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으로 풍부하게 기를 내 보낸다. 세맥까지 어루만지고, 자연스럽게 내 쉰다.’
가부좌를 틀 필요조차 없다.
모든 움직임이 곧, 내공 수련이다.
복잡한 구결보다, 자연기(自然氣)의 포용에 역점을 둔다.
‘그렇지. 그렇게.’
자하진기 이단공에 접어들면서 가장 먼저 생긴 변화는 기억력의 증대였다.
스쳐지나가듯 들었던 사부님의 가르침들이 환청처럼 들려와 그의 운기(運氣)를 도와주고 있다.
‘아니지. 조금 더 천천히. 그래, 거기에서 풀어주는 것이야.’
사부님.
어쩔 때는 정말로 곁에서 그를 이끌어 주고 계시는 듯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구소공은 육합이야. 오행기는 말 그대로 오행의 힘을 끌어다 쓰는 것이지. 자하진기는 육합도, 오행도, 사상도 아니란다. 자하진기는 음양이야. 음과 양의 이치를 따르면서도 둘을 따로 생각하지 않지. 자하(紫霞)는 곧 노을의 색깔이고, 새벽의 색깔이니까.......음과 양이 교차되는 순간이라 만유의 기운을 모두 품고 있어. 지금까지 있었던 화산파의 심법과는 틀리지. 때문에 이 사부를 좋아하지 않는 장로들도 많단다. 하지만 이 사부는 믿는다. 자하진기는 최고야. 큰 일을 이룰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다.’
‘사부님, 저도 믿어요.’
살아생전 사부님의 앞에서도 그랬듯이, 마음으로 대답하는 청풍이다. 일심으로 연련을 계속하는 그에게는 지속되는 발전과 힘의 축적이 함께하고 있는 중이었다.
‘상, 중, 하단전을 따로 생각하지 않고 온 몸을 하나의 그릇으로 생각하거라. 몸 안의 우주(宇宙)를 느끼고, 스스로 흐르는 것을 거스르지 않는 거야.’
계절이 바뀌며 몇 벌 없는 도복의 두께가 달라질 때, 깊어진 자하진기는 또 한번의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안법(眼法)을 따로 익히지 않았음에도 사물을 보는 눈이 무척이나 밝아졌다.
장운대 무관에서 배우는 화형권과 육합권의 투로가 훤하게 읽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초식이 복잡하지 않는 단순한 무공들.
가장 말단 제자들이 익히는 화형권과 육합검도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절기가 될 수 있다.
다만 보무제자들에게는 기본공을 절공으로 바꾸어 주는 상승 요결들을 가르쳐주지 않을 뿐이다. 화형권 육합권만이 아니다. 처음으로 배우는 비형권이나 이형권 역시 핵심되는 정수를 얻을 수 있다면 뛰어난 무공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거기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었구나!’
청풍은 이제 그러한 상승 요결들을 볼 수 있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권형과 검형 속에서 잡아낼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눈을 확신할 수 있는가이다.
절대 다수의 보무제자들이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홀로 보고 있으니, 스스로의 깨달음이 옳은 것인지 확인할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수련 사부께 여쭈어 보기에는 왠지 꺼려지는 바가 있다.
수련 사부에게 묻는 것은 어딘지, 스스로가 자하진기의 공능을 의심한다는 느낌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단공에 이르면 비로소 무공이 무엇인지 볼 수 있을 것이란다. 단순한 투로가 아니라 그 실체가 보인단 말이야.’
‘눈에 담아 둘게요. 제 눈을 믿어야죠. 기(氣)는 강한 믿음에서 연공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눈이 트이는 것에 이어, 청력, 미각, 후각, 촉각, 오감(五感)이 발달하였고, 특별한 수련을 하지 않음에도 근력과 유연성이 증대되었다.
십 사세, 한참 성장하고 있을 나이.
커가면서 이상적인 근골이 될 수 있도록, 자하진기가 그의 몸을 바꾸어 놓고 있는 것이었다.
