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검(白虎劍).
사방신검(四方神劍) 중 서방검(西方劍).
서천신검(西天神劍). 백호신검(白虎神劍).
검인(劍刃) 백색. 재질(材質) 불명(不明).
검신(劍身) 이(二) 척(尺) 삼(三) 촌(寸).
검병(劍柄) 구(九) 촌(寸).
검폭(劍幅) 사(四) 촌(寸)의 양수검(兩手劍).
동방(東方) 이족(異族)의 고대(古代) 병기(兵器)라는 설이 있음.
파마(破魔)의 공능(攻能)이 지대하여, 어떤 귀물(鬼物)도 접근할 수 없다 전해짐.
연(連)이 닿는 자에게 무공(武功)을 선사한다는 전설이 함께 함.
마기(魔氣) 봉쇄 능력. 내력(內力) 증폭 능력 유(有).
제작자 불명.
한백무림서 병기편(兵器篇)
제 일장 검(劍) 중에서.
이십 삼 세.
청풍은 아직까지도 보무제자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천화관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화관 시험 자체가 없었으니, 새로운 평검수도 없다.
청풍으로서는 선검수에 뜻이 없는지라, 천화관을 기다리며 보무제자로 눌러 앉은 상황인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삼년 전에 있었던 종남과 화산의 회합 결과에 기인한 일이었다.
평소처럼 이겼더라면, 정상적으로 천화관이 치루어 졌을 터.
져버린 것이 문제였다.
이년이나 삼년. 정기적으로 벌어지는 대무(對武)의 회합이다.
장장 삼일 간에 걸쳐 진행되었던 삼십 번의 비무.
화산파는 십이승 밖에 챙기지 못하면서 이십여 년 만에 첫 패배를 기록하고 말았다.
무승부가 네 번. 십 사패.
근소한 차이지만, 졌다. 그것도 화산 본산에서 일어난 패배였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만큼, 교류가 잦고 서로 간에 경쟁의식이 강한 두 문파다.
구대 문파의 두 곳.
선의의 경쟁을 벌이던 그 동안 화산파는 언제나 승자의 위치에 있었다.
두 회 이전에는 이십 번 비무에 십팔 승의 압승을 거두었었으며, 바로 그 전 회합 때도 삼십 번 비무에 이십 이 번의 승리를 얻어냈었다.
근 이십년의 세월동안 한번의 패배도 없었을 정도.
헌데, 그 때는 달랐다.
졌다.
그 동안의 전적을 생각한다면, 참담하다고 할 정도의 결과였다.
안이했던 마음가짐에, 절치부심한 종남파다.
예정된 결과?
아니다. 전에도 마찬가지. 종남파는 이기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었고, 화산파는 승리자의 입장에서 여유로움을 보였었다.
그러면서도 쭉 이겨왔다. 받아들이는 인재의 숫자, 보유하고 있는 고수들이 많은 까닭이었다.
그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예상은 깨졌다.
종남파는 여전히 화산파보다 적은 규모에, 지닌 바 힘도 약했지만, 이겼다.
상황이 변한 것이다.
화산파 장문인은 이 일을 전에 없이 중대한 사안으로 받아들이고는 장로들을 불러모아 해결책을 모색했다.
화산파 장문인, 천화진인(天華眞人).
달리 천검진인(天劍眞人)이라고도 불리는 불세출의 고수로서, 젊은 나이 장문인에 올라 화산파의 중흥기를 주도한 큰 인물이다.
그는 이 사태의 원인을 평검수들의 수련 부족에서 찾았다.
확고한 매화검수의 자리.
평검수가 되어 있어도, 매화검수를 넘보기엔 자질과 무공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선택된 자가 아니라면 올라가기 힘든 위치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그렇게 되니, 되려 의욕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검수로서도 규율만 완벽하게 지키면, 어지간한 혜택을 모두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 안주하는 이들이 생기는 것이었다.
머물러 있고자 하는 자에게 발전은 없다.
실제로 이번 대무 회합에서 패배한 제자들은 하나같이 평검수들 뿐이었다.
장문인은 천화관을 막았다.
회합이 끝나는 대로 뽑으려고 했던 계획까지 백지화 시켰다.
