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요녀여. 네가 이 흉악한 무리들의 우두머리렸다.”
“일단은 그런 것 같네요.”
“요망한!”
검자루를 잡은 원현진인의 손에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당장이라도 뛰쳐 나갈 기세. 그러나 그는 땅을 박차는 대신, 멈칫 하며 얼굴을 굳혔다.
파락! 파라락!
하나 둘.......
천천히.
방금 해치운 것과 똑같은 흑포 괴인들이 담벼락을 날아 넘어 호위하듯 요녀의 주위로 내려서고 있었다.
여덟. 아홉. 아홉이나 된다. 하나 하나가 발하는 음산한 기운들이 타오르는 불길마저 몰아내는 듯, 온 장내를 메워가고 있었다.
“갈수록 큰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오늘은 많은 피를 보겠어요.”
“감히!........감히........이 화산에서........!”
분노에 사로잡힌 원현진인이다.
요녀의 목소리에는 그야말로 요사함이 가득했다. 도무지, 듣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화산도 화산 나름이지요. 오늘의 화산은, 아무래도 화산답지 못한 듯 해요. 그렇죠?”
“갈!!”
터엉!
결국 참지 못한 원현진인.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천류신화검의 막강한 검력이 쏟아질 때. 놈들 중에서도 가장 체구가 큰 흑포괴인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원현진인의 앞을 막아섰다.
쩌정!
십자로 교차한 흑포괴인의 양팔엔 흑색의 강철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검날을 얽어 맨 괴인의 족쇄들이다. 힘과 힘의 겨룸. 그러나, 그 싸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작은 요녀의 목소리가 곧바로 그 교착상태를 깨버렸기 때문이다.
“규귀(奎鬼) 물러나라.”
규귀라고 불린 흑포 괴인이 팔을 풀며 뒤로 몸을 날렸다. 쫓아 움직이려던 원현진인. 그러나 흑포괴인들이 둘러친 방벽은 튼튼하기 짝이 없어, 그의 쇄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성질이 급하시군요. 장로님.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으니 검을 좀 멈추시지요.”
원현진인은 가타부타 대답하질 않았다. 이런 요사한 무리들에게 무슨 대화가 필요할까.
하지만, 이어지는 요녀의 말은 원현진인의 공격을 멈추도록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다시 한번 뒤를 보세요. 벌써 몇 명이 죽었나요? 제 질문에 답하신다면 이 공격을 멈춰 드리지요.”
“이.......요사한 것!”
“못 믿으시겠나요? 잘 보세요.”
치리링!
작은 요녀가 품속에서 방울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소리, 그 이상의 파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자, 흑의 무인들이 일순간 살수를 멈추었다. 한 발작 물러나는 습격자들, 갑작스레 멈춘 그들의 행동에 화산 제자들은 되려 당황한 듯, 동시에 손을 멈추고 검을 겨누었다.
타닥. 타닥.
불똥이 튀는 소리 외에는 방울소리의 여운만이 남아, 사방을 정적으로 몰아넣었다.
요녀의 얼굴에 그려지는 조그만 미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자. 장로님. 묻겠어요. 사방신검(四方神劍)들은 어디에 있죠?”
“!!”
원현진인의 얼굴이 다시 한번 굳었다.
‘그것 때문이었을 줄이야!’
습격의 목적이다.
화산파 본산 습격이란 미친 짓을 벌인 이유가 이 때문이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벌써 봉인한지가 수십 년인 신병(神兵)들.
화산파에서도 본파 소관의 장로들만 알고 있는 기밀 사항인 바다. 이 화산파에 사방신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작금 강호에 전무하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넘겨 줄 수 없다.”
어찌 알고 왔는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까지 나온다는 것은 사방신검의 존재를 확신하고 왔다는 뜻. 어중간하게 둘러댈 때가 아니다. 어차피 알고 온 것, 끝까지 버티는 편이 옳은 방법이었다.
“순순히 넘겨주실 것으로 생각했다면, 애초부터 이런 수고는 의미가 없었겠죠. 장로님께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사방신검의 위치를 말하지 않으신다면, 다시 공격할 수밖에요. 무고한 제자들을 살리려면 말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어림없는 수작이다. 그것들을 가져다가 어쩌려 하는가! 그것들은, 너희와 같은 사도(邪道)의 무리들이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호호호. 그것이 아니지요. 오히려 화산 쪽에서 쓸 수가 없으니 봉인했던 것 아니었나요?”