“취운암에서 나와 주어야 되겠다. 이제 와서 정진암 숙소로 들어가기도 내키지 않을 터이니, 서벽의 풍암당(風庵堂)을 내어 주마.”
사부님과의 거처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풍암당은 멀다.
장운대에서 무공들을 배우고, 오일에 한 번 씩, 노부암 학연당(學硏堂)에서 학문을 습득하기 위해 오가려면 봉우리 두개와 오리에 걸친 긴 능선을 지나쳐야 된다.
“예. 알겠습니다.”
청풍은 일언반구 불평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쉽게 하지 못하는 편인데다가, 거처를 옮기는 것도 기실, 별반 대단할 것이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어차피, 사부님도 안 계신 곳이니까.
이 순간의 청풍.
어린 시절 모두를 그곳에서 보냈지만, 그것을 깊은 추억으로 받아들이기엔 아직은 어린 나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직도, 다른 장로를 모시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게냐?”
“예.”
“진심으로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어서 운대관에나 응시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너 역시 약초 채집과 부옥 수집에 참가해야만 한다. 규율이기 때문이다. 일년 가까이 규율을 어기며 배려를 해 주었지만, 더 이상은 안 돼.”
“알았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그다지 운대관, 서검수에는 미련이 없었다.
차라리 풍암당 먼 곳으로 가는 편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거기서 라면 더욱 더 자하진기에 전념할 수 있으니까. 기실, 취운암은 장운대와 너무 가깝고, 오가는 사람들도 많아 집중에 방해되는 바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무공 수련에 별반 의욕이 없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검문 제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할 바에는 도문(道門)에 몸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게다. 사부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성심껏 수련하는 제자들의 분위기는 망치지 않았으면 싶다.”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절도와 극기를 강조하는 정원진인이다.
상처받을 만도 한 이야기였지만 청풍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착하고 순하지만 그렇다고 나약한 심성을 지닌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내일까지 풍암당으로 가겠습니다.”
절도있게 포권을 취한 청풍을 보며, 정원진인은 당연하다는 듯 손을 들어 답례하고는 몸을 돌려 사라졌다.
역시나 화산파다.
지금까지 취운암에서 있을 수 있었던 것도 감지덕지하라는 듯한 느낌.
확고하게 잡혀있는 원칙대로 움직이는 내사(內事)에는 최소한의 예외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도 아쉽기는 한가 봐요. 사부님.’
취운암.
연화봉 기상 높은 바위들 밑으로 매화가지 세 줄기 늘어뜨린 곳.
기억나는 모든 시간들이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청풍은 마음을 다 잡으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사부님은 자하진기를 남겼고, 그것만으로도 그는 사부님과 함께 있다.
장소 따윈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다음 날 풍암당으로 향하는 청풍의 눈에 그렁그렁 맺혀 있는 눈물은 왜일까.
생각과 감정. 항상 같이 움직일 수는 없는 이치에, 소년 청풍은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넘기며 새로운 곳,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 * *
“너는 누가 가장 괜찮은 것 같아?”
“글쎄. 하운 사형도 괜찮고, 동한 사형도 좋고.”
“동한 사형은 너무 냉담해서 싫어. 게다가 본산제자고........”
“나랑은 다르네.”
“성일 사형은 어때?”
“글쎄. 성일 사형은 아직 선검수지 않어?”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매화검수쯤 되면 이미 사람이 아니잖아.......종일 무공에만 매달리고.......”
“하긴.......역시 그러면 매사형인가?”
“매사형 정도면 최고지. 하지만 매 사형도 곧 매화검수가 되어 버릴걸? 본산제자도 아니면서......곧 소요관에 도전한대.”
“매 사형이 나이가 어떻게 되지?”
“우리보다 한 살 많아. 열 일곱이라고 들었어.”
“근데 벌써 매화검수라고? 속가면서? 너무한 것 아냐?”
