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162. 해야 할 일.
162. 해야 할 일.
커피향기가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 하찮게 생각하던 믹스커피다. 따듯한 김으로 코를 파고든 내음은 입 안에 퍼지는 맛과 더불어 향그럽다.
“남이 타 준걸 먹어서 그런가 유별난 맛인데?”
머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최준후는 윤미령에게 윙크했다. 심드렁한 얼굴로 그 표정을 마주 응시하던 윤미령은 아이들이 잠든 방을 힐긋 돌아본다. 옅게 찡그렸던 미간을 표며 최준후를 다시 보고 말한다.
“갈 거면 애들 잠들었을 때 가.”
커피 잔을 다시 들던 최준후는 흠칫하며 윤미령을 응시했다.흑백이선명한 눈동자, 한치의 흔들림도 없다.역시 최준후 자신의 생각을 읽었다.늘 그랬다. 보육원 원장의 딸로 만난 그 날 이후로, 윤미령은 그랬다.
“경찰됐을 때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몰라.”
말 없는 최준후 대신 말한다는 듯 윤미령은 옛이야기를 한다.
“뜬금없이 선물 보내고 돈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아버지는 알고 있었어.”
그랬나, 하는 시선을 내린 최준후는 커피잔만 응시했다. 그런 최준후의 얼굴을 바라보며 윤미령은 터널 안 이 피신처의 공기를 새삼 들이마셨다.
“보육원 나간 뒤로 연락 한번 안하던 인간, 뭐가 그렇게 궁금했을까.”
안다, 최준후 자신의 살던 자취방을 찾아왔던 사람이 원장아버지였다는 걸, 그와 마주치기 싫어 이사 다닌 것만 세 번은 된다. 왜 그랬을까.
“우리 보육원 출신이 신명경찰서 소속 경찰이 됐다고, 아버지하고 친한 경찰이 연락을 해줘서야 알았지. 그날 아버진 안 드시던 술까지 드셨어. 기분 좋다고, 이런 날은 마셔야 한다고, 최준후가 정말로 잘 됐다고.”
윤미령은 최준후를 똑바로 바라보고 가슴에 담았던 걸 던졌다.
“무슨 생각으로 이랬던 거야?”
커피잔만 응시하던 최준후는 윤미령의 눈을 마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삼년 전에 우리가 다시 봤을 때······”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한 걸까, 모르겠다. 기억 속에만 있던 소녀, 원장의 딸, 그녀가 별세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햇빛보육원을 끌어가고 있다는 걸 안 그날, 저 얼굴을 본 그때, 가슴 속에 기이한 울림이 생겨났다.
‘무시하고 묻어뒀던······’
이 세상에 떨어져 두려움에 휩싸여 있던 최준후 자신의 손을 꼬옥 잡아줬던 소녀, 사슴 같던 그 눈과 미소를 한번도,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잘 들어.”
묵직한 숨으로 다시 입을 연 최준후는 테이블 위에 그것을 올렸다.은빛비구, 프락시안의 무기다.흠칫하는 윤미령의 오른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렇게 착용하는 거야.”
윤미령이 뭐라고 반응할 새도 없이 최준후는 비구를 착용시켰다.
“뭐하는 거야?”
놀란 윤미령의 반응 속에 비구는 저절로 크기를 맞췄다.
“안쪽의 우묵한 부분에 손가락을 대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착용과 해제, 발사도 마찬가지야. 그걸 생각하는 순간 푸르게 변하고 발사되는 거야.”
오른 팔에 붙어버린 외계인의 무기를 당황해 보며 윤미령은 묻는다.
“생각만으로 된다고?”“그래, 생각만으로 작동되는 무기야. 본 것처럼 착용자의 신체구조에 맞게 변환 돼.”“정말 그렇다고?”
비구는 삽시간에 푸르게 물들었다. 그걸 본 최준후는 소리쳤다.
“안 돼!”
화들짝 놀란 윤미령은 발사라는 생각을 밀어내고 중지를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게 떠올린 발사란 생각, 바로 반응하는 비구를 두렵게 봤다.
“이, 이거······”“네가 갖고 있어야 해.”
단호한 최준후의 말, 윤미령은 시선을 맞추고 상황을 받아 들였다. 자신이 아이들 잠들었을 때 가라고 했다, 최준후는 그걸 위해 가야 한다.
‘그렇지.’
이곳에 남아 아이들을 지켜야 할 것은 윤미령 자신이다.
“알았어.”
명료하게 대답하는 윤미령, 현실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최준후는 설핏 미소 지었다. 역시 윤미령이지 하는 생각, 이 아가씨는 언제나 당차다.
‘해야 할 일은 미루거나 외면한 적이 없지.’
