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56)

  

경석은 악기를 만들 때 쓰는 돌이다.  

두 개의 돌을 마주쳐 보았을 때, 소리가 가볍고 맑게 울려야 진짜였다. 둔탁하고 묵직한 소리가 나는 돌들은 아무리 모아도 쓸모가 없었다.

경석을 모으는 작업은 반나절에 걸쳐 진행된다. 

반 나절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황석곡에 널려 있는 돌맹이들 사이사이, 한 발작을 움직일 때도 화영보에 의해 움직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제대로만 한다면 분명 좋은 수련방식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배우는 보무제자들이나 그들을 감독하는 매화검수들이나 그런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매화검수 한 명이 인솔하는 제자들만 백 명.

매화검수들이 그들을 일일이 봐 줄 수는 없다.

스스로 열심인 제자들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 수련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는 것이다.

특히나 청풍은 처음부터 화영보의 연마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무엇을 배우든, 따르는 시늉만을 한다. 내면에서는 온전히 그 혼자서 쓰는 시간이었다.

간간히 떠오르는 약간의 상념들이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자하진기 연마에 전념한다.  

  ‘매화검수.......여자인데도 그렇게 대단하다니.’ 

지금은 잠시의 휴식, 상념의 시간이다.

매화검수 연선하의 모습.

연약한 이들. 여인은 보호해야 할 존재. 사부님께 배웠던 것인데, 그가 본 연선하는 그 가르침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딱, 따악, 딱. 

‘너무 시끄럽구나. 청각을 줄이자. 여긴.......안 좋아. 생각하기에도, 수련하기에도.’

돌을 맞부딪치는 소리가 석벽을 울리며 커다란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안 좋은 돌을 걸러내기 위해 모두가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집중하자. 거의 되었어. 이제 거의 안 들린다.’

오감을 통제하는 청풍이다. 오감을 각각 따로. 청력을 최소한으로 줄여 소음을 막아내고 있었다. 

  ‘훨씬 났구나.’

골몰히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의 손은 경석들을 골라내며 작업을 멈추지 않는 상태다.

장운대에서 무공을 배울 때와 같다.

겉으로는 마치 육합검을 펼치는 것 같아도, 내부에서는 완전히 다른 일이 일어난다.

바깥과 안이 다른 것.

그것이 가능한 것은 자하진기 덕분이다. 

오감과 정신의 분리였다. 

청각을 막아 놓았어도, 몸은 듣고 있다. 보통 기이한 일이 아니었지만, 정작 청풍은 그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모른다. 신비함을 일상으로 만드는 것. 자하진기의 공능이었다.

‘여자.......매화검수.......뭐 매화검수니까 그럴 수 있겠지.’

원래 하던 생각으로 돌아간 청풍이다. 

여인이라도, 강할 수 있다.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헌데........그 여자 아이는 뭘까. 그렇게 어린데도, 내력이 상당한 것 같았는데.......’

연선하의 옆에 있던 서영령을 떠올렸다. 

작고, 어리지만 자유분방한 생기(生氣)가 기억에 남는다. 서영령은 화산파의 제자가 아니다. 미묘한 차이. 청풍은 그런 것도 분간해 낼 수 있었다. 

‘세상은 정말 넓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확실히, 운대관 시험을 보기는 해야겠다.’

선검수가 되어도 넘어야할 관문이 많다.

천화관을 통과하여 평검수가 되어야 비로소 강호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그런 면에서는 보무제자가 선검수보다 더 자유로울지 모른다. 

보무제자에게는 화산파의 진산 무공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입문에서 하산이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선검수는 처음으로 상승 무공을 접하는 위치라 강호행에 큰 제약을 받게 된다. 혼자서는 절대 산 밑으로 내려갈 수 없다. 무공 유출도 유출이지만, 다른 위험도 많기 때문이었다.    

  강호행에 제약을 받는 것을 제외하고는 보무제자들 보다 훨씬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는 것이 선검수다. 적어도 이런 쓸데없는 노동에는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선검수가 되어서 배우는 무공들에 해답이 있을지도 몰라. 더 나아갈 수 있는 길.’