“게다가 얼굴도 잘 생겼잖아. 본산제자처럼 투박하지도 않고 말이지. 진이가 그러는데, 품행도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대.”
“심하다.......추영 언니 쯤은 되야 바라 볼 수 있겠네.”
“얘는........추영 언니가 어디 그런 데 신경 쓸 사람이니?”
“그렇긴 해.”
“아휴........운대관도 그렇게 어려웠는데, 우리는 언제나 천화관에 도전할 수 있지? 매 사형이나 하운 사형이나, 벌써 저만큼 멀리 가 버리고.......”
“모르지. 추영언니가 옥녀검법 펼치는 것 본 적 있는데, 우리랑은 너무 너무 다르더라.”
“나도 봤어. 정말........아휴.........”
“아! 그런데 말야. 너 그 이야기 들었니? 그렇게 잘 생긴 애가 하나 있다던데.”
“그래? 또 누가?”
“청풍인가.......평검수 언니들 사이에선 유명해. 우리들 선검수까지는 남자 제자들이 있는 장운대나 옥천각 근처엔 얼씬도 못하니까. 본 언니들 말로는 정말, 굉장히 잘 생겼대. 눈에 확 띌 정도라던데?”
“그 정도야?”
“근데 말이지. 걔 말야. 아직 보무제자래. 열 여섯인데.”
“뭘 아직이니? 우리랑 같은 나이잖아. 우리도 운대관 통과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뭘.”
“아니야. 걔 있잖아. 원래 장로님 직전이었대. 보통 장로님들 직전이면, 최소한 작년에는 선검수까지 올라갔어야 하잖아.”
“고작 일년 가지고.......”
“어머, 일년이면 얼마나 큰데. 다른 장로님들 직전 중에 열 여섯까지 보무제자인 애들은 아무도 없어. 물론 좀 문제가 있기는 하다지만.”
“문제? 아, 혹시 걔가 그, 돌아가신 선현장로님 제자였니? 그, 다른 사부님들 모시는 것 전부 거절했다던.......”
“그 애 맞아, 들어 본 적 있지?”
“잘생겼다는 건 몰랐어. 그 애가 그 애 였구나.”
“음.......근데 말야.......잘 생긴 것은 언니들이 다 그러니까 그렇다해도, 걔 좀 이상한 것 갖지 않니? 그 때부터 생각했었는데.......직전 제자 자리도 거절해 버리고.”
“모르지. 그거야. 뭐.......나름대로 낭만적이지 않아? 옛 사부님을 잊지 못해서 다른 사부는 못 모시는 어린 제자, 그런 거.”
“어머, 어머. 설마 정말 그럴라구......혹시........실상은 다른 장로님들이 모두 안 받아 주려 했다거나 그런 것 아니겠어?”
“에이. 너무 불쌍하게 보는 것 아냐?”
“그럴 만도 하지. 그 선현 장로님도 장로님들 사이에선 그렇게 인정받는 분이 아니셨다는데 뭘. 그 제자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쩜.......얄밉기는.......니가 더 심하다.”
“아니,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그런 것 가지고 눈을 흘기고 그러니?”
“화내지 마. 화산파 계율 십 이계. 화산파 제자들은.”
“동문끼리 다투지 않는다. 알아. 알았어. 요것아. 그나저나 어떤 애인지 되게 궁금하다. 얘.”
“그러게. 걔 얼굴 보기 위해서라도, 얼른 천화관 시험을 통과해야 되겠다.”
“맞아. 매 사형 얼굴도 보고 말이지.”
끝에는 서로 손을 부여잡으며 웃음을 터뜨리는 여제자들이다.
화산파의 여제자 수는 전체 남자 제자들의 십 분지 일 정도. 숫자는 적다지만 그 중 매화검수까지 올라가는 제자들이 의외로 많은 편이다.
현 이십사 명 매화검수들 중에도 여 제자가 네 명이나 있으니까.
이유는 간단하다.