“무엇이!”
“장로님께선 그것들이 어떤 물건들인지 보신 적이나 있으신가요. 소녀가 추측컨대, 장로님도 그것들에 대하여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 진실을 아셔야죠. 화산파가 그것들을 얻고도 봉인해야 했던 이유는, 화산에서도 신검(神劍)들을 다룰만한 인물들이 없어서였겠지요. 그렇지 않던가요?”
“함부로 삿된 거짓을 말하지 말라! 어디의 어떤 무리이길래, 이리도 간사함과 교활함이 가득할까. 그 정체를 밝혀라!”
쩌렁 쩌렁 울리는 원현진인의 목소리.
요녀의 아미(蛾眉)가 부르럽게 일그러졌다.
“재미있는 말이네요. 이것이 뭔가요? 시간을 끌고 싶으신 건가요? 구차하군요. 대 화산의 장로님치고는 말이에요.”
위잉.
그녀가 손에 든 양날겸, 귀병(鬼兵) 양영귀(兩靈鬼)를 장난스럽게 휘돌렸다.
“다른 장로들이 오길 기다리는 모양인데, 잘 안 될 겁니다. 기껏해야 두세 명. 아, 어쩌죠? 아까는 어리디 어린 제자들을 제 수하들이 지키고 서 있는 길목들로 보내시는 것 같던데.......장로들에게 알리러 가던 임무도 다 못 마치고 죽게들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할까요?”
원현진인의 얼굴. 분노가 극에 달해 그 색깔을 창백하게 만들 정도다.
요녀가 마치 그 표정을 즐기기라도 하듯, 배시시 미소를 짓더니, 계속하여 말을 이어 나갔다.
“저기, 매화검수들이 오나 보네요. 둘 밖에 없는데다가 상처도 입었군요. 제법이네요. 가장 먼저 제거하기 위해 실력 있는 수하들을 보냈는데요. 자, 이제 이야기 하세요. 막을 수 없다는 것, 잘 아시잖아요.”
“.........”
“제자들을 죽일 생각이군요. 잃어버린 보물은 다시 찾을 수 있겠지만, 한 번 죽은 목숨은 어지간해서는 살려내기 힘들겠죠. 뭐, 어쩔 수 없군요. 직접 뒤지며 확인해볼 수밖에요.”
그녀가 종전에 흔들었던 방울을 다시금 치켜 올렸다.
그 방울을 바라 본 원현진인.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등 뒤에 있는 제자들의 눈빛.
굴복할 수 없다.
여기서 죽더라도 요사한 무리들이 뜻하는 대로는 놔두지 않겠다.
자랑스런 화산 제자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래서 원현진인은 더욱 더 갈등할 수밖에 없다.
하나같이 이 화산을 이끌어 갈 미래들이다. 뒤에 있는 아이들이 매화검수들이었다면, 응당 기개로서 죽을 때까지의 응전을 선택했겠지만, 그런 것을 고집하기엔 보무제자들과 선검수들이 너무 어렸다.
“그것들은.......”
억눌린 목소리. 원현진인의 입이 열렸다.
“상궁(上宮) 경내, 네 개의 기둥 안에 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요녀의 말대로 신검들이야 다시 되찾으면 되는 일이다.
‘이 결정으로 인해 장로직을 내 놓아야 하겠지.’
원현진인의 결정.
외압에 무릎 꿇고, 화산 정기를 훼손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화산의 가르침에 크게 어긋난다?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다. 원현진인 자신의 목숨이야 얼마든지 줄 수 있지만, 어린 제자들의 목숨 값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장로님은 듣던 바, 화산파의 장로들과는 꽤나 다르군요. 하지만 어쩌죠. 양영귀는 피를 더 마시고 싶대요.”
키이잉. 키이잉.
마치 살아있는 듯, 피를 구하는 마병이다. 양날의 낫, 양영귀로부터 기이한 울림이 계속하여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튼 알려줘서 고마워요. 수고를 덜었어요.”