운대관 시험을 고려하게 된 청풍이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없었다.

선검수가 되어도 해답은 없다. 

오행기와 구소공, 암향표, 천류검, 태을검에는 그가 구하는 진결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기(氣)는 느끼고자 하는 사람,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 힘을 빌려준다. 

준비가 안 되었을 뿐. 

그저 청풍은 그 해답이 자신의 안에 이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                     *                      *

   

‘이렇게였나.’

경석의 수집이 끝나던 밤.

마음먹고 시전해 본 화형권은 무척이나 어색했다.

세 번을 연이어 펼쳐보고, 비형권과 이형권도 다시 한번 되 짚어 보았다.

마지막으로 돌아온 화형권에 이르러, 청풍은 문득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뭔가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변한다?’

이상하게 달랐다. 진결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음에도, 그 전의 권형과는 차이가 있다. 상원진인이 보여주던 것과는 어딘지 다른 권법이 되어가고 있었다.

‘왜지?’

비무 할 때는 이렇지 않았다.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이라 생각하고 권형대로만 내 뻗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몸, 진기가 저절로 그를 이끌고 있다.

화형권의 투로 그대로가 아니라, 조금 더 빠른 궤도, 조금 더 날카로운 기세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 이것은?’

그 뿐이 아니었다. 권각을 휘두르다 보니, 화형권의 도중에 비형권의 동작과 구결이 끼어들었다. 조금 더 지나자 처음 배웠던 이형권의 구결까지 섞여 들어왔다..

파악.

어느 순간, 말아 쥐었던 주먹이 펴졌다.

찌릿 찌릿 팔을 타고 올라간 진기 때문이다. 끝까지 이른 진력이 손가락을 펼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팡! 파팡!

이제 청풍이 펼치는 것은 권법이 아니라 장법이었다. 

공수가 자유롭게 조화되어 있는 상승 무공.

쳐내는 장력에 날카로움과 정교함이 함께 깃들어 있는 강력한 무공이었다.

‘안 돼.’

도취된 듯 장법을 전개하던 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쳐야 한다. 잘 멈추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끊어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것은 안 되는 일이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정해진 투로에 따르지 않고 함부로 무공을 변형시키는 것은 이 화산파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새 무공의 습득과 연공.

매화검수가 되기 전까지는 금기다.

아무리 큰 깨달음을 얻었더라도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장로들이 직접 가르치는 것이 아닌 이상, 다른 무공을 익히다가는 엄벌에 처해진다.

청풍은 자신도 모르는 새 중대한 잘못을 저질러 버린 것이었다.

‘어째서일까.’

규율을 어긴 마당이다.  

그럼에도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더 알고 싶은 기분, 파고들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움직였어.’   

느꼈기 때문이다. 

전에 없던 자하진기의 요동을 감지했다. 새로운 무공, 새로운 진결. 지대한 유혹일 수밖에 없었다.

‘펼쳐 볼 수 없다면 생각해야 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무엇이 자하진기를 움직이게 만들었는지.’

삼단공으로 치고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좌공, 입공, 동공만으로는 부족하다. 

뭔가 계기가 있어야 되는데, 그 실마리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자하진기의 구결을 곱씹으며,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 이형권, 비형권, 화형권의 투로를 검토해 본 것도 물론이다.

‘세 무공, 처음부터 하나였는지도 몰라.’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느낌이다. 

점차 그 실체에 접근해가는 청풍은 장운대에서 있었던 육합검법의 수련을 건성으로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다시 한번 그것을 펼쳐 보기로 결심했다.  

풍암당 앞 조그만 공터, 사위를 분간하기 힘든 어두운 밤이다.        

야조(夜鳥)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올 때.

‘아무도 없는 것 맞겠지.’

청풍은 주위를 면밀히 살핀 후, 생각해 놓았던 구결들을 재차 떠올려 보았다.

누가 보면 큰일이다. 풍암당 안에서 펼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너무 비좁아, 어쩔 수 없이 밖에 나왔다.

떨치기 힘든 불안감이다.