대부분의 여제자들이 태생부터 무가(武家)의 여식이거나, 화산 속가제자들의 여식들이었니 기초가 탄탄하는 점.
어차피 매화검수는 후기지수 때나 받는 호칭, 어린 시절의 수련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화산의 무공 자체에서도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본래 화산파의 검법이 날카로움에 정교함을 중시하는 무공이라 다른 문파의 무공들에 비하여 여인들이 익히기에 유리한 면이 있었다.
화산파의 여제자들.
엄격한 규율과 관리 속에서, 생활하는 그녀들이다. 하지만 십대 소녀들의 마음이란 어떤 곳에서 무엇을 배우든 비슷한 모양이었다.
남자 제자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뛰어난 사형제들에 대한 동경.
그런 여제자들 한 켠에서 나름대로 큰 화제가 되고 있는 청풍이다.
하지만, 십 육세 청풍이 지닌 것은 그 돋보이는 외모뿐이 아니라는 것을.
아직까지 그녀들, 아니, 화산에 있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 * *
‘쉽지 않다. 쉽지 않아.
내공 심법의 깨달음이란 홀로 정진하여 이루어야 하는 법이라지만, 역시나 사부님의 도움 없이 익혀 나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삼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단공에 머물러,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구결의 이해도 충분하고, 내력도 쌓을만큼 쌓았는데,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벽에 부딪쳤다. 어찌해야 할까.’
다른 장로께 여쭈어 보면 해답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 될 말.
‘아니야.’
청풍은 고개를 흔들었다.
최소한의 자존심이다. 열 여섯, 특별한 친우(親友)조차 없이 오직 자하진기만을 벗하며 살아온 그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사부님이 화산파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기공(氣功)만을 고집하다가 결국 비무에서 패배하여 돌아가신 분. 화산파의 자존심을 깎아먹은 치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그런 것은 귀를 닫아놓는다고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이야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말들을 듣고 있으면서,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 자하진기는 사부님의 일생이 걸려있는 유작(遺作)인 것이다.
‘혼자 해야 돼.’
어찌 보면 어린 마음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사부의 고집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일까.
자하진기의 완성을 위해 융통성을 보이는 것. 청풍은 아직 성장하지 못했다. 청풍의 마음은 선현진인이 죽었을 때, 그 때 그대로, 마치 사부가 살아있는 것처럼,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까닭이었다.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안은 채, 장운대로 향한 청풍이다.
‘아! 오늘부터였나.’
바로 어제까지와는 다른 풍경이다.
화형권과 육합검법을 연마하는 대신, 모두 다 행낭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늘부터는 경공 수련이다. 화영보(花影步) 구결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날이 저물 때 까지 황석곡에 가서 경석을 모으고 돌아온다. 인솔하는 매화검수를 잘 따르도록.”
“예!”
보무 제자 이백이 절도 있는 대답소리를 울렸다.
경공 연마를 구실로 이백 여명이 경석 수집에 나서면 나머지 이백여 제자들은 이 장운대에서 무공 수련을 계속한다. 십일의 경석 수집이 끝나면 교대다. 그 다음 십일 동안에는, 장운대에 남았던 이백여 제자들이 약초 채집에 나서게 되는 구조였다.
청풍은 선발대다.
바로 오늘부터, 경석 수집에 나서야 했다.
‘시간이 아까운데.......’
청풍은 이미 두 번이나 이 경석 수집에 나가본 적이 있다. 상당히 곤욕스런 작업, 청풍은 사부의 죽음이후 처음으로 선검수로 진급하는 운대관 시험을 생각했다.
‘시험을 봐야 하나. 역시......’
그러고 보면 청풍의 나이도 이제 보무제자들 중, 적은 편이 아니었다.
십 이삼 세 보무제자들도 꽤 되는데다가, 계속하여 어린 제자들이 들어오고 있는 중이다.
아래에서 많아지면 위에서 잘려나가는 이들이 있어야 하는 법.