더 이상 평검수의 숫자를 늘리지 않은 채, 평검수들을 정예화 시키려는 의도였다. 평검수의 선발 간격을 오년으로 대폭 조정하였으며, 그 조건도 훨씬 까다롭게 바꾸어 놓았다.
한참이나 평검수를 뽑지 않으니,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포기하고 하산하는 제자들이 늘어갔으며, 그런 현상은 보무제자들보다 선검수들 사이에서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천화진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삼년 동안 평검수들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에만 전념했다. 더불어 매화검수들이나 매화권사들게도 어려운 임무들을 맡기면서 실력을 가일층 진보시킬 수 있도록 혹독하게 몰아 붙였다.
그러하니, 보무제자들과 선검수들에 대한 관리는 소홀해 질 수 밖에 없다.
일부러라도 풀어주는 것.
여기서 그들까지 쥐어짠다면 남아날 사람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천화진인의 뛰어난 문파 운영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약간은 자유로워진 규율과, 더 많아진 개인 수련 시간이다.
그것은 곧 청풍에겐 더할 나위 없는 복(福)으로 작용했다.
누구하나 건드리는 사람이 없다.
보무제자들 사이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생활하는지라 특별한 친우도 없는데다가, 유일하게 교류가 있는 연선하도 거의 산에는 붙어있질 않아 도통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홀로 된 청풍.
온전히 자하진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태을미리공, 매화삼릉검을 얻으면서 운공(運功)의 묘리를 깨우친 상황, 그의 내공은 날이 갈수록 정심해져만 갔다.
자하진기 삼단공의 끝자락.
받아들이는 자연기(自然氣)가 온 몸으로 녹아들며, 조용하게 갈무리 되고 있다.
자하진기의 본래 특성일지. 치우침 없이 드러나지 않는 내력이다. 장로들이 보아도 자세히 살피지 않는 한, 그의 공력을 가늠해 낼 수 없을 정도였다.
‘벌써 봄이구나.’
오용 육현을 습득하는 일부분의 시간들을 제외하고는 전심 전력으로 내공만을 연마했다.
스스로도 얼마만큼의 힘이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적어도 선검수 이상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모르는 일이다. 그보다 훨씬 강할 수도, 아니면 느끼는 것 보다 약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나?’
보름도 채 남지 않았다.
종남과 화산의 회합이 열리는 것은.
이번에는 종남산.
여유로웠던 승자에서 도전하는 패자로 바뀐 화산파다.
친선으로 이루어지는 비무라지만, 마치 생사 결전을 앞둔 것처럼 온 산의 공기가 고조되고 있다. 특히나 평검수들이 거하는 은선대(隱仙垈) 산자락에서는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이글이글 끓고 있는 군기(軍氣)가 뻗쳐 나오는 중이었다.
“그래도 이번 일 끝나고 나면, 천화관이 열릴 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돼.”
한가하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벌써 일년이 넘은 것 같다.
삼십의 나이에 가까워진 연선하.
세월이 비껴가기라도 하는 듯,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 그대로다. 원숙에 이른 무공, 전보다 진중해진 성정만이 지나 온 계절들의 숫자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통과할 자신은 있겠지?”
“아마도요.”
“대답이 그게 뭐야. 그 동안 또 많은 성취가 있었던 것 같은데.”
“모르는 일이죠. 더 뽑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아닐 걸. 더 지체하진 않을 거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비무 결과에 관계없이 말이지.”
“종남파.......이번엔........이길 것 같아요?”
“별반 관심도 없어 하면서 왠일이니. 그런 것을 다 물어보게.”
“아니요. 그냥........”
“글쎄다. 지지는 않겠지. 나도 나가거든. 하하.”
“그래요?”
“응, 게다가 하운, 동한. 이름은 들어 봤지?”
“예.”
“그들은 강해. 거기다가 매한옥이라고, 들어 봤을거야. 속가 출신인데도 정말 대단하지. 그까지 출전하기로 했어.”
“예에.”
“나름대로 총력전이라 할 수 있을 거야. 게다가 이번에는 중요한 손님들도 오기로 했으니까 질 수는 없지.”