요녀, 방울을 든 손을 내리지 않는다.
옆으로 흔들리는 손목. 방울로부터 날카로운 금속음이 터져 나왔다.
“장로님, 가시는 길이 외롭지는 않으실 거예요.”
무슨 짓인가.
원현진인의 얼굴이 암담함으로 물들었다.
완전히 잘못 판단했다.
현혹.
요녀의 목소리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현혹시키는 사기(邪氣)가 넘쳐흐르고 있었던 바,
완벽하게 당한 것이었다.
“모두 죽여라. 화산파에 구주의 넓음을 가르쳐 줘.”
아홉의 흑포괴인들이 튀어 나온다.
피에 굶주린 양영귀의 재물로 삼기 위해.
원현진인에겐 요녀가 직접 그 마병을 휘두르며 날아들고 있었다.
* * *
불길이 번지고 있는 장운대다.
하늘로 치솟고 있는 검은 연기가 사납기 그지없다. 온 하늘의 별빛마저 가려버릴 정도였다.
새까만 밤, 장운대로 오르는 길.
청풍은 사방에 쓰러진 보무제자들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럴 수가!’
놀라움을 넘어선 충격이다.
피에 젖어 있는 참혹한 시체. 청풍으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험한 산, 사고로 죽었던 동문의 시체를 본 기억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처참한 검상(劍傷)으로 쏟아내는 피, 죽음을 직접 대면하는 일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여기 또 있군.”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다가오는 자들.
세 명이다. 흑의 무복에 피 묻은 협봉검들을 들고 있었다.
‘이들이.......제자들을.......’
분노보다 먼저 느껴지는 것은 경계심이다.
적들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또한 죽여 본 자들이었다. 피부로 전해지는 살의(殺意)가 섬찟하다. 쳐내는 검에 당장이라도 목이 날아갈 것처럼 두려움이 들었다.
‘마음을 가라앉혀야 해.’
청풍은 더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물러나지도 않았다.
공포심을 버려야 한다.
보무 제자들의 시체는 애써 외면했다. 진득한 살기를 품고서 다가오는 세 명의 흑의 무인들에게만 정신을 집중했다.
‘자하진기를.......!’
청풍은 목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통할 수 있을까. 모른다. 이것은 비무가 아니다. 목숨을 뺏고 빼앗기는 싸움이다.
한 번도 그런 것을 겪어보지 않았다는 사실. 잊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불리하다 느끼는 순간, 그 싸움은 이미 진 싸움이다. 천화관, 오용 사현. 전술의 장(章)이었다.
쒜액!
아무런 말도, 아무런 기합소리도 없다.
흑의무인의 협봉검이 독사(毒蛇)의 송곳니가 되어, 청풍의 가슴을 향해 뻗어오고 있었다.
위잉.
청풍의 몸이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실전의 달인이라도 된 양, 반전되는 상체 너머로 목검(木劒)을 휘두른다. 매화삼릉검, 육합검에서 뽑아낸 절기(絶技)였다.
땅!
첫 일격을 튕겨내는 데 성공했다. 통한다.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취리링!
협봉검은 한 자루가 아니다.
청풍은 본능처럼 오감을 최대로 열면서 몸을 숙였다. 등 뒤를 스쳐 나가는 검격을 느끼며 앞으로 나아갔다.
‘세 번째!’
또 한 자루가 더 있다.
이번에는 왼 쪽으로 비켜냈다.
특별한 형(形)에 따른 움직임이 아니다. 적들의 악의(惡意)를 감지한 자하진기가 그의 몸을 이끌고 있었다.
‘공격을 해야 하는데!’
세 개의 협봉검을 피해 내고도 반격의 실마리를 잡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경험 부족 때문이다. 청풍은 이런 싸움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죽고 죽이는 혈전, 그곳에 처음으로 들여놓은 일보(一步)는 예상했던 것 보다 더욱 무섭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식은땀 나는 일이었다.
쐐액! 쐐애액!
세 번의 공격을 모두 피해낸 까닭인지, 훨씬 더 사납게 쳐 들어오는 공격이다.
하나는 위쪽으로 머리를 노려 오고, 하나는 아래쪽으로 다리를 베어 온다.