이십 세 까지도 운대관을 통과하지 못하고 보무제자에 머무른 이들은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해 대부분 하산하기 마련이었으며 십 칠 팔세만 되도 스스로의 한계를 느낀 제자들이 하나 둘 빠져 나가, 전체 보무 제자들의 숫자는 사, 오백 명 선에서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탁! 탁! 타타탁!
황색 도복 이백여 제자들이 질서 정연하게 장운대 수련장을 빠져 나왔다.
가파른 길을 따라 길 아닌 길을 넘고, 보법을 펼친다.
워낙에나 험한 산길이라, 경신술의 숙달 없이는 함부로 다닐 수 없다. 어린 보무 제자들이라고 특별히 챙겨주는 것은 없었으니, 굉장히 엄하면서도 효과적인 수련방식이 된다.
구결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하지 못하면, 낙오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보무 제자들이 화영보의 구결을 되뇌이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단 하나 청풍을 제외하고는.
‘더 진중하게. 마음을 조급하게 갖지 말고.’
청풍은 화영보의 구결을 따르지 않았다.
항상 그렇듯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하진기 뿐이다.
화영보와 비슷한 동작을 쓰고 있기는 하다. 다른 이들 사이에서 굳이 눈에 띌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청풍이 움직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하진기의 운용에 의해서다. 진기의 흐름 대로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자신만의 세계에만 빠져들어 있는 것이었다.
탁, 타탁.
“거기 조심! 가파르다.”
앞과 뒤에는 각각 매화검수들이 하나씩 따라붙어 있다.
청량한 목소리. 한 매화 검수가 이백 제자 모두에게 들릴 소리로 말을 이었다.
“보폭을 작게 해라. 구결 암송을 잊지 마.”
그들의 역할은 보무제자들의 인솔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인솔 뿐 아니라, 경신술 수련의 사범 역할도 겸하는 것.
특히 힘들어하는 제자들을 보면, 보법 활용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고, 전체 일행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확실히. 매화 검수는 다른 것 같다.’
요즘 들어 특히 느끼는 바다.
자하진기가 이단공의 막바지에 이르러 감각이 예민해진 점도 있겠지만, 그렇게 진기로서 느끼는 것 이외에도 매화검수들에겐 확실히 다른 제자들과 구별되는 특질이 있었다.
잘 벼려진 명검(名劍)과도 같은 기도다.
이십 대 정도의 후기지수들, 기껏 십년, 또는 십 수년의 차이밖에 없음에도 어떻게 그렇게 고강한 기운을 발할 수 있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자하진기를 얼마나 더 익혀야 저 수준에 이를 수 있을까?’
한참 걸릴 것이란 생각이 든다.
자하진기가 최고라는 사부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겠지만, 문제는 청풍 자신이 느끼는 스스로의 자질이다. 스스로 천부적인 무재(武才)라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자하진기 하나만을 익히기에도 벅찬 마당이다.
워낙에 화형권, 육합검의 투로를 등한시 한 바가 없지는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또래의 제자들과 화형권, 육합검 비무를 할 때면 겨우 겨우 패배만을 면할 뿐,·통쾌하게 이겨본 경험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직 멀었나보다. 나는.......’
흔들리는 눈빛에 안타까움이 묻어 나온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도 모른 채.
청풍은 자하진기를 모른다.
제 단전 안에 축기를 이루고 있는 진기의 수준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자하진기는 신공(神功)이다.
신공에는 신공에 어울리는 비기(秘技)가 필요하다.
진기를 활용할 수 있는 무공만 제대로 익힌다면, 다른 보무제자들은 결코 청풍의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가르치는 무공들이 문제인 것이다. 비형권이나 화형권 정도로는 안 된다. 그 안에서도 나름대로 상승 요결을 끌어낼 수 있는 청풍이었지만, 그것으로는 진신 내공을 끌어낼만한 진결이 부족한 까닭이었다.
‘뭐, 늦으면 어때. 언제든 될 수 있겠지.’