왜 눈빛이 그래? 미소는 뭐야? 란 윤미령의 시선을 무시하고 최준후는 말했다.
“어떤 상황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 걸 파악해야 해.”
최준후의 이야기가 뭔지 윤미령도 안다.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거다. 그런 게 있을지 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영원히 숨을 순 없는 거야.
“삼삼칠 박자로 정하자.”“뭐?”“돌아오면 철문을 그걸로 두들기란 말이야.”“헤, 뭐래냐?”“싫어? 그럼 말아. 안 열어주면 그만이지.”“아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일부러 가벼운 분위기를 만드는 윤미령의 의도를 알기에 최준후는 웃었다. 하지만 가슴 속엔 바윗덩이가 들어찼다. 망해가는 세상의 현실이다.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절로 찌푸려진 미간을 모르는 채 최준후는 커피 잔을 들어 입에 댔다. 남은 커피를 넘기는 데 윤미령의 기묘한 시선이 보인다. 물음도 건너온다.
“늘 하던 그 헛소리, 이게 그거지?”
늘 하던 헛소리, 최준후 자신이 겪고 살던 세상의 이야기다. 아무도 믿지 않는 고아의 이야기, 잠꼬대와 상상인 거다. 그것이 현실로 일어났다.
“맞아.”
명징하게 대답한 최준후는 남은 커피를 단숨에 미시고 컵을 내렸다.
“나는 원래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살았어. 그곳은 육백년에 걸친 두 번의 외계인 침공이 있었고, 두 번째가 바로 프락시안이었지. 지금 이 세상을 공격해온 외계인들이야. 이 현실을 나도 받아들이기 힘들어.”
윤미령은 눈썹을 가늘게 떨었다. 최준후가 다른 세상에서 살아왔다는 말은 지금 들어도 믿기 힘들다. 그런데 지금 외계인의 침공을 겪고 있다.
‘정말이었던 거야······!’
그들이 누군지 최준후는 알고 있다. 그들의 성향도, 무기 사용법도 안다.
“거긴 지옥 같은 곳이었어. 세상이 망해버려서야.”
테이블을 응시하며 중얼거림처럼 말한 최준후는 시선을 들어 윤미령을 응시했다. 강렬한 눈빛을 흘려내며 뒷말을 냈다. 가슴이 품은 의지다.
“여기도 그렇게 되면 안 돼. 막아야 해.”
* * *
화재에 대비한 소화장치가 작동했다.벙커출입구 밖은 흰색 소화연무로 가득 찼다.안개속이나 다름없는 그 안에 외계인의 형상이 있다.당황한 모습이다.놈을 감싸고 돌아가던 톱날들이 멈칫거리는 게 보인다.
‘정말이구나!’
눈을 부릅뜬 김일우는 주저하지 않고 사격했다. 탄창이 다 빌 때까지 소총을 발사했다. 곁의 부하들과 같이 철갑탄의 우박을 퍼부었다. 외계인은 휘청거리며 물러난다. 무수한 불꽃이 피어나는 가운데 피도 튄다.
“된다! 때려 부어!”
김일우의 외침에 반응하며 경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마침내 외계인의 그림자가 소화연무 속에서 주저앉았다.탄창을 갈아 끼운 김일우는 다가가며 방아쇠를 당겼다. 두 팔로 얼굴을 가린 놈을 쐈다.
“죽어라아!”
김일우와 국정원요원들의 총격 속에서 프락시안의 머리는 터졌다.
“후아.”
결과에 놀라고 당황한 김일우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뒤늦게 소화분무를 흡입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기침을 터트렸다. 부하들과 물러나 연무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다시 다가가 살폈다.
‘이런 놈들이구나.’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욕을 들으며 김일우는 이름을 기억해냈다. 프락시안, 최준후가 말한 이름이 그것이었다. 지구를 침략해온 놈들이다.
“무기들이 멀쩡합니다.”
감탄하는 부하의 목소리에 밀리듯 김일우는 손을 뻗었다. 바닥에 떨어진 톱날, 길게 늘어진 모양이 줄을 늘여놓은 것만 같다. 그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자 순간 변했다. 손잡이만 남았다. 면도날 같던 칼이 사라졌다.
‘이거······’
기묘한 예감으로 김일우는 손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쉿,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뻗어나갔다. 벽을 파고 들어간 톱날의 거리가 몇미터나 된다.
“허.”
감탄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숨소리를 흘려낸 김일우는 부하가 잡은 다른 걸 봤다. 프락시안의 팔에서 떼어낸 은빛의 비구, 번개를 뿜는 무기다.
* * *
건쉽에 오른 최준후는 생각으로 조종했다. 스르르 떠오른 건쉽은 터널 밖으로 나가 날아올랐다. 어둠의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곳은 남산이다.김일우 국장을 우선 만나야 한다. 그런데 그가 무사한지는 알 수 없다.