“중요한 손님이라면.......?”
“무당파. 장문인께서 직접 오신대. 그 무당파야. 현양진인이시란 말이지! 고절한 인품과 무공이 비할 데가 없으시다던데, 정말 무척이나 기대 돼.”
연선하의 만면에 생기가 돈다.
무당파 장문인, 현양진인.
잘 알고 있다.
오용 사현 중, 지식의 시험을 통과하려면 현재 뿐 아니라 과거의 것까지, 강호 정세에 대해서 웬만큼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각대 문파들 중에서도 항상 수위에 거론되는 무당파다. 그 무당파 장문인인 현양진인은 그 덕(德)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깊으며 지닌바 무공도 그 품성 못지않게 정심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정말 대단하겠습니다. 이번에는.”
“그렇겠지? 너도 함께 갈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말야.”
“그러게요.”
회합에 참가하는 것은 평검수까지만이다. 이번에는 더욱 규모를 늘려 사십 회 까지 비무를 하도록 결정했으니, 정말 볼만한 행사가 될 터,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쉬울 만도 했다.
“그나저나, 걱정은 걱정이다. 상대가 만만치 않아서 말이지.”
“아, 사저(師姐)는 어떤 사람과 싸우죠?”
“벽뢰신수 곽전각.”
“예? 진짜요?”
벌떡 일어날 정도로 놀란 청풍이다.
곽전각이 누구던가.
종남파의 장문인으로 화산파 천화진인과 함께 섬서 제일 고수를 넘보는 절대 강자였다.
“하하하, 그걸 믿니? 하여튼........”
놀라는 청풍의 반응이 재미있었던 듯, 깔깔깔 웃음을 터뜨리는 연선하다.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벽뢰신수는 아니고, 그분이 키운 제자라더라. 후계자 감이래.”
“아니, 그럼 굉장히 강할 것 아니에요.”
“어머. 지금 걱정하는 거니? 날 못 믿는 거야? 나도 강해. 아직까진 하운이나 동한한테 밀리지 않는단다.”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
“아니, 그냥.......그러니까.......”
청풍도 이제 다 큰 청년이다. 조각 같은 얼굴을 지닌 미청년. 연선하는 그런 그를 놀리는 것에 재미라도 붙인 모양이었다.
“뭐, 그래. 내가 걱정하는 것이랑, 네가 걱정하는 것이랑은 다를 테니까. 네가 걱정하는 것은 내가 지는 것이겠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야.”
“그........그러면요?”
“상대를 죽일까봐. 강하니까.”
청풍의 얼굴이 굳었다.
죽인다? 죽는다.
그렇다.
연선하는 매화검수다.
숱한 임무를 맡고서 강호를 종횡하는 매화검수였으니, 지금까지 적어도 몇 명쯤은 죽여 봤으리라.
어쩌면 몇 십 명. 아니면 그보다 더.
그녀는 사람을 죽여 본 진정한 검사(劍士)인 것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당연한 거야. 그런 것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청풍이다.
오용 사현. 전술.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머리로 배우는 것과 실제와의 차이는 생각보다 큰 것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야. 몇 달 지나고 나면, 너도 매화검수, 나도 매화검수. 같은 위치에서 만나는 거야. 알겠지?”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긴 했지만, 이상한 예감이 든다.
무엇인가 어긋나는 느낌이다.
그녀의 이야기.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괜한 생각일거다. 괜찮아. 괜찮아야지.’
풍암당에서 배웅하는 연선하.
암향표의 바람을 타고서 금새 멀어져 간다. 다시 만날 때에도 이처럼 담소로서 만나기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청풍이었다.
* * *
* * *
‘지금 쯤, 시합이 다 끝났겠구나.’
이상하게도 오늘은 온 종일 집중할 수가 없었다.
종남산의 회합이 시작된 것은 어제 부터다.
아무래도 불안하다.
무엇인가 잘못 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체 왜지?’
석양이 부드럽게 깔리는 저녁이 지나고, 암천의 서쪽 하늘에 일곱 개의 별이 반짝일 때 까지도,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는 그 기분은 없어지질 않는다.
풍암당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문을 밀치고 나와 밤 공기를 들이켰다.