몇 걸음 더 가파른 산길을 타 내리는 사이, 청풍은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달리 했다. 조급함을 떨쳐버린 맑은 눈에 더 이상 실망감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내공은.......경쟁하기 위해 익히는 것이 아니니까.’
낙천적인 성격이다.
이 역시 자하진기와 함께 사부님이 남겨준 것, 천성적으로 선한 심성에 더해진 또 하나의 장점이라 할 수 있었다.
휘이이이잉.
주홍색 바위를 타고 부는 바람이 황석곡에 거의 다 이르렀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조금 더 가자 조그만 정자 하나가 보인다.
적색 기와, 분홍 장식이 조화로운 색조를 띄고 있는 매화정(梅花亭)이었다.
황석곡 측면 능선에 위치한 매화정은 화산의 장중함을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명지다.
하늘 높이 솟은 연화봉과 운대봉을 한눈에 담아둘 수 있는 곳, 쉬어가는 구름이 머무는 아름다운 장소였다.
“다시 정렬하라. 여기까지는 갑조. 여기까지는 을조. 저번에 나누었던 방식대로 움직인다.”
매화정을 기점으로 이백여 제자들은 두 방향으로 나뉘어져 황석곡으로 들어간다. 어린 제자들은 덜 위험한 동쪽 진입로로, 십 오세 이상의 제자들은 북쪽 진입로로 이동해야 했다.
처처처척.
금새 대열을 갖춘 제자들, 생활로 익숙해진 엄정함이었다.
“유 사형, 오랜만이네요.”
매화정을 지나치려니,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발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있다. 뜻밖의 일. 한 명의 여인과 한 명의 소녀가 거기에 있었다.
“연 사매. 오랜만이다. 언제 올라왔느냐.”
연 사매라 불린 이. 매화정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녀는 여인임에도 무척이나 큰 키를 지녔다. 늘씬한 체구에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가니, 그 모습 가히 선녀에 비길 정도라, 그녀를 보는 보무제자들의 눈이 모두 다 휘둥그레졌다.
“어젯 밤에요. 보무제자들인가요?”
“그래.”
“수고 하셔야겠네요. 보무제자들도, 모두들 고생이군요.”
스스로의 위치에도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성정을 지녔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보무제자들을 향하여 웃 음짓는 그녀다.
가파른 산을 탄 제자들의 피로를 한 번에 앗아갈 만큼 시원한 미소였다.
연선하. 매화검수다.
방년 이십 오세, 오년 전 이십 세의 나이에 소요관을 통과한 여걸이었다.
이제 겨우 입문한 제자들이야 모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보무제자들이 그녀를 안다.
워낙에 유명하니까.
잘 알고 있어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천재 여협, 아기자기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뚜렷한 이목구비에 깊고도 맑은 눈을 지닌, 대단한 매력을 발산하는 여검수였다.
“왠 여자 아이냐?”
“하하, 딸 하나 낳았어요.”
약간은 산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밝은 성격을 지녔다.
그 모습에서 섬서성을 떨쳐 울리는 천류검의 달인, 천류여협의 명성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을 듯 싶다. 그래서 더욱 신비로운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멋진 여자였다.
“........그 괴이한 농담은 여전하구나. 상원진인께서 들으셨다가는 징벌을 면치 못할 이야기다.”
“에그, 딱딱하기는. 유사형도 여전하네요 뭘. 이 아이는 그 산서신협 서자강 대협의 장중보옥이죠. 인사드려라. 얘야.”
열 두세 살 정도의 귀여운 여자아이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수줍어하는 기색은 찾아 볼 수 없다. 도리어 한 발 나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서영령이라고 해요.”
맑은 목소리다.
아직은 어리디 어린 소녀지만, 그 얼굴에서 앞으로 대단한 미인이 될 조짐을 볼 수 있었다. 매화검수의 정기어린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태도하며, 움츠러들지 않는 대담한 모습이 또 한 명의 여협 탄생을 예고하는 듯 했다.
