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164화 (165/172)

혹성강호. 164. 단독전개.

164. 단독 전개.

남산을 언제 밟아봤는지 기억을 더듬으며 최준후는 이동했다.

‘도서관 다닐 때 빼곤 없군.’

계절별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던 남산이다. 지금도 봄꽃들을 피워내기 위해 준비 중이다. 꽃들이 피면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웃던 곳이다.

‘옛날이야기가 돼버리겠어.’

한숨을 내쉰 최준후는 주변을 살피며 한남동 방향으로 열심히 움직였다. 건쉽을 타지 않고 도보로 움직일 것을 마음먹은 건 애초의 목적 때문이다. 무기를 더 확보한다는, 김일우가 듣기엔 자살미션 같은 것이다.

‘내가 말해놓고도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피식 실소를 흘린 최준후는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프락시안의 톱날 칼, 최대 십미터까지 늘어나는 무기다. 이게 회전하면 보호막이 되는 거다.

‘이런 걸 가진 놈을 치는 거야, 건쉽을 확보하면 그걸 타고 돌아가는 거고.’

그게 목적이고 계획이다. 그런데 더 큰 목적은 현황파악이다. 얼마나 피해를 입은 건지, 반격의 희망은 있는 건지, 움직여야 알 수 있는 거다.

‘아직 전기와 물은 끊어지지 않았어.’

이게 프락시안놈들의 의도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어쨌든 다행한 일이지만 언제 끊길지 알 수 없다. 물론 그렇게 되면 국정원 벙커는 비상전력을 사용할 테니 문제없지만 윤미령이 있는 터널은 문제다.

‘거기도 비상발전기가 있지만······’

제대로 완벽하게 살펴보지 못했다. 발전기를 돌렸을 때의 결과가 생길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지나친 염려라고 여겨진다. 터널 안의 깊은 곳에 위치한 공간이다. 터널 밖은 파괴의 아수라장, 도처에 불길이 있다.

‘발전기를 돌려 생긴 에너지 흔적이나 소음 등을 프락시안이 파악한다는 건 오버겠지. 미령이라면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대응할 게 뻔하고.’

터널 안 쉘터엔 왕정산내부로 흐르는 물길이 있다. 작은 수로와 같은 그곳이 취수원이다. 물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식량도 인스턴트지만 충분하다. 그러나 그곳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다. 그러니 움직이는 거다.

‘방법을 찾아야 해.’

살 방법을, 프락시안을 물리칠 기회를 찾아야 한다.그런데 혼자 이렇게 위험한 밖을 돌아다닌 다고 생겨날리 없다. 하지만 앉아 기다리는 건 아니다.그처럼 해야 한다, 강흑성처럼, 스스로 헤치고 나가 만드는 거다.

‘한남동.’

어느새 발길이 도심지역을 앞에 두고 있다.유명한 호텔이 저 앞에 있다.한눈에 봐도 혼돈의 아비규환이 휩쓴 모습이다.호텔외부로 보이는 유리창들은 거의 다 파괴됐다.군데군데 피어나는 연기는 신음 같다.

‘제길.’

꿈틀거리는 분노를 달래며 최준후는 전진했다. 주변의 기척을 살피며 호텔 주차장에 들었다. 장난감처럼 뒤집힌 차량들 사이 죽음이 보인다.패닉에 빠져 도망치려던 사람들, 괴물들의 손에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괴물로 변하고 안 변하고는 도대체 무슨 차이인 건지······’

의문을 최준후는 밀어내 버렸다. 짐작은 있지만, 그런 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생겨난 일, 대응하고 파훼하는 것만 생각하는 거다.

‘응?’

하늘로부터 퍼져오는 소리에 최준후는 눈썹을 세웠다.

‘헬기?’

분명히 그 소리다. 승합차 옆에 붙어 보니 맹렬한 속도로 날아온다.호텔 앞으로 접근하려는 모양새다.자세히 모르지만 미국국기가 붙은 저건 아파치다.세 대가 하강하고 있고 한 대가 착륙하는 이유가 보인다.

‘구출.’

호텔에서 사람이 나온다. 미국인이 분명하다, 자국민을 구출하기 위해 미군은 아파치 헬기를 보낸 거다. 저 인물이 누군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모르지만 구조하러 왔다. 그런데 역시 손쉽게 되지는 않을 모양이다.

‘미군이 아직 움직이고 있다는 건······!’

희망을 품으며 승합차 밑으로 굴러 들어간 최준후는 괴물들의 질주를 응시했다. 헬기소리에 반응하며 사방에서 몰려드는 괴물들이다. 아파치 헬기 두 대는 좌우로 불벼락을 뿜는다. 괴물들은 부서지며 달려온다.

‘미친······!’

눈앞에서 벌어지는 파멸의 잔치에 최준후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저런 일은 늘 봤었다. 이 세상이 아닌 원래 살던 세상에서다. 춘천에서 내전상황도 겪었다. 새삼스러운 광경이 아니다.

