래로, 찔러 들어온 칼날들 밑으로다.받아버린 놈이 휙 나가떨어지며 칼날들도 사라졌다.그대로 차를 밀고 나갔다.바퀴아래 깔리는 괴물을 느끼며 최준후는 악셀을 거칠게 밟았다. 그런데 바퀴가 터졌다. 이유야 뻔하다, 괴물이 갈라서다. 이젠 도리가 없다.조수석에 놓아둔 작두를 잡고 최준후는 밖으로 튀어나갔다.깔렸던 차아래서 일어서는 괴물을 향해 쇄도했다.놈이 반응하기 전에 목을 쳤다.머리가 잘린 괴물놈은 경련하는 몸짓으로 휘청거리다 쓰러졌다. 그런데 뒤쫓아 오던 놈들이 어느새 지척이다. 놈들을 향해 최준후는 달려갔다.
* * *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윤미령은 어둠을 응시했다. 최준후가 안 돌아오고 있어서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남자라는 걸 알고 있지만 걱정된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보육원 밖 어둠을 바라보던 윤미령은 미간을 좁혔다. 어둠이 흔들리는 것 같아서다. 최준후의 말대로 보육원 안팎의 불을 다 꺼서 어둠뿐이다. 그나마 아직 전기가 들어오고 있다는 게 감사하다.
‘어?’
흔들리는 어둠은 점점 뚜렷해진다. 보육원 앞으로 다가오는 차량이다. 라이트를 켜지 않은 소형승용차다. 멈춰서더니 내리는 사람은 최준후다.윤미령이 반가운 기쁨을 드러내기도 전에 최준후가 말했다.
“밖에 나와서 뭐해?”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최준후는 윤미령의 앞에 와서야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걱정해 기다렸다는 것, 저 눈은 안도와 함께 욕하고 있다.그래서 선수 쳤다. 당할 수 없는 윤미령의 공격을 안 당하는 방법이다.
“보육원 원장이 식자재 떨어진 것도 모르고 사냐?”
째려보는 눈을 했던 윤미령은 한숨을 쉬며 싸우길 포기한다.
“그러게 말이야, 나는 자격 없는 원장이야.”
그게 아니란 걸 최준후는 안다. 오늘이 식자재를 새로 채우는 날인 거다. 그래서 창고에 쌀이며 부식이며 지끄레기만 남아 있던 상황이었다.
“자, 용진이 약.”
따로 챙긴 약봉투를 최준후가 내밀자 윤미령은 표정을 폈다.
“고마워.”
서둘러 지하실로 내려가는 윤미령을 보고 최준후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등에 짊어진 배낭의 무게를 가늠하며 새삼 현실을 곱씹었다.
‘먹을 걸 더 확보하고 아이들을 안전하게 하자면······’
그 순간 주머니 속의 폰이 몸부림쳤다. 흠칫하며 폰을 꺼낸 최준후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전화가 이 순간 연결됐다.
‘김일우국장!’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최준후는 통화를 터치했다.
“국장님!”
소리 낸 최준후의 목소리는 보육원 주변 어둠을 흔들며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