꼭, 등 뒤에서 누군가 그를 쳐다보고 있을 것 만 같았다.

‘해 보자. 어차피 이 시간에 이 곳에 올 사람은 아무도 없어.’

천천히 이형권의 투로를 밟아가는 청풍.

청풍은 자신의 불안감, 자하진기가 가져다 준, 오감 이상의 감각을 믿는 편이 좋았을련지도 모른다.

그의 뒤, 풀숲 사이 어둠 속에 정말로 청풍을 쳐다보고 있는 두개의 눈동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형권이네.’

두개의 눈동자.

그 주인은 청풍의 투로를 보며 생각했다. 

발을 내 딛는 동작, 주먹을 뻗는 자세가 이형권의 첫 초식, 선권좌보 그대로였다.

‘정말 잘 생기긴 잘 생겼구나. 그런데 이 야심한 시간까지도 겨우 이형권이라니. 무공에 있어서는 그렇게 눈에 띄는 이가 아니라고는 들었지만.......보무제자.......역시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꼭 알아봐 달라는 부탁에 이런 편법을 썼지만, 어느 정도 실망감이 든다.

  잘 생긴 것이야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이 야심한 밤까지 기껏 이형권을 수련하고 있다니, 정말 기대 이하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제법.’

조금 보고 있으려니, 비록 이형권이라고 할지나마 제대로 펼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요결을 확실하게 짚어내고 있다. 보통 이상은 되는 모양이었다.

‘열 여섯........저 때, 내가 익히던 것은 옥녀검이었지. 아마.’  

이형권 정도는 이미 열 두셋 부근에 수련을 끝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남들보다 몇 년씩 앞서나갔었던 바. 그리고 다른 매화검수들도 모두 그런 이들 뿐이라 더더욱 비교가 되었다.

얼굴은 잘 생겼지만, 그것으로 그만이다. 

듣던 그대로.

별반 볼 것 없는 보무제자인 것이다.

‘영령에겐 관심 끊으라 해야겠구나.’

외모 뿐이라면, 흥미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서영령이야 아직은 어려서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좋아하겠지만 얼마 안 있어 생각이 바뀌리라. 영리한 아이였으니까.

‘괜한 걸음이었네. 돌아가자.’

매화검수 연선하. 

시선을 거두려 할 때다. 문득 마지막으로 청풍을 바라본 그녀. 

그녀의 눈이 크게 치떠진 것은 한 순간이었다.

‘저, 저것은!!’

이형권이 변하고 있었다.

권법이 장법으로 전환되며 움직임이 빨라진다. 

장쾌한 몸놀림. 정교한 손속.

잘 알고 있는 무공이었다. 청풍이 펼치고 있는 것은 매화검수들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비기 중의 비기였다.

‘태, 태을미리장(太乙迷離掌)!!’

그녀는 진정으로 놀랐다.  

태을미리장은 장로들을 제외하곤, 단 여덟 명 있는 매화권사들이나 투로를 풀어낼 수 있는 상승의 무공이다. 

자신도 모르게 풀숲에서 일어난 그녀다.

넘실대는 진기의 흐름. 

이것은 진짜다. 흉내가 아니라, 진짜 태을미리장이었다.

팡! 파파팡!

스스로의 무공에 도취되어 그녀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청풍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선하는 놀라움을 가라앉히며 잠자코 청풍의 장법을 지켜보았다.

‘조금은 다르다. 아직 완전하진 않아.’

태을미리장은 태을미리장이지만, 다소 부족함이 엿보이고 있다.

당연한 일일까. 그렇다 해도 충격적인 광경. 이런 것을 보게 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었다.

어느 순간이 되자, 청풍이 고개를 손을 멈추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제대로 되지 않는 듯 하다. 

마치 처음 펼쳐본 것 같은 모양새였다.

“누구에게 배운 거지?”

결국, 직접 물어보고 만 연선하다. 화들짝 놀라는 청풍의 얼굴. 곤란한 표정이 만면에 떠올랐다.

“아.......그것이.......”

제 사부에게 배웠을 리는 없다. 