‘여기 살면서 여기 사람이 됐구나.’

고개 흔들어 사념과 감정을 흩은 최준후는 소총을 움켜잡았다.아파치 헬기는 로켓을 발사하고 미사일 까지 발사했다.괴물들은 화염과 함께 흩어졌다. 하지만 남산의 나무들만큼이나 많은 괴물들이 몰려들고 있다.

‘저렇게나!’

너무나 많은 괴물들을 보고 최준후는 숨 쉬는 걸 잊었다. 사람들이 거의 다 괴물이 됐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광경이다. 이건 정말로 지옥이다.

“헛!”

자신도 모르게 소릴 내며 최준후는 경직했다.세대의 아파치 헬기 중 한 대가 폭발해서다.그 이유가 보인다. 프락시안의 건쉽이 나타났다.

‘저!’

두 대의 아파치 헬기는 빠르게 기동하며 반격에 나섰다.한 대가 기총사격을 퍼붓는 동안 다른 한 대가 헬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했다.그 공격을 프락시안의 건쉽은 피하지 않았다.보호막 같은 게 작동하고 있다.아찔한 미사일의 폭발, 결과를 두고 아파치 헬기들은 기수를 돌렸다.도주를 택한 그 움직임을 향해 프락시안의 건쉽이 푸른 벼락을 던진다.두 대의 아파치는 공중에서 폭발했다. 그 잔해가 호텔 주변에 휘날려 내린다.

‘개자식들!’

분노를 삼키면서도 최준후는 의문을 물었다. 프락시안의 푸른 광선무기가 만든 저 결과다. 먼지처럼 흩어버린 게 아니라 폭발시킨 거다. 그 차이가 뭔지 모르지만 짐작이 생긴다. 일부러 저렇게 만들었다는 거다.

‘어?’

프락시안의 건쉽이 뭔가를 떨어뜨렸다. 기체 바닥이 열리고 땅에 충돌한 것은 은빛 금속창살로 이뤄진 케이지다. 그것이 열리고 뭐가 나온다.

‘저건!’

퓨터다.흉악한 사냥본능을 가진 중형 괴수다. 지구에서 저것과 비슷한 것을 봤다. 영화에 나온 육식공룡, 긴 꼬리에 이족보행을 하는 흉악한 놈.

퓌르르르.

퓨터가 흘려내는 숨소리, 사냥을 위한 울음소리가 귀에 박힌 순간 최준후는 승합차 반대편으로 굴러나갔다. 퓨터는 괴물들을 향해 질주한다.

‘한마리가 아니구나!’

어디선가 퓨터들이 달려온다. 분명 다른 건쉽에서 떨어뜨린 놈들이다. 십여마리로 불어난 놈들은 괴물들과 얽혔다. 무서운 싸움이 시작됐다.

‘이런 걸······!’

즐기는 거다. 프락시안 놈들의 유희다. 그리고 그것이 닥쳐오고 있다.

‘이것들이!’

퓨터와 변이자괴물, 동시에 달려온다.최준후는 돌아서 달리며 하늘을 봤다.프락시안의 건쉽이 따라온다. 도심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갔다.

* * *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아침 먹은 걸 치우던 윤미령은 혜진이의 눈을 보고 미소를 피워냈다. 혜진이의 불안과 두려움을 밀어내주려는 미소, 그게 되는지는 모르겠다.

“우리 커피 한잔 할까?”

혜진이를 테이블에 앉힌 윤미령은 믹스커피를 타서 내놓았다. 소중하게 잔을 감싸 쥐는 혜진이를 보며 자신도 그렇게 하고 있음을 알았다.하찮고 흔하던 것, 그러나 이젠 다시 맛보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 된 거다.

“세상은 망하는 걸까요?”

다시 나온 혜진이의 목소리는 가는 떨림을 품고 있었다.저 두려운 마음을 안다.이제 성년으로 접어드는 나이, 그만큼만을 살았다.자신이 알던 세상이 무너지는 걸 보고 있는 거다.죽음은 생각해 본 적도 없다.그런데 죽음이 곁에 있다.최경철이 죽었다. 사람들이 괴물이 돼서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고아라는 불우함을 비관하며 언뜻 품었던 죽음과는 완전히 다른 죽음이다.살아서 이런 걸 겪을 줄 꿈에도 생각 못했다.

“세상이 망하길 바랐던 적이 있었어.”

나직하게 나온 윤미령의 말에 혜진은 미간을 좁혔다. 원장엄마라고 부르는 윤미령, 큰 언니 또래 밖에 안 되는 저 당찬 여자가 할 말이 아니다.

“아버지가 친딸인 나 말고 다른 아이들을 더 위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랬지······”

이어 나온 윤미령의 목소리와 서글픈 미소로 혜진은 알았다.

‘그런······’

원장엄마 윤미령도 사람이다. 슬프고 화나고 힘들고, 똑같은 감정에 괴로워하는 거다. 아버지의 사랑을 고아들에게 뺏겼다고 여기면 그럴 거다.