‘나머지 하나는?’
검은 세 개다.
눈에 보이는 두 개의 공격보다, 뒤에 들어올 한 번이 더 위험할 것이다.
본능적으로, 아니, 주인을 지키는 자하진기가 가르쳐 주는 느낌이었다.
파박!
왼발로 땅을 박차고는 완전히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공중에서 가로 누운 청풍이다.
위아래 허공 훑고 지나간 두 개의 협봉검 사이. 청풍은 오른손을 크게 휘둘러, 매화삼릉검의 일초를 펼쳐냈다.
채앵!
아래와 위, 방향을 바꿔 집중되는 공격을 잘 막아낸 청풍이다.
‘지금이 고비!’
다음 순간이다. 마지막 남아있던 세 번째 공격이 오른쪽으로부터 날카롭게 흘러 들어왔다. 꽃잎 하나, 삼각으로 떨쳐낸 검격에 큰 충격으로 맞부딪쳤다.
쩌억!
생각보다 너무 잘 전개되는 무공에 너무 가볍게 본 것일까.
협봉검에 마주한 목검이 두 동강 나고 말았다.
‘이런.......!’
큰일이다.
급히 몸을 틀어 뒤로 물러났다. 뒤 따라 오는 협봉검, 이들은 강하다. 실전을 아는 자들, 보무제자들과의 비무가 전부였던 청풍으로서는 밀리는 것이 당연했다. 이만큼이나 맞상대한 것만으로도 스스로에게 놀랄만한 일이었다.
슈각!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엄청나게 뜨겁다. 검상(劍傷)이란 것이 이런 느낌이었던가. 상대의 살의(殺意)가 상처를 타고 들어와서 심장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쐐액!
청풍의 몸이 뒤로 젖혀졌다. 왼발을 뒤로 빼며 옆으로, 다시, 한발 뒤로.
신경이 극도로 곤두선 지금, 두 눈에 상대의 검 끝이 아리도록 비쳐든다.
간발의 차이로 비껴나는 청풍이다.
단전에서부터 끌어내진 진기가 온 몸을 타고 돌며, 그의 몸을 유도한다.
자하진기.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더더욱 활성화 되는 것 같았다.
파박! 쒜섹!
자꾸만 맞추지를 못하니, 흑의 무인들의 공격도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듯 하다. 거칠어지는 검격에 청풍은 한 가지를 깨닫는다.
‘이것은.......!’
아까부터 자꾸만 시선이 가는 지점들.
무인들의 동작 몇몇 부분에 허술해 보이는 곳들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낀다.
‘허점.......! 그런 것이었나!’
하고 많았던 보무제자들과의 비무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왜 이제 와서 깨달아지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보무제자들의 무공은 온갖 군데가 허점이었으니까.
거기서 오는 혼란 때문에 도리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공격할 부분이 너무 많아, 스스로의 판단을 믿지 못했었던 것이었다.
피핑!
귓가를 스쳐가는 검날은 여전히 두렵다.
몇 치만 이쪽으로 왔어도 왼 쪽 눈이 꿰뚫렸을 터.
오싹해지는 상상 뒤로, 청풍은 마음 깊은 곳의 용기(勇氣)를 끌어 올렸다.
‘좌 하방, 다섯 치! 지금!’
청풍의 몸이 앞으로 기울여졌다.
노리는 곳은 맨 앞 흑의 무인의 오른 쪽 허리다. 상체 전환의 핵이 되는 곳,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파탄을 드러내는 부위였다.
빠악!
흑의 무인의 몸이 활처럼 꺾였다.
일순간 멈춰버리는 몸, 공격의 맥이 완전히 끊어진다. 제대로 본 것이다.
‘치명적이진 않아! 목검이 너무 짧다!’
판단력도 수준 이상이다.
보무제자를 훨씬 뛰어넘은 수준.
이 정도면 평검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쉬익!
두 번 째 흑의 무인이 재빠른 움직임으로 협봉검을 찔러왔다. 중단을 노려오는 검이다. 뒤에는 순간적인 경직에서 회복하는 첫 번째 흑의 무인이 있고, 이 앞, 어깨 너머에는 상단을 겨누고 있는 세 번째 무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목검으로는 안 돼. 버리자.’