그녀는 미리 들은 바가 있다. 

청풍의 사부가 선현진인이었다는 것.

선현진인이 유명을 달리한지가 벌써 삼년 째다. 

열 셋의 나이에 태을미리장을 익혔다는 것은 제아무리 희대의 천재라고 해도 어불성설이다. 아니, 그만한 천재라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화형권을 연마하다가.......그러니까.......구결이, 섞이기 시작하여.......”

말까지 더듬을 정도로 당황한 청풍이다. 

횡설수설에 가까운 목소리.

연선하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상한 녀석이다. 이리도 잘 생겼으면서, 또한 전혀 예상 밖의 무공을 보여주었으면서, 말하는 품은 또 왜 이런지 알 수가 없었다.

“훔쳐 배우기라도 한 건가?”

물어보는 스스로도 웃기다고 생각한 질문이다.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청풍.  

어리다.

열 여섯이라고 했는데, 눈 안에서 느껴지는 나이는 그 정도가 아니다. 아이의 그것처럼 순수하고도 맑은 빛. 이해하기 힘든 녀석이었다.

“그럴리야 없기는 하지. 그것, 어떻게 가능했는지 말해줄 수 있어?”

태을미리장은 훔쳐 배우려 한다고 훔쳐 배울 수 있는 성질의 무공이 아니다. 게다가 태을미리장을 수련하는 이들이라면 매화권사 이상의 고수들, 청풍 정도가 눈에 띄지 않고서 수련 장소까지 접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하다 보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함부로 무공을 변형시킨 것.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무슨 소리야. 무공의 변형?”

연선하는 또 한번 놀랐다.

“설마하니........너, 그것이 뭔지도 모르고 펼친 거야?”

“예? 예........”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일지.

“태을미리장. 네가 펼친 무공의 이름이다.”

“태을......미리장........”

“보무제자들은 들어본 적도 드물겠지. 본 적은 더더욱 없을 것이고. 다시 한번 정리하자.  그러니까, 네 말은 그냥 화형권을 펼치다 보니, 태을미리장이 나왔다 이거지?”

“예.”

“내 참. 자세히 좀 설명해 봐라.”

연선하의 재촉, 청풍은 능숙하지 않은 말솜씨로 천천히 그 자초지종을 설명해 나갔다. 

화형권에 비형권의 구결이 간섭해 들어오던 일. 

세 무공의 근본이 하나가 아니었을까 했던 가정. 

그리고, 힘이 흐르는 길. 

다 듣고 난 연선하가, 결국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만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몸이 저절로 따라 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청풍 자신도 그 이치를 잘 모르는데.

“그래. 그렇다고 쳐! 그런데 왜 넌 아직도 보무제자야?”

“그것이.......”

“보무제자 수준이 아니잖아. 너.”

“굳이 선검수가 될 필요성은 없다고......하지만 요즘에는 좀......생각이 바뀌고 있습니다.”

“하! 무슨 소리야! 너는 매화검수를 목표로 하지 않아?”

“매화검수도.......특별히........”

“하! 정말 이거........”

거의 화를 낼 듯한 얼굴이다.

선검수를 마다한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매화검수에도 관심이 없다?

말도 안 된다. 

일찌감치 포기한 것이라면 모르되, 그런 것은 아닐 거다.

말 그대로 특별히 염두에 둔 바가 없다는 기색이었다.

‘처음 봤다. 처음 봤어.’

매화검수. 

매화권사.

화산파 젊은 제자들이 예외 없이 지니는 꿈의 지위다.

이미 이루어 놓은 그녀가 잘 안다.

매화검수가 가지는 권한과 자유. 그만한 책임과 의무가 따르지만, 여기까지 올만할 가치가 충분했다.

매화검수는 가장 중요한 화산파 십이 계율 이외엔 모든 면에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다. 문파의 허락 없이도 혼인할 수 있으며, 협의에 어긋나지 않는 한, 어떠한 비무와 살인도 가능하다. 

그 뿐인가.