나아지나. 아니다.
조금도 나아지질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종남산은 서남 쪽에 있다.
먼 하늘을 바라보는 청풍, 연선하의 안위가 궁금했다.
‘아니. 아니다.’
뭔가 이상하다.
연선하의 안위.
그런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듯한 느낌.
청풍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돌렸다.
연화봉. 상궁(上宮).
장운대와 은선대 방향이다.
‘연 사저가 아니야. 종남산이 아니었어! 여기, 화산이다.’
자하진기를 삼단공까지 연성한 그다.
이제 오감을 넘어선 육감을 지니게 된 청풍은 비로소 깨닫는다. 처음부터 연선하 쪽이 아니었다. 일이 벌어지는 곳은 종남이 아니다. 화산이었다.
청풍은 홀리기라도 한 듯, 장운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심한 밤.
풍암당이 위치한 곳은 구석진 곳 중에서도 구석진 곳이다. 점차 걸음을 빨리하는 청풍. 그의 눈은 한참 멀리 있는 장운대, 정진묘 숙소들로 고정되어 있었다.
‘저것은!!’
이제는 달린다. 자하진기를 일으키며 뛰기 시작했다.
보았기 때문이다.
장운대.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누군가가 지른 불. 넘실대는 악의(惡意). 습격이다. 온 종일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이 습격자들의 암울함이었음이 틀림없었다.
‘빨리.......!’
허리 춤에 매달린 목검을 잡아본다. 이것은 비무가 아니다. 실전이다. 통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어도 가야한다. 이런 변고에 두려움으로 일신의 안전을 꾀한다면, 더 이상 화산파 제자라 말할 수 없다.
속도를 내는 청풍.
장운대를 휩쓴 불길은 삽시간에 번져나가, 보무제자들의 숙소인 정진묘까지 퍼져 나가고 있었다.
“웬 놈들이 감히!”
장운대의 담을 날아 넘으며 다짜고짜 살수를 전개하는 습격자들은 하나 같이 흑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길쭉한 협봉검을 휘두르며 쇄도해 오는 기세가 사납기 그지없다. 진입 방향은 세 방향, 거칠면서도 조직적인 공격이었다.
챙! 채챙!
“물러나지 마! 진검(眞劍)을 든 선검수들이 앞으로 나서라!”
큰 소리로 명령하는 이는 화산파 지객장로 원현진인이었다.
화광이 충천하는 장운대 담벼락.
일렁이는 그림자들이 어지럽게 얽혀들고 있다.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습격자들의 수가 벌써 기백을 헤아리고 있었다.
“어린 제자들을 보호하라! 검을 들어! 화산 제자들에겐 두려움은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화산파 십이 계율 제 칠계. 화산 문하는 어떤 싸움에서도 물러나지 않는다.
웅혼한 내력이 담겨있는 원현진인의 독려에 겨우 목검을 든 보무제자들까지도 용감하게 나서고 있었다.
‘앞으로 나서라고 했지만 이들로는 안 돼. 위험하다!’
선검수라고 해 보았자, 이제 겨우 진검을 잡기 시작한 초급 무인들이다.
보무 제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쓰러지는 제자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았다. 역부족. 이대로는 버텨낼 수가 없었다.
‘이런 시점에! 이 놈들.......!’
모든 것을 알고 온 것이 틀림없다.
종남파에서 열린 회합으로 대부분의 정예들이 빠져나간 상태.
장문인 뿐 아니라, 열 명이 넘는 수행 장로들, 그리고 매화검수 이십 명과 평검수 칠십 이 명 중 사십 명이 종남산으로 떠나 있다. 지금 이곳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이라면 기껏 남아있는 평검수 삼십 이 명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챙! 쓰걱!
흑의 무인들의 손속에는 망설임이 없다.
제대로 훈련받은 자들이다. 살수를 뿜어내는 모습들이 익숙했다. 보무제자들이나 선검수로는 절대 막아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타종(打鐘)을! 서둘러!”
은선대의 평검수들을 동원해야 한다. 이곳에 남아있는 매화검수가 몇이었던가. 두 명. 은선대 위쪽 검향관(劍香官), 타종을 굳이 울리지 않더라도 이미 이쪽으로 오고 있으리라.