보무제자니까 가능한 생각이다.
매화검수, 평검수는 검집에 검을 도로 넣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대, 검자루를 놓지 않는다. 그렇게 배우고, 그렇게 키워지기 때문. 그러나, 보무제자 청풍은 다르다. 일순간 반토막 남은 목검을 저 앞, 세 번째 무인을 향하여 힘껏 집어 던졌다.
쨍!
세 번 째 무인의 검이 목검을 쳐 내는 순간이다.
무기를 버리는 청풍에 놀란 듯한 그들.
‘안 쪽으로!’
생각은 순간이다. 게다가 몸이 움직인 것은 그보다도 먼저였다.
청풍은 눈 앞 두 번째 무인의 품속으로 뛰어들며 손바닥을 내질렀다.
퍼엉!
장법이다.
예측 밖의 공격에 제대로 격중당한 흑의 무인의 몸이 공중으로 두 자 가까이나 떠올랐다.
털썩, 하고 허물어지는 몸.
‘되었나?’
태을미리장이다.
통하리라는 확신도 없이 시도해본 일격은 놀랄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쓰러진 흑의 무인, 다시 일어나지 않고 있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모양이었다.
‘아직, 위험해.’
하나를 쓰러뜨렸지만, 여전히 아슬아슬하다.
동료를 아랑곳 하지 않고 날려 오는 두 자루의 협봉검. 청풍은 또 다시 수세에 몰렸다.
태을미리장이 통한 것은 행운이다. 적들이 몰랐기에 가능했던 것. 장법을 경계하며 거리를 두고 검들을 휘둘러오니, 공격을 성공시킬 방도가 없었다.
‘어떻게 하지?’
위기다.
자하진기가 유발하는 신법(身法), 굳이 말하자면 자하신법(紫霞身法)일까.
처음 그 진가를 드러내는 신공(神功)의 방대함으로 용케 피해내고는 있다지만, 그것으로 한계다. 회피에 이어지는 반격이 있어야 하는데, 잘 되질 않는다. 사나운 검날에 대한 무서움이 그의 마음을 위축시키고 있었다.
파악!
땅에 꽂힌 검 끝에서 흙먼지가 인다. 어둠 속에 번뜩이는 협봉검,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저것을!’
청풍의 시야에 땅에 떨어진 협봉검이 들어왔다.
쓰러뜨린 흑의 무인이 놓쳐버렸던 검이다. 집어 들 수 있다면, 반전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
타탁!
마음이 일자, 자하진기가 호응한다.
한 발, 한 발. 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땅에 떨어진 검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안 돼. 눈치 챘다. 그렇다면.......’
적들의 검세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알 수 있다.
미묘한 변화를 감지해 내는 능력. 백전의 고수들이나 가질만한 감각이다. 청풍은 언제나처럼, 그 감각이 얼마나 대단한 것임을 모르면서 자연스럽게 느끼고, 사용하고 있었다.
‘더 가까이.’
한 발 더 나아갔다.
지척에 이른 협봉검.
청풍이 몸을 날리며 손을 뻗자, 두 자루의 검날이 기다렸다는 듯 속도를 배가시키며 매섭게 꽂아 들어왔다.
청풍이 방향을 급 전환한 것은 그 때다.
오른발로 땅을 찍고, 몸을 되돌리며 협봉검 두 자루의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빠악! 우직!
흑의 무인 하나의 무릎이 바깥쪽으로 꺾여 버렸다. 허우적거리듯, 검을 내 저으며 쓰러지는 무인의 옆으로 청풍은 보폭을 크게 잡아 움직임을 빨리 했다.
다급하게 베어드는 검을, 단숨에 피해내며 손을 내 뻗었다.
턱!
적의 어깨를 잡은 손.
단전에서부터 솟구치는 진기가 팔을 타고 뿜어진다. 마지막 남은 흑의 무인, ‘컥!’하는 외마디 숨 막히는 소리와 함께 땅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내가........이런 것이 가능했었나........?!’
비틀 비틀, 일어나려 애쓰지만, 부서진 무릎에서 오는 고통 때문인지, 거동을 못하는 흑의 무인이 눈앞에 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땅에 머리를 쳐 박은 두 사람의 흑의무인을 보며, 청풍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한기를 느꼈다.