화산파의 어떤 무공이라도 배울 수 있고, 제자를 가르칠 수도 있다. 필요한 돈, 은자는 쓰고도 남을 만큼까지 얼마든 제공되며, 무엇이든 부족함이 없도록 온갖 혜택이 주어진다. 

엄정한 화산파의 규율 속에서, 이렇게 멋대로 남자 제자들의 거처를 들락거릴 수 있는 것 역시 그녀가 매화검수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평검수나 선검수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

혼인은커녕, 이성을 만나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어느 것 하나에도 소소한 제약이 따르니, 누구든 기를 쓰고 매화검수가 되길 원하는 것이다.

“내 눈으로 본 것이니까 믿을 수밖에 없지만, 글쎄.......이것을 알리는 것이 좋을지는 잘 모르겠다. 받아들이기 힘들거야. 어떤 조치가 취해질지........”

“.........”

“그래서, 운대관에는 지원할 생각이 있다고?”  

“예.”

“아서라.”

“예?”

“내 생각엔, 차라리 이곳에서 무공을 다듬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운대관과 천화관을 단번에 통과할 수 있다면 모르되, 선검수는 어떤 면에서 도리어 보무제자들보다도 못한 점이 많어. 모든 것이 단체 생활로 이루어지거든. 겪어 보지 않으면 몰라. 배우는 무공은 보무제자로서 배울 때보다 훨씬 뛰어난 것들이지만, 너에게  필요가 있을지는 의문이 들어. 어떤 무공도 태을미리장에는 비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거기서도 할 수 있지 않나요.”

“옥로암 생활은 그런 것이 아니라니까. 아, 남자 제자들은 옥천각이었던가. 여튼, 거기에 들어갔다가는, 아마 태을미리장을 다시 펼쳐볼 기회가 없을 거야.”

“........”

“잘 생각해. 오늘 너는 경솔했어. 내가 아닌 다른 이였으면 집법 장로님께 보고부터 했을 거다.”

“예.......”

“난 재능을 지닌 사람을 알아. 너한테는 그게 보여.”          

“.........”

“여기까지 올라와. 매화검수까지. 검을 잡고 싶지 않다면 매화권사로라도. 선현진인께서 남기셨다는 심법도 어느 정도일지 궁금하니까. 여기까지 올라와서 진인의 역작(力作)을 증명하는 거다. 이번 일을 눈 감아 주는 대신에 꼭 이루어야 되는 약속이야. 알겠지?”

연선하가 시원스런 웃음을 지었다. 

신뢰가 가는 여인이다. 어머니가 있다면 그런 느낌일까. 엉뚱한 생각이었겠지만, 청풍이 느끼는 바는 그러했다. 사부님 이후, 진심으로 대해주는 첫 사람. 청풍은 굳게 고개를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해야 할 일.

새롭게 나아가야 할 목표가 그 싹을 틔우고 있는 중이었다.

  

시간은 빠르고도 빠르게 지나갔다.

삼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청풍은 태을미리장을 또 한번 변화시켰다.

여전히 보무제자로 머무른 채, 계속되던 수련이다.

자하진기는 마치 태을미리장의 진결을 흡수해 버리기라도 하듯, 하나 하나 동작들을 지워버리더니, 종국에는 좌공 처럼 진기의 흐름을 보조하는 운공법으로 바꿔놓고 말았다.

청풍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형(形)은 사라지고 기(氣)만 남았다.

그날 이후에도 몇 번인가 더 찾아왔던 연선하, 강호로 나가버려 일 년 째 만나지 못한 그녀도 태을미리장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을 알면 크게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어찌 보면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을지.

저번에는 그저 태을미리장이었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행여라도 누군가 알게 되면 쉽게 넘어가지 못할 터다. 

어겨서는 안 되는 금기.

하지만 한편으로는 잘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태을미리장의 본모습일 것 같은 느낌이다.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운공 속에 녹아든 것이야말로 태을미리장, 아니, 태을미리공의 진정한 실체인 것 같다는 말이었다.

태을미리공을 받아들인 자하진기의 성취는 어느 새 삼단공의 초입을 훌쩍 넘어서 버렸다.