“정말로 괴롭고 슬퍼서 세상이 확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미소를 짙게 만든 윤미령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있지.”

혜진이의 눈을 응시하며 윤미령은 차분하고 따스하게 목소릴 이어냈다.

“화나게 하고 무섭고 슬프게 하는 일들, 세상엔 그런 일들 천지야. 내 마음대로 되는 게 거의 없는 것 같아. 하다못해 태어나는 것도 그래.”

흠칫하는 혜진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윤미령은 계속 말했다.

“난 지금의 이런 모습으로 태어나길 바라지 않았어. 그렇지만 태어났지. 왜 태어났을까, 왜 이런 몰골일까, 집착해 봐도 달라지는 건 없어. 그게 세상이지. 그러니 계속 슬퍼하고 화내는 건 아무 소용없는 짓이야.”

눈자위를 가늘게 떠는 혜진이에게 윤미령은 물었다.

“누구의 잘못일까? 내가 잘못해서일까? 아니면 누가 있어서 날 골탕 먹이는 걸까? 어째서 난 이렇게 태어났고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걸까?”

윤미령은 시선을 내려 커피잔을 응시했다. 잠시 동안 말없이 그렇게 있었다. 그 침묵이 버거워 혜진이가 입을 열려할 때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싫으니까 바꾸는 거야. 내가, 우리가.”

다시 미소를 지은 윤미령은 남은 말을 했다.

“우린 슬프지도 두렵지도 않아. 우리니까.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 * *

호텔 앞 미술관을 맹렬히 달려간 최준후는 상점가로 들어섰다. 퓨터의 맹렬한 스피드를 잘라내는 건 무리다. 이쯤에서 결정을 지어야 한다.

“와라!”

소리쳐 말한 최준후는 상가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계단을 차고 오르는데 퓨터가 출입구에 추돌하며 쫓아올라온다. 그런데 역시 위에도 있다.

“크워억!”

괴물변이자가 계단을 달려 내려온다.네 개의 칼날을 뻗어내는 공격 아래로 최준후는 들어갔다.괴물의 다리를 톱날칼로 베었다.균형이 무너진 놈은 아래로 굴렀고, 퓨터가 달려들어 목을 물었다.머리통이 떨어진다.

‘그래!’

쾌재를 부르면 최준후는 벽을 차고 돌았다. 막 다시 움직이려는 퓨터의 머리를 향해 톱날칼을 뻗었다. 칼날이 폭발처럼 나가 머릴 갈랐다.경련하며 엎어진 퓨터 앞에 최준후는 멈춰 섰다. 그런데 건물 옥상위의 기척을 감지했다. 예감을 확인하기 위해 옥상으로 맹렬히 올라갔다.

‘건쉽!’

삼각형 기체가 내려앉았다. 문이 열리고 프락시안이 나온다. 그런데 이제까지 본 놈들과 다르다. 전신을 은빛 아머로 무장했다. 놈이 돌아본다.

‘이!’

프락시안이 흉악한 눈빛으로 푸른 벼락을 터트리는 순간 최준후는 몸을 던졌다. 옥상 바닥으로 다이빙했다. 뒤의 옥탑출구는 먼지로 사라졌다.놀라는 게 분명한 프락시안의 앞에서 최준후는 굴러 일어섰다.놈의 비구가 다시 벼락을 터트리기 전에 다리를 후렸다.하지만 놈의 아머를 톱날칼은 가르지 못했다. 그렇지만 균형이 무너졌다.놈을 어깨로 받았다.쾅 소리와 함께 뒤로 튕겨나간 프락시안.경악과 분노로 눈을 치뜬 놈이 톱날 칼을 뻗어내는 순간 최준후도 같이 뻗었다.놈의 칼날이 오른쪽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놈은 왼손에 칼날을 정확히 박아 넣었다.

“크악!”

고통에 찬 반응이 터지는 그 찰나 최준후는 톱날 칼을 흔들었다. 프락시안의 왼 손목은 잘려 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그걸 본 놈은 괴성을 질렀다.

“크워어!”

최준후는 머뭇거리지 않았다.놈을 향해 쇄도했다. 안면이 열려있는 헬멧사이로 무릎을 박아 넣었다.머리가 넘어간 놈을 잡고 연속해 강타했다.

“헉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러난 최준후는 경련하는 프락시안을 바라봤다. 드디어 또 한놈을 잡았다는 쾌감을 삼켰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걸 감지했다.

‘저거?’

놈의 비구가 빛을 내고 있다. 심장의 고동 같다. 그런데 그 빛이 건쉽에서도 난다. 그것들을 시야에 넣고 있던 최준후는 옥상을 박차고 뛰었다.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최준후는 쉴드를 생각했다. 톱날의 칼은 면도날로 펼쳐져 최준후의 형상을 휘감아 돌았고, 건쉽의 폭발은 그 위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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