“나는 매화검수 유자서다. 대협을 닮은 듯 대단한 기질이 ,보이는구나.”
“감사합니다.”
서영령이 다시 한번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옆에서 서영령의 어깨를 감싸 안은 연선하가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귀엽죠? 나도 나중에 딸이나 낳을까 봐요.”
“누가 너를 데려가겠느냐. 걱정이다.”
“어머, 농담도 할 줄 아네요. 기억해 두겠어요. 서자강 대협은 지금, 장문인을 뵙고 있을 거구요. 아이는 화산 구경이나 시켜줄 겸, 데리고 나온 거죠.”
“그렇구나. 서 대협은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다더냐.”
“잘은 모르겠어요. 저 같은 경우, 저번 강호행 때, 우연히 친분을 쌓을 기회가 있었는데. 마침 이번에 들어오면서 만나게 되었어요. 서 대협 말씀으로는 그냥, 화산파가 어떤지 궁금해서 왔다 하시대요. 영령의 말벗이나 되어 달라고 부탁하시던데........뭐, 달리 말하자면 놀러온 거라 할 수 있대요.”
“그러냐.”
유자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산서신협만한 고수가 아무런 목적 없이 놀러 온다? 화산파에? 모르는 일이다.
산서신협은 그 무공이 화경에 이른 절정 고수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근본 내력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직접 그 무공을 견식해본 사람조차 드물어, 출신 문파, 뒷 배경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경계를 해 볼만한 이라 할 수 있다.
경각심을 일으키던 유자서의 시선이 서영령에 닿았다.
뭐가 어찌되었든 산서신협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온 것은 아닐 것 같기는 하다.
순진한 눈빛의 서영령.
어린 딸이 여기에 있다.
화산파 제자들이 어떤 이들인지 궁금했던 듯, 보무제자들을 하나 하나 찬찬히 훑어보고 있는 서영령이다.
문제를 일으킬 요량이었으면, 이처럼 어린 딸을 동행하고 이곳에 오지는 않았으리라.
“그럼 가 봐야 되겠다. 간만에 보니 반갑구나. 가끔 본산에도 올라오고 그러거라.”
“알았어요.”
매화검수 유자서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재빨리 대열을 수습하고 보무제자를 이끈다. 저녁까지 목표량을 채우고, 장운대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꽤나 촉박하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썰물처럼 이동해 버린 후.
서영령이 연선하를 올려보며 입을 열었다.
“언니. 있잖아. 화산파 제자들 중에도 굉장히 잘 생긴 사람이 있네.”
“누가? 유 사형? 설마.”
“당연히 아니지. 중간쯤에 있던 제자 말야.”
“그래? 누굴 말하는 거지?”
“못 봤어? 눈에 띄던데. 그런 미남은 흔치 않아. 나이가 들면 더 멋있어 질걸?”
“아이고. 못 말린다. 너 몇 살이니? 벌써부터 남자 이야기를 하고.”
“왜 어때서?”
“말을 말아야지.”
“뭐, 언니 눈에는 무공 강한 사람밖에 안 보일테니까.”
“점점.......대체 누가, 얼마나 잘 생겼길래 그래?”
“나중에 한 번 알아봐. 언니. 아마 여기 여제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할걸?”
“내 참. 여기 제자들이 뭐 그런 것 신경 쓸 것 같니?”
“신경 쓸걸? 언니랑은 다르잖아. 언니는 천재고. 다른 언니들은 천재가 아니니까.”
“벌써부터 이렇게 여우같아가지고, 나중엔 얼마나 속을 썩이련지.”
“언니, 정말 알아보고, 꼭 가르쳐 줘야 돼? 이름이 뭔지 말야.”
“알았다. 알았어. 이 꼬맹아.”
어느 봄 날의 매화정이다.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다.
하늘은 그 수레바퀴를 천천히, 그리고 단호하게 굴려나가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