삼단공.

진기의 활용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상태. 범위를 확장시켜나가던 청풍이 다음으로 손대게 된 것은 다음 아닌 육합검법이다. 하루가 다르게 진화해 가는 청풍, 육합검법에서도 새로운 무공을 발견해 냈다.

‘이렇게 움직이면, 음. 맞아. 이렇게다.’

목검을 휘두르는 기세가 굉장하다.

약관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는 청풍은 이제 누가 봐도 감탄이 나올 만큼 헌앙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여전히 진신 실력을 발휘하지 않아, 보무제자들 사이에서는 그냥 그런 정도로 평가받는 중이었지만, 작년부터 새롭게 장운대 사부를 맡은 소현진인은 청풍에게서 뭔가를 느낀 듯, 최근 들어 다음 운대관 응시를 권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셋인가?’

매일 같이 두 번 이상 주변을 살피고는 수련에 들어간다. 수련을 할 때도 동작을 최소한으로. 오감을 열어두고 누가 접근하든 반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이거다. 육합은 압축될 수 있어. 이것이 핵심이다.’ 

육합검법에서 뽑아낸 것은 삼(三)이란 숫자다.

육합 십이장, 삼십 육초가 삼장 구초로 최적화 시키고 나자, 종전의 검법보다 훨씬 강력한 검법이 나왔다.

검법을 이해하는 것은 태을미리장보다 어렵다. 

순수한 육체로 발하는 기(氣)가 아니라, 검(劍)의 기(氣)를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무공과 씨름하던 청풍은 뒤에서 들려온 맑은 목소리를 맞이했다.

연선하.

오랜만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이었다.

“이번에는 삼릉검(三凌劍)이네. 홀로 매화삼릉검(梅花三凌劍)을 익혀내는 보무제자라니. 다들 신기해 할 거야.”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오용 사현.

소요관에서 시험하는 오용 중에 암행(暗行)의 관문이 있는 만큼, 마음먹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매화검수는 제아무리 자하진기가 뛰어나도 아직 잡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러게.”

“일이 많으셨나봐요.”

“응. 강호 전체가 난리야. 지금.”

“무슨 일 있었습니까?”

“있었지. 온갖 기이한 요물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가지고.”

“요.......물이요?”      

“장강의 교룡출세 몰라? ‘교룡출세 이후, 수많은 영물과 귀물들이 출현하니 상서로운 징조일지 환란의 징후일지 알 수가 없도다.’ 요즘 강호는 온통 이 이야기뿐이야.”

“이상한 이야기네요.”

“이상한 이야기지.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기도 하고. 아무도 안 가르쳐 줬지? 여하간 보무제자들에 대한 대우가 너무 박한 것 같아. 뭐 알아봤자 좋을 것도 없지만서도.”

“대단히 골치 아픈 일이었던 모양이에요.”

“그래. 이 화산에서도 몇 놈 나타났었다는데. 어찌 조용조용 잘 처리한 모양이야. 듣기로는 나타난 귀물들도 이 연화봉 주변에는 얼씬도 못했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다들 몰랐던 것 같아. 도문에서는 꼭꼭 숨겨 두었던 매화술사들을 처음으로 내 놓았다는 이야기도 들려.”

“예에......”

그러고 보면 몇 달 전, 갑작스레 약초 채집과 부옥, 경석 수집이 한참 동안 중단된 적이 있었다. 무슨 괴사(怪事)가 있었다는 것 같았는데, 청풍으로서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신경 쓰지 않았었다. 도리어, 홀로 수련할 시간이 더 생겼다고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육합검이 매화삼릉검의 기초라는 것은 평검수가 되어서야 가르치는 부분이야. 거기까지 이른 것을 보면, 확실히 넌 능력이 있어. 아무도 일러주지 않은 상태에서도 삼릉검을 찾아낸 제자는 이제껏 몇 명 없었다고 하거든.”

“그런가요.”