“보무제자들은 삼인 일조로 전권을 빠져 나가라! 산개(散開)해라! 이 일을 장로들에게 알려!”
화산검문, 제자들이야 연화봉 정상의 전각군에 모여 있지만, 장로들은 다르다.
대부분이 넓디넓은 화산 곳곳의 암당(庵堂)에 흩어져 있다.
심지어 이 연화봉이 아닌 운대봉이나 낙안봉에 거하는 장로들까지 있는 마당이다. 게다가 그들마저도 모두 제 자리에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가까이에 있는 장로들이야 이 변고를 보고서 달려오고 있겠지만, 그것도 몇 명 안 될 것이다. 종남산으로 간 이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용무로 강호에 나가 있는 장로들이 꽤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해도 보내야 한다.
어차피 보무제자들은 실제적인 전력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죽도록 놔 둘 바에는 연락책으로 쓰는 편이 나았다.
재빨리 지시를 내리면서 생각을 정리한 원현진인이다.
직접 나서야 할 때.
검을 뽑아드는 그의 눈에 막 담벼락을 넘어 들어오는 검은 그림자가 비쳐 들었다. 하늘을 가로질러 나타난 흑포 괴인. 온 몸에 불길한 기운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저것은........!’
타오르는 불길을 배경으로 검은 색 장포를 휘날리는 괴인의 얼굴에는, 사람이 지녀야 할 생기가 없다. 창백하다 못해 푸른 빛에 가까운 색깔, 그 표정이 괴이하게 비틀려 있었다.
파라라락!
움직이기 시작한다.
빨랐다.
순식간에 삼장 거리를 가로지르더니, 젊디젊은 선검수 한 명의 목을 비틀어 버렸다.
늘어지는 제자의 눈에 죽음이 내려앉는다.
원현진인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터엉!
원현진인의 몸이 빛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다.
흑의 무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위이잉!
지척에 이른 것은 순간이다.
날카로운 검광을 뿌려내는 원현진인. 흑포괴인의 몸이 기이한 각도로 휘어졌다.
‘피했다?!’
화산파 장로의 검예는 이미 그 이름값만으로 강호 일절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가볍게 피해냈다. 그 뿐인가. 반격까지 날려 온다. 찢어지는 흑포 사이, 짓쳐오는 손에는 암울하기 그지없는 기운이 담겨 있었다.
퍼엉!
검을 회수하며 왼손으로 받아내는 원현진인이다.
화산(華山) 비전(秘傳) 난화수(亂花手).
날렵하게 밀어내는 손속에 커다란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이 진기는.......!’
진기(眞氣)에서 생령(生靈)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기(死氣)만이 느껴질 뿐이다. 사술(邪術), 아니, 사술보다 더한 마공(魔功)인 것 같았다.
화르르르륵!
등 뒤로부터 느껴지는 불기운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검을 전개하면서 상황을 확인했다.
문제다.
선검수들의 방벽은 이미 뚫려 버렸다. 깊게 파고든 흑의 무인들이 정진묘 모든 전각들에 불을 지르는 중이었다.
‘이 놈들......!’
흑의 무인들이 타오르는 불을 향해 검은 주머니들을 던지는 것이 보였다.
검은 주머니가 터질 때 마다 낼름대는 화염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 기름 주머니인 것이 틀림없었다.
촤아악! 파팡!
더 살피고 있을 겨를이 없다. 눈 앞의 적부터 상대해야 한다.
다른 것에 신경 쓰기에는 흑포괴인의 공격이 지나치게 위협적인 까닭이었다.
“합!”
일갈을 내지르는 원현진인의 검이 장쾌한 기세를 발하며 뻗어 나갔다. 불꽃처럼 터져 나가는 검력이다. 화산 일절. 천류신화검법이었다.
파사삭!
괴인의 흑포가 부스러지듯 찢겨 나갔다.
물러나는 괴인이다. 따라 붙은 원현진인의 검이 격렬한 떨림을 보였다. 정교함보다는 살상력. 깊게 찔러 들어가는 검형에 살기(殺氣)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쩡!