자신이 가진 힘에 대한 확신이 없다.
얼떨결에 이긴 느낌이지, 무공이 강해서 이긴 것 같지가 않았다. 진기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승리를 거두고 나자 어쩔 줄을 모르겠는 심정이었다. 스스로 두렵기까지 한 자신의 힘,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그것을 경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청풍은 보무제자들의 시체들을 보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가라앉는 마음. 몇 번의 호흡에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진 정신이다.
고개를 돌려, 장운대 쪽을 바라보았다. 올라가고 있는 불길, 은선대까지 번지고 있는 그 화광(火光)의 향연 속으로 나아가야 할 때였다.
* * *
“멈추어라!”
정심한 내력이다.
장운대를 너머, 은선대까지. 상궁의 지척에 당도한 양영귀의 요녀는, 뒤 쪽에서 새롭게 들려온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파아아아!
반백의 머리를 말끔하게 뒤로 넘긴 초로의 도인이 달려오고 있다.
그 뒤를 따르는 세 명의 젊은 도사들. 초로의 도인이나, 젊은 도사들이나 특이하게도 검을 들고 있지 않았다.
‘오행진인인가! 저것은 매화권사들로군!’
오행진인.
본래 도호는 전현(前賢)이다. 오행진기와 매화오행장의 달인으로 달리 오행진인의 칭호를 얻었으며, 권각과 장법에서 화산 제일을 다툰다는 고수였다.
‘와 있다니. 잘못된 정보였나.’
매화권사들은 전부, 강호에 나가 있는 상태라 들었다. 매화권사 하나의 전투력은 매화검수 개개인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했다. 상당한 전력. 그러나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 매화권사들을 통괄한다는 오행진인은 주의할만한 상대였지만, 매화권사들은 신장귀들만으로도 처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산서(山西)에 나가셨다 들었는데, 오행진인께서는 어찌 이곳에 계시는지요.”
요녀의 말에 달려오던 오행진인의 얼굴이 크게 굳었다.
안면이 전혀 없음에도, 대번에 신분을 알아보는 안목은 차치하고서라도 장로 개개인의 근황까지 파악하고 있는 정보력은 다시없는 놀라움이다. 산서성에서의 일이 예상보다 일찍 끝나 귀환한 것이 바로 오늘, 얼마 전이었다.
쫓아오면서 보았던 변고.
장운대에서 은선대까지 밀리고 있는 전황이 보여주듯, 이 습격자들은 무척이나 강했고, 또한 철저했다.
“알 바 없다. 요녀여. 어디에서 왔기에 이리도 요사한 것인가. 어느 문파에서 왔든, 그대와 그대의 문파는 이것을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야 두고 봐야 아는 것이겠지요.”
“방자하기 이를데 없다. 원현이 이 밑에 있었을 터인데, 어찌 보내 주었는지 알 수 없도다.”
“그러게요. 너무 짧았죠. 원현장로는. 이 십초를 채 못 버티시더랍니다. 하지만, 장로님의 피. 워낙에 깨끗한 피였던 만큼 양영귀가 굉장히 흡족해 했어요. 매화검수들의 피도 젊은이들의 것인 만큼 무척이나 좋아하더군요. 진인. 오행진력이 담긴 진인의 피는 그보다 더 맑겠지요?”
오행진인의 눈이 잠깐 감겼다.
원현의 죽음. 어렴풋이 느꼈던 바다.
사제가 어떤 이였던가.
정이 많으면서도 강직했던 이. 목숨을 내 놓지 않고서야 이런 무리들을 여기까지 이르도록 허용할 리가 없었다.
다시 뜬 오행진인의 눈에는 슬픔보다는 정기(精氣)가 이글거리고 있었으니.
창노한 음성, 오행진인의 입에서 강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끝없는 잡기(雜氣)와 요사한 사기(邪氣)로 온통 물들어 있는 여인이구나! 아깝지만 장대한 죽음이었을 터. 원현의 넋은 내가 위로하리라!”
텅!