“그래. 이제 슬슬 천화관을 생각해도 되겠어. 무공이야 충분하지만 문제는 나머지야. 오용 중 무공을 뺀, 전술, 암계, 추적, 암행. 이것들, 하나 하나가 무척 어렵지. 다음은 사현인데, 의협과 도학은 그렇다 쳐도, 지식과 지략 두 가지는 굉장히 힘들어. 오랫동안 준비해야 할거야.”

“오용 사현은.......아직 육력도 다 못했는데요.”

“오용 사현을 전부 습득했다 하면, 운대관 육력은 아무것도 아니야. 문제는.......운대관과 천화관 시험을 한꺼번에 보려면 한참 기다려야 된다는 것이지. 운대관이야 수시로 열린다지만 평검수 숫자도 자 차버렸으니, 이번 해 천화관 시험은 아마 없을거야. 내년에도 없을 수 있고.”

“아, 이번 해에는 없나요?”

“응. 내년에는 종남과 화산의 정기적인 회합이 있거든. 저번에 종남이었으니, 이번에는 화산에서 하겠지. 그것 때문에라도 천화관은 미뤄질 거야. 회합 때에는 대대로 두 파사이에 비무 시합을 하게 되는데, 거기에 나가는 것이 주로 평검수들이거든. 천화관을 막 통과한 제자들을 당장 내보낼 수는 없으니까, 새로운 평검수들을 뽑지 않는 것이지.”

“그렇군요.”  

“차라리 잘 되었어. 어차피 준비하는 데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니까. 아니면,  천화관 뿐 아니라 아예 소요관까지 한번에 돌파해 보는 것도 괜찮고. 보무 제자에서 곧바로 매화검수라면 정말 대단한 주목을 받겠지. 필요한 서적들은 내가 구해다 줄게.”

조그만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던 연선하가 몸을 일으켰다. 

몸을 돌리는 그녀. 청풍이 옆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마음 써 줘서, 고마워요.”  

진심이 깃든 말이다. 잘생긴 외모는 차치하고서라도 마음을 다 내보여 줄 듯 꺼내 놓은 목소리는 가히 비교할 데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승사자의 얼굴에도 미소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큼, 맑고도 듣기가 좋았다.     

“아, 잊을 뻔 했다. 이것, 너에게 전해주라던데.”

연선하가 미소로 청풍의 말에 화답하고는, 주섬주섬 하나의 물건을 꺼내어 내밀었다.

“이게 뭐죠?”

“목걸이. 여기서 난 부옥으로 만든 거라더군.”

우윳빛 옥석(玉石)을 길쭉하게 세공하여, 굵은 태사(太絲)줄에 매달아 놓은 목걸이였다.

“누가 이걸........”

“그러니까 네가 감사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 목걸이를 준 아이라 이 말이지. 그 아이가 그랬어. 널 더 멋있는 남자로 만들어 달라고 말야. 원래는 매화검수로 올라올 때까지 손을 대지 않으려 했는데, 하도 재촉을 하더라고.”

“예? 아니, 무슨.......”

“잘 해봐. 나와 한 약속과는 별개니까.......나한테는 네 성취만 보여주면 되지만, 그 아이는 더 많은 것을 바랄지 몰라. 매화검수가 되어 강호로 나가면 만날 수 있을 거야. 그 때 쯤 이면 그 아이도 미녀가 되어 있을 거다.”  

청아한 웃음소리만을 남긴 채,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지는 연선하다. 

청풍으로서는 혼란스러울 따름. 

목걸이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일단 품속에 간직해 두었다.

‘언젠가는 돌려줘야겠지.’

그로서는 받을 이유가 없다. 문득, 이년 전 매화정에서 보았던 서영령이 떠오른다. 

왠지 모를 느낌. 나름대로 근거 있는 추측이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실제로 그녀이든. 다른 누구이든지간에, 딱히 기꺼운 일은 아니다. 도움을 주겠다는 것은 진실로 고맙지만, 이런 방식이라면 사양하고 싶었다. 

자하진기.

그것 하나면 된다. 그저 지켜봐 줄 뿐인 연선하의 존재까지. 그 이상은 필요 없었다. 그 홀로도 잘 해 낼 수 있는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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