‘응?’
홀로그램 화면에 나타난 녹색 점들을 보고 최준후는 긴장했다. 분명히 프락시안의 다른 건쉽이다. 놈들이 다가온다. 이내 놈들이 말을 걸어온다.
-재미 좀 봤나?
목에 두른 은테를 통해 명확히 인지되는 프락시안 말이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최준후는 긴장했다. 두 대의 건쉽은 차례로 말을 건다.
-여긴 더 재미 볼게 없는 거 같지 않아?-북상해야겠어, 군대가 남아 있잖아.
여전히 최준후는 대응을 안했다, 아니 못했다. 그 반응이 온다.
-왜 대답이 없어?-무슨 일 있는 건가?
건쉽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게 홀로그램 레이더에 보인다.
“아무 일 없어!”
발작적으로 소리친 최준후는 파국에 대비해 지상으로 내려가려던 생각을 버렸다.
-왜 소리치고 그래?-소리 지르는 거 보니까 무슨 일이 있긴 있군.
두 대의 프락시안 건쉽은 더 관심 안 가진다는 듯 기수를 돌려 날아갔다.애초에 독자행동과 사냥이 근본 습성인 존재들, 이쪽에 무슨 일이 있든지 뭣 때문에 저러는지 관심을 끊는 거다. 저 둘 사이도 마찬가지다.
“하아.”
안심하며 숨을 내쉰 최준후는 다시 목적지를 생각했다.
‘남산.’
홀로그램 화면엔 남산으로 가는 최단경로가 나타났다. 세밀한 지도다. 이걸 보니 프락시안들이 침략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왔다는 걸 알겠다.
‘개자식들.’
새삼 치미는 분노를 씹어 삼키며 최준후는 속도를 높였다, 생각만으로 제어되는 건쉽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를 비행했다. 그 와중에 프락시안의 다른 건쉽들을 포착했다. 하지만 걱정 안한다, 직전처럼 하면 된다.
‘내가 말하는 것도 놈들에겐······’
프락시안 말로 전해진다. 놈들의 무기와 장비수준이 두렵다. 지구보다 훨씬 진보된 과학문명의 기반을 느낀다. 그런데 의문도 든다. 괴물맹수와도 같은 형상의 프락시안, 사냥과 전쟁만을 일삼는 족속이어서다.
‘이런 수준의 과학문명을 어떻게 이룩한 거지?’
의문을 품던 최준후는 레이더에 나타난 건쉽들의 숫자가 많아지는 걸 확인했다. 서울 상공으로 들어와서다. 인구밀집지역, 사냥감도 많은 거다.부득, 이를 간 최준후는 남산을 향해 날아갔다.
* * *
긴장한 숨을 흘려내며 김일우는 어둠을 응시했다. 국정원 건물이 파괴된 것처럼 외부정경은 처참하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뒤집혀진 폐허다.그런데 그 속에 그것이 있다, 프락시안 외계인이 타고 온 비행체다.
‘저거······’
뜨거운 침을 삼킨 김일우는 어둠을 헤치고 전진했다. 뒤집힌 차를 지나고 웅덩이가 생긴 곳을 건너 비행체에 다다랐다. 새카만 암흑빛의 삼각형 기체, 바닥을 디딘 세 개의 발만 제외하면 이음매가 전혀 없다.
‘출입구가······’
기체의 표면을 만지던 김일우는 순간 경직했다. 상공에 비행체 하나가 나타나서다. 즉각적인 반응으로 기체의 아래로 굴러 들어갔다. 숨을 죽이고 오른팔에 착용한 비구를 내밀었다. 비행체가 바로 옆에 착륙한다.
‘빌어먹을!’
이판사판, 죽이지 않으면 죽는거다란 생각으로 김일우는 이를 악물었다. 눈에 힘을 주고 비행체를 노려봤다. 기체에 선이 생기며 문이 열렸다.
‘죽인다!’
결심한 순간 푸르게 물드는 비구를 겨누고 김일우는 튀어나갔다. 그런데 비행체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고 놀랐다, 당황했다. 다름아닌 최준후다.
‘어!’
김일우가 놀라던 그 찰나, 최준후가 귀신처럼 움직였다. 기체에서 점프하며 김일우의 오른 팔을 걷어찼다. 푸른 번개는 숲을 쑤시고 들어갔다.
“누굴 잡으려고 그럽니까!”
최준후를 본 김일우는 반가움과 미안함이 어린 얼굴로 주춤거렸다.
“최형사······”
최준후는 김일우를 보며 씩 웃었다.
“제대로 살아계시네요.”
제대로의 의미를 생각하며 김일우는 마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