상궁의 문 앞을 막아 선 오행진인이다. 진각 한 번에 땅이 울린다. 하늘을 우러러 펼쳐지는 오행진기의 기운, 난전을 벌이고 있는 제자들을 수습하는 매화권사들이 짜임새 있는 방벽을 이루기 시작했다.
“쓸 데 없는 수고일 거예요. 장로님 정도로는 안 되거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양영귀의 요녀에겐 아까와 같은 여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흑포괴인, 신장귀들의 숫자는 이제 여덟이다.
두 명 있었던 매화검수들을 처리하면서 하나를 더 잃었다. 이제 겨우 이십 대, 혹은 삼십 대의 젊은 자들이면서 신장귀 하나를 못 쓰게 만든 매화검수다. 예상 밖의 일, 그래서 원현진인을 죽인 후, 직접 손을 썼다.
매화검수 두 명을 죽이고서 느꼈다.
여기에 동원한 호교무인들만도 이백 명, 벌써 반 수 가까이 쓰러졌다.
화산파는 강하다. 목적한 바야 이룰 수 있겠지만, 확실히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
치리리링!
그녀가 손에 든 방울을 크게 울렸다.
흑의 무인들이 집결된다. 한 지점을 향하여. 오행진인 한 사람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신장귀들은 나를 따르라. 무인들은 오행진인을 막는다!”
“신장귀들은 나를 따르라. 무인들은 오행진인을 막는다!”
오행진인과의 정면 대결은 피하는 편이 좋다.
몇 십초 안에 제압할 자신이 있기는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장운대에서 너무나 많이 지체한 모양이다. 그녀의 예상보다 빨리,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납시는군. 빨리 끝내야 되는데.’
서로 다른 방향, 멀리서부터 다가오고 있는 두 개의 기운이 있다.
그녀는 그 기운들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
오행진인 이상의 강자들이다.
그들이 들어 닥치기까지, 아마도 일다경 정도 여유가 있을 터. 어쩌면 그보다 빠를 수도 있었다.
‘하나는 목영진인. 그리고 이 정도 기운.........하나는 옥허진인인가!’
먼저, 목영진인.
한 자루 목검으로 온 천하에 이름을 날린 절정의 검객이다. 그 기량은 오행진인을 훨씬 넘어서, 이미 초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수준이었다.
하나 더 있다.
봉우리 몇 개를 격한 먼 곳, 이 연화봉도 아닌, 운대봉 저 멀리에서부터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이 있다. 한 마리 금룡(金龍)이 꿈틀거리듯, 뭉클 뭉클 전해오는 기파. 접근하는 속도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르다.
매화검신, 옥허진인이 틀림없다. 장문인인 천화진인에 버금가는, 또는 그 이상이라고까지 말해지는 초절정고수다. 목영진인까지는 상대할 수 있겠지만, 매화검신이라면 장담할 수 없었다.
그 둘 만이 아니다.
화산 곳곳에 포진한 절정 고수들, 어느 정도 이상 연배의 화산 도사들은 대부분 화산 도문에 틀어박혀 세속의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알려져 있으나, 이 정도 일이라면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 사태를 알아채고 이 곳에 올라온다면 그 때는 이 정도 무인들과 그녀로서도 정말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당도하기 전에 찾아야 된다.’
그녀가 신법을 전개했다.
오행진인의 옆 쪽, 상궁을 둘러 친 돌담 위를 향해서였다.
그녀를 잡기 위해 오행진인도 몸을 날렸다. 암향표 신법을 최대로 펼치는 오행진인, 그러나 제대로 되질 않는다. 앞을 가로막는 검은 그림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망한 것들!”
흑포괴인들이었다. 흑포괴인 둘, 거기에 더하여 흑의 무인들이 조직적으로 벽을 쳐 왔다.
퍼엉!
뛰쳐 오른 오행진인의 손에서 막강한 장력이 터져 나왔다.
격중당한 흑의 무인이 삼장이나 날아가 목을 꺾고 쳐 박혔다. 가공할 위력이다. 수십 근 사람 몸을 날려 버리는 힘, 화산 일절, 오행의 무인(武人)이란 이런 것임을 뚜렷이 보여주는 듯 했다.
“요녀여! 직접 나서거라!”
빠악!