검과 육장이 부딪쳤음에도 금속성이 들려왔다.
검을 휘돌리는 원현진인. 아니다. 다시 보니 그냥 육장이 아니다. 흑포괴인의 오른손 팔목에는 강철 족쇄가 매달려 있다. 방금의 금속성은 바로 그곳에서 터져 나왔던 모양이었다.
쐐액! 파팡!
제압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 끝 차이다. 괴인의 무공은 놀랍게도 구파 일방, 화산검문 장로인 원현진인의 무공에 근접해 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십 이 합을 교환했다. 그래도 원현진인이 한 수 위. 일순간, 원현진인은 결정적인 허점을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푸우욱!
‘끝이다.’
포착한 허점을 놓칠 원현진인이 아니다.
제대로 들어갔다. 검날이 가슴을 지나 등 뒤에까지 뚫고 나왔다. 천류신화검의 내력을 그대로 쏟아 부었으니, 버텨낼 리가 없다.
‘?!’
검을 빼내려던 원현진인이다. 손에 전해지는 감각. 덜컥하며 걸리는 느낌을 받고서는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큭큭큭큭.”
기괴한 웃음소리.
원현진인의 몸이 급박하게 뒤로 젖혀졌다.
파아아아.
본능적인 움직임이다.
간발의 차이였다.
흑포괴인의 손이 원현진인의 얼굴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것.
그대로 맞았다면 죽었을지 모른다. 오른발로 땅을 찍어 몸을 띄웠다.
다시 한번 쳐내 오는 공격을 막아내고는 놈의 머리를 향해 난화수의 일격을 뿜어냈다.
빠악!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공격.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화산 장로의 진가다. 강력한 일격에 흑포괴인의 목이 뒤로 꺾여 버린다. 그제서야 놈의 가슴에서 빠져나오는 검이었다. 재빨리 고쳐 들며 흑포 괴인을 향해 겨누었다.
“크큭, 크크큭.”
완전히 꺾여버린 목일진데, 아직까지도 괴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직, 우드드득.
“이.......이, 요사한.......!”
원현진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뼈가 맞춰지는 소리와 함께 목이 돌아오고 있다. 기사(奇事)도 이런 기사가 있을 수 없었다.
사람이 아니다. 괴물이었다. 사술에 의해 만들어지는 귀인들, 강시들이 있다더니, 바로 이런 놈들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우득, 우직, 우드득.
목이 제대로 맞추어지지 않는 듯, 숫제 두 손으로 머리를 잡은 채 이리 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끊임없이 흘러 나오는 기분 나쁜 뼈 소리.
원현진인은 더 들어줄 마음이 없었다. 죽여야 한다. 이런 괴물에게도 죽음이란 말이 통용될련지는 모르나, 목을 날려버린 후까지 움직이지는 못하리라.
슈각!
섬광처럼 뻗어낸 검에 괴인의 목이 떨구어졌다. 땅을 구르는 그 머리. 원현진인은 지체 없이 이검(二劍)을 전개하여 쿵 하고 넘어가는 괴인의 심장을 파괴했다.
“늦었군요.”
담장 저편 위에서 들린 목소리다.
홱 몸을 돌린 원현진인의 시야에 조그만 인영 하나가 들어왔다.
아담한 체구, 여자였다.
“신장귀(神將鬼)를 혼자서 처리하다니, 과연 화산 장로의 이름들은 명불허전인 모양입니다.”
백색과 흑색이 조합된 옷은 궁중의 복식 같기도 하고, 옛날 옛적 복식 같기도 한 것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창백한 피부에, 아기자기한 이목구비가 돋보이는 미녀였으나, 그 손에 든 물건은 그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낫.
그것도 철봉의 양쪽 끝에 길쭉한 낫이 달려있는 양날 겸(鎌)이었다.
“겨우 신장귀 하나네요. 어쩌죠? 장로님 뒤 쪽에서는 수 십명의 제자들이 죽고 있어요.”
꿈틀, 눈썹을 치켜 올린 원현진인이었지만, 섣불리 공격을 시도하지는 못했다.
이 여자는 강하다.
요녀. 작은 몸 안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꿈틀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