공중으로 뛰어올라 앞으로 차낸 각법에 상체 전체가 뒤틀려 버린다. 흑포 괴인 둘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적도들을 하나씩 쓰러뜨리는 무용. 혀를 내두를 무예였다.
“그렇게는 안 되겠네요.”
이미 담벼락 위에 올라가 있는 요녀다. 땅을 박차는 오행진인은 흑포괴인들이 휘두르는 손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빠악!
흑포괴인 하나의 신형이 뒤로 튕겨났다.
펄럭거리는 검은색 장포를 타 넘은 오행진인이다.
공중에서 내리찍는 일장을 막아내는 흑포괴인의 팔이 ‘우지끈’ 소리와 함께 뒤틀려 버렸다.
파라락! 꽈앙!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 하다.
부러진 팔을 그대로 휘둘러 오행진인의 장법에 맞서 나갔다.
“크크크.”
오행진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느낀바 그대로, 이 괴인들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일반적인 공격으로 끝장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텅!
“소진, 청람! 이곳을 지켜!”
담벼락에서 뛰어내리며 매화권사들을 불렀다.
상궁으로 향하는 요녀를 막아야 하는 바, 그것을 맡을 사람은 오행진인 자신뿐이었다.
파바바바박!
뛰 쫓아 들어오는 흑의 무인들을 하나 하나 떨구었다.
암향표 신법의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절묘하게 후방의 적들을 차단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신기(神技)라고밖에 달리 부를 말이 없었다.
쾅!
그런 신기도 상궁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제 갈 길을 잃어 버렸다.
상궁 안에는 이미 들어서 있는 흑포 괴인들이 여섯이나 된다. 가로 막은 것은 셋. 오행진인은 철벽과도 같은 검은 그림자들을 맞이하여,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용맹하게 무공을 전개했다.
팡! 파파팡!
어려웠다.
흑포괴인들은 굉장히 강하다. 부상의 영향을 안 받는 비정상적인 신체와, 바위를 부술 만큼 강력한 일격들이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타탁! 쐐액!
쏟아져 들어오는 흑의무인들도 문제다.
상궁의 바로 앞까지, 보무제자들과 선검수들의 방벽은 뚫려 버린 지 오래였고, 남아있는 방어선이라고는 오행진인과 매화권사들 셋이 전부였다.
‘헌데, 대체 왜 상궁까지!’
그 이유를 알아채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궁 안 쪽, 장문인의 태사의를 둘러싸고 서 있는 네 개의 기둥을 부수고 있는 요녀와 흑포괴인들이 보였던 것이다.
‘설마!’
설마가 아니다.
기둥을 부수고 있다면 노리는 바가 자명하다.
그 곳에 감춰진 제어 불능의 병기들. 사방신검을 노리고서 이러한 짓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었다.
쿵! 콰쾅!
“안 돼!”
속절없는 외침이다. 부서지는 한 쪽 기둥 안으로부터 수십 장 부적에 덮여있는 푸른 색 목갑이 드러나고 있었다.
콰직!
두 번째는 붉은 색 목갑이다. 역시나 부적에 덮여있는 상태였다.
오행진인의 눈에 다급함이 떠오를 때, 세 번째 검은 색 목갑, 그리고 결국 네 번째 흰 색의 목갑까지 마저 바깥으로 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기둥 속 공간에 깊이 박혀있는 사색(四色)의 목갑.
암천 이십 팔 수의 별들을 수호하는 사신(四神)의 영령처럼, 언제까지나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술식(術式)........! 잘도 봉인해 놨군요. 시간이 걸리겠어요.”
오행진인에게 던지듯 발하는 목소리엔 공손한 말투와는 달리, 전에 없는 사나움이 엿보이고 있다. 이 상황이 매우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다. 기둥 곳곳을 살피고, 부적들을 살피며 뽑아내 운반할 방법을 고민하는 요녀의 모습, 오행진인의 손속에도 다급함이 깃들었다.
‘어서 돌파해야......!’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화산파 오행진인의 이름이 이렇게도 무력할 수 있다니.
생전 처음 느껴보는 절망감이다.
눈앞에서 사문의 비보(秘寶)를 강탈당하는 심정이란 참으로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이 아무리, 사용하지 못하는 물건이었을지라도.